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쌍마협 제 1 권 **
- 원저 : 유잔양
차 례 ....................................
작가 소개 [목차 1]
서장 [목차 2]
맹주부의 풍운 [목차 3]
의문의 피살 [목차 4]
살해자는 누구냐 [목차 5]
심야의 유혈극 [목차 6]
혐의자 [목차 7]
기구한 신세 [목차 8]
황야의 시비 [목차 9]
악독한 칠교주 [목차10]
누가 진짜냐 [목차11]
숨어 있는 적 [목차12]
능운보탑의 결투 [목차13]
탑에서 만난 소녀 [목차14]
도망친 홍의의 소녀 [목차15]
대의를 위해서 [목차16]
약속한 싸움 [목차17]
작가 소개
와룡생 (臥龍生)
그는 김용(金庸) 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무협소설의 대가로서 우리에게
는 아주 친숙한 이름이다.대표작으로는 무림성, 불야성, 금검지, 중원지,
무유지 등이 있다.
서장
황금빛 찬란한 저녁노을이 익어 갈 무렵.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 대로 기울자 서녘 하늘은 수줍은 처녀의 뺨처럼 붉
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고도(古道)는 옛 그대로였으나 오색 영롱한 저녁노을이 온누리에 한 겹의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처량한 감이 드는 색처럼 그 위에 깔아 놓았
다. 그 색채에 의해 붉게 물들어 가는 고도는 고즈넉하기만 했다.
미련없이 지는 해의 잔양이 쓸쓸한 대지 위에 고이 내려앉는다. 끝없이
넓기만한 광야, 무서우리 만큼 고요한 대지.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만
같았다. 그것을 예시하는 듯 은은히 음산한 기운이 대지 위에 감도는 것
이었다.
이때 돌연.
한차례 지극히 처량하면서도 날카롭기 짝이 없는 사나운 말의 울음 소리
가 먼 곳에서 들려 왔다. 그 소리는 점점 더 커지며 사방으로 울려 퍼졌
다.
저녁노을이 내리 깔린 황야 저편 서쪽에서 한 필의 준마가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질풍같이 달려오는 것이었다.
마치 한 줄기의 무지개가 갑작스럽게 뻗쳐 오는 것 같았다. 번개 빛살보
다도 빠르게 거의 미친 듯이 달려오고 있는 한 마리의 말, 그것은 오룡신
구(烏龍神驅)였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신구가 질풍처럼 달리며 이따금 고개를 쳐들
고 사나운 소리로 울부짖고 있었지만 안장 위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기사
(騎士)가 보이지를 않는 것이다.
주인 없이 빈 말이 혼자서 주인을 찾기라도 하는 듯 연달아 매섭게 울부
짖으며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주인을 잃고 저토록 미친 듯이 달리고 있는 것일까? 지금 어
디서 오는 길이며 또 어디로 가고 있을까?
쓸쓸한 고도, 그 양쪽으로 펼쳐진 무서우리 만큼 고요한 황야, 그리고 그
적막을 깨며 무섭도록 빠른 속도로 달리고 있는 빈 말.
잔양이 소리 없이 쓸쓸한 대지 위를 비치는 속에 일진의 처량한 말의 울
음 소리가 하늘을 찌를 듯이 연방 울려 퍼지자 대지는 또 다른 세계로 변
하고 말았다.
이미 평화의 대지가 아니었다. 무수한 영혼들이 뜨거운 불길 속에서 아우
성치며 통곡하는 지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로 변하고 말았던 것이다.
삽시간에 황야는 온통 처량하고 비참한 분위기 속에서 깊이 빠져 들어가
신음하기 시작하였다.
기사가 없는 말은 시위를 벗어난 화살과도 같이 빠른 속도로 여전히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히히히힝 히힝!"
예의 그 처량하고 애달프기까지 한 사나운 말 울음 소리는 그칠 줄 몰랐
다.
희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그 한 필의 오룡신구는 동쪽을 바라보고 지쳐 금
방 쓰러질 듯 거품을 한 입 문 채 전력을 다해 달리고 있었다.
"......."
마침내 그 오룡신구는 드넓은 황야를 지나 어느 한 채의 웅장하고 장엄한
규모의 붉은 벽돌 담이 둘러싸인 대원(大院) 앞에 당도하였다.
궁전을 연상케 하리만큼 우람하고 거대한 대원의 대문 양쪽은 네 명의 흑
의의 무사가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오룡신구 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발
견하고는 하나같이 안색이 크게 변하였다.
갑자기.
오룡신구는 고개를 높이 쳐들고 또 처량하고 애달픈 울음 소리를 길게 내
질렀다. 흡사 용이 울고 호랑이가 울부짖는 소리와 같은 그 날카로운 말
의 울음 소리가 하는 끝까지 울려 퍼졌다.
그 처량한 울음 소리의 여운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오룡신구는 돌연 발을
모두 뒤로 들어올리고 눈을 부릅뜨더니 뒤로 화살처럼 내달으며 대문 우
측에 있는 커다란 돌사자를 향해 부딪쳤다.
다음 순간 외마디 가벼운 신음 비슷한 소리와 함께 말의 머리가 포탄과
같은 기세로 돌사자에 부딪쳐 완전히 으스러져 버리고 말았다.
육중한 말은 한바탕 몸부림을 쳤다. 그러는 사이에 핏덩이와 살덩이가 사
방으로 튀었다.
"쿵!"
놀랍게도 신구는 한동안 악을 쓰며 발버둥치다가 끝내 땅바닥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이 갑작스런 일은 그야말로 눈 깜빡할 사이에 일어난 것이었다.
네 명의 흑의의 무사들은 이 오룡신구가 스스로 머리를 부딪쳐 죽으리라
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듯 모두 넋을 잃고 말았다. 그들은 한동안 어찌
할 줄을 모르고 넋을 잃은 채 멍청히 서 있었다.
이 말은 스스로 머리를 깨고 죽은 사실로 보건대 분명히 천하에서 보기
드문 극히 영통한 천리신구(千里神驅)임에 거의 틀림이 없는 것이다.
모름지기 주인이 죽었기 때문에 장렬한 죽음을 한 것이리라. 비록 짐승일
망정 그 말의 죽음은 너무나 애통하고 비참한 것이 아니랴!
그 넓은 황야에서 날뛰며 울부짖던 말이 끝내 이 대원 앞에서 스스로 머
리를 깨고 죽어 가자, 대지는 다시 적막을 되찾았다.
그러나 이번의 적막은 아까와는 엄청나게 다른 것이었다. 무릇 말 못하는
나무와 구름 그리고 하늘마저 이 말의 죽음을 비통해 하는 듯했다. 이 고
요하고 쓸쓸한 분위기가 그것을 대신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 장렬한 말
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무시무시한 곡절이 있었
으니.......
맹주부의 풍운
개봉부의 무림 제일가. 여기는 또한 천하 무림맹을 대표하는 무림 맹주부
이기도 하다.
이곳은 한 채의 궁전 식으로 세워진 육중한 대문에 누각 지붕들이 백칸
정도 연결되어 있는 큰 뜰이었다. 붉은 벽돌 담이 길게 둘러싸이고 우거
진 소나무와 상나무가 빽빽이 들어서 있어 더욱 호기 충천해 보였다.
때는 정오 무렵.
찬란한 한낮의 태양이 높이 박혀서 따사로운 햇살을 뿌리고 있었다.
이 무림 맹주부의 중겹으로 이루어진 뜰 안에는 육칠 장(丈) 높이의 등대
가 세워져 있었다.
이 등대의, 바람이 쓸쓸하게 펄럭이고 있는 하얀 깃발에는 검은 색으로
기중(忌中) 조상(弔喪)이라고 크게 쓰여져 있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대문 앞에 위치하고 있는 광장에는 마차가 줄을 이었고, 사람들이 거의
장사진을 이루다시피 했다. 그 행렬은 대문 안 깊숙한 곳에서부터 바깥까
지 이어졌는데 분분히 들어가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들이 들어가고 나올 때 이십사 명의 흑의의 무사가 감시를 하
고 있었는데 하나같이 표정들이 어둡고 침통하였다.
흑의의 무사들은 저마다 몸에 칼과 검을 차고 있었으며, 팔뚝에는 검은
천을 두르고 있었고, 모두들 신색이 침울하면서도 엄숙하여 두 눈에서는
모두들 형형한 신광을 뿜어내며 무림 맹주부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샅샅이
감시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광장의 한 모퉁이에서 이목이 청수하고 칼날 같은 눈썹에 호랑이 눈을 가
진 흑의의 소년 서생이 나타났다.
무쇠같이 단단해 보이는 팔뚝에 곰처럼 퍼진 허리를 가진 그 서생은 언뜻
보기에도 야무지고 억세 보였다.
한 가지 애석한 것은 걸어가는 중의 왼쪽 발을 약간 절룩거리는 것이었
다. 게다가 얼굴의 신색은 말이 아니었다.
금방 병석에서 일어난 사람처럼 안색이 창백하고 누렇게 떠있는 것이 깊
은 실의에 찬 모습이었다.
흑의의 서생은 걸음을 멈추고 서서 맥빠진 표정으로 한참 동안 주춤거렸
다. 그는 주위를 한 차례 둘러보고 나서야 비로소 예의 왼발을 절룩거리
며 돌계단을 지나 줄지어 선 사람들 틈에 끼었다.
잠시 후 그는 사람들 틈에 낀 채 대문 안에 들어서려고 했다. 바로 그때
갑자기 검을 찬 두 명의 흑의의 무사가 바짝 다가와 그의 앞을 가로막았
다.
오른쪽의 나이가 약간 많아 보이는 무사가 음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보 형씨, 걸음을 좀 멈추실까?"
흑의의 서생은 이 말을 듣자 움찔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급히 허리
를 굽히고 자못 겸손하게 말했다.
"저는 맹주님의 비보를 듣고 문상(問喪)하러 온 사람입니다."
흑의의 무사는 다소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다면, 형씨 부첩(訃帖)을 좀 보여 주시오."
흑의의 소년 서생은 일순간 어리둥절해 하다가 말했다.
"부첩이요. 아, 급히 달려오느라고 가지고 오는 것을 깜빡 잊었습니다."
흑의의 무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형씨가 천리 밖에서 개봉까지 달려와 문상하는 것을 구천에 계시는 우리
맹주님의 영혼이 아신다면 분명히 감격해 하실거요. 그러나, 형씨가 부첩
이 없는 이상 나는 형씨로 하여금 맹주부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수가
없소이다."
흑의의 소년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저는 평소부터 호(胡)맹주님의 협의심이 강하고 인의가 남달리 두터우셨
던데 대해 진심으로 우러러 왔습니다. 그러니 형님들, 저로 하여금 호맹주
님의 영전에 조의를 표할 수 있도록 편의를 좀 봐주실 수 없으시겠습니
까?"
흑의 부사는 얼굴에 병색이 완연한 소년이 말하는 사이에 눈에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곧 냉정을 되찾고 여전히 고개를 흔들었다.
"형씨가 성심 성의로 이곳에 와 호맹주님의 영혼을 위해 문상하는 것에는
나도 매우 감격하는 바이오. 그러나, 치상회에서 신분 내력이 불분명한 사
람의 문상을 금지하도록 명을 내렸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
소이다."
안색이 누런 소년 서생은 이 말을 듣자 대번에 울상이 되고 말았다. 모습
은 처량하다 못해 비통스럽기까지 했다.
"휴!"
그가 한숨을 내쉬자 원래부터 실의에 차 있던 모습이 더욱 참담해지는 것
이었다.
이윽고 그는 몸을 돌리고 절룩거리는 왼발은 무겁게 끌며 쓸쓸히 돌계단
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침통한 소리로 부르짖고 있었다.
'십 년 동안 길러 주신 은혜를 어디에 비하랴. 바다와 같은 깊은 정을 어
찌 잊을 수 있단 말인가...... 나...... 나는 반드시 사부님의 영전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한다. 비록 나 몽천악(夢天岳)은 사문(師門)에서 쫓겨난
사람이지만 그러나, 바다와 같이 넓고 깊은 사부님의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느냐? 사부님, 이 못난 놈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또 사부님의
금령(禁令)을 거역하고 무림 맹주부에 발을 들여놓았습니다.......'
정오가 지난 오후의 가을 바람은 안색이 누렇게 병태가 있는 소년 서생의
남루한 옷자락을 풀어 제쳤다.
이윽고 그의 넋이 나간 듯한 애잔한 뒷모습은 무림 맹주부의 광장에서 쓸
쓸히 사라져 버렸다.
초가을의 칠월.
밤이 되자 쌀쌀한 바람이 제법 불어와 으스스한 한기를 느끼게 한다. 오
늘 날씨는 유달랐다.
어느 날 밤처럼 은빛을 뿌리는 달도 없고 그 많은 별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어둠침침한 하늘에서 달과 별을 삼켜 버린 검은 구름이 쉬지 않고
유동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숨막힐 듯이 고요한 밤.
가을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풀잎은 가냘픈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일 뿐 바람이 지나고 나면 또다시 대지
는 고즈넉한 적막에 잠겨 버린다.
무림 제일가 맹주부 동북쪽을 둘러싼 조그만 솔밭도 이런 밤공기에 젖어
있었다.
이때 돌연!
한 줄기 검은 인영이 번뜩하며 나타났다. 신광이 번쩍이는 호랑이 같은
눈이 등불이 환히 밝혀진 맹주부의 위쪽 뜰 안을 조용히 한차례 훑어보았
다.
잠시 적막이 흐른 뒤 그는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까 낮에 보았던 흑
의의 서생, 바로 왼발을 절룩거리는 그 소년이었다.
그는 절룩거리는 발을 차분하게 끌며 담 모퉁이까지 다가갔다.
갑자기 그는 무릎은 전혀 구부리지 않고, 허리도 굽히지 않은 채 단지 양
발을 가볍게 떨치자 날쌘 표범처럼 몸이 담 위로 날아 올라가는 것이었
다.
절름발이 병신인 그 소년이 일신에 그런 놀라운 경공술을 지니고 있으리
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방금의 그 사실은 놀라운 것이었다.
이렇듯 무릎을 구부리지 않고 허리도 움직이지 않은 채 오직 양발의 탄력
만을 이용해 일 장 높이의 담을 한 순간에 올라갈 수 있는 경공술의 위력
은 실로 초상비 절정 경공의 위력과 별로 차이가 없는 것이다.
병태가 깃든 누런 안색의 소년 몽천악은 담 위에 올라간 뒤 잠시도 머뭇
거리지 않고 신속하게 몸을 날려 담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그것은 일진의 극히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앞쪽 뜰 안 통
로에서 세 명의 흑의의 무사가 돌아 나왔기 때문이었다.
그들 세 명의 무사는 뜰 안을 순시하고 있는 듯 순서대로 줄을 지어 질서
있는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허리에 단검을 차고 있었다.
창졸간에 이런 상황을 피한 안색이 누런 소년 몽천악은 내심 자신도 모르
게 깜짝 놀라며 몸을 숨긴 채 생각에 잠겼다.
'음, 이상하다. 무림 맹주부가 어째서 오늘따라 이렇듯 경계가 삼엄한 것
일까? 그전에는 이렇게까지 경계가 심하지는 않았는데 웬 까닭일까?'
갑자기 몽천악은 낮에 대문 입구에서 무사가 자신이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을 금지시켰던 일이 머리에 떠올랐다.
이렇게 되자 몽천악의 마음에는 한 가지 의심이 생겼다.
그는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사부님은 생전에 강호에 혁혁한 명성을 떨치셨고 천하에 그 위세를 날리
다가 마침내는 중원 무림의 제이십구대 무림 맹주 자리에 앉은 분이다.
그러니 그분이 작고하셨으면 마땅히 천하무림 동료들로 하여금 마음대로
영전을 참배케 해야 옳거늘, 어째서 부첩을 가져야만 이 문상을 할 수 있
단 말인가?'
그의 이러한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연 세 명의 무사 중에 한 사람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강(阿强)형, 호맹주님게서 돌아가신 후부터 무려 사십 구일 동안 이토
록 경계가 삼엄한데, 이런 처사는 무슨 까닭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
다."
그들 중의 다른 한 사람이 코웃음을 치며 말을 받았다.
"흥, 말이 사십구 일이지 그게 어디 짧은 날인가? 그 동안 우리들만 죽어
났지 뭔가! 만약 호맹주께서 생전에 우리들을 잘 대해 주신 것만 아니었
다면....... 제기랄, 나는 그 치령회의 등신 같은 놈들을 실컷 욕했을
것이다."
방금 전 아강형이라고 불렸던 무사는 세 사람 중에서 제일 위인 것 같았
다. 그는 빠른 말투로 나직이 외쳤다.
"쓸데없이 함부로 지껄이지 말아라. 너희들이 무얼 안다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듣자 하니 맹주님의 말 오룡신구가 맹주님의 돌아가신 소식을
전하고 스스로 돌사자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뒤부터 무림 맹주부에 손님
으로 왔던 다섯 분의 무림고수들도 잇따라 원인 모르게 갑작스런 죽음을
당했다는 거야......."
말소리가 그들의 멀어져 가는 발걸음 소리에 따라 사라져 버렸다.
한데 이러한 말을 암중에 듣고 있던 소년 서생 몽천악은 내심 커다란 놀
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때 그는 무림 맹주부가 어째서 이렇듯 긴장에 싸여 있으며 경계가 유난
히 삼엄한지 그 까닭을 짐작했다.
원래 그는 맹주의 죽음이 단순한 병환 때문인 줄 알았었다. 지금 이들의
말을 듣고 생각해 보니 반드시 그런 것이 아니라, 무슨 내막이 있는 듯싶
었다.
'그럼 그분께서는 십중팔구 피살당하신 거로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그의 머리에 떠올랐다.
그러나 다시 돌이켜 생각해 보니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철장건곤권(鐵掌乾坤圈) 호창부(胡滄夫)는 그 이름이 천하에 알려진 바이
거니와 현재 무림에서 중천에 뜬 찬란한 태양과 같이 불사조에 가까운 명
성을 떨치고 있었다.
명성이 천하에 자자한 그분의 무공 조예로 말할 것 같으면 비록 혼자서
천하를 완전히 한 손에 놓고 군림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아직까지 강호
무림에서 그의 적수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특히 그의 한 쌍의 철장(鐵掌)과 신출귀몰할 정도의 무상한 위력을 지닌
건곤권은 절대적일 뿐더러 그것을 당해 낼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
다는 것이 엄연한 사실로 알려져 있었다.
갑자기 다리가 불구인 소년 서생 몽천악은 짜증스런 기색을 나타냈다.
"삭!"
그가 가벼운 소리를 내며 양손은 떨치자 그의 몸은 마치 하늘을 나는 새
처럼 날쌔고 절묘하게 연이어 있는 뜰 안을 향해 소리 없이 날아갔다.
그의 기억력은 남달리 뛰어났으므로 지금도 무림 맹주부의 어느 길 어느
화석초목(花石草木)이라도 눈을 감고 능히 그려낼 수 있었다.
칠 년, 그가 이곳을 떠난 지 벌써 칠 년째 접어든 것이다.
이때 무림 맹주부는 경계가 몹시 삼엄하여 거의 세 걸음마다 보초가 한
명 있고, 다섯 걸음마다 초소가 하나씩 있었다.
게다가 달과 별이 구름 뒤로 숨어 버린 어둠침침한 밤인지라 사물을 분간
하기에 퍽 힘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으로 하여금 거의 믿기 어려울 정도의 고명한 경공신법을 발
휘하여 잠입한 몽천악은 이런 황궁 안과도 같은 엄밀한 경계를 쉽사리 피
해 갈 수 있었다.
한 줄기 연기와도 같이 몽천악은 소리 없이 한 채의 따로 떨어진 대청당
앞에서 멈추었다.
때는 자시 무렵.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으며 모든 생물은 깊은 잠속에 빠져 있었다. 다
만 이따금씩 가벼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소리는 마치 귀신이 흐느끼고 짐승이 우는 소리를 연상케 할 만큼
귀에 거슬리고 음산하였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하얀 깃발과 등불을 흔들리게 하여 한참씩 주위가
어두워지곤 했다.
그러나, 이때 청당만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곱 개의 휘황찬란한 기름
등이 밝혀져 있어서 이 시각에도 역시 대낮같이 밝았다.
청당에는 엷은 노란 색등 빛이 모든 경물을 환히 비추고 있었다. 그런 가
운데 갖가지 조화(造花) 꽃바구니가 대문 돌계단 밖까지 늘어져 있었다.
또한 흰 천에 검은 색으로 글씨를 써넣은 조기가 청당의 모퉁이마다 둘러
져 있었다.
청당의 제일 뒤에는 하얀 실이 쳐진 영당(靈堂)이 있었고 한가운데에 영
패(靈牌)가 자리잡고 있었는데,
거기에는 호공창부신위(胡公滄夫神位)란 여섯 글자가 쓰여져 있었다.
벽에는 한 폭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풀썩!" 하는 소리와 함께 몽천악은 황동(黃銅) 향로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샘물처럼 쏟아져 내렸다.
가볍게 경련 하듯이 몸을 떨고 있는 그는 크게 소리 내어 울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런 소리 없는 슬픔의 아픔은 오히려 목놓아 우는 것보다 훨씬
더 심한 것이 아닐까.
순간 지난 일들이 눈앞에 어른거리며 떠올랐다.
십칠 년 전, 어느 눈보라가 모질게 몰아치는 밤, 그는 꽝꽝 얼어붙은 개봉
거리에서 추위와 배고픔에 견디다 못해 거의 숨이 가물가물 넘어갈 지경
에 놓여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그는 한 신선 같은 사람이 건장한 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
려온 듯 자기의 꺼져 가는 목숨 한 가닥을 구해 주는 꿈에 잠기며 의식을
잃었다.
그 뒤, 과연 그는 신선 같은 사람에게 구함을 받았으며 더욱이 삼 년 후
에는 천운으로 그분의 맨 마지막 제자로 거두어들임을 받았다.
그후, 지난날의 모질고 사나운 운명의 장난을 씻어 버리고 이 신선 같은
노인의 사랑과 배움을 받으며 잃었던 인정애와 따스함을 맛보았던 것이
다.
여기까지 기억을 더듬던 몽천악은 고개를 들어 영당 안의 벽에 명추천고
(名秋千古), 음용완재(音容宛在) 등 글을 보았다.
"사부님!"
그는 북받치는 감정을 참지 못해 나직이 외치더니 별안간 몸을 포탄처럼
날려 영당 신위를 향해 떨쳐 갔다.
"사부님!"
다시 한번 외치며 그는 두 손으로 신주목패(神主木牌)를 부둥켜안고 나직
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 못난 몽천악은 만 번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사부님, 비록 사부님
께서는 오래 전에 저를 사문에서 축출하셨지만 저는 사부님의 십 년 동안
의 바다와 같은 넓고 깊은 은혜를 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사부님, 저는
축출당한 후 다시 돌아와 사부님께서 다시 저의 입문(入門)을 허락해 주
시기를 간청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젠 사부님께서 저를 용서해
주시고 그것을 허락해 주시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게 됐으니 이게
어인 일입니까? 결국 저는 영원히 사문에서 축출된 죄인으로 끝나고 마
는군요, 사부님......."
목이 메이고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자꾸 북받쳐 올라 말소리가 제대로 나
오지 않았다.
거의 흐느낌에 가까운 그 말소리에 흐르는 깊은 정과 처량함은 아무도 없
는 밤 공기만을 울리며 더욱 적막히 퍼져 나갔다.
이렇게 몽천악이 비통함을 금치 못하여 흐느끼고 있을 때, 갑자기 뒤에서
짧은 한숨 소리가 들려 왔다. 그 한숨 소리는 무척이나 무거웠다.
몽천악은 그 뜻밖의 소리에 마치 꿈에서 놀라 깨어나듯이 고개를 돌리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어느 사이엔지 청당 안에 회의를 입은 노승 한 분이 들어와 있었다. 그
노승은 왼손을 가슴에 대고 오른손에는 염주를 들고 있었는데 엄숙한 표
정을 하고 입 속으로 불경을 외우고 있었다.
몽천악은 회의 노승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내심 흠칫 놀라며 생각했다.
'이분 노승은 소림 신승 고라선사가 아니신가?'
소림 신승 고라선사는 바로 소림파의 현 장문인의 사백이었다. 배분을 논
하자면 오늘날 무림에서 몇몇 남지 않은 노선배 중의 한 분이라 할 수 있
으니 상당히 높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몽천악은 칠 년 전 자기가 사문에서 축출되기 전에 훨씬 고라화상이 소실
봉에서 폐관을 하고 강호의 속된 일에 상관하지 않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그는 그러한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 까
닭으로 오늘 고라화상이 이곳에 나타났다는 사실은 그로 하여금 커다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고라화상은 눈을 감고 한동안 불경을 외우더
니 갑자기 눈을 떴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몽천악을 쏘아보더니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시주께서 호맹주의 영전을 참배하는 것은 가히 진정한
마음의 흐름이라 할 수 있는 만큼 저승에 계신 호맹주의 영혼이 아시면
매우 흐뭇해 할 거요. 그러나, 지나친 비통함은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함으
로 시주께선 이만 눈물을 거두는게 좋겠소."
이와 같은 말은 고라화상이 몽천악의 지나친 비통이 진원(眞元)을 손상케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공손하게 고라화상을 향해 인사를 하며 말했다.
"선사님의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고라화상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 묻겠는데 시주는 작고하신 호맹주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몽천악은 내심 움찔했으나 곧 사실대로 대답했다.
"후배는 일찍이 호맹주님의 구원을 받아 목숨을 건진 일이 있습니다. 은
혜가 죽은 목숨을 재생시킨 것과 같고 또한 베푸신 인정이 바다와 같이
깊은 바 있습니다. 오늘 은인께서 작고하셨다는 말을 들었사온데, 크나큰
은혜를 갚지 못하였기에 비통함을 억제할 길이 없사옵니다."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미 작고하신 호맹주께서는 일생 동안 협의를 행하셨을 뿐아니라 무림
의 평화를 위해 큰 공을 세운 바 있어 공력이 무량한 거야. 그런 분이 작
고하셨으니 무림의 영재를 잃었음은 물론 그 슬픔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
니네. 아! 시주의 그와 같은 마음은 호맹주의 영혼을 위로하고도 남음이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 바이다."
하고 말하며 노승은 탄식을 했다.
의문의 피살
몽천악은 고라화상의 말을 듣자 눈에 이채를 띠며 말했다.
"고 호맹주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대은을 저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
다. 오늘 밤 영전에 참배하는 것으로는 은혜를 보답하려는 저의 마음을
만분의 일도 표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비통함을 참을
수 없습니다."
고라화상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으로 다시 몽천악의 얼굴을 한차례 주시
하고 다시 말했다.
"정녕 시주가 은혜를 보답하려는 마음이 그토록 깊다면 내 한 가지 길을
가르쳐 주겠네. 무엇보다도 강호 무림의 평화로운 세월 속에서 모든 사람
이 복되게 살도록 하려던 호맹주의 다 이루지 못한 공덕 사업을 그대가
완성시킨다면 그것이 호맹주의 대은을 보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네."
몽천악은 엄숙한 표정을 하고 물었다.
"노선배님, 제가 한 가지 여쭈어 볼 말씀이 있습니다. 호맹주께서는 어떻
게 하여 돌아가셨는지 알고 계십니까?"
고라화상은 나직이 불호를 외우며 말했다.
