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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반도 남단과 규슈 사이의 대한해협 중간에 있는 대마도(쓰시마섬) |
서기 894년 9월 5일(신라 진성여왕 8년), 정체불명의 배 45척이 대마도를 습격한다. 12일 후, 이들의 습격은 대규모 전투로 번지고 일본군의 포로가 된 신라인 현춘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신라가 기근이 들고 창고가 텅 비어 왕성이 불안하니, 왕이 곡물과 천을 빼앗아 가져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크고 작은 배가 100척이고 배에 탄 사람이 2500명이 있다” 9세기 신라해적에 관한 기록을 담은 ‘부상략기’에 따르면, 이들은 기근으로 곡식을 얻기 위해 대마도를 침략했다. 대마도는 은과 진주를 비롯해 삼나무와 같은 목재가 풍부한 섬이었다. 일본역사서에 수차례 등장하는 신라해적. 그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리고 894년 대마도를 침공한 신라해적선의 목표는 무엇이었는지, 우리 역사에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신라해적의 존재를 쫓아본다.
한국 역사서에 없는 존재 ‘신라해적’
9세기에 쓰인 일본 사서를 보면 ‘신라해적’ 기사가 많이 등장한다. 810년대부터 일본 측의 피해 사실들도 기록되고 있으며, 표현도 다양했다. ‘신라해적’을 비롯해 ‘신라구도’, ‘신라적도’ 등에 기록되고 있는 것. 그러나 한국 측 역사서 어디를 봐도 신라에 해적이 있었다는 기사고 나오지 않는다. 가해자 격인 신라에는 없는 기록이 유독 일본에만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일본 측에서는 신라해적으로 인한 여러 피해를 당하면서 공식적인 대응이 필요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방어체계 등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를 기록을 남겼을 것이다. 만약 일본 역사서 기록대로 신라 ‘해적’이었다면 이들이 신라 측 역사서에 등장할 개연성은 줄어드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일본서기> 이후의 일본 역사서는 매우 정확하다고 말한다. 특히, 신라해적에 관한 내용이 많이 소개돼 있는 <일본후기>와 <일본기략>, <일본삼대실록>의 기록은 더 자세하고 구체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해적은 실제로 존재했다고 믿어도 무방하다.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해적 중 가장 규모가 큰 침공은 894년 9월 5일에 있었다. 11세기에 편찬된 일본 역사서 <부상략기>는 신라해적의 대마도 침공을 자세하고 기록하고 있다. 894년 9월 5일 신라해적선 45척이 대마도 남서해안가에 나타났으며, 이때 사로잡힌 해적 포로는 자신들의 근거지에 배 1백 척과 2천5백 명의 군대가 있다고 진술했다.
대규모 신라해적단, 단순한 해적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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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세기 신라해적에 관한 기록이 담겨 있는 부상략기 |
그렇다면 당시 신라해적의 규모는 구체적으로 얼마나 될까. 신라 배들의 한 척당 승선 인원을 토대로 대마도를 침공했던 신라해적의 총 병력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당시 신라선에는 약 20~25명이 승선했다는 연구기록이 있다. 대마도를 침공했던 신라해적선은 모두 45척, 병력은 약 900~1000여 명이이었으며, 천여 명의 무장세력은 단순한 해적의 수준을 능가하는 대부대였다. 이전에도 소규모 신라해적들이 대마도와 큐슈의 해안마을을 습격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천여 명의 대규모 침공은 유례가 없는 일. 실제로 9세기까지 고대 일본은 한 번도 대규모 외적의 침입을 받은 적이 없으며, 신라해적 입장에서는 이날의 침공은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다. “모두 302명을 사살했는데 중대장 3명, 부장 12명이었고 손에 넣은 물건 중에 대장군 깃발도 있었다” <부상략기 中> 해적단이 단순한 백성이나 민초들로 구성 됐다면 대장군과 부장군 같은 계급을 조직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대장군, 부장군의 명칭이 등장한다는 것은 이들이 오합지졸 해적 무리가 아니라 규모가 있는 조직이었으며, 게다가 군사지식이 있는 사람이 조직한 부대라는 방증이 아닐 수 없다. 조사를 받은 포로 현춘은 자신들의 근거지에 1백 척의 배와 2천5백의 군사가 있다고 진술했으며, 이는 단순한 해적의 규모를 훨씬 능가한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궁예의 명령을 받은 왕건이 나주를 공격할 때의 수준으로 894년 신라해적은 상당한 규모를 갖춘 군대였던 것이다.
