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의 머리를 과연 북청계단에 묻었을까?
이 부분은 그냥 일본서기에서 전하기 때문에 제3국이라 객관적이라는
이유에서 상당히 신뢰하면서 곧잘 인용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일본서기내용은 중립성이라고 찾아보기 힘들적으로 신라를
거의 증오하는 기사들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당시 관산성 전투기사에서 신라본기나 백제본기에서 단 한마디도 언급되지
않은 성왕의 목을베어 북청계단에 묻었다는 내용은 일본서기에 전해집니다
계유년(癸酉年; 553)
신라 진흥왕 14년, 고구려 양원왕 9년, 백제 성왕 31년
양(梁)나라 승성 2년
(삼국사기 신라 본기)
가을 7월, 백제의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아찬 무력(=김유신 장군 할아버지)을 그 곳의 군주로 임명하였다.
겨울 10월, 왕이 백제의 왕녀를 맞아 소비로 삼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성왕 31년 가을 7월, 신라가 동북 변경을 빼앗아 신주를 설치하였다.
겨울 10월, 왕의 딸이 신라에 시집갔다.
갑술년(甲戌年; 554)
신라 진흥왕 15년, 고구려 양원왕 10년, 백제 성왕 32년, 위덕왕(威德王) 원년
양(梁)나라 승성 3년
(삼국사기 신라 본기)
15년 가을 7월, 명활성을 수축하였다. 백제왕 명농이 가량과 함께 와서 관산성을 공격하였다.
군주 각간인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이들과 싸웠으나 불리하게 되었다.
신주의 군주 김 무력이 주병을 이끌고 와서 이들과 교전하였는데,
비장인 삼년산군의 고간 도도가 재빨리 공격하여 백제왕을 죽였다.
이 때 모든 군사들이 승세를 타고 싸워 대승하였다.
이 싸움에서 좌평 네 사람과 장병 2만 9천6백 명을 참살하였다.
백제군은 말 한 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백제 성왕 32년
32년 가을 7월, 왕이 신라를 습격하기 위하여 직접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는데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
시호를 성이라 하였다.
(일본서기)
흠명천황 15년(554년) 12월 기사
그 아버지 明王은 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이 때 新羅에서 佐知村의 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奴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 다른 책에는 “明王이 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 다른 책에는 “新羅가 明王의 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新羅王이 明王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都堂都堂: 삼국시대의 정사를 행하던 관청으로 南堂이라고도 한다.
자 그렇다면 삼국사기에는 전해지지 않는 일본서기의 기사를 믿어야 되느냐?말아야 되느냐?의 갈림길에 놓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선 일본서기는 신라자료를 전거한 것보다는 백제자료를 전거했다고 보여지기 때문에
위에서 일본서기가 전하는 내용은 첫째로 신라를 부도덕한 국가로 폄훼하기 위한 목적으로도 생각할 수 있으며
당시 성왕이 전사한 사건에 대해 백제인들의 분노와 증오가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를 퍼뜨려 내부 결속을 위한
전략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내용이 전해져 온것을 일본서기에 전거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입니다.
당시 신라 진흥왕은 550년에 7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관산성 전투시에는 약관의 나이 22세 정도일뿐입니다.
그런데 성왕은 바로 진흥왕의 장인이기도 합니다.
성왕은 관산성 전투에서 해당 지휘관이었던 무력장군이나 고간 도도에의해
진흥왕의 허락없이 즉결처분된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성왕의 시신이야 당연히 왕에게 보고되고
또한 그 시신을 백제로 돌려주는 것이 명분이기도 합니다.
물롱 일본서기에서는 일본천황이 두려워 백제정벌을 포기했다고 하지만
양쪽이 정벌전을 목적으로 전쟁이 있어났다면 신라군은 바로 부여의 백제왕궁까지 진격할 수도 있는 상황으로도 보여지지만
신라군 입장에서는 방어의 입장으로 의외의 전과를 올린 정도로 방어수준에서 멈추어버립니다.
그렇다면 일본서기가 전하는 저러한 내용이 어디까지나 왜곡되고 신라에 대한 증오심을 그대로 표출정도로 밖에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경우 미천왕의 시신이 도굴당했을때 그 시신을 찾기위해 혹독한
댓가를 치르면서도 되찾아오기 위한 노력이 엿보이지만
위덕왕의 경우 부왕을 목을 되찾을려는 어떠한 징후도 외교적 노력도 아니면 원한의 전쟁도 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한 손자의 무왕이 자주 침범을 하지만 역시 성왕의 전사에 대한 아니면 조부의 목을 찾기위한 명분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낌새조차 보이질 않습니다.
