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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묵상글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 - 06시 이후 (05:00 현재. 07:20 현재)
< 김찬선 신부님: 05:00 추가, 호명환 신부님: 07:20 추가. >
# 굿뉴스 게시판에 게재된 어부 베드로 님의 생활묵상과 복음묵상 3편 추가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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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회원 어느 분이나 이 곳에 들어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다른 분(신부님 등)의 오늘 묵상글, 강론글을 이 곳 뜨락에 게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글이 아닌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 묵상글 등 나누기 뜨락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묵상글 뜨락을 '8월 15일 이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에 대한 의견을
전체 공지 H. 260707을 참고하셔서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간 (3 곳을 다니고 참가하며: 2. 2-3. 52번 참조) 이곳 뜨락에서 한 분의 묵상글이라도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나눔의 장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22:05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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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9,6ㄴ-10)
형제 여러분, 6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7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8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9 이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10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복음<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26)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25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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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2,24-26
주님께서는 작은 ‘밀알 하나’를 들어 보이십니다.
밀알은 땅에 떨어져 ‘죽어야’ 싹이 트고,
그래야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자기 한 알을 움켜쥐고 있으면
그저 ‘한 알 그대로’ 남을 뿐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내어 줌’에 있습니다.
오리게네스는
이 밀알에서 두 가지를 함께 봅니다.
먼저 그리스도 자신이 ‘한 알의 밀알’이십니다.
그분께서 십자가에서 땅에 떨어져 죽으심으로
온 인류라는 풍성한 열매를 맺으셨습니다.
또한 순교자들도 ‘밀알’입니다.
그들이 흘린 피는
도리어 더 많은 신앙의 열매를 길러 냈습니다.
오리게네스 자신도 순교를 갈망했고,
그의 아버지는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오늘 기리는 성 라우렌시오가
바로 그 ‘밀알’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교회의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정작 ‘교회의 보물’을 내놓으라는 명령 앞에서는
가난한 이들을 가리키며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답했습니다.
그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여 움켜쥐지’ 않고,
기꺼이 땅에 떨어지는 밀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한 알의 죽음은
수많은 회개와 믿음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친절·선행의 관점에서 보면
라우렌시오의 선행은 두 겹입니다.
하나는 가난한 이를 ‘보물’로 알아본 눈이고,
다른 하나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 준 사랑입니다.
참된 선행의 끝은
결국 ‘자기를 내어 주는’ 데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 ‘죽음’은 끝이 아니라
‘많은 열매’의 시작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한 알 그대로’ 나를 움켜쥐고 있지 않은가?
나는 가난한 이를 ‘교회의 보물’로 알아보는가?
나의 선행은 ‘자기 내어 줌’에까지 이르는가?
나는 ‘죽어야 열매 맺는’ 밀알의 신비를 믿는가?
주님,
저를 움켜쥔 한 알이 아니라
땅에 떨어져 죽는 밀알이 되게 하소서.
가난한 이를 보물로 알아보게 하시고,
자기를 내어 주는 선행으로 많은 열매를 맺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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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은총과 연결됨(connectivity)!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현실은 그 숨겨진 가장 깊은 차원에서 언제나 참으로 선하고 아름답습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신비주의
은총과 연결됨(connectivity)!
2026년 8월 9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어떻게 해서 은총과 친교(connectivity-연결되어 있음)가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의 토대인지를 설명합니다: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를 구체적으로 말하기에 앞서, 먼저 '신비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어원 μυστήριον(musterion)에서의 mu(눈이나 입을 닫음)가 의미하듯, 신비주의는 어떤 숨겨져 있어 쉽게 보거나 말할 수 없는 것을 가리킵니다. 신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 보여 주는데, 그것은 또한 우리가 마음 깊이 바라며 참되기를 희망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참된 신비가들은 거의 언제나 좋은 소식을 전합니다. 현실은 그 숨겨진 가장 깊은 차원에서 언제나 선하며—우리 대부분 사람들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 선함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는 '신비주의'라는 말을 매우 전통적이고 고전적인 의미로 사용합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닿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지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겉모습과 외면을 넘어 내적 은총과 만물의 연결됨(connectivity-친교)을 체험하는 이들에게 열려 있는 길을 뜻합니다. 저는 특히 '연결됨(친교)'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참된 신비가들 안에서 언제나 드러나는, 가르칠 수 없는 특별한 은총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신비가들은 현실의 깊은 중심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즐깁니다. 그들은 다른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모든 것 안에 깃든 은총과 만물 사이의 깊은 연결을 바라봅니다.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는 신비주의의 한 갈래입니다. 그것은 자연 신비주의, 이슬람 수피 신비주의(황홀과 기쁨), 힌두 신비주의(일치의 의식과 고행), 불교(비폭력과 단순함) 등 비그리스도교적 신비주의의 여러 측면과 겹치기도 하지만,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는 그리스도 중심적 시선을 통해 세상 안에서 독특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1182–1226)는 예수님이라는 고유한 인격과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특히 육화하신 겸손한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예수님께서 "이 가장 미천한 이들"(마태 25:40)이라 부르신 배척당한 이들과 작은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했습니다. 주변부와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하려는 경향은 언제나 프란치스칸 신비주의의 중심에 있었으며, 이는 곧 가난과 고통과의 영원한 동일화를 설명해 줍니다.
