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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 24-26
하나님이 가라사대
오늘 본문에도 같으신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 하나님이 ......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땅의 모든 종류의 시작이요, 그것들을 명하시든, 만드시든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하셨으며, 그 창조하신 내용의 결과가 하나님의 기쁨이요 만족하심이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물 중에 하나님을 가장 가까이 대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내신 피조계를 통치할 자로 인생을 내셨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1. 본문 24-25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땅은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내되 육축과 기는 것과 땅의 짐승을 종류대로 내라 하시고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땅의 짐승을 그 종류대로 육축을 그 종류대로 땅에 기는 모든 것을 그 종류대로 만드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입니다.
1) 모세는 이제 동물들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이 창조된 여섯째 날에 대해 언급합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께서는 ‘땅은 생물을 내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요소인 생명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의 이적이 드러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생기도록 명령하신 것을 무에서 창조하기 시작한 것처럼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필요해서 땅에서 물질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세상의 분리된 부분과 우주 자체를 보다 잘 결합시키기 위해 그처럼 행하신 것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왜 땅이 생물을 내는 일에 축복하지 않으시는가? 우리는 ‘동물들이 그 종류대로 창조되었다’라고 말한 모세의 의도가 똑같은 사실을 나타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번식으로 인해 종류대로 창조된 동물은 안정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동물이 종류대로 창조되었을 때 새끼도 모두 포함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이 종류대로 번식하지 않는다면 종의 구별이 무엇 때문에 존재하겠습니까?
2) “육축”이라는 말에서 히브리인 중에 어떤 사람들은 “육축”과 “땅의 짐승”을 구별합니다.
이는 육축은 목초를 먹고 살지만, 땅에 사는 짐승들은 고기를 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이 두 종류 동물에게 양식으로 똑같이 풀을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이 이 두 말이 구별 없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모세가 좀 더 분명하게 종류를 구별하기 위해 베헤못(육축)이라고 이름 붙인 후 ‘땅에 기는 것들’ 이라는 말을 덧붙였다고 믿습니다. 여기에서 ‘기는 것들’ 은 땅 위에 사는 것들을 가리킵니다.
2. 본문 26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입니다.
1) 접두사 에 대해 무조건 고집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의 완전함에 도달하기까지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마음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이 언급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견해가 확고한 것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의 말이 사실일지라도 우리는 그러한 것을 모세가 생각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형상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형상으로’ 라는 모세의 말이 ‘그리스도 안에’ 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불린다고 덧붙일 수 있습니다.
몇몇 교부들은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무기로 아리안파를 물리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바로 이러한 점에서 기만당한 것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여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지 않은 이유를 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모세는 남자와 여자 모두에게 차별 없이 사용합니다. 해결책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울 사도께서는 단순히 가정적인 관계만을 암시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형상을 다스림에 국한시킵니다.
이 다스림에 있어서 남자는 아내보다 우월하여 남자가 명예에 있어서도 더 우월하다는 것만을 뜻할 뿐이지 하나님의 형상 자체에 대하여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통해서 인간의 속성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인간의 속성 안에 있는 정신과 의지와 모든 감성을 통해 질서 있는 하나님의 속성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2) “우리의 모양대로” 에서 주석가들은 이 구절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분분합니다.
대다수의 주석가들은 형상이라는 말이 모양과는 다르다고 해석합니다. 가장 일반적인 차이점은 형상은 실체가 있고 모양은 유연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단순하게 정의하는 사람들은, 형상은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인간의 성품에 부여하신 재능을 말하고 모양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앞에서 말한 견해를 가진 사람과는 달리 삼위 일체 논리를 인간 본성에 비유해서 설명하려고 세밀하게 연구했습니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의 세 가지 기능을 상세히 나열하면서, 그것은 지성과 기억과 의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삼위 일체에서 여러 가지를 유추해 냈습니다. 만일 신자들 중에 여가가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러한 공상을 즐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삼위 일체론 제10권과 제14권, 그리고 하나님의 도성편 제11편을 읽어 보십시요. 실제로 우리는 사람의 본성 속에 성부, 성자, 성령을 비유하여 설명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영혼의 기능이 지니는 특이성을 시인합니다. 성경에 많이 언급된 모양과 형상을 여기에서 단순하게 두 부분 보편적인 것과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인 것으로 분류하는 것이 더 경건해 보여 그 학설을 지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양에 대한 정의는 그와 같이 미묘한 것보다는 보다 확고하고 분명한 기초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형상이 모양이라는 말과 다르다는 견해를 부인하고자 했습니다. 모세는 나중에 동일한 것을 되풀이하면서 “모양”이라는 말은 지나쳐 버리고 단지 형상에 대해서만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모양이란 말이 나오지 않고 형상만 나오는 이유는 모세가 간단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모양이란 말을 빼버렸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우리는 모세가 형상이라는 단어를 두 번이나 언급하면서도 모양이라는 말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히브리인들이 똑같은 것을 다른 말로 반복하는 습관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본문은 두 번째 용어가 설명하기 위해 덧붙여졌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 라는 말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모양이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 는 뜻입니다.
