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선조 25년(1592년)
10월 왜군 2만이 침략해 오자
진주 목사 김시민이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이 힘을 합쳐 왜군을 물리쳤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 대첩입니다.
하지만 이듬해 6월 왜군 10만여 명이 다시 침략을 해왔고
이때 민ㆍ관ㆍ군이 왜군에 맞서 싸우다 모두 순국하는 비운을 겪었다는 기록이
《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1593) 7월 16일 기록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진주성 싸움에서는 “날틀”이 활약했었다고 합니다.
날틀은 한자말로 ‘비거(飛車)’라고 하여 하늘을 나는 차 곧 비행기의 하나입니다.
일본 쪽 역사서인 《왜사기》에도
전라도 김제의 정평구라는 사람이 비거를 발명하여 진주성 전투에서 썼는데
왜군들이 큰 곤욕을 치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날틀은 포위된 진주성과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하였는데
마치 해일처럼 밀려오는 10만의 왜적 앞에서 진주성 사람들에게
이 ‘날틀’은 희망 그것이었을 것이라고
장편역사소설 《진주성전쟁기》를 쓴 박상하 작가는 말합니다.
▲ 비행기를 ‘날틀’이라 부르면 안 될까? (그림 이무성 작가)
18세기 후반에 쓴 신경준의 문집 《여암전서(旅菴全書)》와
19세기 중반 이규경이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이 ‘비거’ 곧 날틀이 등장하지만
정확한 모양이나 어떤 쓰임새였는지는 확실하게 나와 있지 않지요.
만일 이것이 비행기처럼 날았다면 라이트 형제를 앞선 세계 첫 발명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뒤 으뜸 한글학자였던 외솔 최현배 선생은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해서 국수주의라고 비판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 솜틀, 재봉틀처럼 기계를 ’틀‘이라 했고,
조선시대 이미 ”날틀“이란 말이 쓰였음을 생각할 때
최현배 선생이 꼭 국수주의로 비판을 받아야 했는지 의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