예수님 안에서 인격화한 우주적 비전은 프란치스코와 그의 많은 추종자들이 살아내고 체험한 직관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를 신학적 언어나 학문적 개념으로 정식화하기보다는 삶의 방식으로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대개 복음과 프란치스칸 전통을 통해 이 인격화한 우주적 비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겁니다. 프란치스코의 추종자들은 "길이 남는 열매", 즉 "항구한 열매"를 맺었으며, 언제나 변함없이 원죄보다도 원초적 축복(Original Blessing)을 훨씬 더 깊이 믿었습니다.
따라서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는 사실 프란치스코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우주적이고 보편적인 비전에 관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는 모든 현실에 관한 것입니다. 프란치스코는 다른 체제들이 쉽게 배제할 수 있는 이들—나병환자, 비그리스도인, 가난한 이들, 미움받는 주변인들—을 언제나 포함시킴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가장자리까지 밀어붙였습니다. 만약 프란치스칸 신비주의가 이러한 "가장자리"의 입지를 잃게 된다면, 그것은 그저 피상적 신비주의나 단순히 교회 울타리 안에 갇 신비주의일 수는 있어도 결코 프란치스칸 신비주의는 아닙니다. 프란치스코는 오직 사랑만이 진리를 감당하고 품을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크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랑과 기쁨이 가득하지 않으며 포용적이 않은 진리는 결코 위대한 진리가 아닙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저는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쓰신 글을 읽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의 말씀이 제 마음을 깊이 울리며, 평화와 희망으로 저를 가득 채워 줍니다.
—Dianne S.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Franciscan Mysticism: A Cosmic Vision,” Radical Grace 25, no. 1, Franciscan Mysticism (Winter 2012): 12, 13, 2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ouya Hajiebrahimi, untitled,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변모를 기다리며 성녀 클라라가 말한 거울 앞에 고요히 서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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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2026.08.09 22:27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형제라는 이름은 짧지만 그 안에는 복음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형제는 내가 선택하여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곁에 보내신 사람입니다. 형제는 나의 뜻을 이루어 줄 도구가 아니라 그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만나야 할 거룩한 신비입니다. 형제는 나와 생각이 같기 때문에 형제가 되는 것이 아니며, 나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며, 나와 함께 같은 생명의 근원을 나누고 있기 때문에 형제입니다.