"아미타불...... 노승도 지금 막 소실봉에서 달려왔기에 모든 상황이나
내막에 대해 모르고 있네. 아마 그러한 것은 내일 아침에 맹주의 후인들
을 만나 보면 상세하게 알게 될 것이라 생각하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돌연 밖에서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영당 안에 누가 있느냐? 이름을 밝혀라!"
말소리와 함께 영당 문 앞에서 그림자가 번뜩이며 등에 검을 멘 여덟 명
의 흑의의 무사가 나타났다.
그들은 큰 적이라도 만난 듯 씩씩거리며 입구를 가로막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그러한 상황을 보자 속으로,
'큰일이구나!'
하고 부르짖었다.
이때 고라화상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여러 시주들께서 수고스럽지만 한마디 통보해 주게. 소림의
고라가 옛 친구의 영령을 참배하러 왔다고......."
소림의 고라란 말이 떨어지자 여덟 명의 흑의의 무사들의 태도는 곧 달라
졌다. 그들은 일제히 인사를 한 뒤 공손한 어조로 입을 모아 말했다.
"노선사님께서 왕림하셨군요, 제자들이 진작 알아 뵙고 영접하지 못한 것
을 용서하십시오......."
고라화상은 그들이 말을 계속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불호를 외우며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지금 때가 벌써 야밤 삼경이 아닌가. 밤이 깊은 만큼
여러 사람들의 잠을 깨우는 폐를 끼치고 싶지 않네. 노승은 영당 안에서
오경까지 영령을 지키며 불공을 드리도록 할 터이니 여기 시주들은 가서
일을 보도록 하게."
여덟 명의 흑의의 무사 중 키가 크고 깡마른 중년 사나이 한 명이 허리를
굽히고 공경하게 말했다.
"치상회에서는 이미 노선사님께서 근일 맹주부에 왕림하시리라는 말이 있
었습니다. 또한 노선사님께서 왕림하시기만 하면 지체 없이 전갈하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고라화상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시주가 길을 안내하도록 하게."
그의 말소리가 떨어지기 무섭게 밖에서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신승께서 왕림하셨군요. 한수(恨水)가 마중 나왔습니다."
말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어느새 한 사람이 문 앞에 나타났다. 등불이 환
히 비치는 가운데 나타난 사람은 청의를 입고 얼굴이 상당히 야위었으나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었다.
눈빛이 유난히 날카로운 그 청년은 여덟 명의 흑의의 무사 앞에 선 채 공
손히 허리를 굽히며 고라화상을 향해 큰 예를 올렸다.
몽천악은 나타난 사람을 보더니 갑자기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속으
로,
'둘째 사형!'
하고 외쳤다.
이 청의의 인은 다름아닌 바로 철장건곤권 호창부의 둘째 제자 단장홍 유
한수였던 것이다.
현재 그는 무림 맹주부 경위대의 총 지휘자였다. 또한 무림의 형벌당의
직을 동시에 맡고 있었으므로 그의 손에는 중원구대문파의 징벌장상대권
이 쥐어져 있는 셈으로 지위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원래 무림맹은 중원 무림의 구대문파가 연합하여 세운 것으로서 무림 전
체를 통솔하는 유일한 기구였다.
역대 맹주는 모두 구대문파의 위원회가 선출하여 추대하는 것이며 맹주는
지휘 및 명령 대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히 무림 맹주의 지위는 각 대문파의 장문인보다 훨씬
높은 신분인 것이다.
그리고 무림맹의 다른 중요직 요원도 구대문파 연합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선출 추대 및 임명되므로 그 권력 역시 대단하였다.
쉽게 말해서 그 권력은 각파 장문인의 지위와 맞먹는 것이었다.
고라화상은 유한수를 전에 본 적이 있는 듯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고 말
했다.
"유현질, 너무 겸손해 하지 말게나."
단장홍 유한수는 고개를 들고 고라화상 뒤의 몽천악을 얼핏 쳐다보았다.
순간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더니 곧
웃음띤 얼굴로 말했다.
"저분 형씨는 누구이신지 모르겠군요. 저의 견식이 좁은 것을 양해하시고
실례가 안된다면......."
몽천악은 그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손을 모으며 입을 열었
다.
"유소협,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저는 고(高)씨 성에 이름은 외자인 봉(俸)
이라 합니다."
단장홍 유한수는 고봉이란 이름을 가진 인물이 강호에 있다는 말을 들어
본 기억이 없었다.
경력이 대단하고 지위가 높은 그는 생소한 이름을 듣게 되자 상대방을 별
로 이름이 나지 않은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유한수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으므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속
으로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상하다. 조금 전 얼핏 이 사람을 보았을 때는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는데 지금 다시 보니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다니.......'
이런 생각이 그의 뇌리에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그는 전혀 내
색을 하지 않고 미소를 지으며 다시 말을 건냈다.
"고형께선 아마 강호에 처음 나오셨나 봅니다."
몽천악은 즉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렇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깊은 산속에서 살다가 이번에 처음으로 강호
에 나온 것입니다."
몽천악은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울부짖듯 외치고 있었다.
'둘째 사형, 둘째 사형이 사문에서 쫓겨난 이 사제를 몰라보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니다. 칠 년, 칠 년이란 세월은 얼마나 긴 것인가. 그 지루하고
길며 쓸쓸한 세월 속에서 나의 생활은 또 얼마나 고독하고 비참했던가!
아...... 칠 년 전의 몽천악과 칠 년 후 오늘의 나는 얼마나 많이 달라
졌는가. 물론 많은 변화가 있었지. 지난날 맹주부를 떠날 때 나는 열여덟
살의 한 어린아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때는 얼굴이 백옥같이 희고 사지가
멀쩡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나는 절름발이로 변한데다가 변장을 했으니
사형이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지.'
이렇게 부르짖는 동안 몽천악은 가슴이 터질 듯 감개 무량함을 느꼈다.
이때 고라화상이 불호를 외우며 입을 떼었다.
"아미타불. 고시주는 영기를 안에 깊이 품고 감춘 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구려. 내가 생각하건대 시주는 필시 고문(高門)의 출신일 것
이오."
이 말을 듣고 단장홍 유한수는 약간 어리둥절하였다.
원래 그는 몽천악이 고라화상을 따라 함께 왔으며 그들 두 사람은 전부터
아는 사이인 줄 알았었다.
그러나 지금 고라화상과 몽천악이 결코 전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이렇게 되자 단장홍 유한수는 얼굴에 의아해 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는
입술을 움직이며 무슨 말을 하려 했다.
그러자 눈치가 빠른 몽천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는 수년 전 강동에서 호맹주님의 구함을 받아 죽어 가던 목숨을 건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 은혜가 바다와 같이 깊거늘 뜻밖에도 오늘 호맹주께
서 갑작스럽게 작고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렇게 문상하러 온 것입니다.
은인께서 이미 작고하시어 제가 입은 은혜를 갚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은혜에 보답하지 못하면 저는 평생토록 가책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으로 은인께서 만약 못다 하신 일이 있다면 저는 몸이 가루가 되는 한
이 있더라도 보잘것없는 힘이나마 바치기를 원하는 바입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유한수를 바라보며 말을 계속했다.
"유형께서는 저의 이 조그만 소청을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하는 태도는 매우 정중했고 또한 그 말속에는 다분히 진정한 감이
서려 있었다.
단장홍 유한수는 마음속에 여전히 의심을 지울 수 없었으나 이 마당에 와
서 공연히 그를 난처하게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난색을 띠고 생각했다.
'이 사람은 신분이 불분명하니 간단하게 무림 맹주 대사에 참여하도록 해
서는 안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유한수는 한동안 주저주저하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
고 있었다.
이때 고라화상이 차분한 음성으로 말했다.
"고시주의 언행은 가히 남의 모범이 될 만하네. 시주 같은 젊은이가 무림
맹주 대사에 참가하여 의견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무림의 다행스
러운 일이라 할 수 있네."
고라화상을 오늘날 무림 동도에서 가장 남의 존경을 받는 노선배였다.
그러므로 그가 이렇게 말하자 유한수는 달리 의견을 내세울 수가 없는 노
릇이었다.
그는 할 수 없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 고형은 하늘을 찌를 듯한 호기를 지니고 있을 뿐아니라 협의심
이 아주 강하구려. 나는 처음 대면할 때부터 오랜 친구처럼 느꼈소. 그런
데 어찌 고형을 이상하게 생각하겠소."
그는 말끝을 흐렸다가 고개를 돌리고 다시 고라화상을 향해 말했다.
"고라사백님, 이만 의사청으로 존가를 옮기시도록 하십시오. 지금 치상
회의 각파 무림 고수들이 벌써부터 대청 안에서 사백님이 오시기만을 기
다리고 있습니다."
고라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현질, 그럼 앞서서 길은 안내하게."
말을 마치자 고라신승은 가볍게 도포 자락을 내두르며 유한수와 여덟 명
의 흑의의 무사를 따라 영당을 걸어 나갔다.
이윽고 그들은 세 개의 정원과 하나의 광장을 지나 경비가 유난히 삼엄한
큰 뜰에 당도하였다.
외따로 떨어져 있는 뜰 안에는 궁전같이 호화로운 삼층 누각이 우뚝 서
있었다. 지붕에 업힌 유리 기와가 불빛을 받아 찬란히 반짝이는 것이 보
였다.
뜰의 주위에는 많은 무사들이 빈틈없이 경계를 하고 서 있었다. 마치 대
적이라도 방비하는 듯 경계가 몹시 삼엄하였다.
몽천악은 이런 상황을 목격하자 속으로 어리둥절하였다. 도대체 사부님의
죽음이 어떤 중대한 일에 관련되어 있기에 무림 맹주부가 이토록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 무림 맹주부에는 풍운이 감돌고 있는 듯 분위기가 무겁고 스산하기
만 한 것이다.
이때 유한수가 고개를 돌리고 고라화상에게 말했다.
"가사(家師)의 유체(遺體)는 바로 이 누각 위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의 말이 막 떨어지자 정원 쪽 문 입구에서 십여 명의 남녀가 줄을 지어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중에는 중도 있고 도사도 있었다. 그들은 고라화상을 발견하자 일제히
예를 올리며 입을 모아 말했다.
"신승께서 거동하시었는데 멀리 나가 영접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넓으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시오."
고라화상은 즉시 염불을 외우며 말을 받았다.
"아미타불...... 여러 대협들, 속된 인사는 그만 거두시오. 노승이 여러
대협의 단잠을 깨워 도리어 미안스럽게 됐소이다. 양해를 바라오."
몽천악은 번개같이 예리한 눈으로 여러 사람들을 쓸어 보았다. 순간 그는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제 보니 이들 십여 명의 영걸들은 모두가 중원 무림의 가장 뛰어난 영
웅 호걸들이었다.
또한 그들은 모두가 강호에서 수십 년 동안 명성을 떨친 쟁쟁한 무림 종
사였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굵은 눈썹과 유난히 엄숙한 둥그스름한 얼굴에 위풍당당한
남의의 중년인과 용모가 꽃처럼 아름다운 하얀 상복을 입은 소녀도 있었
다.
몽천악의 눈길이 그들 두 사람에게 닿았을 때 그는 일진의 심한 격동을
느낀 나머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남의의 중년인은 바로 그의 큰 사형 패왕궁(覇王弓) 하불감(何不柑)이었
으며 백의의 소녀는 바로 사부님의 외동딸 호천옥(胡천玉)이었다.
군협(群俠)들의 눈빛은 대부분 고라화상에게 집중되어 있었기에 그들은
몽천악을 주의해 보지 않았다.
또한 몽천악이 몸에 검은 옷을 걸치고 있었기 때문에 군협들은 단순히 그
를 무림 맹주부의 일개 무사인 줄 알았다.
그러나 호창부의 효녀 호천옥만은 몽천악을 주의하여 보았다. 그녀는 그
를 쳐다보는 순간 화용(花容)이 약간 변하였으나 이내 다시 정상을 회복
하였다.
이때 고라화상과 군협들은 몇 마디 인사말을 주고받은 뒤 줄을 지어 등불
이 대낮같이 밝혀진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몽천악이 그들을 따라 막 걸음을 옮겨 들어서려는 순간 돌연 곁에서 호천
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둘째 사형, 저분 상공은 어느 문파의 고인인가요?"
몽천악은 뒤에 있는 단장홍 유한수가 대답하기를 기다리지 않고 즉시 몸
을 돌려 호천옥을 향해 손을 모으며 예를 표하여 말했다.
"저는 고봉이라 합니다. 삼가 묻겠는데 아가씨는 호맹주님의 따님이 아니
신지요?"
이때 호천옥도 몽천악의 누렇고 창백한 안색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는 미
간을 잔뜩 찌푸리고 고개를 흔들며 속으로 생각에 잠겼다.
'이상하다. 조금 전에 보았을 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얼굴 같았는데 다
시 자세히 바라보니 오히려 기억이 나지 않는구나.'
이때 단장홍 유한수가 낭랑한 음성으로 호천옥을 향해 말했다.
"사매, 고소협은 고라신승과 함께 왔소이다."
"아, 그래요."
호천옥은 몽천악을 향해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말했다.
"고소협께서 이렇게 가부의 문상을 와 주셔서 감사드려요."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여쭐 말이 없군요. 아무튼 영존의 돌아가심을 무림 전체의 불행
이오, 더없이 슬픈 일입니다. 아!"
단장홍 유산수는 몽천악을 향해 말했다.
"고형, 가사의 돌아가심은 무형 중에 무림의 위기와 관계가 되오. 우리들
이 오늘 밤 감히 고라신승으로 하여금 수련을 중지하시고 소실봉에서 여
기 무림 맹주부로 오시게 한 것은 바로 무림의 존망 대사를 의논하고자
한 때문이오. 고형은 무림맹 조직 안의 사람이 아니니 만약 달리 각오가
없다면 이 시비의 소용돌이 속으로 말려들 필요는 없소."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영당 안에서 이미 마음의 뜻을 표명한 바 있거니와 몸이 부서지고
뼈가 가루로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있는 힘을 다할까 합니다."
단장홍 유한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히 그런 생각이라면 좋소. 그럼 고형, 어서 자리에 드시오."
이때 고라신승을 비롯한 군협들은 이미 차례로 자리에 앉았다. 십여 명의
사람들은 원형으로 둘러앉았는데 모두들 침통한 표정이었다.
철장건곤권 호창부의 제일 큰 제자 패왕궁 하불감, 둘째 제자 단장홍 유
한수와 호천옥 등 세 사람은 동쪽 편 주인의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고라신승은 바로 정면에 앉았고 몽천악은 고라신승에 가까운 오른
쪽의 빈 자리에 앉았다.
모두 자리를 잡고 앉자 주인 자리에 앉은 패왕궁 하불감이 먼저 엄숙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입을 떼었다.
"여러 무림 선배 분들, 오늘 우리가 고라신승께서 십 년 동안 문을 닫고
수양을 닦으시겠다고 맹세하신 말에 지대한 폐를 끼치는 것을 불사하고
수련을 중지케 하고 삼가 무림 맹주부로 모셔온 목적은 바로 가사께서 돌
아가시게 된 진정한 원인을 수사하려는 것입니다."
그는 좌중을 한차례 둘러보고 나서 말을 계속했다.
"가사께서 도대체 누구에게 살해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무공에 의해 살해
당하셨는지 자세한 것들을 우리는 알아내야겠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지
금까지 치상회의 군협들께서 자세히 조사해 보았지만 아직 까지 수수께끼
로 남아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제일 괴이한 것은 바로 사십 삼 일
전 가사께서 아끼시는 말 오룡신구가 무림맹으로 달려와 주인의 서거하신
소식을 전하고 스스로 돌사자에 머리를 부딪쳐 죽은 그날 밤의 일입니
다."
그는 언성을 약간 높였다.
"그러니까 그날 밤 맹주부에 손님으로 오셨던 다섯 분의 무림 고수들이
원인 모르게 급사해 버렸던 것입니다. 그분들의 죽은 원인도 조사해 낼
수가 없었고 또한 신체상의 모든 부분에 조그만 상처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분들이 무슨 병으로 인하여 죽은 것은 더욱
아닌 듯합니다. 다만 공교롭게도 가사의 돌아가심과 똑같은 것입니다."
고라화상이 불호를 외우며 물었다.
"아미타불...... 다섯 분의 무림 고수는 누구인가?"
패왕궁 하불감은 즉시 대답했다.
"그분들은 신권문의 천하 제일권 막강 노영웅, 흑호방의 용두방주 관무평,
강남 칠성표국연맹의 총표두 풍뢰객 이빙산, 칠성보의 노보주 추혼필 사
랑, 그리고 흑백 양도에 명성을 크게 떨친 철관음 한낭자입니다."
이 다섯 무림 고수들의 이름이 차례로 밝혀지자 몽천악은 물론 군협들은
모두 미간을 찌푸렸다. 분위기는 더욱더 엄숙해져 갔다.
이제 보니 이 다섯 고수 중에는 강호의 이름 없는 소졸은 한 사람도 없고
모두가 무림에 명성을 크게 떨치던 영도자격의 인물들이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도 과연 어떤 마두가 한꺼번에 이 다섯 고수의 목숨을
흔적도 없이 살해할 수 있었는지 생각해 내지를 못하였다.
고라화상은 안색을 서릿발같이 차갑게 굳히고 말했다.
"천하 제일권 막강, 흑호방주 관무평, 풍뢰객 이빙상, 추혼필 사랑, 철관
음 한낭자 등 다섯 분의 무공은 여러분도 알다시피 모두 고강하기 그지없
는 것이오. 그들이 동시에 무림 맹주부 안에서 피살되었다는 사실은 확실
히 무림 전체를 경동시키고도 남을 만한 놀라운 일이외다."
고라화상은 여기까지 말하고는 눈을 감았다. 무슨 생각에 잠기는 듯했다.
이때 패왕궁 하불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이 다섯 분의 무림 고수들이 피살당한 후 시체를 안치해 둔지 삼 일째
되는 날 깊은 밤이었습니다. 돌연 다섯 구의 시체가 놀랍게도 자취도 없
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 말에 고라화상은 눈을 번쩍 뜨며 다그치듯 물었다.
"아니, 다섯 구의 시체가 맹주부 안에서 실종되었단 말인가?"
패왕궁 하불감은 침울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 다섯 구의 시체가 모두 종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
습니다."
군협들은 이와 같은 경이적인 사실을 알게 되자 더욱 안색이 굳어지는 것
이었다.
그들은 모두 이 사건이 극히 해결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이
엄청난 소식들이 만약 새어 나간다면 훗날 천하 무림이 한바탕 소란을 일
으키게 되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과연 이 끔찍하리 만큼 놀라운 사건은 어떻게 하여 일어났으며 또한 이
사건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어쨌든 철장건곤권 호창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하여 중원 무림은 어두
운 그림자 속에 덮이게 되었다.
이 어두운 그림자는 신비에 싸여 있었으며 추측과 판단마저 불허했으나
그것이 무림 전체에 심상치 않은 액난을 조성할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
었다.
고라화상을 비롯한 군협들은 모두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애를 쓰고 있는 그들의 마음은
천 근 쇠처럼 무겁기만 했다.
의사청 안은 완전히 긴장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 무거운 긴장 속에 음산
한 기운이 은은히 감돌고 있었다.
침묵의 순간은 계속되었다.
갑자기.
군협들 가운데서 키가 작고 깡마른 노인 한 사람이 무서우리만큼 고요하
고 긴장된 분위기를 깨며 입을 떼었다.
"노부(老夫)의 추측에 의할 것 같으면 천하 제일권 막강 등 다섯 무림 고
수들이 의문의 피살을 당한 데에는 지극히 커다란 문제가 있는 듯합니
다."
이 말이 나오자 군협들의 눈길은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고라화상이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공손대협, 무슨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신 지 여러 사람이 있는 데서 상세
히 말씀해 보시오."
원래 이 용모와 생김새가 볼품이 없으나 눈에서는 정광이 아른거리는 노
인은 바로 무림에서 사람들이 다지성 삼로(三老) 중의 하나라고 부르는
곤손보기였다.
공손보기는 날카롭게 반짝이는 조그만 눈으로 한번 주위를 둘러보더니 서
서히 입을 떼었다.
"노부가 육감으로 추측한 바로는 천하 제일권 막강...... 등...... 다섯
사람은 진짜로 죽지 않았을 겁니다."
이와 같은 말은 다시 한번 군협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너무나 의외의
발언이었다.
패왕궁 하불감이 급히 물었다.
"공손대협께선 어떻게 천하 제일권 막강 등 다섯 분의 무림 고수가 죽지
않았을 거라고 단정하십니까? 무슨 증거가 될 만한 것이라도 생각해 내셨
습니까?"
다지성 공손보기는 눈초리에 야릇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그들 다섯 사람은 십중팔구 거짓으로 죽은 체했을 거요. 노부는 오래 전
에 철관음 한낭자에게 일종의 괴상한 약효를 가진 독문 단약이 있다는 말
을 들었소. 그 단약을 사람이 복용하면 두 시간 후에는 심장이 정지하고
사지가 얼음장같이 차가워져서 죽은 사람과 똑같이 된다는 겁니다."
갑자기 몽천악이 외쳤다.
"그것은 동면단입니다."
이 외침 소리는 순간적으로 군협들의 마음을 경동시켰다. 수십 줄기의 시
선이 일제히 몽천악에게 쏠렸다.
군협들은 몽천악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고는 모두 미간을 찌푸리고 속으
로 부르짖었다.
'아니, 저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살해자는 누구냐
이때 다지성 공손보기가 안색이 돌변한 채 몽천악을 향해 다급히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해서 그것이 동면단이란 것을 아는가?"
몽천악은 중인의 신색을 보고는 마음속이 움찔했으나 곧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저는 한 권의 서경(書經) 속에서 동면단 약성에 관한 도문이 기재되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기재되어 있기를 이 단약을 복용하
면 사람의 생리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는데 그 상태는 마치 뱀이나 개구리
가 동면에 들어간 것 같으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시 생리 기능이 서
서히 원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입니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계속 추궁했다.
"소협은 어디서 그 책을 보았나?"
몽천악은 가볍게 웃으며,
"어느 깊은 산속의 동굴에서 읽었습니다."
공손보기가 다시 물었다.
"소협은 누구인가?"
몽천악은 서슴없이 대답했다.
"저는 고씨 성에 이름은 봉입니다."
공손보기는 미간을 찌푸리고,
"어느 문파의 제자인가?"
몽천악은 안색을 차갑게 굳혔다.
"문파도 없고 스승도 없습니다."
그러자 다지성 공손보기는 돌연 수직으로 날아 일어나더니 일 장의 공간
을 번개 빛보다 빠르게 날아가 소리 없이 몽천악의 삼 척 거리 앞에 내려
섰다.
그리고는 그는 안색을 싸늘하게 하고 호통을 쳤다.
"그대가 만약 문파와 내력을 말하지 않겠다면 무림 맹주부에서 한걸음도
떠날 생각을 마라!"
분위기는 삽시간에 긴장에 휩싸여 버렸다.
의사청 안은 마치 큰일이라도 일어난 듯 소란해지고 말았다.
이때 고라화상과 단장홍 유한수는 자리에 앉은 채 말없이 이 광경을 보고
있었다.
그들도 몽천악의 신세 내력을 은근히 알고 싶어하던 차라 공손보기가 그
의 내력을 알아보기를 기대했던 것이다.
갑자기.
누각의 지붕 위에서 음흉스럽고 차가운 웃음 소리가 울려 오더니 이어서
싸늘한 말소리가 날아들었다.
"이 늙은 원숭이야, 사람을 너무 얕보지 마라."
이 갑작스런 욕설은 너무나 뜻밖이어서 의사청 안의 군협들은 일제히 안
색이 크게 변하고 말았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눈을 부라리며 고함을 질렀다.
"웬 놈이냐?"
하는 외침 소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그는 일진의 선풍처럼 몸을 날려 비할
데 없이 절쾌하게 문 앞을 향해 덮쳐 갔다.
뒤따라서 한 사람이 몸을 날렸다. 공손보기의 뒤를 따라 먼저 몸을 날린
사람은 다름아닌 유한수였다.
이어서 인영이 어지러이 움직이는 가운데 군협들은 모두 뒤를 쫓아 밖으
로 달려나갔다.
의사청 안에는 고라화상, 패왕궁 하불감, 호천옥과 몽천악 등 네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그들 네 사람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앉은 채 움
직이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얼굴에도 긴장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패왕궁 하불감은 두 눈에서 날카로운 빛을 쏘아 내며 몽천악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때 고라화상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떼었다.
"조금 전 그 말소리는 바로 고절한 내공인 천리회음(千里廻音) 수법을 사
용한 것이지. 여러 사람이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 사람은 아마 일 기 밖
에 있었을 거야. 아, 중원 무림에 그야말로 일대 살겁의 위기가 닥쳐오려
하는군."
고라신승의 탄식 소리가 떨어지는 순간 다지성 공손보기가 화를 참지 못
해 씩씩거리며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흰색 깃발이 들려 있었다.
이어 칠팔 명의 군호들이 뒤따라 들어왔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갑자기 수중의 백번(白幡)을 펼쳐 들더니 긴 탁자 위
에 던지며 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자, 보십시오."
백번은 탁자 위에 펼쳐졌다. 눈같이 흰 천 위에 검은 글씨로 이러한 글이
쓰여 있었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귀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리라.'
귀월이란 음력 칠월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이 칠월 이십삼 일이니 결국
칠 일을 넘기지 못하고 죽으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군협들은 넋이 빠진 사람처럼 멍청히 그 먹 글씨만을 바라볼
따름이었다.
이때 단장홍 유한수 등 다른 군협들이 모두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들도 백번 위의 흰 글씨를 보자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군협들은 말문이 막힌 채 서로 얼굴만을 한동안 마주 보았다.
갑자기 패왕궁 하불감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공손대협께서는 어디서 이 백번을 가져오셨습니까?"
공손보기는 음산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연무장 안의 한 등대 위에서 끌어내린 거요."
하불감은 한숨을 내쉬며,
"맹주부는 경계가 삼엄하기가 마치 황궁 같은데 적이 어떻게 들어왔단 말
인가. 마치 무인지경인 양 들어와서는 연무장에서 이 백번을 바꾸어 걸었
으니, 그 기막힌 솜씨는 정말 놀랄 만하군요."
공손보기는 사납게 소리쳤다.
"여러분, 그 사람은 대체 누구이겠습니까?"
이미 그의 왼손은 몽천악을 가리키고 있었고, 툭 불거져 나온 무서운 눈
알은 하불감을 노려보고 있었다. 단장홍 유한수가 얼른 입을 열었다.
"고소협은 고라신승과 함께 맹주부에 온 사람입니다."
유한수는 눈치가 매우 빠른 사람이라 지금 이 마당에서 몽천악이 이미 의
심스러운 인물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동시에 누군가 말 한마
디라도 잘못하다가는 오늘의 이 자리가 곧 수습할 수 없는 사태로 변하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지금 의사청 안에 있는 군협들은 모두 무림맹의 위원이었으며, 또한 그들
은 지위가 상당히 높아 무림 맹주를 파면, 선출하는 대권을 쥐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자기네들이 내력이 불명확하고 무림맹의 사람도 아닌 의문의
인물을 무림맹의 기밀 회의에 참여케 한 것만으로도 이미 큰 잘못을 범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번개 같이 염두를 굴리고는 책임을 고라화상에게 떠
밀은 것이었다.