만일에 적국의 왕을
아니면 장인의 목을 북청계단에 묻었다면
신라입장에서야 부도덕해서 숨겼다지만, 백제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대내외적으로 전쟁의 명분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명분이라면 백제의 침입은 거의 원한에 가까운 신라멸망을 목적으로 죽기살기의 전쟁이 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별로 그렇게 보이질 않기 때문입니다
부왕이나 조부의 목을 찾으려고 노력도 하지 않은 백제의 왕들이 과연 효성이 부족한 인물들이어서 그랬을까요?
성왕은 전사하였지만 일본서기의 와전된 내용과는 다르기 때문에 삼국사기에서는 전거되지 않은것으로 사료됩니다.
첫댓글 이와 반대로 동성왕의 죽음을 일본서기에는 나라사람들이 미워하여 죽였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동성왕은 반왜친신라 정책이었다고 보여지고, 무녕왕은 애매하고,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성왕은 왜와 화친한 것으로 보이나 삼국사기에 특별히 반신라정책이라 보여지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신라가 성왕을 죽이고, 시신까지 모독한 것을 보면 성왕자신이 도덕적으로 큰 결함이 있지 않았나 판단이 듭니다. 예를 들면 성왕이 아버지 무녕왕을 죽였거나, 죽인자와 내통하고 죽인자를 처단하지 않았으며, 또는 장례를 치루지 않고 방치하지 않았나 판단이 되는데... 이 일을 성왕이 죽기전에 후회하지 않는지...
정성일님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성왕은 왜와 화친한 것으로 보이나 삼국사기에 특별히 반신라정책이라 보여지는 부분이 없습니다.라는 부분이 잘 이해가 안되는데 보다 자세하게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이 때 新羅에서 佐知村의 飼馬奴 苦都[ 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고 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이 부분을 제가 오독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성왕의 시신을 모독한 신라가 이런말을 했다고 하기엔 좀 이상하군요.
그 내용은 성왕이 포로로 잡혀 고간 도도에게 참수당하는 모습의 상황을 생중계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저런 대화가 오고갔다면 신라측에 자세하게 전해지지 어찌 살아돌아간 사람이 없는 없는 백제인들에게 전해지겠습니까??..차라리 "신라의 복병이 나타나 그들과 싸우다가 왕이 난병들에게 살해되었다."라는 삼국사기 백제 본기 기사가 정확하다고 보여집니다..일본서기의 신빙성은 50기를 대동하고 태자 여창에게 위문갔다는 내용까지이며 급습당한 시점에서는 살아돌아간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저렇게 생중계할 수가 있었을까요?..지어낸 이야기 수준으로 보입니다.
소호금천씨님의 의견을 들어보고 저 또한 많은 고민이 듭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을 사실로서 입증하려면 일단 그 전제에 대해서 먼저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소호금천씨님께서는 "일본서기는 신라자료를 전거한 것보다는 백제자료를 전거했다고 보여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단 이 전제에 대한 증명부터 이뤄져야 할지 않을까 싶군요.
이러한 말씀의 배경은 아무래도 백제삼서 등의 자료를 보고 일본서기를 편찬했다는 생각에서 나온듯합니다. 하지만 일본서기를 편찬하는데 단지 백제삼서만을 가지고 삼국의 정세를 서술하진 않았겠지요. 오히려 당시 백제나 신라의 사신들이 한 발언을 정리하고 또 이를 바탕으로 후대에
예 우선 백제 삼서에서 발상이 된것은 사실입니다..그런데 일본서기 내용자체가 백제에 관한 것은 비교적 소상하지만 신라나 고구려에 관한 내용은 별로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리고 신라에 대해서는 역사서라고 하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흠명기 16년의 기록을 보면 백제에선 백제왕자 惠를 사신으로 보냅니다. 반면 21년의 기록을 보면 신라에선 나말(17관위 중 11등)을 보내고 22년의 기록에서는 급벌간(17관위 중 9등)을 보냅니다. 나말은 6두품의 품계에, 급벌간은 5두품의 품계에 해당하니 백제와 신라의 기록에 대한 정보 차이는 어찌보면 이런 데에서 있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네요. 백제와 신라에서 보내는 사신의 급 자체가 천지차이이며, 그들이 제공하는 정보의 양도 어느정도 차이가 있겠지요. 게다가 일본은 당시 가야와 백제와의 정보교류가 활발했으니 주로 그쪽에 대한 정보가 많이 수록된 듯 합니다.