포르치운쿨라는 바로 이 진실이 삶이 된 자리였습니다. 작은 성당 안에 모인 사람들은 출신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으며, 능력과 생각과 삶의 배경도 서로 달랐습니다. 어떤 이는 귀족 출신이었고 어떤 이는 가난한 노동자였으며, 어떤 이는 배움이 있었고 어떤 이는 글조차 제대로 읽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 앞에서 그들은 모두 같은 이름을 얻었습니다. 작은 형제. 그 이름 안에서는 높은 사람도 낮은 사람도 없었습니다. 많이 아는 이가 적게 아는 이를 지배하지 않았고, 일을 잘하는 이가 약한 이를 무시하지 않았으며, 오래 머문 이가 새로 온 이를 자신의 아래에 두지 않았습니다. 누구도 다른 이 위에 군림할 수 없었고, 누구도 형제를 자신의 뜻에 따라 움직일 권리를 갖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 앞에서 가난한 사람이었고, 서로의 도움 없이는 복음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형제성은 이렇게 자신의 충분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나는 혼자 완전할 수 없고, 혼자 구원받을 수 없으며, 혼자 복음을 살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내게 없는 것을 형제가 지니고 있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형제가 바라보며, 내가 쓰러질 때 형제가 나를 붙들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독립적이고 강한 사람을 성숙한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의 짐을 나누어 지는 사람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세상은 혼자서도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자랑하지만, 포르치운쿨라는 자신의 한계를 숨기지 않고 도움을 청할 수 있는 가난을 가르칩니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함이 아니라 관계를 믿는 용기이며, 자신의 부족함을 드러내는 것은 수치가 아니라 형제에게 들어올 문을 열어 주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형제성은 아름다운 말처럼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가까이 살아갈수록 서로의 결점이 드러나고, 함께 일할수록 생각의 차이가 나타나며,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낼수록 감추어 두었던 상처와 욕망이 관계 위로 떠오릅니다. 멀리 있는 사람은 이상적으로 사랑할 수 있지만, 매일 만나는 형제는 우리의 인내와 겸손과 가난을 실제로 시험합니다.
형제가 나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을 때, 나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할 때,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일을 가볍게 여길 때, 나보다 늦고 서툴며 반복해서 같은 실수를 할 때, 형제성은 비로소 관념이 아니라 십자가가 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자신에게 묻게 됩니다. 나는 형제를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뜻에 맞는 형제만을 사랑하는가. 나는 그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바꾸려 하는가. 나는 그의 성장을 기다리는가, 아니면 내 불편함을 빨리 없애기 위하여 그를 통제하려 하는가.
형제성은 다른 이를 바꾸는 기술이 아닙니다. 형제를 통하여 내가 변화되는 은총입니다. 형제의 느림은 내 안의 조급함을 드러내고, 형제의 고집은 내 안의 숨은 완고함을 비추며, 형제의 약함은 내가 얼마나 능력과 효율을 우상처럼 섬기고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형제의 성공 앞에서 느끼는 불편함은 내 안의 시기와 경쟁심을 드러내고, 형제가 인정받을 때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나라보다 나의 왕국을 더 사랑하고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러므로 형제는 나의 거룩함을 방해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진실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형제와의 관계 안에서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덜 겸손하고, 덜 인내하며, 덜 자유롭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나는 사랑한다고 생각했지만 조건을 붙여 사랑했고, 섬긴다고 생각했지만 인정받기를 기대했으며, 공동선을 위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나의 방식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형제는 내 안의 감추어진 왕국을 드러냅니다. 내가 중심이 되어야 편안하고, 내가 결정해야 안심하며, 내 방식대로 일이 이루어져야 옳다고 느끼고, 내 수고가 인정받지 못하면 섭섭해하며, 다른 이가 나보다 빛날 때 마음 한구석이 흔들리는 왕국입니다. 이 왕국은 겉으로는 봉사와 책임과 열정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면에는 통제와 소유와 자기 증명의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공동체를 위한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자신의 계획에 맞추려 하고, 걱정한다는 이유로 그의 자유를 제한하며, 질서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약한 이의 목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습니다.
걱정이 지나치면 통제가 되고, 책임이 가난을 잃으면 지배가 되며, 열정이 사랑을 잃으면 자기 의지가 됩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이 자비를 잃으면 폭력이 되고, 공동체를 지키겠다는 마음이 사람보다 제도를 앞세우면 배제가 됩니다. 포르치운쿨라의 형제성은 이러한 우리의 왕국을 내려놓으라고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나의 왕국은 한 마음 안에서 함께 중심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중 충실성은 함정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내가 빛나는 것보다 형제가 살아나는 것이 중요하고, 나의 뜻이 관철되는 것보다 관계 안에 선이 흐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왕국에서는 형제가 나를 위하여 존재하지만,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내가 형제를 위하여 작은 도구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의 보물이 될 때 포장과 증명과 자랑과 비교와 경쟁은 조금씩 힘을 잃습니다. 다른 이보다 나아 보여야 한다는 불안에서 자유로워지고, 나의 공로를 기억해 달라는 요구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내가 앞에 서지 않아도 공동체가 잘 살아가는 것을 기뻐하고, 내가 시작한 일을 다른 형제가 완성해도 감사하며, 나보다 젊고 능력 있는 형제가 더 큰 역할을 맡을 때에도 그 안에서 하느님의 선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프란치스코가 말한 참되고 완전한 기쁨의 한 모습입니다. 내가 인정받는 기쁨이 아니라 형제가 빛나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 내가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기쁨이 아니라 말째 자리에서도 평화를 잃지 않는 자유, 나의 이름이 드러나지 않아도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충분해하는 가난입니다.