신라해적이 노리는 대마도의 보물
예나 지금이나 대마도는 척박한 땅이었다. <삼국지> 위지 왜인전에 보면 대마도는 ‘토지는 산세가 매우 험하고 깊은 숲이 많다. 전부 1000여 호가 사는데, 좋은 밭이 없어 해산물을 먹으며, 배를 타고 남북으로 다니면서 양식을 바꾸어 온다’라고 쓰여 있다. 현재 역시 대마도는 농지가 전체 면적의 4%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포로로 잡힌 현춘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기근으로 인해 곡식을 얻고자 대마도를 습격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대마도는 산세가 험난해 곡식 재배가 어려운 지역이다. 그렇다면 신라해적은 무엇 때문에 대마도를 침공했을까? 대마도는 농경에 불리한 지형이지만 고대에는 은과 진주가 많이 나는 지역이었다. 또한 삼림이 우거진 대마도는 삼나무와 같은 목재가 풍부하게 자라는 섬으로 이는 주요한 조선용 자재로 쓰였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일본 조정에서는 일찍이 대마도 방위에 신경을 집중해왔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대마도에서 은이 발견된 것은 674년 7세기 후반으로 일본에서 최초로 은이 발견된 사례다. 이후 10세기까지 대마도의 은 채굴은 매우 활발했다. 신라해적이 상륙한 곳은 고대 은광산이 있던 ‘금전산’과 아주 가까운 곳으로 여기는 6세기말 일본 최초로 금까지 발견돼 조정에 바쳤던 곳이다. 일본은 이를 기념해 연호까지 대보로 바꿀 정도였고, 이 지역의 은광은 중세까지 운영, 20세기 초까지 아연을 캤다. 일본은 8세기 초 대마도의 은으로 은전을 만들어 당나라와의 무역용 화폐로 사용했다. 이 은전은 에도시대까지 유통됐다. 이처럼 대마도에서 금, 은, 구리 등이 채굴되고 있을 때, 신라의 사정은 매우 달랐다. 9세기 신라는 발해와의 교역이 끊어져서 금, 은이나 중국에서 수입된 견직물이 부족했고, 이 시기 신라는 금과 은이 부족해 왕이 사적인 사용을 금하기까지 했다. 이런 배경으로 신라해적이 노렸던 것은 금과 은, 동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라해적이 노린 것은 지하자원만이 아니었다. 대마도는 물이 맑고 잔잔해 예로부터 광택 좋은 천연 진주가 많이 났다. 신라해적이 노렸던 것이 또 있다. 목화가 들어오기 전, 솜을 대신한 견면이 바로 그것. 누에에서 뽑은 섬유를 뭉쳐서 섬을 만든 것이 견면인데, 이 역시 대마도와 큐슈의 특산품이었다. 견면은 이불과 겨울옷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이다. 일본은 신라에서 수입한 물건에 대한 결제를 견면으로 했는데, 화폐 기능을 했던 견면은 신라해적의 주요 목표일 수밖에 없었다. 894년 9월, 대마도를 침공했던 신라해적은 대마도 특산품인 금, 은, 동과 견면을 탈취해 갔던 것이다.
완강했던 대마도, 그 원인은 신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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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해적들의 일본침공은 894년 처음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869년 큐슈섬. 신라해적이 조공물을 약탈 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게다가 신라해적은 일본 통 치부의 외항에 대담하게 잠입, 조공으로 바쳐진 비단을 탈취한다. 이후 일본 조정에서는 신라인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고, 은의 산출지인 대마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화살 전쟁이 벌어졌는데 화살이 비같이 날아왔다. 적들은 모두 화살을 피해 도망쳐 돌아갔다” <부상략기 中> 45척이라는 거대한 규모로 대마도를 침공한 신라해적. 하지만 그들은 왜 그렇게 쉽게 퇴각해야했을까. 어떻게 일본조정에서는 대마도에 대한 방비를 철저하게 준비했을까. 일본 사서는 해적과 수비군의 전투를 매우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고 적고 있으며, 대마도 수비군은 매우 위력한적인 석궁이라는 무기를 갖고 있었다. 석궁은 조준이 정확하고 관통력이 뛰어나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 실제로 전사자들은 거의 화살에 맞았다. 860년대부터 일본은 신라의 침략에 대비해 해안가 취약 지점에 석궁을 집중 보급했다. 대마도 방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부터 본격화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인 663년,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한 후 일본은 신라의 침입에 대비해 카네다성을 축성했고, 700년대부터 수많은 신라인들이 일본으로 이주하기 시작했다. 이들 신라인들은 일본 각 지역에 흩어져 살았는데, 이들이 집단 거주하던 곳을 신라군, 탁전군이라 불렀다. 이렇게 일본 남부 큐슈를 중심으로 신라인들이 늘어나자 일본의 중앙정보는 위기감을 느꼈고, 중앙정부는 이들이 일본과 결탁해서 큐슈의 지방호족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위기감에서 일본 중앙정부는 대마도의 수비체계를 점검하고 당시로서는 최첨단 무기였던 석궁부대까지 배치했다. 예상 외로 강력한 저항을 했던 대마도 수비군과 강력한 무장의 배경에는 일본에서 세력을 확대해가던 신라인들이 있었고, 일본 내 신라인들을 견제하기 위해 강화했던 대마도 수비대가 신라해적을 맞아 선전을 펼쳤던 것이다.
