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인질 맞교환 석방자 명단을 추리느라 바빴을 때 전도유망했지만 덜 알려진 러시아 피아니스트가 교도소에서 조용히 죽어가고 있었다.
파벨 쿠슈니르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거듭해 반대 시위를 했는데 지난 5월 체포된 뒤 곧바로 단식 농성을 벌였던 인물이라고 영국 BBC가 25일(현지시간) 전했다. 그는 단식에 돌입한 뒤 물조차 거부했다.
그는 천천히,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채로 지난달 28일 사망했다. 더 이름이 알려진 반체제 인사들이 지난 1일 크렘린 스파이들, 활동하지 않는 첩보요원들, 서방에 수감 중인 킬러들과 교환돼 풀려나기 불과 나흘 전이었다.
쿠슈니르는 러시아의 극동 비로비드잔에 있는 미결수 구치소에서 외롭게 눈을 감았는데 서른아홉 살 밖에 되지 않았다. 그가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본 이는 11명 뿐이었을 정도로 초라하게 세상을 등졌다.
시베리아의 무소속 정치인 스베틀라나 카베르지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에게 말을 걸어 스스로를 희생하지 말도록 말리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텔레그램에 “우리는 변호사를 구해 그에게 보낼 수도 없었다.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는 혼자였다”고 적었다.
'해외 공작원 멀더'
그가 체포됐을 때 유튜브 채널 그의 계정에는 4개의 반전 동영상이 올라와 있었는데 구독자는 단 5명이었다. 그의 “해외 공작원 멀더” 포스트들은 미국 TV시리즈 'X 파일'의 캐릭터 에서 따왔는데 1990년대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었다. 러시아 법에서는 정치적으로 의심되는 이들은 “해외 공작원”이라고 선언하면 그만이었다. 한 동영상을 보면 쿠슈니르는 심지어 손으로 그린 미 연방수사국(FBI) 배지를 달고 있었다.
그의 마지막 동영상은 지난 1월 올린 것으로 2022년 키이우 외곽 부차의 러시아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을 담은 것이었다.
몇 달 뒤 비밀경호국에 가까운 텔레그램 채널 'Operational Reports'는 마스크를 쓴 남성들이 흰색 미니밴에 쿠슈니르를 태우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을 올렸다. 이 채널은 빔죄 재판이 시작됐으며, 그가 공석에서 테러 행위에 가담할 것을 요청한 혐의라고 설명했는데 징역 7년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지난 2일까지 어떤 소식도 들리지 않았다. 인권 운동가 올가 로마노바는 그의 친구 올가 슈크리구노바가 온라인 매체 봇 탁(Vot Tak)이 발간한 기사 속에서 그의 죽음을 알게 됐다고 그 날 알렸다. 그의 어머니 이리나 레비나(79)는 나중에 아들의 죽음을 확인했다.
쿠슈니르는 러시아 중부 탐보브에서 태어났는데 부친 미하일도 피아니스트 겸 교사였으며, 모친은 음악학교 교사였다. 두 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열일곱 살 때 2시간 30분 동안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24편의 서곡과 푸가를 연주하는 공연을 가질 정도로 역량을 인정받았다. 같은 해 말 모스크바 컨서바토리에 입학했다. 급우 율리아 베르트만은 그가 보잘 것 없는 코트와 검정 옷을 걸치고 주머니에 반쯤 담긴 보드카 병을 꽂고 나타나는 등 "반체제 이미지"를 풍기고 있었다고 돌아에봤다.
2005년 인터뷰를 하던 기자가 절대 연주하지 않을 것 같은 곡 중에 어떤 것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러시아 국가"라고 당당히 답했다.
졸업 뒤 쿠슈니르는 일부러 작은 도시들에서 일자리를 구했는데 모스크바 밖으로 나가야 훨씬 음악적이며 개성을 살릴 자유를 얻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슈크리구노바는 전했다.
그는 예카테린부르크, 쿠르스크를 거쳐 우랄 산맥 동쪽의 도시 쿠르간에서 3년을 보냈다. 그런데 그 도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일자리를 2022년 잃었다. 슈크리구노바는 그가 해고된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면서 "어떤 기계에도 어울리지 않는 이였다. 어린 시절부터 죽 그랬다"고 말했다.