형제성은 다른 이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다른 이 안에 있는 선을 보고 기뻐하며, 그 선이 공동체 안에서 자라도록 자신이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선하심이 다양한 사람 안에서 서로 다르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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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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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10 04:16
- 자기만 만족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말하는데
나는 그 은총을 넘치게 받을 수 있는 자이고,
받은 그 은총을 넘치게 나눌 수 있는 자인가?
이것이 오늘 라우렌시오 성인 축일을 지내면 저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도전입니다.
왜냐면 라우렌시오 성인이야말로 이런 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이고,
그래서 교회는 사도도 아닌 그를 기념일이 아니라 축일로 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두 부제 순교자를 사도가 아닌데도 축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스테파노 부제가 먼저 그리스도교의 첫 번째 순교자로서 축일로 지내고,
라우렌시오 부제는 로마 교회의 순교자로서 축일로 지내는 것인데 이는 그가
단지 부제였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삶과 순교가 특히 기릴만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순교는 로마의 수많은 순교자 가운데서도 영웅적이어서 실제로 그렇게
순교했을까 의심될 정도인데 고등어를 석쇠 구이 하듯 그렇게 순교했다지요.
그리고 그렇게 끔찍한 순교를 당하면서도 그렇게 의연하였다지요.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의 ‘썩어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로 순교를 완성했지요.
그러나 이것보다 더욱 기릴만한 것은 그의 부제 직무 수행입니다.
부제로서 교회 재산을 관리할 때 바오로가 오늘 독서에서 얘기한 그대로였습니다.
황제가 교회의 보물을 몰수하려고 하자 그는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는
황제에게 갈 땐 이들을 데리고 가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들이라고 했다지요.
그런데 그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은총을 넘치게 받았기 때문이고,
은총이 넘쳐서 그리한 것입니다.
은총이 넘치면 누구나 라우렌시오 성인처럼 나눌 수 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넘치도록 받는 것입니다.
잔이 넘치도록 받아야지 넘쳐서 흘러가지
찰랑찰랑 채울 정도만 받으면 넘쳐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도 종종 넘치게 받지 않습니다.
자기 잔을 채우고 나면 됐다고 하며 더 받지 않습니다.
자기 배부르면 그것으로 자기만 만족하고 나눌 생각이 없는 것입니다.
사실 가진 것이 없으면 나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많이 가졌어도 나눌 생각 곧 사랑이 없으면 나눌 수 없습니다.
많이 가졌어도 내 것이라고 움켜쥐는 사람은 나누는 것이 아깝잖아요?
그러므로 가진 것이 많아도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 거저 받은 것이고,
넘치게 받고 과분하게 받았다고 생각할 때에야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은총으로 자기만 만족하고 마는 사람과
하느님 은총을 나누는 사랑의 사람이 있는데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보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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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삼보 전진 이보 후퇴하는 삶을 살기 위해....
2026.08.10. 05:30
라우렌시오 성인은 서기 258년,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박해 속에서 로마에서 순교했습니다. 그는 교황 성 시스투스 2세를 섬기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는데, 교황이 며칠 전에 순교한 뒤 곧이어 라우렌시오도 같은 길을 걸었습니다.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내놓으라 요구했을 때, 라우렌시오는 며칠의 시간을 청했습니다. 그 후 도시 곳곳을 다니며 교회의 도움을 받던 가난한 이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누구보다도 그들을 잘 알고 있던 그는, 사흘째 되는 날 교회 앞에 많은 이들을 모아 세워 두었습니다. 늙고 병든 이들, 눈먼 이들,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들… 그들을 줄지어 세운 뒤, 그는 총독을 불러 교회의 참된 보물을 보여주겠다 초대했습니다.
이에 격노한 총독은 라우렌시오를 사형에 처했습니다.