대규모 신라해적의 배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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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남 광양에 있는 해상호족 박영규의 근거지 마로산성 |
신라해적 현춘은 포로가 된 뒤 자신의 근거지에 2천5백의 군대가 있다고 진술했다. 또한, 해적 무리에는 3명의 장수가 있는데, 그 중의 한 명은 당나라 사람이라고 다소 충격적인 증언을 했다. 9세기 중엽, 당나라는 중앙권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민란이 끊이지 않을 만큼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당시 반란을 일으킨 자들은 실패할 경우 바다 건너로 도피할 계획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반란을 일으켰다가 평정될 경우 그 잔존세력들이 신라로 망명하기도 했다. 당의 혼란을 피해 쉽게 도망갈 수 있는 곳은 한반도의 서남해안으로 섬이 많아 은신하기 좋고, 신라의 중앙권력이 미치지 않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적합한 곳이다. 더욱이 장보고가 죽은 후 9세기 중반부터 이미 서남해안은 중앙권력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이었으며, 이런 시대 상황으로 볼 때 신라해적의 우두머리 중에 당나라 사람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신라해적의 근거지는 어디였을까. 대마도와 가장 가까운 곳은 부산이나 해류와 바람의 방향을 고려할 때 부산보다는 거제도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9세기경만 아니라 선사시대부터 한반도 남서해안 지역과 대마도 지역 간에는 자연스러운 교류가 많았고, 조선 초 이종무의 대마도 원정도 거제도에서 이루어졌다.
9세기 후반 역시 신라는 몰락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대마도 침공이 발생한 진성여왕에 이르면 신라 사회의 혼란은 절정에 이르렀고, 진성여왕 즉위 시기에는 여러 기근과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9세기 후반, 신라의 중앙권력이 급속도록 약화되지 한반도 해안 각지에는 크고 작은 해상호족들이 등장했는데, 이들 세력 중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바로 견훤이었다.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은 전남 순천만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아 군소 해적들을 평정하며 공을 세웠고, 점차 주변 해상세력들을 흡수해 서남해를 장악해 나갔다. 892년, 견훤은 전주를 점령했으며, 893년에는 내륙에서 궁예가 장군을 자칭했다. 이 무렵부터 일본 열도에는 해적이 나타나 대마도와 큐슈, 심지어 큐슈 서쪽의 오도 열도까지 해적이 출몰했고, 이런 과정에서 894년에 신라해적의 대마도 침공이 있었다. 모든 국제적인 상황을 볼 때 신라해적의 근거지로 가장 가능성이 많은 지역은 한반도 남서해안 지역이다. 특히, 견훤이 이후 922년 두 번에 걸쳐 대마도에 사신을 파견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대규모 침공이 있은 지 20여 년이 지난 후 대마도에 사신을 파견하는 견훤, 이는 대마도와 한반도 서남해안 해양세력이 정치적으로 연결됐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를 증명해주는 유적이 전남 광양의 마로산성. 둘레가 550미터밖에 안 되는 작은 산성이지만 통일신라 말기부터 해상교류를 통제하는 중요한 거점 역할을 해왔다. 이 마로산성의 해상 호족세력은 박영규였다. 박영규는 견훤의 보호를 받으며 성장했고, 훗날 견훤의 사위가 되는 인물이다. 바로 이 마로산성에 있었던 박영규 가문이 당나라, 일본과 교역하는 과정에서 해적이 따라붙고 해적을 소탕하는 데 신라의 군대가 역할을 했고, 견훤과 박영규 가문이 유착되어 이해가 연결되는 상황이 조성되었다. 해상지역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규합해 나가던 견훤과 그의 군사들이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해적’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9세기 일본열도를 뒤흔들었던 신라해적. 하지만 이와 같은 해적들의 소행이 부정적 측면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장보고 사후, 신라와의 공적 교류를 중단했던 일본. 신라해적은 비정상적인 교역형태이지만 일본과 또 다른 교역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해상무역과 약탈을 통해 얻은 이익을 가지고 새로운 해상세력권으로 성장하고, 이들은 후삼국 시대를 여는 견훤이나 왕건 같은 세력에게 흡수된다. 신라해적은 비록 ‘해적’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겼지만, 그들은 한 시대의 종말과 새 시대의 개명을 여는 역사의 부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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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이거 보고 같은 생각을 했네요 ㅎㅎ
선천적인 호구민족인가 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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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왜(假倭) 유명하죠..