끝으로 50장 1절에는 이 형상에 대한 언급이 없이 모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두 단어 사이에 내재되어 있는 모든 차이점을 제쳐놓고도 형상이나 모양이 무엇인지를 여전히 모릅니다. 신인동형동성론은 인간의 신체로부터 그 유사성을 찾는 논리인데 너무 조잡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망상은 없어져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유형적인 존재로 상상하지는 않지만 그분의 형상이 인간의 신체에 나타나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사람의 몸에 찬란히 빛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결코 성경에 맞지 않습니다. 크리소스톰의 설명도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지배력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이라기보다는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세상을 통치하도록 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므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것을 다시 회복함으로써 본래 어떤 것이었는지를 판단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복음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 하나님과 똑같은 형상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골3:10, 엡4:23). 그는 이 형상이 ‘의와 참된 거룩함’ 에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제유법의 표현입니다. 의와 거룩은 하나님의 형상에 있어서 주요 속성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온전해진 우리의 성품을 의미합니다. 사실 아담이 올바른 판단력을 하나님께 부여받고 이성과 조화를 이루는 사랑의 감정과 건전하고 정돈된 감성으로 선한 일에 열심일 때, 더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갖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이 주로 거하는 곳은 사람의 정신과 마음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은 바로 사람의 정신과 마음속에서 영롱하게 빛났습니다. 아담에게서는 하나님의 모든 형상이 빛을 발했습니다. 아담에게 있어서 영혼의 각 부분은 다양한 기능이 서로 잘 연관되어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정신 속에는 완전한 지성이 충만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직이 지성의 동반자로서 함께 있었으며 모든 감성은 이성에 순종하도록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육체는 이와 같은 내적 질서와 잘 부합되어 있었습니다. 비록 그 형상이 아직도 우리 안에 남아있긴 해도 너무나 상처를 입고 더럽혀져 있어서 실상은 완전히 파괴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모든 곳이 볼품 없으며 죄의 감염으로 인해 모든 부분에 악이 침투하여 자유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3)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라는 말씀에서는 미래 시제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모두 이것이 신중한 표현법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하나님께서 단지 명령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장 뛰어나고 놀라우신 역사를 이루시는 지금은 인간 창조에 대해 명령하시는 것이 아니라 상의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여기에서도 하고자 하는 일을 말씀만으로 명령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탁월하게 만들기 위해 상의하신 것입니다. 말하자면 인간의 창조를 위해 의논하려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가장 존귀하게 여기셨다는 증거입니다. 모세는 이와 같이 말함으로써 우리를 감격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어떤 형상을 덧입히며 어떤 재능을 부여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생각한 것은 처음이 아니며 지금 시작하신 것도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일을 행하시다가 어려운 문제 때문에 멈추고 생각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앞에서도 고찰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6일 동안에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묵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인간의 존엄성에 집중시키려고 인간의 창조에 대해 상의하시며 자신이 무엇인가 위대하고 놀라운 일을 착수하리라는 것을 증거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의 타락한 성품에는 경멸을 야기시키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올바르게 헤아려 본다면 다른 피조물 가운데 인간이 하나님의 지혜와 공의와 선의 특출한 표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인들은 인간을 미코로코스모스(축소된 세상)라고 부를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다른 의논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홀로 숙의하셨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지구나 천사들과 의사소통을 하신다고 생각함으로써 어리석음을 드러냅니다.
지구는 분명히 뛰어난 조언자였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절묘한 일의 가장 적은 부분이라도 천사들에게 돌린다는 것은 신성모독이요, 혐오스러운 생각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우리가 지구나 천사들의 형상에 따라 창조되었다는 것을 어디서 알게 되겠는가? 모세는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고 선포할 때 모든 피조물을 직접 배제하고 있지 않은가?
다른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당시의 방백이나 왕들의 표현법을 따라 자신을 복수로 말씀하신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날카롭기는 하지만 이중성에 미혹된 자들의 견해입니다. 이는 마치 당시 세계에 팽배하고 있던 조잡한 표현법이 지난 몇 세기 동안 발전하여 사용되기에 이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잔인한 사악은 어리석음과 결합되어 극도로 완악해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우둔함을 자녀들에게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증거에 기초하여 유일하신 하나님 안에 삼위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외부에 있는 조언자들을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 안에 있는 특이한 어떤 것을 발견하신다고 추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 내재된 영원한 지혜와 권능입니다.
3)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에서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부여하신 존엄성의 일부를 생각하십니다.
즉 인간이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지닐 것에 대해 생각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세상의 주인으로 정하신 것은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동물들이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하셨습니다. 고유한 성향과 본성을 지닌 동물들이 외부로부터의 지배를 덜 받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복수를 사용한 것은 이러한 권위가 아담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주어졌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이 창조된 목적이 무엇인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인생에 필요한 것과 편리한 것을 공급하여 인간에게 부족한 것이 전혀 없도록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창조의 질서만 보더라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배려가 현저히 나타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심지어는 인간을 창조하시기 전에 엄청난 재물을 충분히 준비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태어나기 전부터 부유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존재하기 전부터 우리를 그처럼 돌보아 주셨습니다. 때문에 이 세상에서도 음식은 물론 인생에 필요한 다른 것까지도 결코 부족하지 않도록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축복의 손을 뻗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