이 장면은 교회의 보물이 금이나 은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돌보아야 할 가난한 이들임을 증언하는 감동적인 사건으로, 오늘날까지 신앙인들의 마음을 깊이 울리고 있습니다.
…
이런 이들이 우리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의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랑의 넓은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사실 라우렌시오 성인도 교회의 보물을 가져오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이미 교회의 돈을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는 이들을 로마 총독 앞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요즘 저는 마음 한 구석에 뭔가가 내려가지 않은 듯한 심리적이고 영적인 체증 같은 것을 느끼곤 합니다. 그 원인이 무언가를 곰곰이 바라다보니 제 마음 저 깊은 구석에 '내' 뜻에 집착하며 '손해'보고 싶지 않은 에고의 고집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합니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 그 동기는 선하고 진실하며, 그 계획은 기도 안에서 세워집니다. 그러나 때때로 그런 일을 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아의 죽음, 곧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하느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내' 뜻을 내려놓는다는 것, 그리고 하느님께 '나'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긴다는 것은 쉽게 말해 '사랑' 때문에 '손해 보는 것'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에고는 본능(?)적으로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내면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과 정면으로 충돌하기 때문에 우리는 뭔지 모를 답답함이나 체증 같은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적으로 정체된 상태를 바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 또한 우리 에고의 집착이긴 하지만... 우리가 나름대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한다고 여기며 우리의 세상적 논리를 내려놓지 않으려는 상태에 계속 머무르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에고는 계속해서 "이렇게 해야 해!" "저렇게 해야 해!" "그것이 바른 거고 합리적인 거야!" 하며 우리를 재촉하거든요....
그러니 무언가를 열심히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것이 큰 희생인 양 땀을 흠뻑 흘리며 일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것 또한 '내' 에고를 만족시키고 부풀리는 데에만 역할을 하지, 참으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게 아니지..." 하며 '내' 에고의 고삐를 풀어 버릴 때 그 체증이 후련하게 내려가는 듯한 해방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이 우리의 영적인 삶에 있어 참으로 전진하는 때가 아닐까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에고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후퇴하는 삶을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해방감을 느끼는 순간을 지나면서 우리는 앞으로 전진하는 은총 안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것이 바로 삼보 전진 이보 후퇴하는 정상적인 삶입니다. 비록 이보 후퇴하지만 삼보라도 전진하는 것이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그런데 이보 전진하고 삼보 후퇴하는 삶을 살아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큰 낭패가 되겠지요...
그러니 삼보 전진 이보 후퇴하는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깨어 '나' 자신의 내면을 깊이 바라보며 우리의 참 자아를 깨우는 수양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종종 우리가 세운 계획과 성공에 얽히고, 우리의 희망과 봉사에 대한 감정은 그 결과에 매여 버립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길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내' 힘으로 모든 것을 하려 하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은 분명합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참된 생명이 오는 길입니다. 죽음을 통해서만 풍성한 추수가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합니다: "나는 아직 무엇을 하느님께 온전히 봉헌하지 못했는가? 왜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는가?"
진리는 사랑 안에서만 온전히 드러납니다. 사랑 없는 진리는 결코 위대한 진리가 아닙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에고를 내려놓고,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겨드리며,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 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는 삶으로 나아가기를 다짐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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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뉴스 게시판에 게재된 어부 베드로님의 생활묵상과 복음묵상 3편을 추가합니다.
(260810.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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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평신도와 복음묵상: 굿뉴스게시판. 260809.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id=2135804&menu=4770
굿뉴스게시판 - 가톨릭마당 - 우리들의 묵상 /체험 . 2026-08-09 ㅣNo.191098
최근에 카톡으로 복음묵상이라고 하면서 개인 카톡으로 복음묵상을 전해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자기 개인 묵상도 있고 또 어떤 분의 묵상을 대신 전달해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정말 어이가 없는 묵상글을 접하면서 느낀 점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여기도 묵상을 전제로 해서 개방된 코너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평신도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복음묵상입니다. 복음묵상은 사실 아주 어렵습니다. 복음묵상은 말 그대로 묵상이 복음을 바탕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근데 복음을 바탕으로 하긴 하는데 그게 그저 사건을 해설하고 그 주변 이야기를 하는 것에 그치면 그건 복음묵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 내용 자체에 성경적인 지식을 꼭 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인 성경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해야 하는데 실제 그 내용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개념을 이상한 개념으로 묵상을 한답시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영화를 보고 그 영화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것처럼 말하는 건 묵상이 아닙니다.