성왕의 목이 북청계단에 묻혔다는 진위여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살아돌아간 사람이 없는데 저렇게 생중계할수 있었을까요?라는 질문에 대해선 회의적이네요... 고대 전쟁은 사람과 사람간에 칼을 휘두루는 싸움인대... 아무리 참혹하다 해도 부상자나 포로들은 있었을것이고, 잘린 성왕의 시신을 백제측에 전달해주었다면, 신라인들이 직접 전해줬다기 보단, 포로들을 통해서 보내줬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요... 아니면 신라내부에도 백제 첩자들이 있었을 테니까 내부 상황을 어느정도 알았을 수도 있고요... 변수는 여러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꼭 아니라고 볼것으로 치부해선 안된다고 봅니다.
그것은 삼국사기의 기사에서 말한필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했다는 기사 내용으로 갈음할께요..물론 과장된 내용이지만 그만큼 포로가 문제가 아니라 참혹했다는 뜻이지요..당시 전투가 저렇게 한가하게 성왕의 처단식을 포로에게 관람시켜가면서 거창하게 행해질 상황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여 편찬하였다고 보아야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서기를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흠명기 21년의 기록을 보면 신라에서 사신을 보낸 기록이 보입니다. 또한 22년의 기록에서도 사신을 보냅니다. 백제의 성왕의 전사 기록이 15년에 배치되어 있고, 위덕왕의 보고는 16년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간차를 본다면 오히려 일본의 기록은 신라 사신의 발언을 적어둔 것을 방영하여 일본서기에 수록하였다고 보는게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앞서 말씀하신 당시 상황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단순히 꾸며낸 게 아닌, 사실일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볼 수 있지요. 그리고 이러한 신라의 주장을 꼭 부도덕한
비사인님 신라사신이라면 더욱 더 백제왕의 목을 베어서 북청계단에 묻었다는 발언을 하기가 힘들지요..그렇다면 다시 일본서기의 기록에서 정성일님 댓글중 " 이 때 新羅에서 ..<중략>...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신라에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면 왜 후세에 전해지지 않았을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일본서기에서는 이런 해석을 내놓고 있네요.
이때 新羅는 佐知村의 飼馬奴苦都에게, "苦都는 천한 종놈이요, 明王은 이름있는 왕이다. 지금 천한 종으로써 군왕을 죽이게 하려 한다. 후세에 전하여져서 길이 그 이름이 남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신라 측의 기록이라면 삼국사기겠지요. 삼국사기의 사료비판을 해보면 아시겠지만, 내력비판의 측면에서 보면 유가적 입장이 강한 김부식의 서술로 인하여 첨삭이 여럿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일부러 그에 관한 부분을 삭제했을 가능성이 높지요. 이 부분은 고구려무사님도 지적하신 것으로 압니다.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고 생각듭니다.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를 보면 "우리 조상 수가 군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니 잠시 싸우다가 소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라는 내용의 발언이 나옵니다. 이 기사에 대한 신빙문제가 있긴 하지만, 백제 입장에서는 자랑스러운 일이지 결코 부도덕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이에 대한 소호금천씨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전투중에 상대 적장의 목을 베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지요..적장이 왕이든 장수이든 다만 시신의 사후처리가 문제 아닐까요?..개로왕이 북위에 국서를 보내면서 소의 머리를 베어 땅에 묻고 사람이 밟고 다니도록 했다고는 할 수가 없겠지요.(만일에 비록 그런짓을 했더라도)
적장이나 왕의 시신의 경우 상대국에서 전리품(?)처럼 취득하며 그에 상응하는 대가가 없는한 가급적 돌려주지를 않지요. 그리고 고대의 경우 지금의 우리와 인식이 다른 면이 많다보니 굳이 너무 오늘날의 입장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위덕왕의 대처에 대해서는 당시 정치적 상황과 결부시켜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지요.
다른 사료엔 단지 성왕을 죽였다는 단편적인 이야기만 나오고, 일본서기엔 전투 상보와 함께 성왕이 죽는 장면과 뒷처리까지 자세히 나옵니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부인할 수 있는 다른 근거가 없는 한 이건 사료 가치에서 애초에 게임이 안 됩니다. 백제인이 자신들의 왕이 적군에게 붙잡혀 죽고 그 머리도 찾아오지 못했다는 치욕적인 이야기를 굳이 지어낼 이유도 없습니다. 왜인들이 지어낼 이유는 더더욱 없습니다.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