가왜에 대해선 아직 확실히 정립이 안된걸로 압니다. 무라타교수의 연구로 가왜에 대해서 논의가 시작되긴 했는데 규모나 사례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
가왜에 대한 사료부족을 이영 선생님이 지적했죠(무라타가 아니라 무라이 쇼스케 교수군요) 무라이교수님은 뭐 변방인으로 해서 제주-남해-복건-규수 통틀어 변경인 개념을 주장하시고 말씀하신대로 합작을 했고 사칭도 했다는 입장이고 이영선생님은 사료에 나온 기록자체가 극히 드물다 후속연구가 있어야지 된다는 입장이였던걸로 (중세 왜인의 세계)란 책에서 꽤 긴 역주를 다셨죠.
제 생각으로는 사칭은 있었어도 언어소통등의 문제로 합작은 힘들지않았을까 싶긴 합니다.
일본 사람들은 진짜 뭐라고 해야 하나. 본토가 공격받을 일이 너무 없어서 그런지 오히려 웬만해선 오지 않을 침략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진 거 같아요. 다른 나라는 일상산데 일본은 역사를 통틀어서 몇 번 아니다 보니까 더 크게 느끼는 느낌? 당장 신라만 해도 신라 초기엔 왜구에게 서라벌까지 탈탈 털리는 게 예삿일이었는데 통일신라 때에 대마도나 큐슈에 좀 깔작거리는 행동이 그렇게 충격이라는 게 참 재밌네요.
허허 ㄷㄷ
일본쪽 역사를 들여다보면 '고려가 군선 400척을 동원해 다자이후에 몰려와서 교역을 강요했다'는 기록도 있긴 합니다. 포함외교 ㄷㄷㄷ
오오...제국주의!!
신라해적이 극성이었다는 것은 몇차례 들어왔지만,
이정도였다니...
더하여 댓글중에 보게된 말갈해적이라니요... ㄷㄷㄷ
혹시 장문휴의 함대를(진짜 해적인지 국가 함대인지...;;) 당나라가 해적으로 기록한 것을 지칭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별도로 말갈해적이 역시 극성이었나요?
기록상 1019년 도이(刀伊:동이東夷란 뜻, 여진해적으로 해석합니다.)가 50여척의 배를 타고 와서 쓰시마, 잇키, 치쿠센등을 공격했습니다.(刀伊の入寇) 격퇴당해서 고려로 가서 고려해군에 격퇴당하고 고려가 구해낸 일본인들을 송환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막상 고려사에는 그 내용이 없다는군요 (http://ja.wikipedia.org/wiki/%E5%88%80%E4%BC%8A%E3%81%AE%E5%85%A5%E5%AF%87#.E9.AB.98.E9.BA.97.E6.B2.BF.E5.B2.B8.E3.81.B8.E3.81.AE.E8.A5.B2.E6.92.83) 저도 일본 사회의 역사라는 아미노 교수님 책을 읽기 전에는 여진족이 해적질 한 걸 몰랐죠;;;
우와 나름 신선한 충격이로군요.
어떤분은 무려 명칭의 유례 자체가 왜구=해적 / 말갈=산적 이라는 언어학적 해석까지 내놓는 경우도 있던데...
이렇게보니 편견이 무섭긴 하군요.
곁다리(?)로 알아온것에 비해 상당한 여파로군요.
그런데 해적이라는게 꼭 국적 나눠서 이루어 진 걸까요?
위에서 나오는거 처럼 해적도 서양에서 말하는 길드 처럼 조합처럼 이루어 지지 않았을까...
말이 신라해적 왜놈 이렇게 상대방 이름으로 말했지 실제 구성원은 의외로 골고루 섞이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신라도 당하고 당나라도 당하고 일본도 당하겠죠...
글로벌 해적!
그걸 주장한게 무라이교수신데 여말선초의 왜구의 구성원을 일본인이 주력에 조선인과 중국인의 합작, 그리고 국가의 경계선상의 해민이라는 개념을 세우셨죠. 그 이후 일본학계에선 저 이론(왜구는 일본 단독이 아니다)을 꽤 따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상지역 호족들을 자신의 세력권으로 규합해 나가던 견훤과 그의 군사들이 일본 역사서에 등장하는 ‘신라해적’이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