실직해 4개월을 보낸 뒤, 그는 비로비드잔 필하모닉과 협연하는 솔로이스트가 됐다. 현지 TV 인터뷰를 통해 “내가 수감되지 않으면, 군대에 징집되거나 해고될 것이다. 그 때 난 앞으로 12년은 여러분과 함께 보냈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유가 있어 이 일을 하고 있다'
쿠슈니르는 여가 시간을 전쟁 반대 시위하는 데 보냈다. 친구들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그는 밤에 비로비드잔 주변을 돌면 포스터들이 잔뜩 붙여진 것을 보는데 그 어이없는 문구에 분노가 치솟는다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을 파시스트라고 표현했다.
그는 또 단식 투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지난해 봄에 20일 동안 결행한 뒤 같은 해 2차로 3개월을 이어갔다. 슈크리구노바는 쿠슈니르가 위험을 자초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의 외로운 시위였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누군가의 행동이다."
그녀는 러시아를 떠나든지,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살고 있던 베를린에서 연주하는 생활을 하라고 설득시키려 했으나 끝내 둘은 여행을 짜내지 못했다.
지난 3월 말, 쿠슈니르는 슈크리구노바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는데 자신이 감시당하는 느낌이라며 “같은 사람을 계속 보게 된다”고 말했다. 그의 마지막 한마디는 "무슨 일이든 일어나게 마련인데 난 이유가 있어 이 일을 하는 것"이었다.
'해골 같았다'
비로비드잔 법원 기록에는 그를 제소한 형사 사건에 대한 어떤 정보도 찾을 수 없다. 다만 지난 6월 20일 제출된 "조그만 훌리거니즘"에 대한 비범죄 기록은 보관돼 있었다.
7월 19일에 쿠슈니르는 알려지지 않은 액수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그가 심리에 참석했는지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법원은 그에게 판결문 사본을 송부했는데 같은 달 30일 "송달 불가" 메모와 함께 반송됐다. 물론 이미 죽은 몸이었다.
독립적인 뉴스 매체 '메디아조나'(Mediazona)는 죽기 직전에 그를 봤다는 누군가와 얘기를 나눴다. 그들은 7월 중순에 그를 봤는데 "해골 같았다"고 묘사한 뒤 걷기조차 힘들어 했으며 "아주 빈약한 몸상태"였다고 했다. 공식 사망 원인은 " 확장된 심근병증 및 울혈성 심부전 "이었다.
연방첩보국(FSB)과 비로비드잔 법원은 BBC의 코멘트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러시아 교도행정청 지역 책임자인 바실리 미하일렌코는 이 사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메디아조나에 털어놓았다.
'젠틀하고 재미있었다'
쿠슈니르가 죽은 뒤 그의 어머니는 다른 독립 뉴스 조직 오크노(Okno) 인터뷰를 통해 아들을 타일러 보려 했으나 실패했다고 털어놓았다. “난 아들이 더 조용한 방식으로 자기 일을 해내고 정치와는 거리를 두도록 바랐다. 아주 유감스럽게도 그는 목숨을 내놓았고, 외형적으로 아무 것도 아니게 됐다.”
그러나 슈크리구노바는 동의하지 않는다. 쿠슈니르는 목숨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감수해야 반전 견해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줄곧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도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음을 이해했다. 그러나 그가 깨달았을 때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는 어디로 흘러갈지, 해서 쓸데 없는 노력이었다고 판명되지 않을 것이란 점도 알았다.”
죽음으로 그는 살았을 때 받았던 것보다 훨씬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그가 2014년에 쓴 책은 재빠르게 독일에서 재발간됐다. 그래미상을 수상한 일렉트로닉 밴드 클린 밴딧(Clean Bandit) 멤버인 그레이스 차토는 쿠슈니르가 공부했던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동문인데 인스타그램에 고인을 "젠틀하고 재미있었다"고 표현한 감동적인 추모사를 올렸다.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경, 마르타 아르헤리치를 비롯한 22명의 클래식 음악인들은 결코 만난 적 없는 "특기할 아티스트"를 추모하는 공개 서한을 작성했다. 살아있을 때 그의 유튜브 구독자는 한 자릿수였으나 동영상 가운데 가장 인기 있는 클립의 시청 횟수는 2만 2000회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