묵상의 개념은 다양한 정의가 있습니다. 학문적인 개념보다는 아주 쉽게 표현해 그날 복음이라든지 아니면 평소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 말씀을 자신의 삶 속에 어떻게 녹여서 그 말씀이 삶으로 실천이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게 복음묵상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저 성경 풀이를 신학적으로 해석을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평신도이지만 평신도가 하는 복음묵상은 상당한 주의를 요합니다. 자칫 잘못하면 예수님 말씀을 사람들에게 잘못 전달하는 사람으로 될 수 있습니다. 또한 국어적으로도 표현이 명확해야 합니다. 언어 선택을 아주 잘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어 하나를 사용해도 신중해야 합니다. 자기 나라말 단어 하나도 제대로 맞는 단어를 구사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느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을지 의문이기도 하지만 성경적인 의미를 벗어나 자기 멋대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의미를 묵상할 땐 그 단어 속에서 나타나는 셩경의 상징적인 의미도 중요한데 그저 성경상에 놓인 직접적인 문자로만 이해를 해 자기 생각을 대변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복음 묵상을 해도 그 자체를 공개적으로 온라인 상에 오픈을 할 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 말씀을 왜곡해서 전파하는 사기꾼 율법교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는 묵상을 해도 그걸 공개적으로 오픈을 할 정도가 되려면 언어의 구사력이 논리적으로 정확해야 합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애매모호한 방식으로 추상적으로 표현하면 그걸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시키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자기가 묵상한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표현을 하되 정확한 개념을 가지고 해야지 자기가 어디서나 아니면 들은 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재구성해 전달하는 수준으로 한다면 그건 제대로 된 자기만의 묵상이 아니고 남의 묵상을 짜집기해서 표절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묵상은 남의 묵상을 표절해서 그 표절을 자기 것으로 포장하는 건 절대 제대로 된 묵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묵상은 창작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을 왜곡해서는 절대 안 되는 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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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묵상 : 가슴으로 하는 사랑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3&id=2135804&menu=4770
260810. 19:46 ㅣNo.19111
사랑에 대해 많이 묵상을 하곤 합니다. 남녀 간의 사랑을 말하는 것도 포함하겠지만 좀 더 나아가 신앙 안에서 형제애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절대적인가 아니면 상대적인가를 많이 묵상해보기도 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라면 상대적인이라는 의미를 초월해야 진정한 사랑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사랑도 하기 어렵지만 상대적인 건 하려고만 하면 누구나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도 안 되는 사람도 있긴 합니다. 보통의 경우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상대적인 사랑은 계산적인 사랑입니다. 내가 받은 만큼 다시 나도 사랑으로 돌려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냉정한 의미에서 보면 이건 단순히 사랑이라고 표현을 했지만 사랑이라는 건 어떤 수치로 정량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무게처럼 어떻게 가시적으로 저울로 달아서 측정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상대적인 사랑은 밑바탕에는 조건이 사실 이미 전제가 된 것입니다. 나도 받은 만큼 주겠다는 묵시적인 조건이 숨어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절대적인 사랑은 그렇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사랑은 조건과 외부의 환경적인 요인에 의해서 변하는 사랑이 아닙니다. 환경에 의해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변하지 않을 수 있어야 그게 진정으로 아름다운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흔히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 말하고 아는 그런 수준으로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까 엄청 고민을 많이 해봤습니다. 우리는 하느님도 될 수 없고 예수님도 될 수도 없습니다. 어려운 듯하면서도 쉬운 답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으로 남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보려면 인간 육신의 옷을 입고 한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표현하는 것보다는 그냥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신성을 가진 존재로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몸 자체가 이미 되지 않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겁니다.