현재 소림사 장문인 원혜대사는 무림맹 위원회의 위원장이었다. 고라신승
은 한 노선사라 할 수 있었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과연 유한수의 말을 듣자 얼굴의 노한 기색을 즉시 거
두어들였다.
그는 눈길을 돌려 고라화상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신승께 삼가 여쭙겠습니다. 이 사람은 어느 문파의 문하입니까?"
"고시주는 소승과 같은 도의 사람입니다."
그의 이 한마디 말은 군협들로 하여금 몽천악을 의심하는 마음을 거의 떨
쳐 버리게 하였다.
이때 패왕궁 하불감이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여러 군협들께서는 다시 자리에 앉으시도록 하십시오. 아직 결정을 보지
못한 대사를 상의하도록 하십시다."
군협들은 순서대로 자리에 앉았다.
무당파의 황학도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적이 맹주부에 이와 같은 글을 남겨 놓았으니 빈도가 보는 견지에 의하
면 공손대협께서는 이 칠 일 동안 엄중한 경계를 펴야 옳을 것입니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이런 말을 듣자 건성으로 웃으며 말을 받았다.
"황학도장의 걱정해 주심에 감사드리는 바이나, 노부는 스스로의 명이 최
소한 십 년 이상을 더 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황학도장은 정색을 했다.
"공손대협, 화를 내지 말고 들어 보시오. 적들의 정체가 무엇인지조차 모
르고 있는 이 마당에 우리가 결코 경솔히 대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오.
그들이 대담하게도 이렇게 전해 온 것을 보면 절대로 협박이나 위협을 주
려는 데만 그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바이오."
공손보기는 눈초리에 냉소를 띠고 말했다.
"노부는 이런 귀신들의 장난 같은 잔재주를 믿지 않소이다. 나는 강호에
서 수십 년 동안 숟가락질을 해 왔지만, 귀신 따위를 두려워해 본 적이
없소. 여러 선배들께서는 나를 위해 구태여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는 말꼬리를 흐렸다가 침통한 표정을 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다만 나는 한 가지 일에 의혹을 느끼고 있소. 조금 전 내가 소리를 듣고
나갔을 때, 그 독수리보다 빠르다 해도 쉽사리 노부의 추적을 벗어나기
힘든 것이오. 또한 뜰 안의 사방에는 삼십여 명의 무사가 잔뜩 깔려 있었
음에도 불구하고 뜻밖에 한 사람도 적의 종적을 발견할 수 없었으니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이겠소?"
단장홍 유한수도 얼굴에 의아스러운 기색을 가득 드러낸 채 말을 이었다.
"조금 전 나는 겹겹으로 서 있는 보초들에게 물었으나, 놀랍게도 한 사람
도 적의 그림자를 발견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예 이상한 소리조차도 들
은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고라화상이 서서히 입을 떼었다.
"여러 시주들께선 혹시 천리회음이란 절정 기공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
소? 이 천리회음술은 백 장 앞에서 한 말을 한 가닥 음파로 응집시켜 가
지고 사람들의 귓속에 울려 가게 할 수 있는 것이오."
이런 말을 듣고 군호들은 모두 안색이 크게 변했다.
단장홍 유한수가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적의 무공은 이미 노화순청의 경지에 다다른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라화상은 눈썹을 가볍게 찌푸리고,
"적의 무공 성취는 확실히 보통이 아닐걸세만 그 안에는 기교가 있네."
그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가 돌연 화제를 바꾸어 다시 말했다.
"하현질, 자네는 고(故) 호맹주를 따른 시간이 제일 오래 되니 한 가지 묻
겠네. 영사의 일생을 통하여 한 번이라도 어떤 이상한 일이 발생한 적이
있는지, 그리고 혹시 어떤 사람들이 영사에게 원수를 갚을 가능성이 있는
지 알고 있는가?"
패왕국 하불감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가사께선 평생 동안 중후한 인덕으로써 사람을 대하셨고, 남달리 협의심
이 강하셨으며, 또한 행협으로 많은 사람을 감복케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크나큰 원수나 적이 있다고 말 또한 행협으로 많은 사람을 감복케 하셨습
니다. 그러므로 크나큰 원수나 적이 있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비록 사
이가 좋지 않은 경우가 있었다 해도 그들은 무림의 대수롭지 않은 것들입
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저는 벌써 보름 동안이나 심혈을 기울여 조사해 보았으나, 사가께 원한
을 품고 있던 사람들은 대부분이 죽었거나, 죽지않은 사람이라 해도 이미
가사에게 징벌을 받아 병신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명의 의심스
러운 인물이 있긴 합니다만 그들은 지금까지 행방이 불명합니다."
고라화상은 급히 물었다.
"어떤 세 사람인가 아는 대로 말해 보게, 현질."
패왕궁 하불감은 어두운 안색으로 대답했다.
"첫째 분은 가사 동문의 사저인 후난향(候蘭香)입니다."
고라선사는 후난향이란 이름을 듣자 얼굴빛이 약간 변했다.
"후난향은 십 년 전 무림에서 강남 제일 미인으로 불렸었지. 그러나 그녀
는 한 번 피었다가는 곧 시들어 버리는 꽃과 같이 세월이 흐르자 무림에
서 행방이 묘연하게 되었지. 지금까지도 행방이 불명하군. 그래, 영사가
살아 계실 때 노승도 그가 후난향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
네. 그러나......."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하불감을 주시하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러나 말이네. 그녀는 바로 형사의 동문 사저이며, 또한 그녀와 영사 사
이에 어떤 시비곡절이 있었다는 말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네. 내가 생각
컨대 그녀를 고 호맹주를 가해한 용의자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
같네."
패왕궁 하불감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다시 말했다.
"두 번째 분은 삼십여 년 전 천하 무림을 경동시킨 바 있는 조전신(趙殿
臣)입니다."
조전신이라는 말이 나오자 군웅들은 제각기 귀엣말을 주고받았다. 모든
사람이 그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듯했다.
원래 조전신은 삼십육 년 전 천하 무림을 떠들썩하게 한 인물이었다. 그
는 강호에 발을 들여놓은 지 불과 삼 년 만에 한 자루의 사검을 가지고
대강 남북의 무림에 이름을 크게 떨친 팔십일 명의 대가들을 차례로 격패
시켰었다.
그리하여 그는 강호 사람으로부터 마검신군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 당시 마검신군 조전신의 이름을 들추기만 하여도 흑백 양도를 막론하
고 모두가 슬그머니 피해 버리곤 할 정도로 그야말로 천하를 주름잡았던
무적의 사나이였다.
이때 고라화상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검신군 조전신은...... 확실히 일대 무림 괴걸이었지. 삼십 년 전의
어느 혹독하리 만큼 추운 겨울 밤이었네. 괄창산 빙운 설봉 꼭대기에서
조전신과 고 호맹주와 싸운 적이 있었지. 그 싸움이야말로 무림 유사 이
래 가장 격렬한 경천동지의 싸움이었네."
이때 단장홍 유한수가 불쑥 물었다.
"사백님, 지난날 조전신이 가사에게 빙운 설봉에서 싸우자고 도전하였을
때 사백님께서 심판인으로 초청되지 않았습니까?"
고라화상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노승은 그 싸움의 심판인으로 초청 받았었네. 그 싸움은 무려
삼일 밤낮을 계속되었네. 삼 일 동안 격투를 벌인 끝에 승부가 가려졌으
나 고 호맹주가 오직 반 초를 이겨 승리를 거두게 되었었지."
그는 말꼬리를 흐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계속했다.
"마검신군 조전신은 괄창산 빙운설봉 꼭대기에서의 싸움에서 패한 뒤 즉
각 무림에서 스스로 은퇴하였지. 그후 삼십여 년이 지나는 동안 다시는
그의 이름을 듣지 못하였고 또한 그의 행적을 아는 사람도 없었네. 그렇
지, 조전신은 철장건곤권 호창부의 손에 패한 적이 있으므로 확실히 그
원수를 갚으려 했을 가능성이 큰 것일세."
패왕궁 하불감은 계속해서 세 번째 사람을 말했다.
"세 번째 사람은 바로 은사님에게 축출 당하여 쫓겨난 몽천악입니다."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너무나 크게 놀라 하마터면 고함을 칠 뻔하였다.
그가 은사님을 가해한 세 명의 의심스러운 인물 중의 하나로 나열되다니,
그는 이렇게 자신이 용의자로 몰리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터였
다.
이때 고라화상이 물었다.
"그자는 고 호맹주가 마지막으로 거둔 제자가 아닌가?"
패왕궁 하불감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몽천악은 저의 막내 사제입니다."
고라화상은 고개를 흔들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소악, 그 아이는 매우 착하고 말도 잘 들었으며 남달리 총명하였지. 더욱
이 그 애는 골격이 비상하고 천질이 뛰어나서 독특한 무예를 연마할 수
있는 기재임에 확실했네."
이어 그는 하불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어떻게 하여 그 애가 사문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 자네가 좀 상
세하게 말해 보게. 당시 노승은 소실봉에서 문을 닫고 있었으므로 그 일
에 대해 잘 모르고 있네."
패왕궁 하불감은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했다.
"몽천악 사제는 확실히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이였습니다. 그 애가 사문
에서 쫓겨난 뒤에도 사부님과 우리 형제들은 여전히 그 애를 못 잊어 그
리워했습니다."
그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을 계속해 내려갔다.
"그 일은 칠 년 전 한여름에 발생했습니다. 저의 셋째 사제 소자명과 넷
째 사제 몽천악은 그때 사부님의 명을 받들고 절강 땅으로 가서 사모님을
맞이해 가지고 개봉으로 돌아오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그들 두 사
형제는 무공 초식에 관한 논쟁을 벌이다가 끝내는 절벽 위에서 서로 무예
를 겨루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혈기가 흘러 넘치고 한창 자존심
이 강한 때였으므로 어느 쪽도 양보하려 들지 않았지요. 처음에는 시합으
로 겨루었으나 나중에 가서는 목숨을 건 싸움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결국 셋째 사제 소자명이 넷째 사제 몽천악에게 패하여 절벽에서 떨어지
고 마는 참극을 빚게 되었습니다. 그 후 셋째 사제는 시체조차도 찾을 수
가 없었습니다."
몽천악은 이러한 얘기를 듣고 있노라니까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이 아
팠다. 그는 속으로 울부짖었다.
'큰 사형님, 큰 사형께선 저의 말못할 사정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결코 무학에 관한 논쟁을 벌인 끝에 셋째 사형 소자명을 살해한 것
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만 제가 사부님과 사형들에게 말못할 부득이한 사
연 때문에 그러한 얘기를 꾸며 냈던 것이고 진정한 사실은 숨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큰 사형.'
이때 고라화상은 정신을 모으고 경과를 듣고 난 뒤 조용히 물었다.
"그래 몽천악이 소자명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는 일에 대해 어떤 증거
될 만한 것이 있는지 모르겠군. 뭐 증명할 만한 것이 있는가?"
하불감을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 두 사형제는 단 둘이 절강으로 갔었는데 도중에 그와 같은 불상사
가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경과 상황은 모두 넷째 사제 몽천
악이 개봉으로 돌아와 직접 사부님께 자백한 것입니다."
"음!"
고라화상은 가볍게 신음 소리를 냈다.
하불감의 얘기는 계속되었다.
"사부님께서는 그와 같은 일을 들으시고는 크게 노하셨습니다. 그 당시
그분께서는 당장에 그를 쳐죽일 생각으로 손을 번쩍 쳐드시었습니다. 그
런데 어찌 된 일인지 사부께선 손을 들어 올린 채 머뭇거리면서 결코 내
리치지 못하셨습니다. 나중에 저와 둘째 사제 그리고 호사매가 사부님께
특별히 애걸을 하였더니 사부님께선 넷째 사제의 죽을 죄를 사해 주셨습
니다. 그러나 그분은 몽천악을 영원히 사문에서 축출하고 사도의 관계를
끊을 것을 선고하셨습니다."
몽천악은 얘기를 들을수록 가슴이 찢어지고 갈라지는 듯이 아프기만 했
다. 그는 또 속으로 중얼거렸다.
'큰 사형, 사형께선 내가 소자명 셋째 사형을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을 때
증인 하나가 그 자리에 있었으며, 그 증인이 바로 사모님이란 사실을 알
고 계십니까? 제가 그 당시 셋째 사형을 살해하였을 때는 이미 사모님을
맞이하여 모시고 절강에서 개봉으로 돌아오는 도중이었습니다.'
이때 고라화상은 기가 차다는 듯 마른 웃음을 치며 말했다.
"허허허...... 거참, 노승이 문을 닫고 있는 동안 고 호맹주 집안에서 그
렇 듯 불행한 일이 발생하였다니 정말 뜻밖인걸. 아! 몽천악, 그 아이는
비록 살기가 가득 차 있으나 그래도 매우 선량했어."
패왕궁 하불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넷째 사제 몽천악은 그렇게 하여 사문에서 쫓겨난 뒤 칠 년이 지난 오늘
날까지도 행방과 생사의 여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몽천악은 남몰래 피눈물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다시 또 속으로 비통스
럽게 외쳤다.
'큰 사형, 사형께선 제가 사문에서 쫓겨난 후로 칠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시달림과 고통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러니까 제가 막 사문에서 쫓겨났
을 때의 일입니다. 나는 사모님이 보낸 자객의 추격을 받아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마터면 그 자객의 손 아래 목숨을 잃을 뻔하
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도와 요행히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렇지만 결국 저는 반병신이 되었습니다. 오늘날까지 반병신이 된 것도 모
두 사모님 때문입니다. 저는 너무나 사모님이 증오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한때 저는 사문으로 돌아와서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려 했습니다. 그러
나......
그러나, 저는 사부님을 너무나 존경하였기에 서러움을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차마 사부님에게 불행을 안겨 드릴 수 없어 저는 칠 년
이 지난 오늘날까지 여전히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모님의 비밀을 숨겨 왔
던 것입니다. 큰 사형, 제발 사형께선 더 이상 내가 사부님을 가해한 범
인이라고 오해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때 단장홍 유한수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넷째 사제 몽천악은 말입니다. 사람됨이 철저하므로 원한을 쉽사리 잊어
버릴 성격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그가 사부님께 처벌을 받고 사문
에서 쫓겨난 일에 원한을 품고 혹시나 극단적인 생각으로 사부님에게 독
수를 쓴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뒤를 받아 지금까지 말 한마디 없던 호천옥이 돌연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유사형, 내 생각에는 넷째 사제가 그렇듯 마음이 독하지 않을 것 같아요.
그...... 그가 사문에서 쫓겨 난 다음날 저는 혼자서 몽천악 사제와 만나
긴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그때 그는 마음속에 말못할 고충이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나 끝내 그는 그 고충을 털어놓지 않은 채 떠나갔어요."
옆에서 이런 상황을 낱낱이 보고 있던 몽천악은 생각 같아선 당장에 신분
을 밝히고 모든 상세한 내막을 토로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참았다. 그는 지난 칠 년 동안 인간으로서 도저히 참아 낼
수 없는 수많은 고초를 참아 왔었다.
그러는 동안 그에게는 보통 사람과 다른 자기 자신을 능히 진정시킬 수
있는 무형의 힘이 생겼다. 그래서 그는 어떤 극한 상황에서나 자신의 감
정을 억누르고 참아 낼 수가 있었다.
그는 지금 이 자리에서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처지인 것이다. 칠 년 전
의 그 생각하기도 싫은 추악한 진상을 어떻게 밝힐 수 있으랴.
비록 은사님이 돌아가셨지만 그 사실을 밝히게 되면 그분의 영예스런 명
성에 커다란 손상을 끼치게 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이때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사문에서 축출당한 몽천악을 비록 사부님을 가해한 용의자로 가상할 수
는 있겠지만 노승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그 가능성이 매우 희박할 것
같소.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고 호맹주를 살해한 사람은 적어도
그분과 무공이 비슷하거나 버금가는 정도는 돼야 한다는 것이요.
그런 견
지에서 본다면 사문을 떠난 지 칠 년이나 되는 사람이 그분을 가해할 수
있었으리라곤 믿어지지 않는 일이요. 솔직히 말하자면 노승도 호창부 맹
주의 무공을 당해 내지 못할 터인데 그의 제자라면 더욱 말할 나위도 없
는 것이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계속했다.
"물론 몽천악의 행방이 지금까지 불명하니 우리들은 그를 용의자 중의 하
나로 가상할 수는 있네...... 그러나 하현질이 말한 그 세 명의 용의자
중에서 내가 보기에는 마검신군 조전신이 범인일 가능성이 가장 큰 것 같
네."
그는 중인을 둘러보면서 다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지난날 조전신이 강호에서 돌아다닐 무렵, 남달
리 큰 야심을 품고 오로지 천하 제일 고인이 되려고만 생각했었다는 일이
네. 그러나 그 야심도 호창부 맹주에게 격패 당하므로서 일단 무너지고
말았지.
동시에 무려 팔십 일명의 검술대가를 차례로 격패시킨 공적도 하
룻밤 사이에 산산조각이 나 버렸지. 이런 무자비한 타격은 성격이 괴벽스
럽고 사람됨이 좋지 않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왕왕 크나큰 원한을 품게 하
는 것이네. 그런 까닭으로 해서 노승은 조전신을 가장 유력한 용의자로
간주하는 바이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조전신의 무공이 삼십여 년 전에
이미 고 호창부 맹주와 버금갈 정도였으니 만약 다시 그 긴 세월 동안 전
심 전력을 다해 수련을 하였다면 호창부 맹주를 능가할 가능성이 매우 큰
것이네."
고라화상이 이와 같은 분석은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그에 대해 반론을 펴
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중인들은 하나같이 무림에 어두운 그림자를 씌워 놓은 장본
인이 바로 마검신군 조전신임에 틀림없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몽천악도 물론 그렇게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이를 깨물고 은사님을 위해
반드시 마검신군을 죽여 없애 원수를 갚아 드리기로 굳게 결심했다.
이때 고라화상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려 어둠이 드리운 밤하늘을 바라보
고 나서 서서히 말문을 열었다.
"고 호맹주를 위해 복수하고 무림을 위해 정의를 주지하여 화근을 없애는
일은 결코 이삼 일 내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지금 여러분도 알
다시피 적은 숨어 있고 우리는 완전히 드러나 있으니 당분간은 적의 무슨
동정이 있기를 기다려 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소. 그러니 만약 여러 시주
들께서도 자신에게 절실히 중요한 일이 없다면 모두 무림 맹주부에 머물
러 주기를 바라는 바이오."
구대문파의 군협들은 모두 이의 없이 고개를 끄덕여 응낙하였다.
패왕궁 하불감이 입을 열었다.
"이미 가사께서 돌아가신 지 사십구 일이 되었습니다만 무림맹주의 자리
가 비어 있는 형편입니다. 고라사백님께서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실 생
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그 일은 그다지 어려운 것이 아니네. 물론 새 맹주를 선출해 내는 것은
짧은 시간 안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이 자리에 계신 여러 시주가 모
두 각파에서 위임한 무림맹 위원회의 위원이니, 뜻만 같이한다면 우선 맹
주의 자리를 대리할 수 있는 사람 하나를 선출해 낼 수 있을 것이네. 여
러 시주들의 의견은 어떠시오? 사태가 긴박하니 만큼 우선 임시 맹주를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소?"
고라화상은 전임 무림맹의 위원장이었으므로 그가 이렇게 제의하자 중인
들도 모두 찬성하고 나섰다.
그러나 어떤 사람을 대리로 선출하느냐 하는 문제가 나오자 나서서 천거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고라화상이 다시 말을 꺼냈다.
"맹주 자리를 대리하는 사람을 뽑는 데 있어 가능한 한 무림맹 안의 여러
가지 사정은 물론 조그만 사물까지 익숙한 사람이 좋을 것 같소. 그래야
만 긴 시간을 허비하여 배우고 익히는 것을 피할 수 있으니 말이요. 그런
상황을 참작해서 노승은 하불감 천질을 천거하여 당분간 대리직을 맡게
하려는데 여러 위원들의 의견은 어떠한지요."
일단 그가 이렇게 말하자 여러 위원들은 모두 찬성하였다.
패왕궁 하불감은 재빨리 사양하는 듯 말했다.
"고라사백님, 저는 경험이 부족하고 아는 바도 없어 이런 중임을 감당해
내지 못할 것 같습니다."
무당의 황학도장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대협은 현임 무림맹 내외 삼당 중의 내무 당주이니 무림맹 내의 일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거요. 호맹주께서 작고한 이 마당에 있어 새 맹주
를 정식으로 선출하기 전까지 하대협이 맹주의 직책을 대리하는 것이 가
장 적당할 것 같소. 그러니 더이상 사양하지 마오."
패왕궁 하불감은 어두운 낯빛으로 말했다.
"지금 강호 무림에는 엄청난 화난과 위기가 꿈틀거리고 있으나 저는 너무
미숙하여......."
고라화상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하현질은 고 호맹주를 이십여 년 동안이나 따라다닌 맏제자가 아닌가.
또한 무공을 논해 봐도 여러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 호창부의 후계자
로 지목을 받고 있던 정도였으며 또한 자네는 마음이 후덕하고 인품도 고
아하여 무림의 영도자로서의 조건을 모두 구비했다고 봐야 할 것이네.
그러므로 능히 맹주의 대리 직책을 수행해 나갈 것으로 믿네. 더 이상 사양
하지 말고 훌륭하게 일해 나갈 준비나 하도록 하게."
패왕궁 하불감은 고라화상이 자기를 추켜세우며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자 더 이상 사양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가볍게 머리를 조아리고 말했다.
"여러 선배님들께서 저를 아껴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데에 감사를 드릴
따름입니다. 앞으로 저는 미숙한 능력으로 맹주의 대리 직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있는 힘을 다할 것이며, 아울러 여러 선배님들의 각별한 지도 편
달을 바라는 바입니다."
몽천악은 속으로 큰 사형이 맹주 대리가 된 일을 기뻐하며 축하해 마지않
았다. 그는 평소부터 큰사형의 사람됨이 인자하고 중후하며 일에 임하는
데 있어 진정할 뿐만 아니라 성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확실히 큰 사형은 일대 영웅 호걸이 될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무공
면에서도 일파의 장문인에 못지않았다.
하불감은 지금껏 남과 무예를 겨룬 적이 매우 드물었지만 몽천악이 아는
바에 의하면 사부님의 공력도 결코 큰 사형보다 얼마 더 높지 않았다.
그러므로 몽천악은 정말로 중원 무림맹이 또 하나의 영웅을 얻게 되었다
고 생각하며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이때 고라화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오늘 밤의 상의는 여기서 그치기로 합시다. 노승은 내일 유체 조사에 손
을 대겠소."
하불감이 재빨리 일어나며 말했다.
"유사제, 빨리 고라사백님과 고소협을 위해 숙소를 준비하도록 하라. 오늘
밤 여러 군협들께 많은 수고를 끼쳤습니다."
군협들은 무림 맹주부에서 이미 한 달 동안 손님으로 묵고 있었다. 그들
은 차례로 숙소로 돌아갔다.
단장홍 유한수도 급한걸음으로 고라신승과 몽천악의 숙소를 준비하러 갔
다.
이때 의사청 안에는 고라신승, 패왕궁 하불감, 몽천악, 그리고 호천옥 등
네 사람만 남아 있었다.
고라화상은 중인이 모두 떠나간 뒤 한숨을 내쉬며 하불감에게 말했다.
"하현질, 지금 적이 무림 맹주부 안에 잠입해 들어왔는데 자네도 알아차
렸는지 모르겠군."
이 말을 들을 몽천악과 호천옥은 모두 크게 놀라 일제히 고라신승을 바라
보았다.
패왕궁 하불감은 아무런 신색의 변함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이 부 안에 침입해 들어온 것을 저는 벌써부터 예감했습니다만 누구인
지를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고라화상은 두 눈에서 예리한 빛을 발하며,
"이 사실은 잠시 비밀로 해 두게. 물론 다른 군협들에게도 얘기해서는 안
되네. 어쩌면 적이 보낸 첩자가 바로 군협들 속에 잠복해 있을지도 모르
니까."
하불감을 말했다.
"사백님께 첩자를 찾아낼 수 있는 어떤 묘계라도 있으신지요?"
고라화상은 돌연 고개를 돌리고 몽천악을 향해 말했다.
"고시주, 노승에게 무리한 부탁이 하나 있는데 들어줄 수 있겠는가?"
몽천악은 당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고 호맹주 대은인을 위한 일이라면 저는 불속에라도 뛰어들 용기가 있습
니다."
고라화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승은 시주로 하여금 약 칠 일 동안 암중으로 다지성 공손보기를 보호
해 달라고 부탁하고 싶네. 다시 말해서 그의 행동을 감시하는 것인데 시
주가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
몽천악은 조금도 서슴없이 말했다.
"삼가 명을 받들어 어긋남이 없이 일을 행하겠습니다."
하불감과 호천옥은 고라신승이 이렇듯 몽천악을 신임하는 것을 보고는 마
음이 편하지 않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감히 이의를 표시하지 못했다.
고라화상은 다시 말했다.
"고시주가 암중에서 공손보기의 행동을 철저히 감시해야 함은 물론이거니
와 하현질과 유현질, 그리고 호질녀도 조금도 태만함이 없이 암중에 군협
들의 행동과 부 안의 무사들을 감시하도록 하게. 만약 노승의 추측이 틀
림없다면 군협들 중에 반드시 첩자 하나가 있을 것이네. 또한 이 첩자가
모든 소식을 부내 무사들 속에 숨어 있는 다른 적에게 전달하고 있을 것
이네."
하불감, 몽천악, 호천옥 등은 고라신승의 예리한 추측과 판단에 대해 마음
속으로 탄복하였다.
갑자기 몽천악이 물었다.
"고라대사님, 제게 한 가지 이해가 닿지 않는 일이 있는데 대사님의 가르
침을 받고 싶습니다."
고라화상은 자상하게 말했다.
"고시주에게 무슨 의문이 있는지 어서 말해 보게."
몽천악은 미간을 가볍게 찌푸리고,
"대사께선 조금 전 천리회음이란 고절한 기공을 들추신 적이 있으신데,
그렇다면 현재 천하 무림에서 천리회음기공을 연마하여 능히 백 장 밖에
서 음파를 한 가닥으로 응집시켜 사람들의 귓속에 울려 들어가게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요?"
고라신승은 그의 이와 같은 질문을 받자 내심 놀라며 생각했다.
'이 청년은 과연 일신에 절학을 지녔구나. 그렇지 않고선 천리회음기공의
신비하고 오묘한 점을 알지 못할 것이다.'
심야의 유혈극
고라화상은 한차례 생각을 하고 나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시주는 견식이 넓으니 물론 천하에서 어느 누구도 그 신화 같은 절학
을 연마해 낼 수 없다는 것을 알 거야."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문득 깨달은 바가 있는 듯 "아!" 소리를 내었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대사께서는 아까 그 천리회음 말소리가 의사청 안
에서 울려 나온 것임을 벌써 알고 계셨겠군요?"
고라화상은 빙긋이 웃었다.
"그렇다네, 노승은 그때 바로 알았네. 그러나 노승은 어떤 사람이 울려 냈
는지를 알아낼 수가 없었네. 그래서 잠복해 있는 첩자로 하여금 노승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의로 천리회음기공의 신화적
인 얘기를 했던 것이네."
패왕궁 하불감과 호천옥은 두 사람의 이와 같은 문답을 듣고는 무슨 말인
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하였다.
이때 호천옥이 아름다운 음성으로 물었다.
