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 동계올림픽 낙수(落穗) 그리고 네덜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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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2. 26
지난 88 올림픽 이후 30년만에 우리나라에서 열린 평창 동계올림픽이 역대 최고 대회였다는 전 세계인들의 찬사를 받으며 17일간의 열전을 마치고 어제 대단원의 막을 내렸습니다.
불과 9개월 전만 해도 비관적인 분위기로 출발한 평창 동계올림픽은 그동안의 우려를 말끔히 씻고 역대 최대 규모인 92개국 2,920명의 선수가 참가해 102개의 메달을 놓고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운영과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남북의 극적인 합의로 이루어진 '평화올림픽' 메시지는 전세계에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우리나라는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 5개, 은메달 8개, 동메달 4개, 합계 17개의 메달을 획득해서 금메달 기준으로는 7위, 메달 수 기준으로는 6위라는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비록 뱅쿠버 대회의 5위 성적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메달 수 기준으로는 당시의 14개를 넘어선 신기륵입니다.
그보다 더 의미가 있는 점은 쇼트 트랙, 스피드 스케이팅, 스켈레톤, 컬링, 봅슬레이 그리고 스노보드 등 모두 6개 종목에서 메달을 획득하면서 역대 동계올림픽 사상 최다 종목 메달 획득이라는 새로운 기록을 세운 것입니다.
특히 대회 마지막 날 스웨덴팀에 석패하며 아쉬운 은메달에 그쳤던 여자 컬링팀은 외신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정도로 국제적인 스타로 떠오르면서 대한민국의 위상을 널리 알리는 수훈을 세웠습니다. 수고하신 모든 선수들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대회에서는 예상대로 노르웨이, 독일, 캐나다, 미국 등 동계올림픽 강국 4개국이 리더보드의 상단을 점령한 가운데, 노르웨이는 39개의 메달로 동계올림픽 메달 신기록을 세우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전 기록은 2010년 뱅쿠버 대회에서 미국이 세운 37개였습니다.
이미 두 차례 동계올림픽 유치 경험이 있는 노르웨이는 이미 7차례나 메달 집계에서 1워에 올랐던 동계스포츠 강국입니다. 인구가 520만명에 불과하지만 노르웨이는 눈과 스키가 많은 환경의 강점을 십분 활용하여 강국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CNN은 보도하고 있습니다.
크로스컨트리 스키 3관왕 요하네스 클라에보가 "일요일에는 누구나 스키를 타고 숲속으로 들어간다."고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노르웨이에는 무려 3만 km에 달하는 스키 트레일 코스가 있다고 하니, "스키를 신고 태어났다."는 속담마저 과장으로 들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노르웨이가 크로스컨트리 스키에서만 13개의 메달을 따낸 스키 왕국이라면, 5위를 차지한 네덜란드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강국입니다. 여자 스피드 스케이팅 500m 우승자인 일본의 고다이라 나오도 네덜란드 유학을 다녀왔을 정도입니다.
혹시 2010년 뱅쿠버 동계 올림픽 10000m 경기 를 기억하시는지요? 당시 無名이었던 이승훈 선수가 세계 최강 스벤 크라머 선수를 극적으로 제치고 금메달을 손에 거머쥐던 순간의 짜릿함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합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워낙 우리나라가 스피드 스케이팅의 불모지여서 관심이 없었던 탓에, 저는 당시 세계 빙상계를 주름잡고 있는 선수들이 누군지도 몰랐습니다. 레인 착오로 실격된 무적 스벤 크라머 선수의 성난 모습을 카메라가 계속 비추면서 비로소 그의 오렌지색 유니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모든 레이스에서 오렌지색 유니폼이 도처에서 눈에 들어왔습니다. 모두 네덜란드 선수들이었습니다.
2010년 뱅쿠버 대회 스피드 스케이팅에서 모두 9개의 메달을 가져간 네덜란드는 4년 후 소치 동계 올림픽에서는 무려 23개의 메달을 싹쓸이해갔습니다. 이는 스피드 스케이팅에 배당된 36개의 메달 중 64%에 해당하는 숫자였습니다. 이번 올림픽에서는 다른 나라들의 약진에 주춤해서 비록 15개의 메달 획득에 그쳤다고는 해도 이는 총 42개 메달의 30%가 넘는 숫자입니다.
소치 올림픽이 끝나고 미국의 뉴스 매체인 쿼츠(quartz)는 네덜란드의 스피드 스케이팅 강세 이유를 조금 더 체계적으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쿼츠는 네덜란드인 들의 신체적 강점, 역사적 전통, 스케이터 들의 사회적 위상 등이 그 원동력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우선 신체적 조건에서 강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네덜란드인은 상대적으로 큰 키를 가지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남성의 평균키는 183cm에 육박하고 이는 스피드 스케이팅의 긴 주법에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다음 강점은 이 나라의 지리적 특성입니다. 수도인 암스테르담은 5개의 큰 운하가 있는데, 겨울철 얼어붙은 운하는 과거부터 암스테르담 주민들의 이동방법이었다고 합니다. 이는 눈이 많이 내리는 노르웨이가 스키에서 강점을 보이는 이치와 같은 것입니다. 운하가 얼어붙는 해에는 전국 11개 도시를 완주하는 엘프스테덴토흐트 (Elfstedentocht) 대회가 열립니다.
