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미카 2,1-5 마태오 12,14-21
옳은 말만 하는데 재수 없는 사람
제가 말로 살아가는 사람이지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바로 극도의 어려움을 겪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에게 용기를 드리려 해도, “당신이 나처럼 죽음 직전에 있나요?”,
“당신이 나처럼 가난하나요?”, “당신이 나처럼 자녀를 잃어 보셨나요?”라고 말할 것 같아 입이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런 때조차 “그래도 용기를 내셔야죠!”라고 말한다면 저는 그분들에게 재수 없는 사람이 됩니다.
왜 그럴까요? 말은 ‘끌어 올리는 말’이 있고 ‘밀어 올리는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끌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밀어 올리려고 하는 말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듀크 신학대학교에서 만난 앤지와 퍼시라는 커플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대해 말하다가
퍼시가 앤지에게 대학교 때부터 좋은 이웃이 되어주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엔 앤지가 퍼시에게 “그러면 당신의 이웃은 누구야?”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후 몇 주간 퍼시에게서 앤지의 질문이 떠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앤지와 퍼시는 아파트를 떠나 리치몬드 처치 힐 중심가에 있는 오래된 도심지로 이사했습니다.
처치 힐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쇠퇴한 소위 할렘가였고 흑인들만 거주했으며 많은 이들이 알코올과 약물에 의존하는 삶을 사는 그야말로
비참한 곳이었습니다.
퍼시와 앤지는 먼저 어린이들에게 다가갔습니다.
퍼시는 농구공을 들고 아이들에게 농구를 시작했고 아이들과 어른들의 이름을 외웠습니다.
조금씩 처치 힐 사람들은 그를 친구로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백인들처럼 그들을 범죄자로 보지 않고 이웃으로 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동네 아이들은 퍼시의 뒤를 따라왔고,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에게 간식을 주고 비디오 게임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어느 날은 15명이나 퍼시의 귀가를 기다리며 문 앞에서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아이들은 퍼시와 앤지가 자신들의 숙제를 도와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밤 퍼시와 앤지는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이웃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믿고 집을 개방하여 아이들이 원할 땐 언제든지 그 집에 올 수 있게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며 아이들에게 파티도 열어주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 지역 주민들은 퍼시와 앤지를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백인 커플이 자신들의 동네에 들어와서 아이들에게 헛된 꿈을 심어주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한 아이의 엄마는 퍼시를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 파견된 사복경찰로 오해하였습니다.
그러나 퍼시와 앤지는 굽히지 않고 자원봉사자까지 구해 더 많은 아이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2002년 CHAT이라는 비영리단체를 만들었습니다.
현재 CHAT은 상주직원 45명과 자원봉사자 수백 명, 운영예산 25억 원의 기관으로 성장했고 지난 13년 동안 아이들 공부방을 시작으로 처치 힐의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참조: ‘유쾌함의 기술’, 앤서니 T. 디베네뎃, 유튜브 ‘책한민국’]
앤지와 퍼시는 소위 사회적 ‘루저’(Looser)가 되어버린 동네의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살고 있던 백인사회에 속해있으며 그들에게 설교만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당신들도 우리 백인들의 도시처럼 될 수 있습니다. 용기를 내세요.”
그들은 말했을 것입니다.
“재수 없어!”
퍼시와 앤지 커플은 말은 자신의 위치에 따라 용기를 줄 수도, 재수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같은 내용의 말이라도, 높은 위치에서 마치 밧줄을 내려주며 잡고 올라오라고 하는 말이 있는가 하면,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등을 밟고 올라서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위에서 하는 말은 재수 없고, 밑에서 하는 말은 힘과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어떤 부류의 말씀이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박해를 받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없애기로 결의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서 그들의 박해에 대해 “감히 하늘의 왕에게 이런 대접을?” 하며 분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숨고 숨어서 가장 가난하고 가장 박해받는 분이 되셨습니다.
분명 올바름을 선포하셨지만, 그 말씀은 사람들을 끌어올리는 말이 아닌, 사람들을 떠받쳐 올려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러니 그분의 말씀은 희망과 용기를 주시는 말씀이셨습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저는 말을 많이 하므로 재수 없는 잔소리만 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핍박을 받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어떤 분들에게는 의미가 없는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 ‘패치 아담스’(1998)는 의대의 엄격한 규율을 깨고 환자들의 눈높이를 맞춰 그들에게 웃음을 주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며 결국 자신의 이상에 꼭 맞는 병원을 설립한 헌터 아담스의 실화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는 아이들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지 않고 웃음을 주기 위해 우스꽝스러운 분장을 하여 밑바닥까지 내려갔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나의 말이 잔소리가 되지 않고 누군가에게 힘이 되려면 내 목소리가 그들의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들리게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내가 그들보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말에 힘은 그 내용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의 위치가 결정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0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12,14-21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오늘 개인적으로 참 감개무량한 날입니다.
노인들만 수두룩한 이 시골에 꽃 같은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여름 신앙학교를 시작하는 날이기에 그렇습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을 보는 형제들의 얼굴에는 다들 웃음꽃이 피어났습니다.