"고라사백님, 천리회음기공이란 도대체 어떤 기공인가요?"
고라화상은 빙그레 웃으며,
"천리회음과 전음입밀, 그리고 의어전음은 모두 일종의 음파기공이란다.
의어전음은 말한 소리를 음파로 만들어 목적하는 사람에게 전하는 것인데
목적하는 사람만이 들을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들을 수 없다. 공부가 아주
고절한 사람일지라도 십여장의 거리 안에서만 전달할 수 있지.
그런데 천
리회음의 성능은 아주 다르단다. 이것은 말한 소리의 음파를 한 가락으로
응집시켜 가지고 어떤 목표물까지 전달하는 것인데 음파가 목표물에 닿으
면 비로소 회음 작용이 일어나 말소리가 들리는 것이야."
그는 지붕을 힐끗 쳐다보고 나서 다음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 지붕 위에서 울려 나온 그 음흉스럽고 차가운 웃음소리는 바로
적이 의사청 안에서 천리회음기공을 사용하여 음파를 몰래 내보내 지붕에
적중시켜 다시 아래로 메아리 치게 한 것이다."
호천옥은 이런 말을 듣자 놀라움을 금치 못한 듯 맑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그녀는 눈을 돌려 몽천악에 물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사전에 그 오묘한 점을 알았지요?"
그녀의 이 물음은 너무 천진 난만하여 몽천악은 내심 우스웠으나 곧 진지
한 태도로 말했다.
"그것은 나도 천리회음절학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오."
호천옥은 눈을 깜박거리더니,
"당신...... 당신은 혹시......."
몽천악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이미 알아차린 듯 곧 신색을 바로
하고 말을 가로챘다.
"호낭자, 안심하시오. 나는 분명히 당신들 편의 사람입니다."
호천옥은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째서 문파를 말하지 않는 거예요?"
몽천악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저에게는 당분간 사문을 밝힐 수 없는 고충이 있소. 그러니 그것은 당신
들이 양해해 주시기를 바라오."
패왕궁 하불감은 호천옥이 계속 쓸데없는 말을 할까봐 염려스러운 듯 얼
른 입을 열었다.
"사매, 고소협에게 말할 수 없는 고충이 있으시다니 우리들은 더 이상 난
처하게 하지 말자. 사실 출신이야 어떻든 간에 마음만 광명 정대하다면
우리들의 친구가 아니겠느냐?"
이어 그는 고라신승을 향해 말했다.
"밤이 깊었으니 사백님은 이만 쉬도록 하십시오."
말을 마치자 그는 고라신승과 몽천악을 안내하며 의사청을 떠났다.
고라신승과 몽천악의 숙소는 뜰 안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대원(大院)이었
다.
뜰 안에는 나무와 화초가 무성했고 정원 안에는 동산, 냇물, 나무다리, 정
자 등이 있어 매우 정취가 있었다. 주위는 깨끗하고 아담하게 단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아한 두 채의 누각이 동서에 각각 서 있었으며 누각의 사면에는
십여 칸의 소원이 지어져 있었다.
원래 이 대원은 무림 맹주부의 초대소로서 먼 길을 온 무림 고수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곳이었다.
여러 군협들은 이미 이곳에 투숙하고 있었다. 한 사람마다 소원 한 칸씩
을 내주었다.
고라화상은 동쪽의 누각에 거취하였고 몽천악은 서쪽 누각에 숙소를 정하
였다.
동서 두 채의 누각은 마주 대치하고 있었는데 떨어진 거리는 십여 장 정
도였다. 어쩌면 하불감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군협들의 행동을 쉽게 감시
하도록 안배한 것인지도 몰랐다.
두 채의 누각에 나누어 거처하면 전반적인 감시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초가을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다.
때는 사경, 이 무렵의 공기는 하루 중 가장 차가운 것이다.
이 무렵 몽천악은 누각의 난간 옆에 서서 웅장한 무림 맹주부의 뜰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몹시 감개 무량한 모습이었다.
그러니까 칠 년 전 사문에서 추방되기 전에도 그는 이따금 깊은 밤에 홀
로 이 누각에 서서 야경을 바라보곤 했었다.
칠 년이란 세월이 흐른 오늘 다시 이곳에 섰는데 눈앞의 경물은 여전하였
다.
그러나 지금 그의 마음속은 근심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처량한 감회에 젖어 있던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몸을 돌려 방
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오경이 가까워
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이튿날 깨어나니 진시 무렵이었다.
돌연 몽천악은 침대 머리맡에서 한 통의 붉은 색 편지를 발견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했다.
'어젯밤 큰 사형이 직접 나를 데리고 이 누각에 올라왔을 때는 분명히 이
편지가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구나.'
그는 즉시 손을 내밀어 붉은 편지를 집었다.
순간 그는 멍청해지면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았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탁자와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정결했다. 분명히 비
녀가 들어와 방을 청소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몽천악이 그 붉은 편지를 펼치자 뜻밖에 '축객령(逐客令)'이라고
커다랗게 쓴 세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아래와 같
은 글이 씌어 있었다.
'귀하는 오늘 해질 무렵까지 무림 맹주부를 떠나도록 하시오. 만약 이를
어기면 귀하의 목숨은 내일 오경을 넘기지 못할 것이오.'
몽천악은 이와 같은 내용을 보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적이 그에게까지
수작을 걸어오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이 붉은 협박장을 보건대 적은 비단 맹주부 안에 잠입해 들어왔을 뿐만
아니라 이곳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듯
무인지경인 양 날뛰며 대담하게 나오지는 못할 것이다.
몽천악은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해 본 뒤 당분간 붉은 편지에 관한 일을
입 밖에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남달리 꿋꿋하고 고집이 센 그는 적이 앞으로 그를 어떻게 상대하려는지
두고 볼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때 돌연.
밖에서 일진의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 왔다.
몽천악은 재빨리 붉은 편지를 품속에 감추었다.
그러자 밖에서 맑고 고운 음성이 들려 왔다.
"고상공님, 일어나셨나요?"
말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리더니 십오륙 세 가량 된 청의의 비녀가 들어왔
다.
몽천악은 비녀의 얼굴을 자세히 보았다. 그는 이 비녀가 바로 칠 년 전
사부님의 시중을 들던 네 명의 어린 소녀 중 하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
비녀의 이름은 소국(小菊)이라 불렀었다.
그런데 칠 년 사이에 그녀는 완전히 숙성하여 아리따운 처녀로 변해 있었
다. 얼굴이 예뻤고 갸름하며 피부가 옥같이 희고 고운 것이 매우 귀여웠
다.
청의의 비녀는 고개를 들다가 몽천악이 예리한 눈빛으로 그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자 움찔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아미를 약간 숙이고
얼른 입을 열어 물었다.
"상공,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몽천악은 재빨리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 일도 없다. 아! 그런데 네 이름이 무어냐?"
청의의 비녀는 귀엽게 웃으며,
"저는 소국이라 불려요. 상공께서도 그렇게 부르시면 되어요."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좋다. 그럼 나는 앞으로 너를 소국이라 부르겠다. 한 가지 묻겠는데 너는
언제 들어와 방안 청소를 하였느냐?"
소국은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약 두 시간 전이에요. 그때 상공께선 한참 단잠에 빠져 계시기에 저는
혹시나 잠이 깰까 싶어 조용조용 청소를 했어요."
그녀는 몽천악의 병든 사람 같은 누런 안색과 반불구인 절름발이임에도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일종의 동정하는 기미가 보였다.
몽천악은 잠시 생각한 뒤 말했다.
"앞으로 너는 그렇게 일찍 들어와 청소할 필요가 없다. 우리같은 사람들
은 늦잠을 자야 겨우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네."
소국은 공손히 대답한 뒤 세면대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상공, 제가 상공을 위해 세숫물을 준비해 놓았어요. 세수를 하신 뒤 아침
식사를 하시지요."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를 그렇게 알뜰살뜰 보살펴 주니 나는 뭐라고 감사의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구나."
돌연 소국은 그 맑고 빛나는 두 눈을 깜박이며 몽천악은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상공같이 무공이 훌륭한 분이 그렇듯 겸손하시니 정말 보기드문 일이에
요."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네가 어떻게 해서 나의 무공이 높다는 것을 아느냐?"
"무림 맹주부 안의 이 별채는 전문적으로 각파 무림 고수들의 숙소로 이
용되고 있어요. 더욱이 별채 안에서도 동, 서, 이 두 채의 누각은 특별한
손님을 모시는 곳이에요."
몽천악은 웃었다.
"그럼 너도 전문적으로 특별한 손님만 시중들겠구나?"
소국은 예쁘게 웃었다.
"상공, 놀리지 마셔요."
몽천악은 물었다.
"소국, 너는 무공을 할 줄 아느냐?"
소국은 머리를 끄덕였다.
"아가씨께서 쉬운 무기 몇 가지를 가르쳐 주신 적이 있어요."
몽천악은 그녀를 바라보며,
"너는 혹시 호맹주의 시중을 들던......."
그는 여기까지 말했을 때 실언을 했음을 경각하고 얼른 입을 다물어 버렸
다.
눈치가 무척 빠른 소국은 재빨리 물었다.
"상공은 제가 맹주님의 시중을 들던 비녀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는지
요......."
몽천악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수년 전 내가 호맹주님을 뵈러 왔을 때, 네가 호맹주 신변에서 시중을
들던 네 명의 여자 아이 중에 하나인 것을 본듯해서 물어 보았을 뿐이
다."
소국은 몽천악의 얼굴을 유심히 주시했다.
"상공의 기억력은 실로 비상하시군요. 한 번 본 사람을 수년이 지난 지금
에 와서도 기억하고 계시다니 정말 상공은 보통분이 아니군요."
몽천악은 가볍게 웃었다.
"나는 사람을 한 번 보면 웬만해서는 잊지 않지. 더욱이 너같이 예쁘장한
얼굴은 더욱 잊지 못하기 마련이다."
소국은 은근히 기뻐하며 말했다.
"상공께서는 농담도 잘하시군요. 조금 전 상공을 처음 뵈었을 때 저도 어
디선가 가끔 뵌 분 같았어요.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확실한 기억이 나
지 않는군요."
갑자기 그녀는 손가락을 입가에 갖다 대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상공과 얘기하는데 정신이 팔려 조반을 준비하는
것도 잊었군요."
하고 말하며 잽싸게 방을 걸어 나갔다.
몽천악은 그녀가 나가자 속으로 헤아렸다.
'그 붉은 편지는 도대체 누가 보내 온 것일까? 필경 소국은 아닐 것이
다...... 그러나 소국을 제외하고 누가 또 이 누각에 들어올 수 있단 말
인가...... 아! 그만 생각하기로 하자. 여하튼 오늘 밤 나는 적의 거동을
기다려야 한다. 그가 다시 오지 않으면 몰라도 그렇지 않은 이상 절대로
나의 두 손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몽천악은 자신을 갖고 있었다.
이날 그는 온종일 누각 안에 있으면서 창을 통해 다지성 공손보기가 묵고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는 한걸음도 나오지 않았고 각 객청의 군협들도
이 별채 밖으로 나온 사람이 없었다.
몽천악은 큰 사형 하불감과 둘째 사형 유한수가 점심 무렵에 동쪽 누각으
로 와 고라화상을 찾아뵌 뒤 미시 무렵에 떠나가는 것을 보았을 따름이었
다.
온 무림 맹주부는 낮에는 위사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다. 더욱이 이 별원
둘레에는 한명의 위사도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날 황혼 무렵.
몽천악은 누각의 난간 옆에 서서 오색 찬란한 빛을 뿌리며 지는 태양과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자 눈앞에 붉은 편지의 글이 떠올랐다.
'오늘 해질 무렵까지 무림 맹주부를 떠나도록 하라. 만약 이를 어기면 너
의 목숨은 오경을 넘기지 못하고 달아날 것이다.'
그리하여 몽천악은 경각심을 높이고 생각했다.
'적은 절대 나에게 정면으로 나타나 공격을 해 오지 못할 것이다. 필경
잔재주를 부려 암살할 것이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소국을 물러가게 하고 내일 아침에 다시 오면 된
다고 일렀다.
원래 시중드는 여비들은 모두 초경 무렵까지 일한 후 겨우 내실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윽고 밤이 되었다.
몽천악은 등촉에 불을 당긴 뒤 누각을 내려와 뜰 안에서 산책을 하고 있
었다. 산책이라고는 하나 사실 군협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공손보기가 소원 안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산뜻한 백색의 장삼을
입고 있었으며 아마 외출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몽천악은 명을 받들어 감시와 보호의 책임이 동시에 있었으므로 암중에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과연 공손보기는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얼마 후
그는 무림 맹주부의 웅장한 대문을 빠져나갔다.
몽천악은 개봉부 시가지 지리에 대해 매우 익숙하였다. 그는 색다른 길이
나 조그만 골목을 막론하고 모르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뒤를 미행하기가
상당히 수월했다.
공손보기는 비록 노련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지만 그의 미행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이 무렵 개봉부 시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매우 흥성거리고 있었다.
다지성 공손보기는 일정한 목적지가 있는 듯 일각도 지체함이 없이 어디
론가 걸어가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놀랍게도 개봉부의 유명한 기생촌을
향해 다가가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흠짓 놀라며 미간을 찡그리고 생각했다.
'저 노인이 몸을 풀러 왔단 말인가?'
원래 이 기생촌을 길이가 반 리 정도나 되었으며 이십여 채 정도의 기원
(妓院 : 여자가 몸을 파는 집)이 있었다.
파란 등, 붉은 등이 대문 앞마다 현란하게 켜져 있었으며 음탕한 소리와
술 냄새가 코를 찌르고 고막을 자극했다.
이따금 여인들의 간드러진 웃음 소리와 신음 소리가 새어나오기도 했다.
몽천악은 이 나이가 되도록 이런 곳에 한 번도 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머뭇거렸다.
이때 공손보기는 포주와 창부들이 끌어당기는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는데
곧 그 모습이 사라지려고 했다.
몽천악은 낯이 뜨거움을 불사하고 급히 쫓아갔다. 유혹적인 창부의 손길
을 뿌리치느라고 그는 땀을 뻘뻘 흘릴 지경이었다.
이윽고 저급 창부가 있는 기원을 지나 비교적 고급인 청루에 당도하자 그
곳에는 길을 가로막으며 손길을 뻗치는 창부나 포주가 보이지 않았다.
몽천악은 속으로 중얼거렸다.'늙은이가 제법 고급 장소를 고를 줄 아는
데.......'
이때 공손보기가 한 채의 커다란 이 층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것이 보
였다.
몽천악은 재빨리 어두운 곳으로 가서 몸을 숨기고 그의 일거일동을 감시
했다.
공손보기는 사방을 한차례 둘러본 뒤 걸음을 옮겨서 그 집안으로 들어서
더니 곧장 누원으로 들어갔다.
붉고 푸른 등불이 밝게 내리비치고 있어 몽천악은 이 청루 기원의 이름이
강산미인루(江山美人樓)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개봉에 오랫동안 살았던 그는 이 강산미인루가 대강 남북에 널리 알려진
큰 기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원의 여자들은 모두 선녀처럼 아름답고 여우처럼 요염할 뿐
만 아니라 또한 가무와 탄금에 뛰어났으며 심지어 어떤 여자는 문장에 정
통하였으니 그야말로 미와 절예를 겸한 기녀들이었던 것이다.
몽천악은 감히 정문으로 들어갈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밖을 배회하며
기다렸다.
그가 안으로 들어가지 않은 것은 첫째 공손보기가 그를 발견할까봐 걱정
해서였으며, 둘째는 그런데 흥미를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따금 여자의 간드러지게 웃는 소리와 남자의 괴상하게 외치는 소리가
안에서 울려 나왔다.
몽천악은 그런 소리가 들릴 때마다 미간을 찌푸리곤 했다.
그는 여자의 품에 안겨 술이나 마시는 족속들에 대해 한심하게 생각해 왔
던 것이다.
밤은 점점 깊어 갔다. 이 무렵이 되자 향락을 즐기러 기원을 찾아오는 손
님도 뜸해졌으며 취객들이 휘청거리는 발을 이끌고 둥그런 모양의 기원
문을 나서고 있는 모습도 하나둘씩 눈에 띄었다.
몽천악은 두 눈을 크게 뜨고 자세히 살폈으나 여전히 다지성 공손보기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짜증이 난 듯 속으로 뇌까렸다.
'이 늙은 원숭이는 정말 제멋대로군. 초저녁에 들어갔는데 어째서 아직도
나오지 않는 것일까. 혹시 계집들에게 빠져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몽천악은 그대로 두어 시간 더 기다려 보았다. 그때는 이미 자정 무렵이
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때가 되도록 공손보기가 나오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
이었다.
보통 기루의 영업 시간은 자정까지였으니 이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
으면 기녀 집에서 밤을 새우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혹시 이 늙은 원숭이가 이곳에서 자려는 것이 아닐까?'
속으로 중얼거린 몽천악은 눈을 크게 뜨고 길거리를 훑어보았으나 사람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만이 처량하게 담 모퉁이에 숨어 있었다.
악기 소리도 이미 오래 전에 끊어져 버렸고 현란한 등불들도 하나씩 꺼져
갔다. 그러나 여전히 다지성 공손보기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몽천악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하며 속으로 부르짖었다.
'큰일이다. 그 늙은 것이 나의 미행을 눈치채고 이미 뺑소니 친 것이 아
닐까?'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조급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어 몸을 돌려 돌아가
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을 옮기다 말고 그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가 혹시 기녀 집에서 밤을 새우는 것은 아닐까?'
공손보기를 보호, 감시해야 할 중책을 맡고 있는 그는 확실한 것을 알아
보기 전에는 이대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기원 방마다 모두 탐지해 보는 수밖에 없다고 속으로 단정
하기에 이르렀다.
일단 마음을 정하자 그는 번쩍 몸을 날려 담을 뛰어 넘어 섰다. 다시 한
번 몸을 날리자 그는 이미 앞뜰의 지붕 위에 올라서 있었다. 그의 동작은
실로 번개 같이 빨랐다.
몽천악은 한 칸 한 칸 살펴 나갔다. 방마다 춘색이 넘치는 음탕한 장면이
전개되고 있었다. 이층 어느 방에서 한창 정사를 벌이고 있는 광경을 보
게 되자 그는 재수 없다는 듯 침을 탁 뱉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몽천악은 열일곱 칸의 방을 모두 살펴보았지만 그 늙은
원숭이 다지성 공손보기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몽천악은 한숨을 들이키며 생각했다.
'아직 저쪽에 누각 하나가 있구나. 만약 저기에도 없으면 공손보기는 분
명히 나를 발견하고 새어 버린 것일 게다.'
이런 생각이 들자 그는 즉시 양팔을 가볍게 한 번 떨쳤다. 그러자 그의
몸은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가 삼 장 밖의 누각 옆에 날아 내렸다.
눈을 올려 바라보니 누각 위에서 한 가닥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몽천악은 길게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시 몸을 날려 누각의 난간 위에 소
리 없이 내려앉았다.
그는 조용히 창가로 다가가 눈길을 모으고 안을 살펴보았다.
순간 몽천악은 하마터면 심장의 고동이 멈출 지경으로 놀라고 말았다.
그는 한 폭의 요염한 그림을 발견하였던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결코 그
림이 아니고 생생하게 살아 있는 여자였다. 더구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요염한 여체였다.
오늘 밤 그는 적지 않은 음탕한 광경을 훔쳐보았지만 그로하여금 가슴이
뛰게 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의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뜨거운 피가 끓어오름을 막
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는 얼마나 끔직한 광경을 목격한 것일까.
누각의 조그만 방안에는 분홍색 초롱 하나가 밝혀져 있었고 침상 위에는
보름달 같은 풍만한 여자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꽃처럼 깜찍하고 아름다웠으며 윤기가 도는 새까만 머리카
락이 젖무덤 사이에 흩어져 있었다.
피부가 옥같이 희고 고우며 몸매의 곡선은 부드러운 구름과 같았다.
이 여인이 너무나 아름답고 요염했기 때문에 몽천악은 더 보지 못하고 눈
을 감았다. 그러나 그는 곧 다시 눈을 뜨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만지면 곧 터질 것만 같은 유방은 희끄무레한 것이 마치 양지 같았고 자
색의 젖꼭지는 꽃봉오리 같았다.
아름다운 곡선을 이룬 엉덩이에선 그윽한 향기가 풍기는 듯했고 그 둥그
스름한 아랫배 밑으로는 거무스름한 것이 드러나 보였다.
아름다운, 몸서리쳐지도록 요염하고 생생한 아름다움이었다. 보면 볼수록
가슴은 더욱 심하게 뛰었다.
몽천악은 애써 심신을 진정시킨 뒤, 머리를 흔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청루기원에 놀랍게도 이렇듯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니, 아, 정말 너무
아깝다.'
이때 달게 자고 있던 미녀가 갑자기 눈을 떴다.
이렇게 되자 몽천악은 흠짓 놀라며 즉시 몸을 날려 하늘을 가르는 유성처
럼 지붕을 넘어 달아나 버렸다.
그는 단숨에 무림 맹주부로 돌아왔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벌렁벌렁 뛰었
다. 그는 보지 않았어야 할 것을 보았다고 깊이 후회하였다. 그는 대문으
로 들어가지 않고 서쪽의 담을 넘어 들어갔다.
그의 경공은 이미 신영에 달했다. 뜰 가운데의 별원까지 오는 동안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경동시키지 않았다. 그만큼 그의 경공은 날쌔고 소리
없이 달리는 표범을 방불케 할 정도로 절묘했던 것이다.
몽천악은 뜰 안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심정을 가라앉힌 뒤 생각했다.
'늙은 원숭이는 정말 돌아온 것일까?'
그는 슬그머니 다지성 공손보기가 묵고 있는 곳으로 다가가서 몰래 엿보
았다. 창문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고, 놀랍게도 다지성 공손
보기는 침상 위에 누워 곤히 잠들어 있었다.
몽천악은 속으로 욕을 했다.
'이 늙어빠지진 원숭이야, 네가 나를 그렇게 고생시키다니 정말 괘씸하구
나.'
다지성 공손보기가 벌써 돌아와 있다는 사실은 그가 몽천악의 미행을 발
견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몽천악은 정말로 크게 화가 났다.
그는 몹시 불쾌한 심정으로 그의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는 여전히 등불이
켜져 있었다.
몽천악은 몸을 날려 누각의 난간으로 뛰어 올라가 창문을 통해 안을 자세
히 살펴보고 별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뒤에 비로소 방문을 열고 들어갔
다.
몽천악은 등불을 끈 뒤 침상에 누웠으나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았으므로
통 잠이 오지 않았다.
삼경 무렵이 되어서야 그의 마음은 겨우 안정되었다. 마음이 일단 안정되
자 그의 눈앞에는 그 아름다운 여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갑자기 그는 마음속에 짚이는 바가 있어 생각했다.
'그 여인의 눈은 매우 날카로웠다.'
아까 그는 창졸간에 주의하지 못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녀는 어
딘가 특이한 데가 있었던 것이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다시 생각했다.
'그녀의 두 눈은 차가운 빛을 쏘아 내고 있었다. 서슬처럼 날카로운 그
눈이 설마 보통 여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아냐. 필시 그
녀는 무림 사람일 게다.'
이것은 천하에 없는 이상한 일이었다. 일신에 절기를 지닌 무림 인물이
뜻밖에도 청루기원 같은 데 몸을 담고 있다니 확실히 경이적인 일이었다.
몽천악은 한참 동안 생각하며 분석해 보았지만 원인을 찾아낼 수가 없었
다.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반드시 강산미인루에 다시 한번 가서 몰래 그 이
상한 일의 진상을 밝혀 내야겠다.'
이렇게 결정하고 나니까 착잡한 머리 속이 다소 안정을 찾았다.
깊은 밤, 삼라 만상이 깊은 잠속에 빠진 고즈넉한 밤이었다.
이때 돌연.
아주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누각 밖의 복도 쪽에서 들려 왔다.
몽천악은 그 소리를 듣자 움찔했다. 순간 그 붉은 색 편지가 생각났다.
'음, 올 것이 왔구나, 좋다.'
몽천악은 아무 동정도 없이 여전히 침상에 잠든 척하고 누워 있었다. 그
러나 암중으로는 고절한 내공심법을 운용하고 있었다. 잠시 후 정신이 맑
아지고 몸이 가뿐해졌다.
이때 그는 적이 이미 방문까지 다가왔음을 알아차렸다.
'그놈이 직접 문을 열고 들어올까?'
그의 이런 생각이 미쳐 끝나기도 전에 찰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몽천악은 살며시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그러자 이미 적이 펼친 내공에
의해 문고리가 부러진 것을 보았다.
돌연.
시커먼 그림자가 뛰쳐 들더니 전광 석화처럼 빠른 기세로 덮쳐 들었다.
몽천악이 경각심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한 손이 그의 면상을 가격해 왔
다.
이 번개 빛보다 빠른 저격은 그야말로 여느 사람으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신속하고 절묘한 것이었다.
이 절묘하고 귀신 같은 솜씨에 얼마나 많은 무림 고수들이 목숨을 잃었을
까. 아무리 고강한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러한 저돌적인 암습에는 여지없
이 목숨을 잃고 말 것이다.
더구나 저격 수법은 무림에서 가장 악독하고 무서운 장법이었다. 그러므
로 비록 미리 대적할 준비를 하였다고 해도 이와같은 경우 방어하기가 극
히 어려운 것이다.
몽천악은 이 장법의 악독하고 날카로움을 알아봤으나 조금도 당황하지 않
았다. 그는 피하지도 않고 상반신을 일으키며 왼손의 다섯 손가락을 독수
리 발톱처럼 구부려서 밖으로 퉁기어 내었다.
다음 찰나.
팍팍! 하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암습자는 외마디 신음소리를 내고 뒤
로 너댓 걸음 밀려 나갔다.
이 틈을 이용하여 몽천악은 침상에서 뛰어 내려와 신광이 이글거리는 눈
으로 암습자를 쏘아보았다.
알고 보니 암습자는 놀랍게도 몸매가 날씬한 흑의의 여자였다. 그녀는 눈
만 내놓고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암습자는 일격이 실패로 돌아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듯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몽천악은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은 누구요? 순순히 굴복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거요. 감히 경거망동
했다 간 뼈도 못 추릴 테니까."
"흥!"
복면의 여자는 냉랭하게 코웃음을 치더니 다시 사나운 짐승처럼 덤벼들었
다. 그녀의 손에는 어느 틈엔지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는 비수가 들려 있
었다.
그녀의 동작은 용맹할 뿐더러 비할 데 없이 빨랐다.
몽천악은 냉소를 치더니 두 발을 약간 구부리고 두 손을 쳐들어 그녀의
가슴과 머리를 동시에 후려쳤다.
"앗!"
복면의 여자는 그의 일 장에 맞아 비명을 지르며 줄이 끊어진 연처럼 밖
으로 굴러 나갔다.
몽천악은 급히 쫓아 나갔다.
돌연.
싹! 하는 예리한 소리가 들리며 차가운 빛을 뿌리는 비수가 날아들었다.
몽천악은 번개같이 손을 날려 그 비수를 낚아채 잡았다. 비수를 손에 잡
고 살펴보니 복면의 여자는 몸을 날려 누각의 계단 아래로 뛰어 내리더니
곧장 밖으로 질풍처럼 달려가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적이 무척 빠른 속도로 도망치는 것을 보자 손에 들고 있는 비
수를 내던졌다.