역사적 전통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13세기 초부터 겨울마다 스케이팅을 즐겼다고 합니다. 문헌에 따르면 1626년에 이미 스케이팅 대회가 열리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사회에서 스케이터들의 위상 또한 남다릅니다. 한국에서 스피드 스케이팅이 비인기 종목인 반면, 네덜란드에서는 브라질인이 축구에 열광하는 것처럼 스피드 스케이팅이 국민 스포츠의 지위를 누리고 있습니다. 네덜란드의 많은 스포츠 유망주들은 다른 스포츠 종목보다 스피드 스케이팅을 그들의 진로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유망주들은 어려서부터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네덜란드의 스피드 스케이팅에 대한 사회 저변도 남다릅니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스피드 스케이팅 시설을 가지고 있습니다. 과거 미국이 2개의 스피드 스케이팅 전용경기장을 가지고 있을 때 네덜란드는 이미 17개의 경기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네덜란드에서 스케이터가 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입니다. 네덜란드는 7개의 스피드 스케이팅 프로팀과 60여 명의 프로선수가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의 양궁과 쇼트트랙 국가대표 선발전과 같이 네덜란드 스피드 스케이팅 국가대표 선발 전은 세계에서 가장 통과하기 어려운 선발 전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선발 전을 통과한 스케이터 들이 국제 경기에서 압도적인 기량을 보여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내친 김에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전반적으로 한번 조명해 보았습니다.
풍차와 튤립의 나라, 육지가 바다보다 낮은 나라, 그래서 나라 이름이 Nederland인 나라. 토목에 능한 고대 로마 제국의 병사들에게서 댐 쌓는 법을 익혀서 바다보다 낮은 땅을 풍차를 이용하여 육지로 만들어 전 국토의 절반 가까이나 땅을 늘린 나라. 그럼에도 국토 면적이 우리나라의 절반도 안 되는 조그만 나라. 그 조그맣고 척박한 땅을 억척같이 다듬어 젖과 꿀이 흐르는 모범적인 낙농국가로 거듭난 나라.
유럽에서 일찌감치 해양왕국을 건설하고 세계의 바다를 주름잡았으며, 한 때는 자기 땅보다 10배 이상 많은 식민지를 거느리기도 하고, 신,구교의 처절한 싸움을 접하자, 유럽에서 가장 먼저 종교 자유를 위한 투쟁이 벌어졌고, 가톨릭의 폐해를 피해 온 유럽의 신교도가 몰려가 둥지를 틀었던 나라.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유입된 다민족 국가로 형성되었고, 인구는 남한의 3분의 1인 1,700만 명에 불과한데 인구밀도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나라.
모든 나라에서 골치거리인 마약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합법화 하자, 오히려 마약 중독자의 비율이 현저히 낮아져 다른 유럽에서 연구 모델로 삼는 나라. 해양박물관, 고흐, 렘브란트의 나라이면서 동성애 허용과 섹스박물관으로 유명한 나라.
개인에 대한 철저한 자유허용과 현실적인 이윤추구로 인하여 국가 경쟁력은 유럽 다른 나라와 비교해도 상대적으로 높고 또한 막강합니다. 갖가지 문제가 산적해있긴 하지만, 글로벌화의 영향으로 싫든 좋든 세계 각국은 이제 서로를 향해 열려있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는데, 이런 세계화를 가장 일찍, 가장 현명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한 국가가 바로 네덜란드입니다.
천혜의 자연을 바탕으로 풍요로운 삶을 구가하는 유럽의 다른 여러 나라와는 달리 끊임없는 도전으로 인간이 자연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는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좁은 땅 중 70%가 산지이고, 인구밀도도 아주 높은 우리나라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2002년 월드컵 한국팀 지휘봉을 잡았던 거스 히딩크에 이어 부임했던 본프레레 감독과 아드보카트 감독이 네덜란드 출신 축구 지도자였다면 , 이번 평창올림픽에서 스피드 스케이팅 장거리 종목에서 한국팀을 지도한 밥데용 코치 역시 네덜란드인입니다.
역사적으로도 17세기 조선에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귀화한 외국인이 '벨테브레'라는 이름의 네덜란드인이었으며, 조선을 유럽에 최초로 소개한 사람 역시 네덜란드인 '하멜'이었습니다.
대회 종반 일부 네덜란드 선수들의 부적절한 행동과 발언이 잠시 구설에 오르기도 했지만, 6.25 전쟁 시에도 병사틀을 파견하는 등, 한국과 오랜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나라인 네덜란드와의 우호관계가 손상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