하지만 이게 일반적인 이론에 불과하다면 이 이론을 뒤집을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을 저는 체험으로 최근 체득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가 형제를 사랑한다든지 아니면 그 대상이 누구가 됐든지 불문하고 사랑하려면 사랑스럽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외에 사랑스럽지 못한 그 모습 또한 사랑으로 감싸안아야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여러 방법이 필요합니다. 그 중 하나가 모든 사람은 예수님처럼 완벽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피부로 절실히 느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허물이 되겠죠. 그런 허물은 자신에게도 있다는 사실 또한 알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남이 가진 그 허물은 잘 보입니다. 같은 허물인데 그 허물이 자기에게 있을 땐 정말 어떻게 된 모양인지 잘 보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허물이 똑같이 보인다면 상대가 가진 그 허물을 보고 비난을 할 수가 없을 텐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상대의 그 허물을 보고 미워하게 되거나 아니면 사랑스럽지 못한 모습이라고 단정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해서 사랑의 감정이 식다보니 연인이 됐든 신앙 안에서 형제자매가 됐든 사랑의 감정이 메마르게 되는 것이죠. 그렇게 하는 것이 보통 인간 수준에서 하는 사랑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몸을 입고서도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신성과 같은 수준의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거의 그 수준에 근접할 수 있는 사랑이 가능할지 많이 고민해봤습니다. 아주 쉬우면서도 아주 어려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상대의 허물을 보고도 못 본 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이걸 못 본 체를 하려면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은 완전할 수 없다는 일반적인 진리도 잘 숙지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자기에게도 그와 같은 허물이 없다고 할 정도로 허물이 없다면 남의 허물을 볼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는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성경에서도 말씀해 주듯이 인내가 필요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눈으로 하면 안 되는 모양입니다. 왜냐하면 눈으로 하는 사랑은 보이는 그 모습 그대로 판단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가슴으로 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슴에는 보는 눈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을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방법 중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을까 하고 묵상을 해보면 잘 없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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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묵상 :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하는 목숨에서 '목숨과 생명'은 어떤 의미 차이인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4&id=2135802&menu=4770
260810.17:08 ㅣNo.191115
모처럼 복음묵상을 해봅니다. 오늘 복음에 보면 목숨이라는 단어와 생명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이 두 단어의 의미를 가지고 오늘 복음을 묵상하려고 합니다. 목숨이라는 말과 생명이라는 말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의미를 단순히 국어적인, 사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논의를 하는 것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저 역시도 하느님의 말씀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알면 얼마나 알 수 있겠으며 또 안다고 해도 그 내용이 이렇다고 하는 형식으로 설명을 하는 것조차 교만에 가까운 행동일 것입니다. 다만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온전히는 아니더라도 이런 의미로 전달하시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하는 것뿐입니다. 이 추론은 맞는 추론이라고 주장도 하지 않습니다. 저의 추론이 맞다는 확실한 근거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추론을 하는 건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렇게 이해를 해서 이렇게 받아들이고 이해를 한다면 저한테 신앙적으로 유익할 거라고 생각을 하며 그렇게 해서 앞으로의 신앙에 적용해 실천하려고 한다면 그런 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저의 이런 생각이 일면 일리가 있다고 공감이 가시는 분이 계시면 그분 역시도 이를 참고해 신앙에 유익이 된다면 그야말로 참으로 좋은 일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설령 그 과정이 미비한 부분이 있지만 그 결과가 긍적적인 효과가 나타난다면 저는 저의 묵상글이 좋은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오늘 복음의 내용 한 부분인 25절을 보면 인간적인 시각에서는 전혀 와 닿지 않는 내용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 말입니다. 또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자기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오늘은 이 구절을 바탕으로 해서 나름 저의 개인적인 신앙 체험을 바탕으로 묵상을 하고자 합니다.