제가 이곳 피정 센터에 도착했을 때, 막 펜데믹이 시작되었습니다.
집합 금지 명령으로 인해 잡혀있던 모든 피정 계획이 100퍼센트 취소되었습니다.
참으로 막막했었습니다.
공동체에 월급받는 사람은 한 명도 없고, 매월 나오는 기본 전기세는 엄청나고, 통장 잔고는 바닥이고, 다른 피정 센터나 수련원들은 줄줄이 문을 닫았습니다.
윗선에서는 진지하게 폐업과 매각까지 고민했습니다.
다행히 주님께서 저희에게 크신 자비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기도와 고민 중에 방법을 알려주시더군요. 딱 한 말씀 던져주셨습니다.
“애야, 피정이나 수련회를 꼭 큰 규모로만 할 필요가 있겠느냐?”
저는 무릎을 탁! 쳤습니다.
감사합니다. 주님! 하며 바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개인 및 소규모 피정을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딱 한 명 오셨습니다.
친절히 봉사했더니 다음에는 두 명이 오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세 명, 네 명. 네 명까지만 가능하니, 여기 네 명, 저기 네 명, 저 건너편에 네 명...
그 어려운 펜데믹 기간에도 피정 센터는 잘 돌아갔습니다.
모든 것이 주님 자비와 은총 덕분이라고 확신합니다.
때로 주님께서 한쪽 문을 닫으시지만, 찬찬히 사방을 둘러보면 슬그머니 다른 문 하나를 열어주신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언제나 너그럽고 인자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릇된 길을 간다 할지라도 항상 인내하십니다.
때로 우리가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느낌일 때도 그분께서는 늘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고
보살펴주심을 굳게 믿습니다.
우리 주님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이토록 우리에게 큰 인내와 자비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이웃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우리의 회심과 새 생활을 기다리고 또 기다리시는 주님께 깊은 감사와 찬미와 영광을 드리면서, 그 인내와 자비를 가까운 이웃들에게도 실천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강론>
(2024. 7. 20. 토)(마태 12,14-21)
<사랑한다면 끝까지 희망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14-21)”
1) 신앙인의 희망에 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면 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여러분의 사랑을 우리가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과 사랑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마련되어 있는 것에 대한 희망에 근거합니다.
이 희망은 여러분이 진리의 말씀 곧 복음을
통하여 이미 들은 것입니다.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다다라 여러분이 그 진리 안에서 하느님의 은총을 듣고 깨달은 날부터, 온 세상에서 그러하듯이 여러분에게서도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습니다(콜로 1,3-6).”
‘희망’은 믿음과 사랑의 ‘근거’이기도 하고, 믿음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기도 합니다.
<희망이 없으면 믿음을 가질 이유가 없게 되고,
사랑을 실천할 힘도 잃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음과 희망의 관계에 관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께 선택된 이들이 밤낮으로 부르짖는데 그들에게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지 않으신 채, 그들을 두고 미적거리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아들이 올 때에 이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루카 18,6-8)”
하느님께서 ‘지체 없이’ 올바른 판결을 내려 주시기를 바라는 희망과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은 하나입니다.
믿으니까 희망하고, 희망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올바른 판결’이라는 말은,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께 청하는 모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청하는 그것을 청하는 그대로 다 주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은 우리가 청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7-8.11)”
이 말씀을 반대로 생각하면, “청하지 않으면 받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다.”입니다.
주시는데도 받지 않으면 못 받는 것입니다.
<외면하거나 관심이 없거나 거부하면 그렇게 됩니다.>
2) 그런데 우리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지 모르거나, 지금 청하는 이것이 정말로 좋은 것인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모른다고 해도 고민하지 말고, 기도하기를 망설이지도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주변에서 “그런 기도는 기복신앙이다.” 라고 핀잔을 줄 때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눅 들거나 열등감에 빠질 이유는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간절하게 바라는 그것이, 또 그것을 간청하는 나의 기도가, 수준이 조금 떨어진다고 남들이 비웃는다고 해도, 주님께서는 나의 간절한 심정을 알아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항상 거창한 기도만 할 수는 없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나에게는 아주 큰 일이 있고, 그것을 주님께 간절하게 빌고 있는데, 기복신앙 같은 모습이 조금 섞인다고 해도 그렇게 큰 문제는 아닙니다.
주님을 믿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주님께 희망을 걸고 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3) 우리는 ‘다른 사람의’ 믿음과 희망을 존중해야 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보기에는 부러진 갈대처럼 구제불능으로 보이는 사람이라도, 다시 살아나서 성인 성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눈에는 박해자 사울이
부러진 갈대로 보였을 것입니다.
그 박해자가 나중에 위대한 사도가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외가 되는 사람이 하나 있긴 합니다.
배반자 유다가 바로 그 사람인데, 최후의 만찬 시점에서 그는 이미 부러진 갈대였고 연기 나는 심지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그를 회개시키려고 애를 쓰셨습니다.
만일에 그가 마지막 순간에라도 회개하고 돌아섰다면, 예수님께서는 그의 죄를 모두 용서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사랑을 거부하고 떠나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이 부족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유다 자신이 스스로 믿음과 희망을 버린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