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신 되지 않는 사랑
이소희
당신에게.
밤이 길어졌습니다. 고요 속에 마음은 더 소란스러워집니다.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한 채 출근을 합니다.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집니다. 안경 속으로 톡! 이건 빗방울일까요? 아니면 내 눈물일까요. 이파리들은 빗방울에 힘없이 떨어집니다. 비는 점점 거세게 쏟아붓고, 내 발목을 붙잡습니다. 무거워진 몸을 이끌고, 몸에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닦아내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아 지루한 날이군요.
비 오는 날이 참 좋았는데 요샌 퍽 싫어집니다. 혼자 집에서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날카로운 빗방울들이 온몸에 구멍을 낼 것만 같거든요. 숨지도 못하고 온전히 받아내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것 같은 그런 기분. 지독한 울렁임. 이런 기분 조금 서글퍼지지 않나요?
아기처럼 몸을 웅크려 당신을 생각합니다. 사실, 편지를 시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당신과 내 모습을 회상하려니 눈앞이 뿌예지는 것 같아 눈을 감기도 했어요. 이렇게 펜을 드니 비장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네요.
이기적이고 철없던 내 사랑을 떠올리는 일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까닭이겠죠. 그때 나는 생기가 넘쳤고, 대범했고, 수다스러웠죠. 세상을 처음 마주한 병아리처럼 파닥이며 요동치던 나를 당신은 첫눈에 알아봐 줬어요. 사랑은 속절없이 어찌하지 못하는 것. 갑자기 찾아온 사랑에 열렬히 빠졌어요. 내가 당신을 사랑한 것은 하필 어쩔 수 없이 라고 고백해요.
내가 당신을 만나고 사랑에 빠지고 긴긴밤을 그리워할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당신을 만나고 좋았던 나는 깊어지는 줄 모르고 당신의 손을 잡았어요. 따뜻한 손을 놓고 싶지 않아 덩굴처럼 얽혔어요. 나는 자랐고, 초록이 되었고, 물들었지요.
나는 사랑이 온몸을 내어 뿌리를 지지해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오랫동안 그리워한 것도 견고한 뿌리 때문이었겠죠. 견고했던 뿌리를 누군가 뽑아 더 좋은 곳에 심어주려 하나봅니다. 이제 난 쓸모를 다한 것이겠죠. 이제 이별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입니다.
부인 단계 : 이건 꿈이야. 지독한 악몽일 뿐이야.
헤어지고 나서 혼자 방 안에 앉아 있습니다. 당신과 찍은 사진, 인형, 추억들이 집안 곳곳 배어 있습니다. 당신이 앉아 있던 곳들을 손바닥으로 더듬어보았어요. 이렇게 내내 생생한데 이건 지독한 악몽일 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야. 다정하게 안부를 묻고, 하루가 끝날 무렵이면 사랑을 속삭이며 온전한 하루를 공유할 거야. 아주 잠깐이야. 그렇게 하루, 이틀, 사흘. 멈춰버린 시간이 흘러가길 간절히 기도했어요. 어리석었죠. 괴로웠습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것 거짓말인지도 몰라요. 낮인지 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네요.
분노 단계 : 네가 나보다 아주 조금 불행해졌으면 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못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내가 미래를 그릴 때 이미 넌 끝을 그린 거였구나. 1분 1초가 괴로운데 넌 내 생각 따위 하지 않겠지. 아주 조금 네가 나만큼 아팠으면 좋겠어. 그 고통받는 순간 네가 날 떠올려줬으면 좋겠어. 나와 함께 한 이 시간이 너에게 별것 아니었던 게 아니었으면 좋겠어. 그런 못된 감정들과 미안한 마음이 혼란스럽게 합니다. 당신도 나처럼 혼란스러울까요? 난 아직도 못된 당신을 그리워하는데 당신도 날 아직 그리워해 줄까요?
협상 단계 : 만일 내가 더 좋은 사람이었더라면 아마도 넌
후회합니다. 만일 내가 더 좋은 사람이었더라면 아마도 넌 내게 시간을 갖자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더라면 내 옆에 머물러 주었을까? 당신이 힘들어함을 눈치채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멀리 있는 당신은 늘 피곤했습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안부를 물어보는 것뿐. 괜찮나요? 당신이 괜찮길 바라는 나의 작은 바람. 멀리 있어도 당신은 나와 함께 있다는 실낱같은 희망. 고작 몇 분의 전화 한 통. 그래서 더 연락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리는 건 아무렇지 않았어요. 기다리면 당신은 꼭 돌아올 테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기다려도 당신이 온전히 내게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겠죠,
우울 단계 : 세상이 부서졌다.
더 이상 휴대폰이 울리지 않습니다. 지금쯤 당신은 일어났을까? 밥은 먹었을까? 휴대폰을 들었다 놨다 여러 번 확인해 봅니다. 당신에게 보낼 문자를 여러 번 썼다 지웠다가 썼다가 결국 보내지 못합니다. 이제야 내 세상이 끝났다는 게 이 슬픔이 온전히 나의 몫이 되었다는 걸 알아갑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늘었어요. 세상에 모든 이별 노래와 드라마가 내 이야기인 것 같아요. 뜨겁던 계절이 지나갑니다. 당신과 함께 만든 첫 세상이 부서집니다. 엉엉 울어도 처음으로 돌아갈 순 없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이젠
수용 단계 : 그래도 가끔 날 떠올렸으면 해
당신을 잊으려 했지만 잊기 위해 애썼지만, 그냥 놔두려고 합니다.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순간은 정말 사랑스러웠습니다.
편지를 다 쓰고 나니 비가 그쳤어요. 가을의 끝 무렵 겨울이네요. 참 다행입니다. 계절이 반복된다는 게. 언젠가 우리도 다시 만날 수 있겠죠? 이젠 당신이 너무 많이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당신 옆에 내가 없더라도 가끔 날 떠올렸으면 합니다.
언제나 가슴 속 깊이 응원합니다. 사랑합니다. 항상 날 사랑해 줬던 당신, 내내 행복하기를.
안녕.
2024년 겨울
당신과 내가 사랑했던 겨울을 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