사람은, 인간은 누구나 생존본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고 싶은 욕망, 욕구를 말합니다. 인간의 이런 기본적인 본능을 거스른 말씀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늘 복음에서 주십니다. 우리의 목숨은 인간적으로는 우리의 손에 달려 있지만 영적으로는 하느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세상 말에도 인명은 재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미 성경에서도 우리의 목숨을 관장하고 주관하시는 분은 하느님 손에 달려 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먼저 목숨과 생명의 원어의 의미를 가지고 얼마든지 설명을 할 수도 있지만 그건 오늘 묵상에서는 제외하겠습니다. 저는 평신도이기 때문에 평신도 수준에서만 묵상하려고 합니다. 국어의 사전적인 의미만으로도 하느님의 말씀을 성경의 문맥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깊이 묵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맥 상호간의 관계를 잘 파악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의미를 잘 이해하면 오늘 복음의 의미가 좀 더 잘 와 닿을 수 있을 거라 사료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등장하는 목숨이라는 이 표현은 인간적인 한계치가 설정된 생명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목숨이라는 건 숨이 나간 상태에서 다시 들어오지 않는 순간이 있다면 이는 더 이상 생명을 지탱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생로병사의 마지막 종착역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모든 상황이 그런 것만을 상징하지는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목숨이라는 것도 인간의 의지에 따라 연장을 할 수가 있는 게 아닙니다. 이 역시도 최종적으로 관장하시는 분은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왜 그렇다면 자기의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인 영생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는지는 거대한 신학이나 성경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오늘 복음은 문맥에서 어느 정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사람인 인간도 세상적인 일을 이치에 맞게 해석하고 생각을 하는 존재인데 하물며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이 그런 원리를 역행해서 말씀하신다는 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은 25절 후반부의 내용을 잘 보면 여기에 힌트가 숨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장난을 하신 게 아닙니다.
다시 한 번 잘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자기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고 하신 말씀 앞에 전제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라는 전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는 숨을 쉬어야 합니다. 한 번 나간 숨이 다시 들어오는 이 과정이 계속 무한반복이 되어야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게 어느 순간 되지 않으면 목에 숨이 들어가지 않는 상태가 되면 그 상태가 죽음입니다. 언어논리로 보면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해 줄 수 있는 목숨을 가지게 될 것이다"는 말씀인데 표면적으로는 논리가 맞지 않지만 사실 여기에는 우리가 아는 개념으로는 이해를 할 수가 없을 겁니다. 목숨과 생명은 밀접한 관계를 맺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등장하는 생명은 단순히 지금 현재의 목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좀 더 넓은 광의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주로 영원한 생명과 같이 영생을 언급할 때 많이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목숨이 끊어지면 생명도 끊어졌다고 생각을 하기 십상입니다. 그런 논리로 오늘 복음을 접근하면 비논리적인 접근이 될 것입니다. 만약 목숨이 끊어졌다고 해도 생명은 끊어지지 않았다는 논리로 설명이 되어야 이 문맥이 합리적인 논리로 명제가 성립될 것입니다. 그렇게 해석될 수 있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왜 이런 의도로 말씀하셨는지 그 이유를 묵상하는 게 어쩌면 오늘 복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암시와 힌트가 바로 24절에 이미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이 죽어야만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전체를 보면 다른 성경에서 말고 이 부분에 한정해서 묵상을 해보면 이 내용에서 이때의 목숨은 단순히 사람의 목숨을 의미할 수 있지만 좀 더 나아가서 보면 ‘자기애‘과 같은 의미로 해석되면 이해가 좀 더 잘 될 수 있고 또 논리적으로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자기애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그럼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까요? 그건 그렇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자기애라는 건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왜 이런 논리로 접근해야 하는가 하면 복음이나 성경은 단 두 말로 압축할 수가 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지 않습니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이웃 사랑을 하느님 사랑과 차등을 두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 말로는 차등을 둔 것처럼 표현되지만 사실 원어적인 표현으로 보면 동등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건 의미상 동급이라는 뜻이 아니고 사실 우열을 가리지 않을 정도로 이웃사랑도 그만큼 하느님 사랑만큼 중요하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설명하는 게 정통적인 성경상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상 이웃사랑의 의미를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한 게 바로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동일한 것처럼 사랑을 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에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자기의 몸을 사랑하는 것과 자기애는 좀 더 다른 의미가 될 것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정도를 표현한 말씀입니다. 그만큼 사랑할 정도로 사랑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랑의 방향이 자기를 향할 때는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걸 경계하신 것이라고 보는 게 합리적인 추론이 될 것입니다. 결국 그렇게 되려면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어 많은 열매를 맺는 삶처럼 살아야 그게 가능할 테니 말입니다.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자기만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 목숨에 애착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저 이 세상 현세만을 위한 생명으로서의 가치만 가지지만 그게 아니고 자기의 목숨만큼이나 다른 생명의 목숨까지도 사랑하려고 하려면 자기애를 부정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필히 자기의 목숨을 미워해야만 할 것입니다. 결국은 자기 자신을 부인하지 않고선 자신의 십자가를 질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과도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오늘 복음을 접근하면 좀 더 잘 와 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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