"휙!"
비수는 복면을 한 여자의 등을 정확히 노리고 번개처럼 쏘아 나갔다.
다음 순간.
"아악!"
하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오며 비수는 흑의의 여자의 왼쪽 어깨
에 깊숙이 꽂히고 말았다.
한데 그녀는 단지 몸을 한차례 휘청거렸을 뿐 여전히 대문 쪽으로 기를
쓰고 달려가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단전의 진기를 끌어올리고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쫓아갔다.
흑의의 여자는 부상을 입은 채 이미 칠팔 장 밖으로 달려가 있었다.
몽천악은 상대방이 중상을 입고도 여전히 경쾌한 솜씨로 달리고 있는 것
을 보자 내심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자칫하면 상대방을 놓쳐 버리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몸을 솟구쳐 지붕
위로 올라갔다.
앞질러 날아가서 그녀의 앞을 가로막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몽천악이 두 채의 지붕을 뛰어넘었을 때 흑의의 여자는 뜻밖에도
몸을 돌려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자 쌍방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흑의의 여자는 모퉁이를 돌자 별채의 낮은 담을 향하여 질풍처럼 달려가
고 있었다.
몽천악은 만약에 그녀가 내원으로 도망쳐 가면 필시 큰 소란을 불러일으
킬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다급한 심정으로 십여 장의 거리를 둔 채 손을 뒤집어 맹렬한
일 장을 격발했다.
"휙! 휙!"
강풍이 예리한 소리를 일으키며 허공을 뚫고 광풍 노도와 같은 기세로 몰
아쳐 갔다. 그 기세는 마치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집어엎을 만하였다.
"윽!"
흑의의 여자는 일진의 광풍과 같은 장력에 여지없이 격중당하자 답답한
신음 소리를 내질렀다.
거세고 거센 바람에 의해 그녀의 몸은 일 장 가량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
다.
다음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머리를 박고 땅에 떨어진 흑의의 여자는 피를 두어
사발이나 쏟더니 손과 다리가 축 늘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일 줄 모르는 것이었다.
몽천악은 급히 달려가서 허리를 굽히고 살펴보았다. 처참했다. 그래도 미
심쩍은 생각에 그는 그녀의 몸을 흔들어 보기도하고 발로 차 보기도 했
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일 장을 맞자 즉시 숨통이 끊
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몽천악은 잠시 멍청히 서 있다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쉰 뒤 중얼거렸다.
"모처럼 힘들여 잡았는데 이렇게 죽다니......."
그때 일진의 가벼운 바람 소리가 들리며 한 사람이 나타났다. 이어 불호
를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미타불...... 고시주의 장력은 산을 무너뜨리고 암석을 깨뜨릴 만큼
위맹하구려. 적은 이미 오장 육부가 모두 터지고 심맥이 완전히 끊어져
죽어버렸소."
몽천악이 급히 고개를 돌려보니 어둠 속에 소림 신승 고라화상이 서 있었
다.
다음 찰나!
사람의 그림자가 여기저기서 번뜩이는가 싶더니 지붕 위에서 많은 군호들
이 속속 날아 내려왔다.
혐의자
단장홍 유한수와 패왕궁 하불감도 동시에 당도했다.
그 시체를 바라보는 패왕궁 하불감의 표정은 극히 엄숙했으며 침울한 음
성으로 외쳤다.
"둘째 사제, 가서 그 흑사를 벗겨라!"
이때 군웅들의 안색은 극히 긴장되었으며 수십 줄기의 시선이 일제히 그
시체 위에 집중되었다.
단장홍 유한수는 천천히 흑사를 찢어 내렸다. 나타난 것은 칠규에 피를
흘려 얼룩덜룩 반점이 진 분명치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단장홍 유한수와 패왕궁 하불감은 이 여자를 곧 알아보았다.
두 사람의 얼굴에 일시에 차가운 서리가 내렸다. 이 여자는 무림 맹주부
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몽천악은 전혀 이 여자를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자기가 맹주부를 떠난 뒤
에 들어온 사람일지도 모른다. 추측컨대 이 여자는 대략 스물 안팎으로
보이며 여비 정도의 하인인 것 같았다.
패왕궁 하불감은 명령을 내렸다.
"유사제, 사람을 보내 이 시체를 치우게 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경동
케 하지 마라."
하불감은 이렇게 말을 한 후 여러 군웅들을 향해 공수의 예를 표하고 말
했다.
"여러분 도형들, 이 흉수의 내력을 내일 제가 상세히 말씀드릴까 하는데
어떻습니까?"
여러 군협들은 죽은 자에 대해서 알지 못해 묻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하불감의 표정을 보고 이 적이 맹주부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때는 야심한 때라 중인들을 다시 원 안으로 들어가 잠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군호들이 분분히 물러가는 것을 본 몽천악은 속으로 '앗!' 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는 군중들 속에서 오직 다지성 공손보기 늙은 원숭이 한 사람만이 없는
것을 발견했던 것이다.
패왕궁 하불감은 몽천악을 한 번 쳐다보고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고장사, 용서하십시오. 적은 지금 무림 맹주부 구석구석에 박혀 있으며
이 여자는 바로 우리 사모님의 비녀입니다."
몽천악은 사모님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마치 벼락에라도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고라화상이 가볍게 불호를 외우더니 입을 열었다.
"아미타불...... 하현질은 따로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을 것 같으니
노승은 잠시 누각으로 돌아가 있겠네."
말을 마치자 고라화상은 홀로 돌아갔다.
몽천악도 대사형이 무엇인가 매우 힘드는 일의 조사에 착수하려는 것을
알고 즉시 작별을 고하고 누각으로 돌아갔다.
그는 등불을 밝히고 침상에 누워 조금 전 자객을 추격하던 경과를 돌이켜
생각했다.
그는 속으로 손을 너무 무겁게 쓴 것을 후회했다.
"아!"
몽천악은 처량하게 탄식을 하고 독백처럼 중얼거렸다.
"......듣자니 자객은 바로 사모님의 비녀라고 했다. 그렇다면 사모님은
칠 년 전처럼 살인을 업으로 하는 사람을 보내 끝까지 나를 죽여야 마음
이 풀린단 말인가......."
이 순간 몽천악의 뇌리에는 칠 년 전의 한스럽고 수치스러운 일 장의 일
이 떠올랐다.
그 해, 한여름 밤. 그는 셋째 사형 소자명과 절강에서 사모님을 영접하여
돌아오는 도중이었다. 그날 밤 길을 잃어 묵을 곳을 찾지 못하자 할 수
없이 산속에서 사모님과 셋째 사형 소자명 그리고 자기 셋이서 밤을 지새
게 되었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유독 무더웠다. 그는 자정 무렵 슬그머니 산봉우리
아래 계곡에 내려가 목욕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모님과
셋째 사형 소자명의 자취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초조한 마음으로 두 사람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한 조그
만 숲 속에서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추악하고 수치스러운 광경을 발견
하게 될 줄이야.......
부드러운 잔디 위에 밝은 달이 환히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 잔디 위에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남녀가 한창 열정에 들떠 끌어안고 운우의 쾌
락을 즐기고 있었다.
이들 두 남녀는 놀랍게도 사모님과 셋째 사형 소자명이었다.
그 당시 그는 너무나 분노한 나머지 이성을 잃고 외마디 소리를 질러 이
들 한 쌍의 들원앙을 놀라 떨어지게 만들었다.......
잠시 후 셋째 사형 소자명은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고 얼굴에 징그러운
웃음을 띤 채 천천히 숲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 뒤를 따라 사모님도 나
왔다.
사모님과 셋째 사형 소자명의 얼굴에는 살인이라도 하여 증거를 없애려는
무서운 살기가 맴돌고 있었다.
극도의 분노와 비통이 자기로 하여금 한 마리의 맹수처럼 셋째 사형 소자
명을 향해 덮쳐 가게 했으니...... 그는 은사를 위해 스승을 배반한 역도
를 처치하려고 결심했다.
그것은 일 장의 처절한 박투였다. 자기 혼자의 힘으로 셋째 사형과 사모
님이 전력을 다한 대항을 당해 내야 했으니.......
그러나 신불이 도와서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나 싸울수록 힘이 솟
아난 몽천악은 마침내 일 장으로 셋째 사형 소자명을 천 길 낭떠러지 밑
으로 쳐 떨어뜨리고 말았다.
셋째 사형 소자명이 낭떠러지 밑으로 떨어지며 지른 날카로운 비명 소리
와 함께 사모님은 손을 멈추었으며 그 뒤로 이어진 것은 일진의 통곡과
참회였다.
그녀는 비오듯 눈물을 흘리며 청순 가련한 음성으로 셋째 사형 소자명이
어떻게 그녀를 유혹하고 건드렸는가를 하소연했다.
그녀는 비통한 표정으로 사부님이나 다른 사람에게 절대 이 사실을 숨겨
달라고 애걸했다.
그러나 몽천악은 격동되었던 마음이 점차 가라앉고 이성을 되찾았다. 만
약에 그 자상하신 노인께서 이 통탄스럽고 수치스러우며 추악한 일을 아
신다면 마음에 어떠한 상처와 자극을 받을 것인가.......
또한 사부님께서는 무림 맹주의 지존으로서 천하 무림 각파를 영도하고
천만 동료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으신데 만약 이 소식이 무림 안에 새
어 나간다면.......
사부님의 청백한 영명은 당장에 산산조각이 나는 것이다.
이 얼마나 비참한 결과이겠는가!
사모님. 그분은 사부님께서 세 번째 맞아들인 부인으로 그녀의 나이 이제
서른일고여덟에 지나지 않는 완숙한 나이이나 사부님께서 일단 이 추악한
일을 아신다면 사모님이 어찌 이 세상에 살아 남을 수가 있겠는가?
사부님의 영명을 구하고 사부님의 정신에 타격을 주지 않기위해서, 또한
사모님의 가련한 목숨을 위해서...... 그리하여 사실을 감추기 위해 그는
일단의 일을 만들어 냈다.
끝내 자기는 사문에서 축출되어 무림 맹주부를 떠나 비참한 신세로 강호
에 유랑했다. 그러나 가증스런 사모님은 자기의 마음을 몰라주고 악독한
마음을 품어 자객을 매수하여 자기의 행방을 추적하여 죽이도록 하였으
니.......
여기까지 생각한 몽천악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혼
자 중얼거렸다.
"......가증하고 더러운 여인 같으니, 당신은 나 몽천악이 다시 돌아왔다
는 것을 기어코 알아냈단 말이오...... 또한 당신은 내가 그 추악한 일을
남에게 말할까봐 걱정하는 것이오? 그래서 자객을 보내 나를 죽여 입을
봉해 버리려고 하는 것이겠지요...... 으흐흐......."
몽천악은 혼자서 나직하고 음침한 냉소를 흘린 뒤 다시 중얼거렸다.
"더러운 계집, 나는 정말 네게 지금까지 무림 맹주부 안에 남아 있을 만
한 두꺼운 낯짝이 있고 아직 삶에 욕심이 있어 죽기를 두려워하는 심정으
로 아직까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너는 응당 죽어야
마땅한 인간이므로 나 몽천악은 반드시 너를 죽여 그 더러운 목숨을 이
세상에 남겨 놓지않을 것이다."
몽천악의 호랑이같은 눈에서 무서운 살기가 뻗쳐 나왔다. 그는 이미 결심
을 굳힌 것이다. 돌연 몽천악은 다시 하나의 가상을 생각해 냈다.
'혹시 사모님이 매복시켜 놓은 적의 첩자가 아닐까?'
이와 같은 단정은 그로 하여금 황무지에서 물을 만난 듯하게 했다.
사모님이 사부님을 배반하고 그런 더러운 일을 저지른 것과 오늘 밤 그
여자 자객의 솜씨를 볼 때 사모님은 확실히 유력한 용의자 중의 한 사람
인 것이다.
몽천악은 이런 결론을 내리자 마음이 매우 가벼워져 곧 잠에 빠졌다.
오경을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 온 지 얼마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는 몽천악은 문득 꾀꼬리 같은 음성에
눈을 떴다.
소국의 귀엽고 예쁜 얼굴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상공! 상공!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몽천악은 눈길을 옮기다가 "아!" 하고 소리를 내고 벌떡 일어나 앉았다.
벽 쪽 긴 나무의자에 사자 호천옥이 단정히 앉아 있었다.
몽천악은 황급히 침상에서 내려와 호천옥에게 인사를 했다.
"호누님. 언제 오셨습니까? 이거 오시는 것도 모르고 잠만 자고 있었으니
실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호천옥은 여전히 소복 단장을 하고 있었으며 그녀의 눈에는 우수가 깃들
어 있었고 얼굴에는 찬 서리가 내려 있었다.
"고상공, 잠을 깨운 걸 용서하세요. 이렇게 고상공을 깨운 것은 지금 집
안에 또 큰 변고가 일어나서 대사형께서 고상공을 빨리 불러오라고 보내
셨기 때문이에요."
몽천악은 놀라며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호천옥은 담담하게 말했다.
"공손대협께서 돌아가셨어요."
이 말에 몽천악은 펄쩍 뒬 듯이 놀랐다.
"아니 뭐라고요? 다지성 공손보기가 죽었단 말입니까?"
호천옥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피살됐어요."
몽천악은 다급하게 물었다.
"어떻게 죽었습니까?"
호천옥은 시름에 잠긴 듯 말했다.
"오늘 아침 비녀가 그분을 부르러 갔었는데 이미 사지가 굳어 싸늘하게
죽어 있었답니다. 아직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지금 고라신승과 여러
군협들께서는 그곳에서 고상공이 오시기를 기다리고 있어요."
몽천악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간단히 머리와 옷매무새를 고치고 호천옥을
따라 누각을 내려와 다지성 공손보기가 묵고 있던 소원으로 갔다.
여러 군협들은 조그만 객청에 모여 있었다. 이때 패왕궁 하불감과 유한주
가 거실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자 군협들은 일제히 물었다.
"공손보기가 어떻게 죽었습니까?"
"......."
하불감과 유한수는 대답을 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고개를 돌려 몽천악이 와 있는 것을 보자 하불감이 담담하게 말했
다.
"고장사, 들어오십시오. 고라신승께서 안에서 고장사를 기다리고 계십니
다."
"네."
몽천악은 가볍게 대답을 하고 급히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 박달나무 침상 위에 굳어 있는 깡마른 노인. 종남산 삼로(三老) 중의
하나인 다지성 공손보기가 누워 있었다.
침상 곁에 고라화상이 앉아서 공손보기의 시체 구석구석을 자세히 살펴보
고 있었다.
몽천악은 침상 곁에 서서 공손보기의 시체를 바라보았다. 공손보기의 안
색을 백지장 같았고 피골이 상접하여 마치 뼈 위에 껍질을 붙여 놓은 것
같았다.
그는 마치 십여 년간 병에 시달리다가 죽은 사람같이 보였다.
고라화상은 눈을 들어 몽천악을 쳐다보더니 천천히 일어났다.
"상처라고는 한 군데도 없고 중독된 흔적도 없으니 이런 것으로 보
면......."
그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느릿느릿 거실을 걸어 나온 뒤 한숨을 내쉬고 끊
었던 말을 이었다.
"......이것은 피가 말라 죽은 것이오......."
그의 말에 군웅들은 안색이 변했다. 그들은 나직한 음성으로 일제히 외치
는 것이었다.
"피가 마르다니, 어떻게 하룻밤 사이에 피가 말라 죽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몽천악만은 공손보기의 죽음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그는 머리
를 들었다. 그때 그의 눈에 호천옥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의 모습을 본
몽천악은 감히 앞으로 나서서 고라화상에게 질문을 할 수가 없었다.
고라화상이 극히 엄숙한 표정으로 무겁게 입을 열었다.
"고시주, 노승은 시주와 얘기를 하고 싶으니 조금 있다가 하현질 그리고
유현질과 함께 동쪽 누각으로 오십시오."
몽천악은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곧 가겠습니다."
그는 대답하기가 바쁘게 고개를 숙이고 고라화상의 뒤를 따랐다.
잠깐 사이에 동쪽 누각 객청에 당도했다.
패왕궁 하불감과 단장홍 유한수가 곧이어 들어왔다.
고라화상은 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앉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손시주께서 피가 고갈되어 죽은 것은 다시 말해서 양기(陽氣)가 모두
떨어져 죽은 것이오."
몽천악이 다짐하듯 물었다.
"정말 양기가 떨어져서 죽은 것입니까?"
고라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공손시주는 여자의 몸 위에서 죽은 것이오."
몽천악은 "아!" 소리를 내고 다시 물었다.
"이것은 의외의 죽음일까요?"
고라화상은 천천히 말했다.
"시주께서는 어젯밤 공손시주를 미행했으니 그가 어디를 갔었는지 알 것
이오."
그 말에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자기가 공손보기를 미행한 것이 고라화상
이 시야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줄은 천만 뜻밖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즉시 대답했다.
"공손대협께서는 강산미인루에 갔었는데 저는 안까지는 뒤따라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후의 일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그리하여 몽천악은 어젯밤에 다지성 공손보기를 미행한 일을 간략하게 얘
기했다. 그러나 그는 춘색을 훔쳐보고 절세의 여자 한 명을 발견한 일만
은 감추고 말하지 않았다.
단장홍 유한수가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공손대협께선 이곳에 한 달 남짓 묵는 동안 하루 걸러 한 번씩 외출을
했습니다. 저도 한번 뒤따라가 본 적이 있는데 그는 그때도 화가로 욕정
을 풀러 갔었습니다."
고라화상이 말했다.
"공손시주께서 욕(慾)을 금하지 못한다는 것은 나도 들어 알고 있네. 그러
나 그는 사람됨이 올바른지라 한 번도 양가의 부녀자들을 욕보인 적은 없
네. 그러나 이 일이 의외가 아니라고 해도 어딘가 약간 미심쩍은 데가 있
네."
몽천악 역시 그의 죽음에 미심쩍은 데가 많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공손보기가 욕정을 해소시키러 갔다가 뜻밖에 원기를 완전히 잃고
죽었다면 어떻게 하여 무림 맹주부의 침상 위에 죽어 있겠는가? 그리고
몸에 내공을 지니고 있는 무림 고수라고 한다면 결코 양기가 떨어져 죽을
정도까지는 흥분하지 않을 것이다.......'
패왕궁 하불감이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모살이란 말입니까?"
고라화상은 침중하게 말했다.
"노승은 자시 무렵에 공손시주가 혼자 돌아오는 것을 보았고 다시 반시간
후에는 별원으로 왔네. 그리고 고시주 또한 공손시주를 살펴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이 말을 들은 몽천악은 내심 뛰어오를 듯이 놀랐다. 자기의 일거수일투족
이 고라화상의 감시를 벗어나지 못할 줄이야.......
그는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대사의 말씀은 조금도 틀림이 없습니다. 저는 혹시 공손대협이 돌아오지
않을까 걱정되어 한 번 확인하러 갔던 것입니다."
고라화상이 말했다.
"대개 흥분이 도를 넘어 양기가 떨어져 죽는 사람은 그때 즉시 죽어 버리
지 이렇게 멀리까지 돌아와서야 죽지는 않네. 아! 공손시주는 잠들기 전
에 자기가 영원히 깨어나지 않고 구천에서 자게 될 줄은 예기치 못했을
것이오."
단장홍 유한수가 물었다.
"사백님, 그럼 공손대협께서는 어떤 상황 하에서 해를 입은 것입니까?"
고라화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이백 년 전 강호 무림에 대음경(大陰經)이란 기서(奇書)
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네. 그 책에는 일종의 소녀술이 기술되어 있었지.
다시 말해서 일종의 채양보음, 채음보양 등의 사술요학이지...... 이런
사술은 무림도상에 한 번도 출현한 적이 없었으나 지금 공손시주가 죽은
모습이 그 책의 논조와 들어맞았기 때문에 그 대음경이란 기서를 생각해
낸 것이네......."
몽천악은 예리한 빛을 쏘아 내며 말했다.
"그럼 대사는 공손대협이 소녀술에 조예가 깊은 한 여인에 의해 천천히
양기를 빼앗겨 피가 고갈되어 죽었다는 말씀입니까?"
고라화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손시주의 죽음은 확실히 그런 양상을 띠고 있소."
몽천악은 놀라 외쳤다.
"그럼 강산미인루에 그러한 미인이 있단 말입니까?"
고라화상이 말했다.
"청루기원에 그런 여자가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오.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의 목숨을 그처럼 처참하게 해치지는 않을 것이오. 아! 노
승이 고시주에게 묻겠소. 공손시주는 도대체 어젯밤 어디에 갔었으며 도
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었습니까?"
몽천악은 섬뜩하여 말했다.
"대사께서는 제가 한 말을 믿지 않습니까?"
고라화상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젯밤 적은 미리 공손시주의 사망 시간을 계산해 두고 또한 그가 여색
을 좋아한다는 성품을 이용하여 소녀술을 연마한 여인 한 명을 보내 도중
에서 그를 유혹하여 목적을 달성한 것이요. 그리고 상식적으로 볼 때 청
루기원 같은 공중 장소에 그런 여자가 있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고 할 수 있는 것이오."
몽천악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한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사 등 여러분께서 믿지 않는다
면 저 역시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사실 몽천악은 다지성 공손보기의 죽음에 대해 경악감을 금치 못하고 있
었다.
고라화상은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럼 공손시주의 죽음에 대해서 노승은 덮어두고 고시주께서 객사시킨
그 자객에 대해서 얘기하겠소......."
몽천악은 고라화상이 자기에게 심문하려는 신색을 보이자 속으로 생각했
다.
'이 심사가 치밀한 노화상은 벌써부터 나에게 혐의를 품고 있었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올가미를 만들어 나로 하여금 가장 중요하고 기밀에 속하는
일에 참여시킨 뒤 암중으로 감시, 조사하려는구나.'
이때 고라화상이 계속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시주에게 맞아 죽은 자객은 바로 호맹주 부인의 신변 비녀 중의
한 사람이오. 지금 노승이 시주에게 묻겠는데 그 비녀가 왜 시주를 암살
대상으로 삼았느냐는 것이오."
그러자 몽천악은 돌연 손을 품속에 넣어 그 붉은 쪽지를 꺼내 낭랑한 음
성으로 말했다.
"대사께선 우선 이것을 보십시오."
고라화상은 그것을 받아 펼쳐 본 뒤 다시 패왕궁 하불감에게 건네주고 입
을 열었다.
"과연 시주가 우리와 같은 길의 사람이라면 적이 이런 편지를 보냈을 때
시주는 반드시 그 첩자를 사로잡아 엄중히 다스려야 옳았을 것이오. 그런
데 시주는 어째서 일격에 쳐죽였소?"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도 지금 그 자객을 쳐죽인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있습니다."
고라화상은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을 내쏘며 몽천악을 응시한 채 침울한 음
성으로 말했다.
"노승이 시주에 대해 일단 그렇게 가상한 것에 대해 용서하고 시주께서
반박을 할 수 있는지를 보겠소이다."
몽천악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네, 말씀해 보십시오."
고라화상은 말했다.
"만약 노승이 시주를 적의 고급 사자로서 명을 받들고 무림 맹주부에 잠
복해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시주는 어떻게 변명을 하겠소?"
몽천악은 장탄식을 했다.
"지금 제가 자신의 신분 내력을 밝힌다면 아마 대사께서는 저를 더 이상
의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 그러나 일개 신분이 불투명한 사람으
로 무림 맹주부에 몸을 담고 있으니 혐의를 피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
그는 잠시 말끝을 흐리고 다시 한 번 탄식을 하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어쨌든 좋습니다. 저는 지금 대사께 한가지 일을 여쭈어 본 뒤 곧 이곳
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고라화상이 말했다.
"무슨 일이오?"
몽천악은 우울한 음성으로 물었다.
"다른 게 아니라 공손보기는 정말 양기가 모두 떨어져 죽은 것입니까?"
그 순간 고라화상의 안색이 급변했다가 곧 회복되었다.
고라화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고시주께서는 친히 그의 주검을 보시고도 어찌 그런 질문을 하시오? 그
럼 시주께서는 그가 어떻게 죽었다고 생각하시오?"
몽천악은 흠짓했다.
"그의 시신을 보니 확실히 피가 고갈되어 죽었습니다."
고라화상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시주께선 또 무슨 일을 의심하는 것이오?"
몽천악은 탄식을 했다.
"그것은 제가 공손보기의 사인을 확실하게 규명해야만이 범인 수사에 착
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고라화상이 침울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고시주, 노승이 이제 시주에게 분명히 말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됐소. 여러
군협, 그리고 하대리맹주(代理盟主) 등 여러분은 내력이 불명한 사람이 중
원 무림 연맹 대사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고 있소."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이며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지금이라도 즉시 이 무림 맹주부를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신분 내력만은 밝힐 수가 없습니다."
단장홍 유한수가 돌연 차갑게 웃으며 나섰다.
"고형께서 신분 내력을 밝히지 않고 이 무림 맹주부를 무사히 물러가기는
좀 어려울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몽천악은 눈썹을 꿈틀거리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들은 눈앞에 정사를 놓아둔 채 그건 처리할 생각은 않고 어찌 나의
내력만을 파고들려는 것입니까?"
단장홍 유한수는 웃으며 말했다.
"그것은 군협들의 의사이며 그들은 지금 누각 아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기구한 신세
그 말을 들은 몽천악은 돌연 탄식을 하고 입을 열었다.
"당신들이 정녕 나를 불신한다면 언젠가는 깊이 후회할 날이 올 것이오."
그는 다시 "아!" 하고 장탄식을 하고는 고개를 돌려 패왕궁 하불감을 향
해 말했다.
"애당초부터 당신들이 나를 불신했다면 무슨 속셈으로 나를 당신네들의
대사에 참여케 했소? 그리고 이제 와서 물러가지 못하게 하니 도대체 나
를 어쩔 작정이오?"
패왕궁 하불감은 담담히 대꾸했다.
"고장사께서는 어째서 자신의 신분을 정정당당히 밝히지 못하십니까?"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패왕궁 하불감은 안색을 굳혔다.
"정녕 고장사께서 신분을 밝히지 않는다면 여러 군협들께서 고 장사가 떠
나는 것을 단호히 막을 것이오."
몽천악은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렇다면 이 기회를 빌어 내가 배운 무공을 한 번 평가해 봐야
겠군요."
말을 마치자 몽천악은 자리에서 일어나 누각 밑으로 걸어 내려갔다.
"흥!"
단장홍 유한수는 차갑게 냉소를 날리고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뒤
를 이어 패왕궁 하불감이 무겁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둘째 사제, 함부로 행동하지 마라!"
몽천악이 내심 두려워한 것은 대사형과 둘째 사형이 손을 써서 앞을 막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때 대사형이 둘째 사형을 말리는 것을 보자 조금은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그는 한걸음 한걸음 계단을 내려와 대문 앞에 당도했다. 과연 그곳에는
여러 군협들이 청원 안에 모여서 수십 줄기의 날카로운 안광으로 일제히
쏘아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몽천악은 그런 것은 아랑곳없다는 듯이 가슴을 펴고 고개를 쳐든
채 정원 가운데 깔린 자갈길을 향해 걸어 나갔다.
이때 고라화상과 하불감 그리고 유한수 등도 모두 누각에서 내려와 대문
앞에 굳은 듯이 서 있었으며 하나같이 심각한 신색을 하고 있었다.
막 몽천악이 정원으로 걸어 나갈 무렵.
