에고에서 벗어나려면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바라보라
[김용은 수녀의 오늘도, 안녕하세요?] 65. SNS 집착과 에고
SNS는 현대사회 에고의 집합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를 포장하고 전시하면서 에고를 더 강화시킨다. 사진 출처=언스플래쉬
어느 유명 연예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고백을 올렸다. “생활이 점점 가식적으로 변하고 글도 남들을 의식하여 올리다 보니 나 자신이 읽어도 오글거릴 정도다”라고. 처음에는 블로그를 일기처럼 쓰려 했는데, 갈수록 방문자 수가 늘어나고 이웃이 많아지자 점점 자유롭지 못한 자신에게 무척 실망했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나도 야심차게 블로그를 시작했었다. 나의 글로 사람들에게 좋은 울림이 되고 싶었다. 소소한 일상이나 올리면서 자랑질은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시작은 그랬다. 우선은 잡지나 신문에 실렸던 나의 글을 올렸다. 가끔 댓글을 달아준 사람들의 블로그를 훔쳐보면서. 그래, 훔쳐본 것이 맞다. 내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려고 로그인하지 않은 채로 들여다보았으니까. 그러다 몇 년이 지나면서 조회 수도 더는 느는 것 같지 않고, 새로운 블로거들도 유입되지 않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내가 처음에 왜 블로그를 시작했지?’를 떠올려보았다. 나는 그저 좋은 울림이 되고 싶었는데, 어느새 내용보다는 ‘나’를 포장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자랑질이라는 덫에 이미 걸려들었던 것이다.
소셜미디어는 그 자체로 ‘전시용’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많은 이들이 SNS를 일기장처럼 사용하지만, 그것은 혼자만 보는 게 아닌 만민에게 드러내는 공개 일기장임을 분명히 의식하고 있다. SNS는 구조 자체가 타인의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게끔 만들어진 공간인 것이다. 아이들과 찬반 토론 수업을 할 때 영상 카메라를 들이대면 순간 달라진다. 카메라가 없을 때는 투박해도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데, 일단 카메라를 들이대면 적어놓은 노트를 자꾸 들여다본다. 말을 더듬거리기도 하고 얼굴이 붉어지기도 한다. 평소 자기표현이 전혀 없던 아이가 무대 위 아나운서처럼 돌변하는 경우도 있다. 아이들은 자기표현과 자기 연출 사이를 오가고 있는 것이다.
자기표현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용기 내어 정직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자기 연출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보여주기 위한 행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자기 연출은 작위적으로 가기가 쉽다. 나 역시도 블로그를 하면서 누군가 나를 보고 있다는 의식을 한시도 놓칠 수가 없었다. 내가 모르고, 나를 모르는 익명의 대중에게 노출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자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을 연출하고 있었다. 더 지적이고, 더 초연하고, 더 거룩한 사람으로.
독일 출신의 영성가인 에크하르트 톨레(Eckhart Tolle)는 “에고(Ego)는 소유가 곧 자신이며, 남들의 판단 기준이 곧 자신의 거울”이라고 한다. 그래서 에고는 눈에 보이는 것으로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 애쓴다. 타인의 시선을 무의식적으로 의식하게끔 구조화된 SNS는 우리의 에고를 자극하고 부추긴다. SNS에 올리는 이미지에 그토록 신경을 쓰는 것도 에고의 심리적 욕구 때문이다.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진을 올리며 ‘너 참 근사하다’, 구매한 물건을 올리며 ‘넌 참 감각이 뛰어나’, 읽은 책을 올리며 ‘넌 참 지적이야’, 애인과 데이트하는 모습을 올리며 ‘너는 정말 행복해’라고 에고는 우리에게 속삭인다. 그 속삭임은 은밀하지만 강력하다.
SNS는 현대사회 에고의 집합체라는 말이 있다. 스스로를 포장하고 전시하면서 에고를 더 강화시킨다. 본래의 나를 보지 못하게 하는 에고는 때론 감정의 변화에 예민해서 부지불식간에 남 탓을 한다. 시시콜콜 끼어들어서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면서 나를 우월하게 만들려고 애쓴다. 톨레는 에고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단지 ‘지금’ 이 순간의 나를 바라보라고 조언한다. 이는 하느님의 영이 깃든 내면의 영혼을 관상하는 행위다. 에고와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고요히 내면을 바라보기만 해도 거센 감정의 파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고맙습니다 성남님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