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고할미
지명의 상당수는 그 마을이 형성된 유래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신기(新基)마을은 새터다. 본디 있던 마을에 딸린 새로 생긴 마을임이 분명하다. 새마을이다. 줄여서 새말이라고 한다. 내 고향 주가 집성촌에 박씨가 한 집 있는데 그 집 택호가 ‘새말댁’이다. 그 집 아주머니 친정이 어디인지 몰라도 신촌에서 시집 왔기에 그렇게 불린다. 아래 아(ㆍ) 흔적이 남아 ‘새ᄆᆞᆯ’을 ‘새말’로 부른다.
창원 북면 마금산에 온천지구 신리가 있다. 이때는 신리(新里)가 아니라 신리(神里)다. 만약 새 신(新) 자로 표기된다면 일제강점기 지명 등록 때 명백한 오기로 봐야 한다. 그곳 신리는 새로 생긴 마을이 아니다. 오래 전부터 면사무소가 있는 옛터다. 그럼에도 신리로 불림은 신(神)의 기운이 서린 마을이라는 의미다. 마을 한복판 수령이 오래되어 신령스러워 보이는 당산나무도 있다.
마금산 온천은 조선 초기 지리서 동국여지승람에도 나온다. 그곳에 약수가 나와 사람들이 마시기도 하고 목욕도 하여 피부병·신경통 계통 환자들이 효험을 보았다고 한다. 지금 온천지구가 신촌이다. 말 그대로 새마을이다. 1940년대 초 일본인에 의해 본격적으로 온천이 개발되어 신리 바깥에 마을이 새로 생겨났다. 이후 신촌에 있던 중학교는 현재 옥녀봉 아래 산기슭으로 옮겨졌다.
봄방학 중 시간을 내어 북면 온천으로 향했다. 온천욕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온천 뒷산을 오르기 위해서였다. 온천 뒤에는 남에서 북으로 나란한 산봉우리가 세 개 솟구쳐 있다. 옥녀봉과 마금산과 천마산이다. 여기서 옥녀봉과 마금산 이름에서 그 아랫마을이 신리(新里)가 아니라 신리(神里)임을 확증할 수 있다. 온천장 들머리인 대호아파트 앞에서 내렸다. 신리저수지 부근이었다.
얼음이 녹은 저수지에는 깃털이 까만 쇠물닭이 헤엄쳐 놀았다. 나는 옥녀봉을 오르기 위해 창북중학교가 내려다보이는 단감나무과수원을 지났다. 억새 검불 속에 몸을 감추고 있던 꿩씨네 일가가 나를 놀라게 했다. 인적 드문 산자락 숨어 있던 예닐곱 마리 장끼와 까투리가 내 발자국소리가 가까워지자 한꺼번에 푸드덕 날아올랐다. 고요한 정적을 깨트린 녀석들보다 내가 더 놀랐다.
볕 바른 자리에 위치한 무덤을 지나 소나무 숲으로 들었다. 발아래 가까운 골짜기에는 재선충으로 말라죽은 소나무를 정리하는 인부들의 톱 소리가 들려왔다. 군데군데 고사목을 벌목한 표시와 함께 비닐로 덮어둔 무더기가 보였다. 가파른 산비탈을 오르니 옥녀봉이었다. 동으로는 백월산이 보이고 북으로는 낙동강이 흘렀다. 남으로는 천주산과 작대산이고 서로는 남지가 드러났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산불감시원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대기가 건조해 산불이 날까 봐 걱정했다. 엊그제 가까운 천마산에서 산불이 발생해 소방헬기가 여러 대 출동하고 잔불을 정리하느라 소방 인력이 고생했다고 했다. 산불감시원과 작별하고 물레고개로 내려섰다. 옥녀봉과 마금산 사이 활처럼 휘어져 보인 산세가 물레고개다. 시어머니 마고할미와 며느리 옥녀가 잦는 물레다.
물레고개에서 마금산을 향해 올랐다. 일제강점기 지명을 등록하면서 마고산(麻姑山)을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마금산(馬金山)으로 바꾸어 놓았다. 일본은 산꼭대기 쇠말뚝을 박기도 했지만 우리의 전통 무속과 민속마저 뭉개버렸던 것이다. 마고할미는 우리 전설에 나오는 괴력을 발휘하는 신선 할미로 전국 곳곳 지명에 나온다. 금정산 정상 고당봉도 마고할미 전설이 서린 곳이다.
마금산 정상에 섰다. 아까 옥녀봉은 흙으로 된 육산이었지만 마금산은 바위 기운이 뭉쳐진 골산이었다. 정자에서 온천 지구를 굽어봤다. 그 앞으로 들판을 지나 백월산이 우뚝했다. 샛강 신천이 낙동강에 합류해 본포로 돌았다. 북으로는 임해진과 명촌 강마을도 보였다. 비탈을 내려서니 천마산으로 건너는 구름다리였다. 고소공포를 느껴 구름다리를 건너지 못하고 온천장으로 내려섰다. 1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