돌연 날카로운 고함 소리가 울려 퍼졌다.
"멈추시오!"
인영이 번쩍이는 순간 우람한 몸집에 남삼을 입고 구레나룻을 기른 사나
이 하나가 몽천악의 앞을 가로막았다.
몽천악은 곧 이 사람을 알아보았다. 그는 점창파 점창쌍웅 중의 하나인
원비금도 홍통남이었다.
몽천악은 차갑게 웃었다.
"흐흐흐, 홍대협, 제게 견교가 있으십니까?"
원비금도 홍통남은 껄껄 웃었다.
"나는 형씨의 절학을 몇 초 배울까 하오. 하하하."
몽천악은 심신을 진정시키고 담담하게 말했다.
"홍대협, 좋으실 대로 하시오."
이와 같이 태연한 응답은 원비금도 홍통남을 움찔하게 하여 그 자리에 멍
청하게 굳어지게 만들었다.
몽천악이 다시 냉랭하게 입을 열었다.
"홍대협, 왜 손을 쓰시지 않고 그렇게 서 계십니까?"
원비금도 홍통남은 돌연 몽천악이 자기를 경멸하는 줄 알자 노함을 금치
못하고 고함을 쳤다.
"좋다! 너에게 도대체 얼마만한 재간이 있기에 이렇듯 대담하고 방자하게
구는지 똑똑히 보아야겠다."
그는 말을 하면서 몽천악의 면상을 향해 일 권을 내질러 갔다. 그 기세는
위맹했고 공력은 웅후했다.
"흥!"
몽천악은 냉소를 날리고 오른발로 중궁의 방위를 밟고 들어가 오른손을
들어 적의 완맥을 절단해 갔다.
이러한 한 번 출수에 정원 안의 군협들은 안색이 일제히 변했다.
원비금도 홍통남은 현재 점창파 장문인의 사제이며 무공도 심후했고 또한
일파 종사의 신분이었다.
그는 몽천악의 양쪽 어깨가 약간 기우는 것을 보자 오른손을 헛 짚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얏!"
그는 즉시 매섭게 고함을 지르고 왼쪽 허리춤에서 왼쪽 주먹을 잽싸고 강
하게 쳐냈다.
이 초식은 점차파의 유명한 궁전권이었다. 주먹이 쳐 나가는 기세는 마치
유성과 같아 그 속도는 어디에 비할 데가 없었다.
관전하고 있던 사람들은 홍통남의 일전이 정말 피하기 어려울 것임을 알
아보았다.
그러나 몽천악은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그는 약간 몸을 움츠리며 주먹
을 질렀다.
"팍!"
커다란 음향이 일었다. 그러자 유비금도 홍통남은 휘청휘청 서너 걸음 뒤
로 물러나서야 겨우 몸을 가누었으나 왼팔은 이미 축 처져 있었고 이마에
는 구슬 같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이 일 초의 접촉을 군호들은 똑똑히 보았다. 몽천악은 전광석화와 같은
순간에 홍통남의 오른팔 완맥을 차단시킨 오른손을 팔꿈치로 가격하는 수
법으로 변화시켜 몸을 약간 움츠리는 사이에 홍통남의 왼팔 기골을 격중
시킨 것이었다.
이 두 초의 접촉으로는 진실한 실력을 알아낼 수 없었으나 쌍방의 승부는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즉 이 승부에서 패한 것은 강호에 이름이 혁혁한
무림 고수인 것이다.
이 놀라운 승부는 군웅들로 하여금 아연 실색케 했다.
이때 패왕궁 하불감이 고라화상을 향해 말했다.
"사백님, 저 사람의 팔꿈치 가격은 극히 오묘하게 운용되어 저 사람의 무
공을 결코 소홀히 볼 것이 아니군요."
고라화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손을 들고 팔꿈치로 가격하는 두 초의 무기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
미 저 사람은 무학의 깊고 넓음을 과시했네."
몽천악은 홍통남을 격퇴시킨 후 공수의 예를 표했다.
"홍대협, 실례했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다시 걸음을 옮겨 나갔다.
그러자 낮으면서도 목쉰 듯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귀하, 잠깐 걸음을 멈추시오, 노부가 한 수 가르침을 받으러 왔소이다."
등에 장검을 맨 흑의의 노인 한 명이 천천히 걸어 나와 몽천악의 석 자
앞을 가로막고 섰다.
몽천악은 그 노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는 미간을 약간 찌푸렸다.
"욱관주, 귀수를 높이 들어 길을 양보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원래 이 키가 크고 깡마른 흑의의 노인은 무림에 이름을 떨치는 공동산
현천관 욱청풍 관주로서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것은 자전검이었다. 그는
이미 공동파의 십삼투검법을 노화순청의 경지까지 터득했다고 하며, 강호
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이미 최고 상승검법인 어검술을 터득했다는 것
이다.
현천관주 욱청풍은 미소를 지었다.
"고장사, 노부가 몇 초 가르침을 받아 쌍방의 무공을 평가해 보고 무학을
비교해 보자는 것인데 안될 게 뭐 있겠소?"
몽천악은 오늘 자기가 무공을 발휘하지 않고는 이곳을 떠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들자 낭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정녕 뜻이 그러시다면 솜씨 비록 보잘것없으나 사양할 수가 없겠군요."
현천관주 욱청풍이 말했다.
"노부는 검을 연마하는 데 평생을 바쳐 온 터라 한 시도 손에서 검이 떠
나지 않았소이다. 귀하는 무슨 무기를 사용할지 모르겠으나 어서 무기를
뽑으시오."
몽천악은 낭랑하게 말했다.
"저는 장법에 뛰어났으니 욱관주께서는 마음껏 손을 써 보십시오."
욱청풍은 섬뜩했다.
"좋소이다. 그럼 손을 쓰겠소."
말을 하기가 무섭게 욱청풍은 뒤로 반 걸음 물러나며 오른손으로 메고 있
던 장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자 번쩍하며 차가운 검광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자전검이 검집에서 나와 빛을 발하자 욱청풍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팔목에 힘을 주어 몽천악의 앞가슴을 향해 곧장 일 검을 찔러 갔다.
욱청풍은 무림에서 이름이 있는 검술가였다. 그가 검을 뽑아 찔러 가는
그 번개 같이 빠르고 맹렬한 검세를 보더라도 그의 검초가 어소 정도라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군협들은 오래 전부터 욱정풍의 검법이 강호를 독주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실지로 그가 검법을 발휘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은 극히 드물었으
므로 중인들은 너나할것없이 정신을 집중시키고 이 일전을 관전했다.
몽천악은 상대방의 검술이 절교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듯 조금도 적을 경
시하는 빛이 없었다. 그는 부리부리한 눈동자에서 날카로운 안광을 번쩍
이며 검식이 찔러 오는 것을 응시했다. 그는 왼손을 반쯤 들어 검세를 맞
이하며 떨쳤다.
현천관주는 몽천악이 왼손을 떨쳐 오는 것을 보자 안색이 대변했다.
"앗!"
그는 가볍게 소리를 지르며 돌연 허리를 굽히고 검을 거두어 들였다가 다
시 퉁겨 냈다.
자전검은 왼쪽을 찌르고 오른쪽을 쓸면서 순식간에 삼 초의 공격을 퍼부
었다.
그러자 검세가 괴이하여 차가운 빛이 유동하고 마치 찌르는 것 같기도 하
고 쪼개는 것 같기도 하여 보는 사람을 어지럽혔다.
옆에서 관전하던 고라화상이 가볍게 탄식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가 한 번 떨쳐 낸 손은 아주 심오한 불맥진혈이오, 내가의 수법이니,
보건대 저 사람의 무공은 기이할 정도로 절묘한 것 같네!"
패왕궁 하불감과 단장홍 유한수 역시 몽천악이 떨쳐 낸 내가의 절학을 알
아보고 극히 심각한 표정으로 전장을 주시했다.
이때 몽천악은 삼 검의 번개 같은 공격을 받고 뒤로 세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침착하게 삼 초의 검식을 모두 피했다.
욱청풍은 역시 검술의 명가답게 적에게 반격을 고사하고 숨돌릴 여유도
주지 않고 왼발을 성큼 내딛으며 팔목에 힘을 주고 맹렬하게 정면을 찔러
갔다.
그러나 몽천악은 더 이상 피하지 않았다. 그는 돌연 두 눈에서 차갑고 날
카로운 빛을 쏘아 냈다.
"얏!"
태산을 무너뜨릴 것 같은 기합 소리를 지르며 몽천악은 오른팔을 질풍같
이 쳐내 잽싸게 검등을 향해 휠둘렀다. 그러자 한 줄기 장력이 검을 밀어
냄과 동시에 왼손으로는 적의 검을 쥐고 있는 오른 손목을 낚아채 갔다.
현천관주 욱청풍은 깜짝 놀라 황급히 세 걸음이나 뒤로 물러나 검세를 돌
변시켰다. 그러자 허공을 가르는 검풍이 일고 차가운 빛이 사방으로 퍼져
그 기세는 마치 광풍 노도처럼 훌륭했다.
몽천악은 차갑게 코웃음을 날리고 옷자락을 펄럭이며 욱청풍의 날카롭고
매서운 검풍 속으로 뛰어 들었다. 그는 왼손으로는 검세를 막고 오른손으
로는 적에게 공격을 가했다. 이때 쌍장의 변화는 무상했으며 또한 그의
신법은 마치 용이 물에서 장난을 치는 것 같아 실로 신기한 무공이라 아
니할 수 없었다.
여러 군협들은 모두가 무림 종사의 신분인지라 무공이 극히 높았다. 그러
나 그들은 이 일 장의 박투를 보자 모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몽천악의 신법과 욱청풍의 검초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
다.
눈 깜박할 사이에 쌍방은 십여 초를 겨루었다.
이때였다. 돌연 듣기조차 답답한 콧소리가 들려 왔다.
그러자 몽천악이 검영 속에서 허공으로 뛰어올라 삼사 장밖에 내려앉았
다. 그가 즉시 몸을 돌리고 몸을 몇 번 솟구치는 사이에 그의 그림자는
정원 안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너무나도 갑작스런 변화인지라 중인들은 미처 손도 쓰지 못하고 멍청히
서서 닭 쫓던 개처럼 쳐다만 보고 있었다.
이때 비탄에 잠긴 탄식 소리가 군호들의 신심을 깨우쳤다.
군웅들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자전검을 거꾸로 든 채 맥이
빠진 듯 숙연히 서서 욱청풍이 말하고 있었다.
"졌다, 졌어. 그래도 노부는 삼십여 년간이나 검을 연마했는데 오늘 놀랍
게도 이름없는 강호 후배의 손에 패하다니......."
단장홍 유한수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욱관주께선 검으로 그의 팔을 상케 하시고는 어째서 패했다고 하시는 것
입니까?"
현천관주 욱청풍은 고개를 들고 처량하게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렇소. 노부는 분명히 그의 왼팔에 부상을 입혔소. 그러나 그는 먼저
내 가슴에 일 장을 가했소. 만약 그가 장에다가 내경을 주입했다면 노부
는 아마 벌써 목숨을 잃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그의 왼팔에
부상을 입히지 못했을 거요."
이제 보니 조금 전의 그 전광 석화와 같은 결정적의 일 초는 고라화상,
패왕궁 하불감, 그리고 무당의 황학도장등 불과 몇 사람만이 똑똑히 보았
을 뿐 다른 사람들은 쌍방이 어떻게 승부를 지었는지 알지 못했고 심지어
는 몽천악이 부상을 입고 도망간 것은 아예 보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고라화상은 두 눈을 굳게 감고 있었는데 마치 무슨 중대한 결정이라도 내
리는 듯했다. 그는 돌연 눈을 번쩍 뜨고 무거운 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사람의 높은 공력은 실로 상상 밖이라 아니할 수 없소. 더욱이 그의
무학, 문파, 초식은 어느 누구도 알아낼 수가 없어...... 그가 만약에 적
이라면 확실히 우려할 일이요."
패왕궁 하불감은 심각한 표정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돌연 나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사람의 장법은 기이하고 예측할 수 없이 신속하며 변화무쌍하나 광명
정대함을 잃지 않아 그 문로가 약간 흡사한 것이......."
그는 뒷말을 흐리다가 마침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흔들며 다시 말을 계속
했다.
"...... 그러나 그 심후하고 장엄한 기질 속에 또한 말할 수없이 음독한
수법이 포함되어 있으니, 아! 정말 갈피를 잡기가 어렵군요."
그러자 고라화상이 하불감의 얼굴을 뚫어지게 주시하며 천천히 물었다.
"하현질은 지금 그가 어떤 사람의 문로와 흡사하다는 것인가?"
패왕궁 하불감은 천천히 대답했다.
"네, 그건 가사의 장법 기질과 흡사하나 자세히 관찰해 보니 그렇지도 않
군요. 원래 천하의 무학은 같은 줄기이니 어쩌면 제가 신경 과민으로 잘
못 본 걸 겁니다."
고라화상은 그 말을 듣자 아무 말도 없이 묵묵히 눈을 감고 입정한 듯 다
시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고라화상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현질, 어서 사람을 보내 고봉을 쫓아가 죽이도록 하게."
패왕궁 하불감은 섬뜩했다.
"고라사백, 어째서 그런 결정을 하셨습니까?"
고라화상은 두 눈에 신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노승은 생각이 났네. 어쩌면 그는 마검신군 조전신의 문인일 걸세."
한편 몽천악은 쾌속한 경공을 전개하여 지붕과 담을 넘어 무림 맹주부를
달려나온 뒤 계속 달려갔다.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그대로 삼 리를
달려간 후에야 걸음을 멈추고 상세를 살펴보았다.
왼팔은 선혈이 낭자했고 옷소매를 완전히 붉게 물들여 놓고 있었다. 상처
의 길이는 약 세 치, 깊이는 두 푼 정도였고 은은히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옷소매를 찢어 상처를 싸매며 답답한 듯 숨을 토해 내고 중얼거렸
다.
"공동의 검법이 과연 매섭구나. 만약 내가 지난 칠 년 동안에 기우가 있
어 절학을 터득하지 않았던들 어떻게 욱청풍의 괴기한 검법을 당해 낼 수
가 있었으랴."
그는 천천히 나무 그늘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하늘의 흘러가는 구름
을 바라보며 자신도 모르게 다시 중얼거렸다.
"앞길이 망망한데 이제 어디로 가야 한단 말이냐? 아...... 내가 다시
무림 맹주부에 들어가 편안히 거하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더니 겨우
이틀 밤과 하루 낮 사이에 다시 쫓겨나 천하를 유랑하게 될 줄을 어찌 알
았겠는가! 사부님, 설마 사부님의 영혼이 현령하셔서 제가 다시 무림 맹
주부 대문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사부님, 만약 사부님의 음혼에 영이 있으시다면 저승에서나마 칠 년 전
저의 무고함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셋째 사형 소자명을 죽인 것을 사감
이 있어서가 아니라 사부님을 위해서 문호를 청소하고 정리한 것입니다."
몽천악은 연신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기구한 운명과 외롭고
쓸쓸했던 일생과 앞으로 험한 가시밭길을 뛰어다녀야 할 일생을 그려 보
았다.
비참한 운명의 장난을 생각하니 새삼 그 가증스럽고 더러우며 골수에 사
무치도록 한스러운 사모님 백연령의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사모 백연령, 그 음부만 아니었던들 자기 신세가 이렇듯 처량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허리를 굽히고 왼발을 뒤의 힘살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돌연 원한의
불꽃이 가슴속에서 타오르기 시작하여 허공에 대고 외쳤다.
"이 더러운 음부야, 너는 칠 년 전 내 왼발 뒤의 힘살을 끊어 절름발이를
만들어 놓더니 그것도 모자라 어젯밤에는 다시 자객을 보내 나를 해치려
고 했으니...... 아! 이 몽천악은 결코 너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것
이다......."
생각하고 생각하다가...... 몽천악은 나무에 머리를 기댄 채 피곤하여 그
만 깊이 잠에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졌고 날이 어두워져 있
었다.
몽천악은 길게 기지개를 켰다. 이때 가볍게 바람이 불어왔다. 그러자 그
바람을 타고 구수한 고기 냄새가 흘러와 갑자기 매우 시장기를 느끼게 했
다.
그는 입에서 감도는 침을 삼키고 머리를 들어 사방을 둘러보았다. 별로
멀지 않은 조그만 숲 속에서 불빛이 깜박거리고 있었고 바로 그 옆에 거
지 차림의 사람 한 명이 앉아서 불 위에 무엇을 굽고 있었다. 그 구수하
게 풍겨 오는 고기 냄새는 바로 그곳에서 흘러 나오고 있었다.
몽천악은 시장한 배를 안고 속으로 생각했다.
'길에 나가 음식을 사 먹자면 적어도 이삼 리는 더 가야 하니 차라리 저
거지에게 가서 반 마리의 군 닭을 사서 우선 요기를 하자.'
그는 즉시 그 조그만 숲을 향해 달려갔다. 과연 생각은 적중했다. 그 불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은 먹음직스럽게 생긴 한 마리의 살찐 닭이었다.
이때 그 거지는 마른 나뭇가지 하나를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불을 조정하
느라고 몽천악이 일 장 밖까지 온 것을 느끼지 못한 듯했다.
"여보시오. 친구! 잠깐 실례하겠소이다."
몽천악은 가벼운 음성으로 불렀다.
그 거지는 고개조차 들지 않고 계속 불을 조정하며 대답했다.
"헤헤헤, 친구, 앉으시오. 나는 당신이 배가 고프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요."
그러자 몽천악은 미안한 듯이 말했다.
"저는 귀하께서 그 닭 반 마리만 나누어 주셨으면 합니다. 값은 얼마든지
드리겠소."
그 거지는 돌연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부귀는 뜬구름과 같고 재물은 똥이나 흙과 같은 것, 돈 얘기를 한다
면 팔지 않겠소이다."
몽천악은 잠시 멍청히 있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피차가 생면부지라 저는 미안해서......."
그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그 거지가 차가운 음성으로 가로챘다.
"그럼 당신은 그대로 굶어 보시오."
구수한 고기 냄새가 몽천악으로 하여금 연신 군침을 삼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위인됨이 중후한지라 오히려 가가호호 돌아다니며 구걸하는 이 거지
를 동정하여 내심 생각했다.
'내가 은자로 그의 닭을 조금 사 먹는 것은 무방하나 그가 그런다고 해서
어찌 거지에게 음식을 그냥 얻어먹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결정을 짓지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돌연 그 거지가 "히!" 하고 외쳤다.
"익었다, 익었다!"
이때 그는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버리고 때가 새까맣게 낀 손으로 불같이
뜨겁고 연기가 나는 그 살찐 닭을 집어 가는 것이 아닌가!
이것을 본 몽천악이 외쳤다.
"조심하시오. 손을 데겠습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 거지는 벌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닭다리 한 개
를 뜯어 며칠 굶은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입 속으로 쑤셔 넣었다.
이때서야 몽천악은 그 거지의 얼굴을 똑똑히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 거지는 아주 젊은 청년으로 나이는 스무 서넛 정도 되어보였고 청수하
고 번듯하게 생긴 얼굴에 큰 귀, 칼날 같은 눈썹에 형형한 눈동자와 우람
스럽게 생긴 코하며 피부 또한 희고 부드러워 만약 헤어지고 때가 묻은
장삼을 입지 않았다면 그는 풍류 공자이지 거지라고 할 사람을 아무도 없
었을 것이다.
몽천악은 견문이 넓은지라 이 거지는 어쩌면 무림에서 수백년 동안 이름
을 떨쳐 오는 궁한방의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궁한방은 강호상에서 가장 큰 방파로서 방중 또한 많아 대강 남북 구석구
석 그들의 자취가 없는 곳이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무림연맹에 가입하지 않고 항상 그들 스스로의 본분만을 지켜 가
며 행동하며 무림의 어떠한 문파와도 교류가 거의 없는 바로 정사간에 있
는 한 조직이었다.
돌이켜보면 십여 년 전 가사께서 무림 맹주를 맡고 있을 당시 무림맹 중
의 곤륜파와 궁한방 사이에 사건이 발생하여 궁한방과 무림 연맹의 대립
으로 발전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 역시 사부님이 직접 궁한방 당대 방주를 찾아가 사
과를 하여 극한 상태를 면하게 되었었다. 궁한방의 현재 세력은 중원 구
대문파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황야의 시비
그 거지는 몽천악이 그곳에 멍청히 서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닭의 다리 하
나를 뜯어서 던져 주며 외쳤다.
"자, 받으시오!"
닭 다리가 날아가는 속도는 화살과 같았다. 그러나 몽천악은 조금도 당황
하지 않고 받았다.
몽천악은 이 거지가 궁한방의 한 인물일 것이라고 생각한 뒤부터 더 이상
겸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쪼그리고 앉아 그 거지보다 더 게걸스럽게 입을 크게 벌리고 닭 다
리를 뜯어 눈 깜박할 사이에 뼈만 남기고 먹어 치웠다.
그 거지는 허겁지겁 닭 다리를 뜯어먹는 몽천악을 보더니 히죽 웃었다.
"천애는 이웃과 같고, 사해는 형제이니 마음놓고 먹으시오."
몽천악은 입을 벌리고 한차례 바보스럽게 웃은 뒤 조금도 사양하는 기색
없이 닭고기를 뜯어먹어 댔다.
순식간에 서너 근은 실히 될 살찐 닭 한 마리가 뼈만이 덩그렇게 남았다.
몽천악은 어느 정도 시장기를 면하자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귀하의 존성 대명은 어떻게 되시는지요?"
거지는 눈을 부릅떴다.
"당신은 별로 신통하게 생긴 것도 없는데 무슨 궁상을 그렇게 떠시오. 내
가 묻겠는데 당신의 이름은 무엇이오?"
몽천악은 이 거지에게 약간 호감이 가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의 성은 고씨이고 이름은 봉이라 합니다."
거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 성도 이름도 모두 가짜군요."
몽천악은 움찔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상대방은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강호 무림에서 그런 이름을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소이다."
몽천악은 내심 놀라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궁한방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사람이 분명할 것이다. 그가
닭 다리를 던진 그 웅휘한 힘을 보더라도 내공이 심후하니까 말이다.'
몽천악은 미소를 띠고 말했다.
"그렇다면 귀하도 무림 사람이겠군요."
"당신은 이미 내가 궁한방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그런걸 새삼스럽게
물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당신은 아직도 성명을 말씀하시지 않았는데요?"
"아, 나는 도소호(屠小虎)라고 합니다."
"아, 그렇습니까. 오늘 밤, 도형의 닭 고기 정말 고마웠습니다."
"그 닭은 무림 맹주부 안에서 훔친 것이니 감사를 하려면 그들에게 하시
오."
몽천악은 섬뜩했다.
"당신은 무림 맹주부에서 왔었습니까?"
"나는 당신이 욱청풍과 싸우는 것도 보았소이다. 흥! 그들 구대문파는 정
말 수치도 모르더군요. 패했으면 깨끗이 물러날 일이지 또 다시 남에게
일 검을 찌르니 말이오."
몽천악은 내심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도소호가 무림 맹주부에 잠입
한 사실은 귀신도 몰랐으며 또한 자기와 현천관주 욱청풍과의 싸움을 일
초 일 식 세밀하게 관찰했으니 그의 무공이 어느 정도 높다는 것을 알 수
가 있었던 것이다.
도소호는 몽천악을 한 번 쳐다보고 다서 물었다.
"나는 당신을 결코 과찬하는 것이 아니오. 그러나 당신은 무공이 매우 높
으며 또한 광명 정대한 사람이오. 우리 궁한방에서는 당신 같은 사람을
환영하는데 가입하고 싶은 의사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지금 아무 걱정도 없고 행사가 자유스러운데 도형께서는 왜 나에게
그런 속박을 가하려고 하십니까?"
도소호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우리 궁한방에 입방하려면 그 수속이 매우 엄격하고 신중합니다.
그러나 나는 고형의 얼굴을 처음 보는 순간 여러 해 사귄 친구 같은 생각
이 들어...... 어쨌든 좋습니다. 후일 고형께서 폐방에 가입하실 마음이
드시면 언제든지 제게 연락만 해주십시오."
"도형의 성격이 호탕하고 솔직하며 또한 잔정으로 남을 대하니 나는 오늘
좋은 친구 하 분을 사귀게 되었군요."
그러자 도소호는 일어나며 말했다.
"지금 나는 폐방 방주의 밀령을 지니고 개봉부에 몇 가지 중대한 일을 조
사하러 와 있으므로 더 이상 긴 얘기를 할 수 없으니 다음에 만나기로 기
약합시다."
그는 말을 마치자 몽천악에게 깊이 허리를 굽히고 곧장 몸을 돌려 떠나갔
다.
몽천악이 낭랑하게 말했다.
"도형, 몸조심하십시오. 나중에 다시 만납시다."
그러자 도소호는 몇 걸음 걷다가 갑자기 몸을 돌려 말했다.
"도형, 소림 신승 고라화상은 고형을 추격 살해하라는 명을 내렸으니 고
형은 각별히 조심해야 할 것이오."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도형,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들을 대하겠습니다."
도소호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몸을 돌려 훌쩍 치솟더니 마치 한 줄기
파란 연기처럼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몽천악은 연기처럼 사라져 가는 도소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 무엇
을 잃은 듯한 아쉬움을 느꼈다.
이 새로 사귄 친구 도소호는 자기에게 정말 숨김없이 솔직하게 대해 주었
으며 또한 진지함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더욱이 도소호가 떠나기 전에 알려준 말은 몽천악을 감개무량하게 만들었
다. 고라화상이 내린 명령은 어쩌면 자기로 하여금 동문과 대치, 싸우게
할는지도 모른다.
'아! 그렇다면 나는 이대로 사라져 먼 심산유곡에 파묻혀 은거해야 한단
말인가.......'
밤하늘에 반짝이는 작은 별들은 몽천악의 심신을 흔드는 것 같았다. 그는
개봉에 더 머물러 있어야 할지 그리고 계속 사부님을 살해한 범인을 수사
해야 할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알 수가 없었다.
중원 무림에 자기 한 사람쯤 없다고 해도 사부님을 살해한 원수는 조사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자기는 응당히 이대로 떠나야 하는 것이다.
가을 바람이 가볍게 불어와 몽천악의 옷자락을 날렸다. 그는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혼자 터벅터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밤! 밤은 신비하고 기이한 것이다.
돌연 딩동하는 요령 소리가 들려 와 더욱 밤의 신비감을 돋우었다.
몽천악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황야의 어둠 속에서 가마 한 채가
나타났으며 그 요령 소리는 바로 그 가마 위에서 들려 온 것이다.
몽천악은 미간을 찌푸리고 재빨리 몸을 날려 수풀 속에 숨어들어 가마가
가까이 다가오기를 지켜보았다.
그 가마는 이인교로 가마꾼은 뜻밖에도 묘령의 두 소녀였다.
가마 오른쪽에는 다시 청삼을 입은 소녀 한명이 따르고 있었고 가마 문에
는 휘장이 내려져 있어 어떤 사람이 타고 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마를 메고 있는 묘령의 두 소녀는 겉으로 보기에는 바람조차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가마를 들고 가는 그녀들의 발걸음은
극히 민첩했다.
이 신비한 가마는 순식간에 몽천악의 앞을 지나 서남쪽으로 멀어져 갔다.
몽천악은 수풀 속에서 나와 멀어져 가는 가마를 바라보다가 알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가마꾼이란 보통 남자들인데, 어찌 저런 묘령의 아가씨들이 가마를 메고
가는지 모르겠구나. 도대체 그녀들은 이밤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그는 억제할 수 없는 호기심이 일어나 곧 가마가 사라져 간 방향을 향해
쫓아갔다.
대략 삼사 리 정도 뒤쫓았으나 가마의 그림자는 간 곳이 묘연했고 그 경
쾌한 요령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몽천악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가마꾼의 걸음이 어찌 이렇듯 빠를 수가 있을까? 어째서 가마가 보이지
않을까? 아, 어쩌면 방향을 잘못 쫓은 것인지도 모른다.'
몽천악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마침내 그는 조금 전에 숨었던 수풀까지 왔으나 가마의 종적은 발견할 수
가 없었다.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이구나!'
몽천악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넋이 나간 듯이 넓은 황야에 멍청히 서 있었
다.
갑자기 이 황량한 들판에 다시 야행인 한명이 나타났다. 그 사람의 경공
은 약하지 않아 멀리서부터 허공을 나는 바람 소리가 들려 왔다.
몽천악은 다시 잽싸게 풀 속에 뛰어들어 숨었다. 잠시 후 그 야행인은 두
서너 장 밖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고 두리번거리며 사방을 살펴보았다.
몽천악은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이 야행인은 이미 이곳에 사람이 있는 것을 발견했는지도 모른
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야행인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던 것이다.
"아마 저 조그만 소나무 그림자를 잘못 본 것이겠지."
그는 다시 경공을 전개하여 몽천악이 숨어 있는 앞을 지나 서남방을 향해
달려갔다.
몽천악의 눈길은 예리한지라 어둠 속에서도 그 야행인의 복장을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바로 무림 맹주부 위사들의 복장이었다.
순간 몽천악의 뇌리에 한 가지 생각이 번개같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즉시 절고한 초상비의 경공을 전개하여 야행인의 뒤를 추격했다.
몽천악의 경공은 이미 순청의 경지에 이른지라 그 야행인과 십여 장의 거
리를 유지하며 마치 유령처럼 일 리 반 정도 추격했다.
돌연 그 야행인이 몸을 날려 길 가의 한 울창한 숲 속으로 피신해 들어가
는 것이 보였다.
몽천악은 다른 방향에서 추격해 들어갔다. 숲 속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나
무에 가려 하늘의 별도 볼 수 없었다. 물론 야행인의 그림자를 볼 수 없
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몽천악은 영민한 귀로 야행인이 낙엽을 밟고 가는 소리를 듣자 상
대방이 팔 장 밖에서 남쪽의 숲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
냈다.
약 이 장 정도 깊이 들어가자 눈앞이 약간 트이며 한 조각의 공터 위에
돌연 붉은 담을 둘러친 고찰 한 채가 나타났다.
몽천악은 이런 깊은 숲 속에 고찰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호기심이 크게 일어나 숲 속에 숨어 조용히 변화를 관찰했다.
이 고찰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은 듯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웠고 죽
은 듯이 조용했다.
또한 담장은 여기저기가 허물어졌으며 지붕의 기와는 깨어졌고 색이 바랜
벽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낡고 부서져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야행인은 발걸음도 가볍게 고찰의 문 쪽으로 향했다.
돌연 고찰의 신전 안에서 청아한 여인의 음성이 물어 왔다.
"삼교주(三敎主)가 보내서 온 사람이냐?"
야행인도 그 말을 듣자 깜짝 놀란 듯이 황급히 대답했다.
"네, 소인은 삼교주님 휘하의 호법이며 칠교주님께서 오셨는지 모르겠습
니다."
신전 안에서 다시 그 청아한 음성의 여인이 차갑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
다.
"칠교주님께서 이미 거동하신 지 오래거늘 너는 어찌 무릎을 꿇고 공손히
물음을 받지 않느냐!"
이 흑의의 야행인은 이 말을 듣자마자 전문 계단 아래 무릎을 꿇고 앉았
다. 그의 표정은 긴장되었으며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몽천악은 숲 속에서 이것을 보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삼교주, 칠교주라니...... 이게 도대체 어떤 교파일까? 만약 저
사람이 틀림없이 무림 맹주부의 위사라면 오늘 밤의 발견은 극히 주요한
일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때 고찰 신전 안에서 다른 여인이 담담하게 물었다.
"너는 삼교주 휘하의 몇 번째 호법이냐?"
이 여인의 음성은 계곡에서 나오는 꾀꼬리처럼 미묘하여 듣는 이로 하여
금 귀를 시원스럽게 했고 마음을 움직이게 했지만 그 속에는 사람에게 겁
을 주는 한 가닥 위엄이 내포되어 있었다.
흑의의 사나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대답했다.
"스물아홉 번째 호법, 나의입니다."
그 여인이 다시 물었다.
"나의, 너는 본교에서 어느 교주가 제자들을 가장 엄히 다스리는지 알고
있느냐?"
흑의의 사나이는 전전긍긍하면서 말했다.
"네, 제칠교주님 이십니다."
그 위엄 있는 여인의 음성이 다시 말했다.
"본좌는 이곳에서 벌써 반 시간이나 기다렸다. 그런데 무슨 일이 너를 삼
각이나 늦게 했느냐?"
흑의의 사나이는 여전히 쩔쩔매며 말했다.
"무림 맹주부 안에서 위대를 갑자기 검열했기 때문에 본의아니게 늦은 것
이오니 칠교주님의 용서를 바랍니다."
몽천악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한 기분이
었다. 이 사람은 무리 맹주부에 잠복해 있는 첩자이며 이 교파 또한 중원
무림의 공적인 것이다.
신전 안에서 다시 여인의 음성이 들려 왔다.
"삼교주에게서 무슨 전령이 있는지 어서 말해 보아라."
흑의의 사나이가 말했다.
"삼교주님께선 세 가지 일을 당부하셨습니다. 첫째는 서둘러서 고봉이란
사람을 조사하시랍니다."
칠교주가 냉랭하게 말했다.
"그 고봉이란 사람이 어떤 위인이기에 본 교주가 직접 조사할 만한 가치
가 있단 말이냐?"
흑의의 사나이가 계속 말했다.
"그것은 삼교주님의 의사입니다. 삼교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고봉의 특징
은 안색이 누렇고 병색을 띠고 있으며 왼발을 약간 저는데 무공이 아주
높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이는 스물일고여덟쯤 되었답니다. 삼교주님께서
는 칠교주님이 그의 신분 내력을 조사한 후 방법을 강구하여 그 사람을
우리 교로 끌어들이든지 그렇지 못할 경우 일찌감치 처치하여 영원히 후
환을 없애버리라고 하셨습니다."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교파가 뜻밖에도
자기에게 독수를 쓰려고 할 줄이야!
신전 안의 여인은 잠시 생각한 후 물었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느냐?"
흑의의 사나이는 말했다.
"네, 두 번째는 며칠 안에 단장홍 유한수가 우리 분타로 조사하러 갈 테
니 그때 만약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칠교주님의 재량으로 그의 생사를 결
정하셔도 좋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두 번째 소식은 몽천악을 더욱 소스라치게 만들었다.
'저들의 분타는 어느 곳에 설치되어 있을까...... 만약에 이 소식을 둘째
사형에게 전해 주지 않는다면 그의 생명이 위험할 것이다.'
흑의의 사나이가 다시 말했다.
"셋째는 십오교주님께서 함부로 무림 맹주부 안에 자객을 들여보내 고봉
을 암살하려다가 실패하여 이미 우리교 신녀대의 비밀 행적을 누설시켜
어쩌면 비교 전체의 총교주님에게 주상하여 십오교주님의 거취를 결정하
라고 하셨습니다."
신전 안의 칠교주가 담담히 물었다.
"삼교주님께서 분부하신 것은 바로 이것 세 가지냐?"
"네."
칠교주가 느릿느릿 말했다.
"본교의 교규는 극히 엄격하여 교의 제자에게 착오나 잘못이 있으면 조금
도 용납하지 않는다. 나의, 너는 잘못을 범한 사람이 어떠한 처치를 받는
지 아느냐?"
흑의의 사나이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한 자는 사형에 처하고 가벼운 자는 감금하여 잘못을 뉘우치게 합니
다."
다시 그 칠교주가 천천히 외쳤다.
"나의, 이리 오너라!"
흑의의 사나이는 아직 자기 머리에 큰 화가 떨어질 것을 모르는 듯 순순
히 대전을 향해 걸어갔다.
칠흑 같은 대전은 흑의의 사나이가 들어가고 난 뒤 찬물을 끼얹은 듯 조
용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몽천악은 시력을 모아 대전을 살펴보았으나 아무런 동정도 볼 수가 없어
의아심이 일어났다.
"이상하다. 대전 안에는 적어도 두 사람이 있었고 흑의의 사나이가 더 들
어갔으니 세 명 이상의 사람이 있을 텐데, 왜 이렇게 조용하기만 할까?"
몽천악은 계속 한 시간을 기다렸으나 대전 안은 여전히 조용하기만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후전으로 해서 떠나갔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자 몽천악은 투덜거리며 욕을 했다.
"교활한 여우 같은 것들!"
그는 몸을 날려 숲 속에서 나와 곧장 대전을 향해 달려갔다.
순간 몽천악은 대전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흑의의 사나이를 보았다.
'아니, 그들은 아직 떠나가지 않았단 말인가?'
몽천악의 생각은 그대로 적중했다. 상대방이 어떠한 교파이건 어떤 내력
을 가지고 있건 간에 은사의 복수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로잡
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몽천악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한걸음 한걸음 대전을 향
해 걸어갔다.
그가 흑의의 사나이의 등뒤, 약 넉 자 정도 되는 곳까지 다가갔을 때 대
전 안은 여전히 아무 기척도 없었고 또한 흑의의 사나이는 고개도 한 번
돌려보지 않았다.
몽천악은 한 번 냉소를 짓고서 대전을 향해 날아가며 번개같이 왼손을 들
어 흑의의 사나이의 오른손 맥문을 낚아채 갔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손이 닿은 곳은 얼음장같이 차가웠으며 흑의의 사
나이는 곧장 뒤로 쓰러지고 말았으니.......
희미한 별빛에 비친 흑의의 사나이의 흉측한 얼굴을 본 몽천악은 놀라움
에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이제 보니 흑의의 사나이는 이미 죽어 있었으며 안색을 핏기라고는 하나
찾아 볼 수 없이 하얗게 변했고 얼굴의 근육은 모두 없어져 마른 껍질 한
겹만을 면골 위에 씌워 놓은 듯했다.
"앗! 죽은 상태가 눈에 익구나."
몽천악은 급히 다지성 공손보기의 죽은 모습을 생각해 냈다. 그것은 이
흑의의 사나이와 거의 똑같았다.
고라화상은 공손보기의 죽음을 양기가 떨어지고 피가 고갈되어 죽은 것이
라고 판단했었다. 그러나 이 흑의의 사나이는 이성을 접촉하여 운우의 쾌
락을 즐긴 적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무공일까? 찰나지간에 호랑이처럼 팔팔하던 사나이
한 명을 피를 말려 죽게 하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칠교주, 그녀는 도대체 어떠한 여인일
까?
아마 그 다지성 공손보기의 죽음도 바로 이 칠교주의 소행일 것이다.
몽천악은 급히 대전으로 들어가 이중으로 된 정원을 지났다. 아니나다를
까, 고찰의 후원은 뒤쪽 문과 직결되어 있었다.
몽천악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신속하게 수림 속으로 추격해 나갔다.
망망한 황야를 바라보노라니 일진의 앙칼진 고함 소리가 들려 왔다.
몽천악은 사막에서 샘물을 만난 것처럼 초인적인 경공을 전개하여 내달았
다.
그러자 황야의 초원 가운데 조그만 가마 한 채가 두 묘령의 청의의 소녀
들에게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가마의 앞쪽에 다른 한 명의 청의의 소녀
가 손에 단검 한 자루를 든 채 얼어붙은 듯이 서 있었다.
그 단검을 들고 서 있는 청의의 소녀 앞을 다시 남루한 옷에 얼굴은 관옥
(冠玉) 같은 소년 한 명이 가로막고 있었다.
몽천악은 한눈에 그 소년이 바로 오늘 밤 처음 만나 사귄 궁한방의 제자
도소호임을 알아보았다.
이때 도소호는 나타난 사람이 몽천악임을 보자 신색이 약간 변했다.
도소호는 몽천악을 이 여자들과 같은 무리로 오해하고 차갑게 웃으며 말
했다.
"귀하가 호화사자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소. 하하하...... 내가 사람을
잘못 사귀었소이다."
몽천악은 급급히 말했다.
"도형, 그건 오해입니다. 나는 저 여자들과 추호도 관련이 없습니다."
도소호는 그 말을 듣자 낭랑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고형께선 구경이나 하십시오."
이때 단검을 든 소녀가 검으로 도소호를 가리키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이 거지 녀석아, 너 혹시 살기가 싫어진 것이 아니냐?"
도소호는 껄껄 웃어대고 입을 열었다.
"하하하, 낭자의 가마를 보내드리는 것은 조금도 어렵지 않으나 그러려면
우선 가마 안에 어떠한 인물이 타고 있는지 보여주어야 하오."
몽천악은 이 순간 가마 안의 사람이 분명히 그 음독 흉악한 칠교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청의의 소녀는 눈썹을 치켜 올리더니 얼굴에 등등한 살기를 띠고 외쳤다.
"너는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녀는 허리를 움직이더니 전광 석화같이 재빠른 신법으로 덮쳐 가며 일
검을 쳐냈다.
도소호는 가볍게 어깨를 흔들어 석 자 정도 피하기가 무섭게 그 조그만
가마를 향해 다가갔다.
"야!"
청의의 소녀는 가볍게 소리를 지르고 삭삭삭 연달아 삼 검을 공격해 냈
다. 번개 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빛이 마치 무수한 겨울 별처럼 도소호를
향해 떨어져 갔다.
도소호는 그 삼 검의 공격으로 두 걸음이나 후퇴했다. 인영이 번쩍 하는
가 싶더니 그 청의의 소녀는 다시 검을 들고 가마 앞을 가로막고 섰다.
도소호는 정말 화가 난 듯 눈썹을 위로 쭉 치켜 올리며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어깨 뒤의 죽봉 하나를 뽑아 들었다.
악독한 칠교주
그는 왼손에 죽봉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눈을 부시게 하는 검 한 자루를
뽑아 들었다.
바로 이때 가마 안에서 극히 청아한 음성이 울려 나오더니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귀하는 궁한방 용두방주 좌우쌍소 중 옥면염라 도소호겠지요?"
궁한방의 좌우쌍소는 강호 무림에 별로 출입을 하지 않아 그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이러한 처지에 도소호는 상대방에게 자기의 이름이 불려지자 적지 않은
놀라움을 느꼈다.
그는 손에 장검을 든 채 무거운 음성으로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가마 속의 여인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칠교주요."
옥면염라 도소호는 돌연 어조를 바꾸었다.
"그렇습니까! 칠교주, 나는 폐방의 무상랑 호장이 죽기 전 그에게서 당신
칠교주의 대명을 들은 적이 있소. 지금 분명히 당신에게 물어 보겠는데
무상랑 호장은 당신이 살해했지요?"
칠교주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그는 이교주의 손에 죽었소."
도소호는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
"이교주는 누구요?"
가마 속의 칠교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정말 천진하고 유치하군요. 이교주는 바로 이교주이니 더
이상 말 품을 팔 필요가 없소."
옆에서 이 말을 들은 몽천악은 절로 이마가 찌푸려졌다. 이 교파의 조직
인물은 아주 괴이하여 오늘밤에 들은 말로 추측해본다면 이 신비스런 조
직의 최고 명칭은 아마도 교주(敎主)라는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교주의 최고 지휘자는 바로 제일총교주이다. 이렇게 순서대로 배
열하면 도대체 얼마나 많은 교주가 있는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오늘 밤에 들은 제일 많은 숫자는 제십오교주였다.
옥면염라 도소호가 냉랭하게 웃었다.
"오늘 밤 내가 당신, 칠교주를 생포하면 당신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교자,
교손들의 얼굴까지 노출시킬 자신이 있소."
"정말 귀하에게 그런 자신이 있을까요?"
도소호는 가볍게 웃고 나서 말했다.
"괜찮으니 시험해 봅시다."
그러자 돌연 칠교주의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마를 내려놓고 너희 셋은 물러나 있거라."
명령이 떨어지자 두 묘령의 소녀들은 즉시 가마를 내려놓고 검을 든 소녀
와 함께 가마 뒤쪽으로 물러났다.
옥면염라 도소호는 장검을 든 손에 힘을 주고 가볍게 웃었다.
"그럼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이때 돌연 몽천악이 무거운 음성으로 외쳤다.
"잠깐!"
그는 성큼성큼 걸어나와 도소호에게 공수의 예를 취하고 말했다.
"도형, 내가 그녀에게 몇 가지 묻고 난 뒤에 손을 써도 늦지않을 것입니
다."
옥면염라 도소호는 몽천악을 한 번 쳐다보고 말했다.
"고형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몽천악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칠교주, 들으시오. 나는 몇 가지 이해할 수 없는 문제가 있어서 귀하에
게 알아보려는 것이오."
칠교주는 가마 속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 보시오."
"나는 무림맹주 철장건곤권 호창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묻고 싶소."
칠교주가 반문했다.
"당신은 호창부와 무슨 관계가 있지요?"
"그저 아는 사이요."
칠교주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호창부의 사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천하에 오직 한 사람 밖에 없으며 나
는 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알려 드릴 수가 없소."
몽천악이 물었다.
"그 사람은 혹시 귀교의 제일총교주가 아니오?"
칠교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몽천악은 부리부리한 눈에 은은히 날카로운 빛을 나타내고 물었다.
"귀교의 교명은 무엇이오?"
가마 속의 칠교주는 가볍게 웃었다.
"본교의 이름은 앞으로 천하 모든 사람들의 심령 속에 전달될 것이니 당
신에게 미리 알려 주어도 무방하겠지요. 본교는 무아진교라고 부르고 있
습니다."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무아라고?"
칠교주는 말을 이었다.
"무아는 본교에 헌신하는 것은 물론, 무아지구, 무아지심, 완전히 자아를
망각하는 경지에 달해야 하는 거지요."
몽천악은 다시 물었다.
"당신들의 제일총교주는 혹시 마검신군 조전신이 아니오?"
칠교주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건 알려 드릴 수 없으니 양해해 주세요."
몽천악은 갑자기 가벼운 탄식을 했다.
"좋습니다. 당신의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그는 말을 마치자 한쪽으로 물러나 도소호에게 말했다.
"도형, 이 사람은 몸에 음독 절공을 지니고 있으니 조심해야 합니다."
옥면염라 도소호는 낭랑하게 웃으며 말했다.
"만약에 내가 죽게 되면 수고스럽겠지만 고형께서 내 시체를 궁한방 총단
에 옮겨다 주십시오."
이때 칠교주는 시종 가마 안에 앉아 있었고, 문에는 주렴이 드리워 있어
오직 은은한 검은 그림자가 비칠 뿐이었다.
도소호는 장검을 들고 가마의 일곱 자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칠교주, 당신은 이렇게 가마 안에 앉아서 공격을 받겠소?"
가마 안의 칠교주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내 걱정은 말고 당신 마음대로 공격해 보시오."
도소호는 이마를 가볍게 찌푸리더니 가마 문에 낮게 드리운 휘장을 향해
일 검을 쳐 갔다.
이때 한 마디 날카롭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그와 동시에 가마 안에서 마치 유령처럼 옥같이 희고 고운 팔 하나가 나
오더니 손가락을 가볍게 퉁겼다. 그러자 쨍! 하는 소리와 함께 도소호의
장검은 거대한 장력에 의해 밀려났다.
'심상치 않다!'
도소호는 내심 이렇게 외치고 장검을 거두어 물러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옥 같은 손이 홱 젖혀지며 손바닥에서 붉은 빛이 움직이더니
태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뒤엎을 듯한 영문을 알 수 없는 경력이 도소호
를 향해 밀려 갈 줄이야.......
도소호는 신음 소리와 함께 그 경력에 의해 일 장 밖으로 날아갔다.
그는 발이 먼저 땅에 닿아 바로 내려앉기는 했으나 상반신이 흔들리고 무
릎이 떨려 몸을 지탱할 수가 없었다.
몽천악은 재빨리 다가가 다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도형, 다치셨습니까?"
도소호는 얼굴 가득히 식은땀을 흘리며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여자의 무공은 매우 요사스러우니 고형은 그녀와 더 이상 상대하지
마십시오......."
이때 그 두 묘령의 소녀들은 이미 가마를 메고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이것을 보자 몽천악은 몸을 날리며 외쳤다.
"잠깐!"
그는 두 손을 들어 허공에서 두 줄기 장풍을 일으켜 묘령의 소녀들을 향
해 쳐 갔다.
"가마를 내려놓고 뒤로 물러나거라."
가마 안에서 칠교주가 외치는 소리가 울려 나왔다.
놀라 외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가마를 맨 묘령의 두 소녀들은 공중으로 떠올라 칠팔 장 밖으로 날아가
떨어졌다.
그러자 그 가마도 석 자 높이에서 땅에 떨어졌다.
몽천악은 쌍장으로 두 소녀를 날려보내자 포물선을 그리며 가마에서 석
자 앞에 내려앉았다.
바로 그 순간 가마 안에서 흰 손목 하나가 뻗쳐 나왔다.
몽천악은 즉시 오른손을 들어 칼날같이 내리쳤으며 그 떨어져 내려오는
속도는 마치 유성과 같았다.
그러나 상대방의 손도 극히 날쌨다. 슬쩍 손을 젖혀 내리치는 기세를 피
했으며 다섯 손가락을 갈퀴처럼 오그려 오히려 몽천악의 오른손 호구를
낚아채 갔다.
두 명의 절대 고수는 각각 손 하나로 격투를 벌여 어룡변환의 묘를 모두
발휘했다. 장지가 날고 어깨와 팔이 회전하면서 두 사람은 눈 깜박할 사
이에 이십여 수를 겨루었다.
이것은 무림에서 아주 보기 어려운 격투로 오직 손 하나만으로 싸움을 벌
이는 것이지만 사실은 몸을 솟구치고 걸음을 옮기는 싸움보다 더욱 격렬
했다.
두 사람이 공격하는 부위는 모두가 호구혈과 맥문 두 곳의 급소였으므로
누구든지 조금이라도 정신이 헛갈리는 날이면 참패를 당하게 되는 것이
다.
"얏!"
몽천악은 돌연 고함을 지르더니 오른발을 날려 상대방의 수장 맥문을 걷
어차 갔으며 획! 소리와 함께 오른손으로는 낮게 처진 휘장을 낚아채 갔
다.
가마 안의 칠교주도 정말 화가 났는지 마치 재빠른 뱀처럼 손을 가마 안
으로 거두어들였으며 또한 매우 교묘하게 몽천악의 공격을 피해 냈다.
칠교주의 손을 일단 가마 안으로 움츠러 들어갔다가 다음 순간 다시 질풍
같이 뻗쳐 나왔는데 그 차이는 극히 짧았다.
이때 그녀의 손바닥은 바깥 쪽을 향하고 있었으며 한 줄기의 붉은 빛이
맴돌았다.
몽천악은 그녀가 놀라운 신공암경을 펴내려는 것임을 알고 크게 고함을
지르고 전신의 진기를 모아 맞닥뜨려 나가며 번개처럼 몸을 날렸다.
동시에 두 줄기의 암경이 한 곳에서 마주쳤다. 일진의 경풍이 소용돌이치
며 우뢰와 같은 소리를 냈다.
몽천악은 이미 삼 장 밖에 날아가 내려앉았다. 그의 오른손에는 흑사 한
조각이 쥐어져 있었다. 그는 마침내 칠교주의 얼굴을 노출시켰던 것이다.
흑사가 없어지자 가마 안이 그대로 드러났다. 가마 안에는 단정하게 남의
를 입은 여인이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여인의 사람의 마음을 흐리게 하는 둥글고 아름다운 눈에서 사람의 넋을
채 갈 듯한 무서운 빛을 쏘아 내며 삼 장 밖에 서 있는 몽천악을 바라보
고 있었다.
몽천악은 가마 안의 절세 미인을 보는 순간 전신이 떨려 오른손에 들고
있던 흑사조차 떨어뜨렸다.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은 너무나도 눈에 익었던 것이다. 몽천악은 눈을 감
고도 그녀의 전라 몸의 비밀스런 곳까지도 그려 볼 수가 있었다.
'그녀다! 정말 그녀일까.......'
몽천악은 속으로 외치다가 고개를 흔들며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
다.
'그렇다. 바로 그녀다. 강산미인루에서 그 불을 뿜던 요물이다.......'
가마 안의 미인은 몽천악의 그런 모습을 보자 문득 무엇인가 생각이 난
듯 "아!"하는 소리를 가볍게 내고 얼굴에 홍조를 떠올리며 몸까지 가볍게
떨었다.
황야의 초원에 죽은 듯한 적막이 감돌았다. 이 두 남녀의 마음속에는 각
기 남에게 알릴 수 없는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도소호와 다른 세 명의 소녀도 그들이 왜 갑자기 멍청해지고 놀
란 표정을 짓는지 알아챌 수가 없었다.
갑자기 가마 안의 칠교주가 침을 뱉으며 욕하는 소리가 들렸다.
"괘씸하고 염치없는 놈 같으니!"
몽천악은 그녀의 욕을 듣자 내심 비할 데 없이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 고개를 숙이며 한마디 반박도 하지 않고 그 욕을 받아들였다.
칠교주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외쳤다.
"얘들아, 어서 가지 않고 뭘 하느냐?"
그러자 묘령의 소녀는 급히 가마를 메더니 검을 든 청의의 소녀와 함께
한 마디 말도 없이 사라졌다.
가마의 요령 소리는 점점 멀어져 갔다.
갑자기, 몽천악은 꿈에서 깨어난 듯 "아!" 하는 소리를 내고 도소호를 돌
아다보았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옥면염라 도소호가 장검으로 자기의
왼쪽 허리를 겨냥하고 있었다.
몽천악은 나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도형, 왜 이러십니까?"
도소호는 호흡이 부자연스러운지 숨을 헐떡이며 거칠게 물었다.
"그 여자는 누굽니까?"
몽천악은 움찔하며 말했다.
"칠교주가 아닙니까?"
도소호는 냉랭하게 웃었다.
"고형, 그렇게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아까 당신들의 표정을 보니......
분명히 구면인데 어째서 모른다고 잡아떼시려고 합니까?"
몽천악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나는 전에 그녀를 한 번 본 적이 있지만 그녀가 누군지는
모릅니다. 내 말이 만약 조금이라도 거짓이라면 천지신명이 나를 죽일 것
이오."
도소호는 돌연 장검을 거두어들이더니 "왁!" 하면서 시뻘건 선혈을 두 모
금 토해 내고 휘청거리다가 땅 위에 주저앉았다.
몽천악은 도소호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하는 것을 보고 대경 실색하며
물었다.
"도형, 왜 그러십니까?"
도소호는 나약한 소리로 말했다.
"고형, 내가 오해한 것을 용서해 주시오...... 나...... 나는 아마 살아날
가망이 없을 것 같소. 그녀의 장공은 아주 악독하고 매섭습니다......지금
나는 전신의 혈관이 수축되어 심한 냉기가 느껴지는군요."
몽천악은 칠교주가 살해한 사람의 죽은 모습을 본 적이 있는터라 속으로
크게 놀라 생각했다.
'그녀의 절공은 대체 무엇인지 그 치료 방법조차 모르니 도형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몽천악은 마음이 초조해서 발을 굴렀다.
"도형, 이걸 어쩌면 좋겠습니까?"
도소호는 스스로 절망한 듯 오히려 태연하게 말했다.
"고형, 내가 죽거든 수고스럽더라도 나의 시체를 사천 궁한방 총단으로
옮겨 주시고 모든 상황을 나의 은사이신 궁한방주에게 설명해 주십시
오......."
몽천악은 급히 말했다.
"도형, 어디 생각해 보십시오. 이 부근에 명의가 있는지."
도소호는 고개를 흔들고 씁쓸히 웃었다.
"소용없습니다. 본방의 무상랑 호장이 죽기 전에 칠교주가 일종의 기괴한
절공을 연마하여 천하를 활보하며, 누구를 막론하고 그녀의 신공에 명중
된 자는 죽는 길을 제외하고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습
니다....... 아, 나는 너무나 자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적의 절공이 매
섭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경솔하게 완강히 적을 맞이했으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것입니다."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천하에 치료할 수 없는 절공이 있다고 나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 명칭만 안다면 나는 치료할 수 있는 길을 곧 찾아낼 수 있습니다...
... 그런데 어쩌면 시간이 늦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도 의술에 약간 조예가 있어 지금의 상태로 봐서 아마 자정까지 지탱
하기가 어려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몽천악이 돌연 말했다.
"도형, 나는 당신을 조용한 곳으로 옮겨 놓고 칠교주를 찾아가 도대체 그
녀가 무슨 무공으로 도형을 상하게 했는지를 알아 내겠습니다."
도소호는 참담하게 웃었다.
"고형, 고맙소. 그러나 칠교주의 무공은 방금 고형도 견식해 보았으니 잘
아실 거요. 만약 고형에게 불의의 사태가 생긴다면 제가 구천지하에서나
마 어찌 편히 누워 있을 수가 있겠소?"
몽천악은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여 말했다.
"그렇게 하는 것 외에 도형의 생명을 구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짤막한 말속에는 몽천악의 대장부로서의 뜨거운 피와 인의(仁義)와 호
탕한 천성이 넘치고 있었다.
도소호는 이 말을 듣자 눈물을 글썽거렸다.
"고형께서 친구를 대하는 이 큰 은혜를, 나는 죽어도 잊지 않을 것이오."
몽천악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소호의 오른팔을 부축하여 은밀
한 풀숲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다.
"도형,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내가 즉시 칠교주를 찾아갔다가
늦어도 두 시간 반 후에는 돌아올 테니까요."
옥면염라 도소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고형, 그것보다 이곳에서 나를 잠시 벗해 주십시
오."
몽천악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도형은 죽음을 극히 담담하게 여기시지만 도형께서 죽으면 무림의 영웅
호걸 한 분이 감소되며 사마 악도들에게는 강적 하나가 적어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도소호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듯 침통하게 외쳤다.
"고형, 만약에 고형께서 갔다가 불행을 당해 나의 뒤를 따라오게 된다면
무림에는 더욱 중요한 영웅 한 분이 줄어들 뿐만아니라 우리들을 죽인 범
인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조차 없을 것입니다."
몽천악은 비장하게 말했다.
"도형, 걱정 마십시오. 나는 결코 칠교주의 손에 죽지 않을 것이니까요.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그는 도소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상승의 경공을 발휘
하여 쏜살같이 달려갔다.
몽천악은 칠교주의 얼굴을 보았을 때 그녀가 바로 강산미인루에 살고 있
는 것을 알았으므로 경공을 발휘하여 곧장 개봉부를 향해 바람같이 달려
갔다.
잠시 후 몽천악은 성안에 들어섰다. 그는 급히 화가를 지나 강산미인루의
담 밖에 이르렀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후원으로 돌아가 담을 넘어 들어갔다.
눈을 들어 살펴보니 그 소원은 바로 칠팔 장 밖에 보였으며 누각 위에는
등불이 대낮같이 밝혀져 있었고 창문 옆에는 아름다운 그림자 하나가 보
였다.
그는 더 이상 생각을 하거나 머뭇거리지 않고 가볍게 몸을 날려 누각 난
간에 뛰어올랐다.
창문의 아름다운 여인은 그를 발견한 듯 가볍게 고개를 움직였으나 그대
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몽천악은 가볍게 기침을 하고 물었다.
"혹시 칠교주가 아니신지요?"
창문 안의 여인은 움직이지도 않고 극히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 무뢰한! 당신은 정말 담이 크군요."
몽천악은 격동된 어조로 말했다.
"칠교주, 나는 결코 야비하고 미친 놈은 아니오......."
창문 안의 여인은 몽천악의 말을 가로채더니 욕을 해댔다.
"당신이 정녕 색정 광도가 아닐진대 어찌 조용한 야밤에 부녀자의 규방을
넘겨다보았어요?"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일은 나중에 천천히 설명할 수 있으니 그렇게 용납하시고, 나는 오
늘 밤......."
창문 안의 여인이 말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단 말이에요?"
"나는 칠교주께서 무슨 무공으로 옥면염라를 상하게 했는지 물어 보고 싶
소."
"그는 아직 죽지 않았소?"
창문 안의 여인이 담담하게 물었다.
몽천악은 대답했다.
"그렇소이다. 그러나 이미 그는 죽음의 문턱에 이르러 있소."
창문 안의 여인이 차갑게 말했다.
"죽으면 그걸로 끝나는 것이지 무슨 무공으로 그를 죽였는지 물어 볼 필
요가 뭐가 있단 말이에요?"
몽천악은 눈썹을 약간 찌푸리고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어찌 사람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생각하시오? 하늘은 인류에게
호생지덕을 내려 주었는데 당신이 이토록 사람의 생명을 앗아 가기를 좋
아한다면 장차 천벌을 면치 못할 것이오."
그러자 창문 안의 여인은 듣는 이로 하여금 모골이 송연할 정도로 음침하
게 웃었다.
누가 진짜냐
돌연 웃음 소리가 그치더니 창문 안의 여인이 묻는 소리가 들려 왔다.
"당신은 감히 들어올 수 있겠어요?"
몽천악은 속으로 움찔했으나 태연히 대답했다.
"못 들어갈 게 뭐가 있겠소."
말을 하며 몽천악은 난간 옆 문으로 다가가 가볍게 밀었다. 뜻밖에 문은
잠겨 있지 않아 쉽게 열렸다.
몽천악은 무공이 높고 대담한 자인지라 가슴을 쫙 펴고 들어갔다.
이 제칠교주는 여전히 몽천악을 등진 채 앉아서 고개도 한 번 돌려 보지
않았다.
그녀는 백옥같이 고운 왼손을 내밀어 옆에 놓인 둥근 의자를 가리켰다.
"거기 앉으시지요."
몽천악은 번개 같은 눈빛으로 의자에 무슨 이상이 없는가를 훑어본 뒤 천
천히 그 둥근 의자에 앉았다.
그러자 칠교주의 아름다운 옆 얼굴이 똑똑히 보였다.
밝은 등불 아래 비친 그녀는 과연 미염절륜한 모습이 엷은 구름에 감추어
진 달과 같았고, 물찬 제비와 같은 몸매는 선녀에 비교할 만했다.
몽천악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 생각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자가 어찌 그렇듯 추악하고 악랄한 마음을 가지고 있
을까? 아, 정말 애석한 일이로구나!'
돌연 귓가에 칠교주의 묻는 소리가 들려 왔다.
"뭘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맑고 청아한 음성은 실로 꾀꼬리 소리와 같았다.
그때 어느 사이엔지 칠교주는 몸을 돌리고 있어서 두 사람의 거리는 넉
자에 불과했으며 그윽한 향기가 풍겨 와 사람을 심취케 했다.
몽천악은 깊이 숨을 들여 마시고 낭랑한 음성으로 솔직히 말했다.
"나는 칠교주가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했소."
칠교주는 돌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어째서 마음이 이렇게 악독한가도 생각했겠지요?"
몽천악은 가슴이 뜨끔했다.
'정말 무섭구나. 어떻게 내 마음속의 생각을 알았을까?'
돌연 칠교주는 안색을 변하며 냉랭하게 말했다.
"당신을 정말 담이 크군요. 이 세상에서 나와 이렇게 가까이 앉은 사람은
한 사람을 제외하곤 없으니까 말이에요."
몽천악은 천천히 대답했다.
"만약 칠교주께서 나에게 독수를 쓰려고 했다면 벌써 썼을 것이오."
칠교주는 천천히 일어나더니 사뿐사뿐 문 앞으로 걸어가 고개를 들고 밤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하얀 팔은 백설 같았고 어깨 위로 흘러내린 머리는 검은 구름과
같았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교소를 띤 채 다시 하늘거리며 걸어왔다.
그 수양버들같이 하늘거리는 허리, 그 절정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삼키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는 천천히 몽천악 앞으로 걸어오더니 돌연 손을 들어 몽천악의 머리
위에 있는 백회혈로 가져왔다.
몽천악은 피하지 않았다. 사실 이런 번개같은 수법은 피하려야 피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칠교주는 깔깔대고 웃으며 손을 치우고 말했다.
"고봉, 당신은 이미 내게 당신을 죽일 마음이 결코 없다는 것을 알고 이
렇게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이겠지요."
몽천악은 눈을 꿈벅이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당신은 고찰 앞 숲 속에 숨어서 본교의 비밀을 많이 듣지 않았어요."
'아! 그녀는 내가 숲 속에서 엿들은 것을 벌써 알고 있었구나. 그렇다면
그 삼교주의 호법인 나의가 피해를 입은 것도 근본적으로는 나 때문이구
나.......'
칠교주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미 당신이 우리의 기밀을 대부분 엿들은 이상 눈앞에는 단 두 갈래 길
밖엔 없어요. 한가지는 죽음이고 또 하나는 무아진교에 가입하는 것이에
요. 만일 당신이 우리 무아진교에 가입하겠다고 하면 나는 책임지고 교주
의 신분이 될 수 있게 해주겠어요."
"칠교주께서는 지금 나를 무아진교에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내가 당신에게 무슨 누를 끼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지 않소?"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신세 내력이 분명치 않을 뿐만 아니라 귀교에 들어간다 해도 과연
성심 성의로 무아지경에 도달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말이오."
칠교주는 머리를 끄덕였다.
"그건 사실이에요. 그렇다면 당신은 오직 죽음이라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겠군요."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인데 뭐가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그러
나......."
"그러나 어떻단 말이에요?"
몽천악은 부리부리한 눈동자에서 은은히 신광을 번쩍였다.
"시시하게 요절은 하지 않을 것이오."
칠교주는 샛별 같은 눈을 깜박이지도 않고 몽천악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
시했다.
몽천악은 가슴이 섬뜩하여 생각했다.
'그녀가 갑자기 독수를 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그는 암중으로 정신을 차리고 경계했다.
잠시 후에 칠교주가 담담하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하마터면 당신에게 속을 뻔했어요. 이제 보니 당신은 얼굴을 변장
했군요. 그렇다면 고봉이라는 이름도 본명이 아니겠는데!"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깜짝 놀랐다.
'이 여자는 정말 날카롭구나. 내가 사용한 역용악은 천하에서 신비한 것
이므로 조금도 흠잡을 데 없이 변장하여 고라화상과 대사형 등 군협들조
차도 알아보지 못했는데 뜻밖에 그녀가 대번에 알아내다니!'
칠교주가 말했다.
"당신은 도대체 남에게 숨겨야 할 일이 무엇이기에 정체를 밝히지 않는
거예요?"
몽천악은 말했다.
"칠교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겠소?"
칠교주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변장하지 않았어요."
"당신은 변장을 하지 않았지만 행동이 신비하고 이름과 내력이 없으니 역
시 남에게 정체를 밝히지 않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칠교주는 대노했다.
"누가 내 이름이 없다고 했어요?"
"그럼 방명이 어떻게 되십니까?"
칠교주는 차갑게 말했다.
"당신은 내 이름을 들을 자격이 없어요."
몽천악을 돌연 정색을 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오늘 밤 내가 칠교주를 찾아온 것은 단지 무슨 신공을 운용하여 옥면염
라 도소호를 상하게 했는지 물어 보려고 한 것이니 칠교주께서는 너무 인
색하지 말고 가르쳐 주십시오."
"대체 무엇 하려고 그걸 묻는 거예요?"
"도소호의 상처를 치료하려고 그러는 것이요."
칠교주는 그 말을 듣자 돌연 깔깔대고 웃었다.
"호호호, 당신이 신공의 이름을 알아 도소호의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호
호호...... 얼마든지 가르쳐 드리지요."
"그게 뭣니까?"
칠교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소녀 잔양신공의 잔양장이에요."
몽천악은 깜깍 놀랐다.
"소녀 잔양신공이라구요?"
그는 안색을 돌변하더니 벌떡 일어나 놀란 기러기가 날아오르듯 곧장 문
을 뚫고 달려갔다.
몽천악은 전혀 도망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다가 그의 신법 또한 너무나
쾌속 절륜하여 눈 깜박할 사이에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 자리에
멍청히 서서 바라보는 칠교주의 안색은 무엇을 잃은 듯 멍했다.
한편 전광 석화같이 누각을 떠난 몽천악은 급히 성을 벗어나 상승의 경공
을 발휘하여 곧장 황야를 향해 달려갔다.
밤은 막 자정으로 접어들어 황야는 죽은 듯 적막했고 신비할 정도로 조용
했다.
몽천악의 마음은 불타듯 조급했다. 마침내 그는 옥면염라 도소호가 숨어
있는 곳까지 왔다. 그러나 사방은 고요했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
을 줄이야!
몽천악은 이마를 찌푸리고 번개 같은 눈길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초목 사이를 지나가는 바람 소리와 가을밤을 슬퍼하는 듯 울어대는 벌레
들의 나직한 울음 소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으
며 십 장 이내에도 도소호의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몽천악의 다급한 마음이 들어 소리쳐 불렀다.
"소호형! 어디 있소? 소호형......."
그러나 대답은 없고 처량한 메아리만이 길게 꼬리를 끌며 밤하늘에 멀리
퍼져 나갈 뿐이었다.
몽천악은 도소호가 부상을 입고 있으므로 절대 이곳에서 멀리 떠나가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사방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약 백 장 둘레를 찾아보았으나 도소호의 종적은 여전히
묘연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에게 구원받아 갔단 말인가...... 어떤 사람이 구해
갔을까.......'
몽천악은 생각을 계속하면서 다시 사방을 수색했다.
그는 문득 길가 한 바위 위에 인영 하나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는 것
을 보았다.
몽천악은 재빨리 몸을 날려 바위 앞으로 달려가 보았다.
그 인영은 노화상으로 회색 가사를 걸치고 금강좌법으로 앉아 있었는데
다리와 무릎 사이에 총채 한 개가 놓여 있고 목에는 가슴까지 늘어진 염
주를 걸고 있었다.
이때 노화상은 두 눈을 감고 마치 입정한 듯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몽천악은 노화상의 얼굴을 보자 마음 깊은 곳에서 외쳤다.
'고라신승.......'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노화상은 바로 소림 신승 고라화상이었던 것이다.
이 순간 도소호가 한 말이 몽천악의 머리를 찡 울렸다.
'고라신승은 이미 나를 추격, 살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는데.......'
몽천악은 전신이 으스스 떨리는 것을 느끼고 아무 말도 없이 몸을 돌려
급히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이때 나직하게 불호를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미타불...... 시주, 잠깐만 멈추시오."
몽천악은 벼락에 맞은 듯 전신을 부르르 떨며 천천히 돌아섰다.
이때 노화상은 극히 날카롭고 차가운 눈빛을 발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몽천악은 낭랑한 음성으로 물었다.
노화상을 여전히 바위 위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으
나 안색만은 가볍게 변했다.
"시주는 아직 젊은 나이지만 내공은 이미 상승절정에 이르렀소. 묻건대
어느 파의 소협이시오?"
몽천악은 당황했다.
"후배는 말씀드리기 어려운 고충이 있어서 그러니 대사께서는 널리 용서
해 주십시오."
노화상을 잠시 생각하다가 허연 수염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시주, 혹시 궁한방의 도소협을 찾는 것이 아니오?"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께서는 그의 행적을 보셨습니까?"
"도소협은 몸에 중상을 입고 생명이 위태로와 노승이 폐파의 두 제자에게
그를 조용한 곳으로 옮겨 상세를 치료하도록 명했소."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약간 마음이 놓이기는 했으나 계속 다급하게 물었
다.
"도소협의 상세가 악화되었는지요?"
"노승이 그를 발견했을 때 그는 혼수상태에 빠져 생명이 매우 위태로웠
소. 시주, 도소협이 어떻게 부상을 입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없겠소?"
"그는 칠주에게 맞아 부상을 당했으니 아마 그의 상처는 완치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듣자 노화상의 안색이 돌변했다.
"그렇다면 도소협은 소녀 잔양신공의 잔양장에 맞은 것이겠구려."
몽천악은 마음이 움찔했다.
'이 화상은 정말 매섭구나. 그가 어떻게 소녀 잔양신공을 알고 있을까?
그는 이미 칠교주를 만나 보았단 말인가.......'
이렇게 생각하며 몽천악은 가볍게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도소협은 칠교주의 잔양장에 맞았습니다."
이 말을 듣자 노화상은 돌연 두 줄기의 날카로운 빛을 쏘아내며 몽천악의
얼굴을 응시하고 반문했다.
"시주는 어떻게 잔양장의 이름을 아시오?"
"후배는 칠교주에게 들어 안 것입니다."
노화상은 경악한 빛을 띠고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시주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오?"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사, 후배를 의심하지 마십시오. 후배는 절대 무아진교의 사람이 아니니
까요."
노화상은 더욱 놀란 빛을 띠었다.
"시주는 무언가 많은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군요. 지금 무림 중원의 구
대문파 사람 중에서 노승을 제외하면 무아진교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
이 별로 많지 않은......."
고라화상은 돌연 입을 다물고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물었다.
"시주가 사문을 알려 주고 싶지 않다면 이름이라도 알려 줄 수 있겠지
요."
몽천악은 당황했다.
"저는 고봉이라고 부르는데 대사께서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어디 있습니
까?"
노화상은 눈에서 기이한 빛을 발하더니 돌연 염불을 외우고 나서 말했다.
"천만에, 별말씀을 다하시오. 노승은 오늘 밤 시주를 처음 만나 생면부지
인데 어찌 시주에게 의심을 품겠소. 그러나 방금 시주가 한 말씀은 무림
사람이면 누구나가 궁금해하는 비밀이므로 노승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
니오."
이 말을 들을 몽천악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사께서는 어째서 우리가 오늘 밤에 처음 만났다고 하시는 겁니까?"
이때 몽천악은 문득 앞에 있는 고라화상과 자기와 나눈 말에 이상한 점이
많고 또한 그의 거동과 모습도 어딘지 전과 다른 것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는 소림 신승 고라화상이 아니라는 말인가?
노화상은 가볍게 불호를 외우고 말했다.
"시주는 노승이 누구인지 아시오?"
몽천악은 급히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신승의 법명을 여쭈어 보려던 참이었습니다."
몽천악은 자기가 사람을 잘못 보았다고는 믿지 않았다. 만약에 자기가 고
라신승을 처음 대면했다던가 혹은 만나 본지 오래 되었다면 어쩌면 잘못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는 오늘 아침에 고라화상과 헤어졌고 또한 눈을 감고도 상대
방의 얼굴을 그려낼 수 있을 정도인데 어찌 잘못 볼 리가 있으랴!
이 노화상은 소림 신승 고라화상이 분명한 것이다.
바위 위의 노화상은 몽천악의 신색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것을 보자 천
천히 말했다.
"노승은 바로 소림의 고라......."
몽천악은 마음속으로 외쳤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소림의 고라화상입니다.'
노화상은 잠시 주저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빈승은 팔 년 전 소실봉에서 폐관했다가 최근에야 파관하고 나와
급히 개봉에 달려왔으며, 이곳에 당도한 것은 겨우 몇 시간 전에 불과한
데 시주는 어째서 우리가 오늘 밤에 처음 만난 것이 아니라고 하시오?"
몽천악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다시 머리가 찡! 하고 울렸다.
'이상한 일이구나. 어떻게 두 명의 고라화상이 있단 말인가? 하나는 삼
일 전에 무림 맹주부에 당도했고 또 하나는 오늘 밤에 막 개봉에 당도했
고, 또 이 두 고라화상의 용모가 똑같으니 도대체 누가 진짜 고라화상이
란 말인가.......'
이것은 무림의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같은 시기에 진짜와 가짜 두
고라화상이 나타났다는 것은 강호 상의 위기가 이미 생사 존망의 긴급한
문턱에 이르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몽천악은 이 노화상의 조금 전 일거일동과 무림 맹주부의 그 고라화상을
비교해 보았다.
홀연히 몽천악은 놀라 외쳤다.
"그는 교주......."
그러자 몽천악을 바라보던 노화상의 표정이 단번에 변했다.
그는 이때 일말의 위기를 깨달은 듯 엄숙한 표정을 짓고 조급히 말했다.
"시주, 무슨 사건이 발생했는지 숨기지 말고 말씀해 주시오."
몽천악은 다급하게 말했다.
"큰일났습니다. 지금 무림 맹주부의 군협들은 생명이 위급합니다."
"시주, 그게 무슨 말인지 시원하게 말씀하십시오."
몽천악은 부리부리한 눈에 빛을 발하며 노화상의 얼굴을 응시하고 물었
다.
"대사께서는 어떤 것으로 자신이 확실히 소림 고라신승이라는 신분을 증
명하시겠습니까?"
노화상은 안색이 싹 변했다.
"그렇다면 무림에 또 다른 고라가 있단 말이오?"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용모는 마치 모형으로 만들어 낸 것같이 똑같고
키와 몸집도 차이가 없습니다."
노화상은 이 말을 듣는 순간 두 눈을 감고 깊이 생각에 잠기더니 갑자기
안색을 바꾸고 불호를 외웠다.
"아미타불...... 아, 팔 년 전 그 조그마한 우려가 오늘날 이런 큰 위
기로 변할 줄을 생각지 못했구려......."
그는 말꼬리를 흐리더니 다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적어도 뜨거운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른 뒤에야 노화승은 눈을 뜨고 땅
이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무아진교는 이미 팔 년 전부터 무림의 고수들을 모살하기 시작했으며 그
오랜 세월을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 왔을 테니, 이제 무림의 위기는 풍전
등화 격이오. 아! 빈승이 팔 년 전에 그런 기미를 눈치채고 미리 방비했
다면 무림의 정세가 오늘 같은 곤경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이오......호창
부 도형도 피해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오......."
말을 하는 노화상의 안색은 연신 변화를 일으켰고 미간에는 깊은 후회의
빛이 감돌았다.
숨어 있는 적
몽천악은 이와 같은 말을 듣자 이마를 깊이 찌푸렸다. 여러가지를 조합하
여 추측해 볼 때 지금 눈앞에 있는 이 노화상이야말로 확실히 진짜 소림
신승 고라화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진짜 고라화상이 어째서 이렇게 늦게 오늘에야 파관을 하
고 나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고라화상의 말을 미루어 볼 때 벌써
부터 무아진교의 행동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서 좀더 일
찍 무아진교의 세력이 확장되는 것을 저지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미
치자 몽천악은 격동하며 말했다.
"신승께서는 이미 팔 년 전에 무아진교의 동향을 아셨다면서 어찌 그들의
세력이 이토록 팽창하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고라화상은 몽천악에게 핀잔을 듣자 처량한 한숨을 길게 내쉬고 말했다.
"시주, 잠시 고정하시오. 빈승은 지금까지 무아진교의 내막을 잘 알지 못
하며 팔 년 전 무아진교의 한 여자 아이를 만난 것에 불과합니다......."
고라화상은 잠시 말을 그쳤다가 한숨을 내쉬며 다음 말을 이었다.
"지금으로부터 팔 년 전이었소....... 어느 달 밝은 밤, 빈승은 소실봉
뒷산에서 참선을 하고 있었소. 그때 돌연 묘령의 소녀 한 명이 나타났소
...... 그 소녀는 열너덧 살쯤 되었는데 아름답기가 비할 데 없었소. 그
소녀는 얼굴을 찡그리든지 아니면 웃든지 간에 사람의 간장을 녹일 정도
였소. 그 소녀는 그날부터 연 사십구 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뒷산에
와서 빈승이 참선 연공하는 것을 구경했으나 그 동안 한 번도 얘기한 적
이 없었는데, 바로 오십 일이 되는 날 밤 그녀는 처음으로 빈승에게 말을
걸었소이다......."
몽천악은 신기하다는 듯이 귀를 기울이다가 물었다.
"그녀는 신승에게 무슨 말을 했습니까?"
"그녀는 빈승에게 자기는 무아진교의 제자이며 제일총교주의 명을 받고
빈승을 가해하러 왔으니 자비한 마음으로 빈승의 생명을 자기에게 바치라
고 하는 것이었소."
"그래 대사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 소녀는 말을 할 때 얼굴에 환히 미소를 띠고 있었고 또한 천진한 기
가 넘칠 뿐만 아니라 당시 강호에서 무아진교라는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
기 때문에 빈승은 그녀가 장난을 하는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지
요. 네가 빈승의 생명을 원한다면 주겠다고 말이오."
"그래 그 소녀는 바로 대사께 손을 썼습니까?"
"그렇소이다. 그 소녀는 즉시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빈승을 가볍게 네 번
을 치더니 말하기를 자기는 이미 장공을 운용하여 나의 기경팔맥을 격상
시켰으므로 보통 사람 같으면 칠 일 후에 죽을 것이지만 빈승은 내공이
심후하므로 보통 사람과는 다르나 역시 백 일 후의 재난에서 벗어나지 못
하고 죽을 것이라고 했소......."
고라화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 소녀는 말을 마치자 곧 떠나갔으며 빈승은 그 일을 아예 마음에도 두
지 않았었소. 그것은 그 소녀의 조그만 손이 빈승의 등심을 가볍게 쳤을
때 내경이나 역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소. 아! 그러나 세상 만물의 기
이함과 내공의 한없는 깊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말 그 신비함을 알아내
기 어렵게 하는 것이오."
몽천악은 이상한 듯 물었다.
"그렇다면 대사께서는 부상을 입으셨단 말입니까?"
고라화상은 장탄식을 했다.
"아! 그날 이후 빈승은 기혈을 운행할 때마다 홀연 기경팔맥 속에 기이한
기류 한 줄기가 가로막는 것을 느꼈소. 그리고 시일이 흐를수록 역류가
가중되어 빈승은 놀라움을 느끼기 시작 했소이다."
고라화승은 돌연 처량하게 탄식을 발하고 다시 말을 이었다.
"천하 무림과 본파 제자들은 빈승이 팔 년 전 벽을 향해 참선을 하겠다고
선포한 것이 사실은 참선을 하는 것이 아니고 상처를 치료하자는 것인 줄
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오......."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그 소녀가 가볍게 내려친 사 장이 신승을 무려 팔 년간이나 누워 있게
했단 말입니까?"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팔 년간 상처를 치려하는 참선 중에 빈승은 그 장공이 천하에서 가장 음
독한 소녀 잔양신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소이다. 생각건대 시주도 이
미 이 신공의 무서운 음독을 알고 있을 것 같구려."
몽천악은 깜짝 놀랐다.
"그 소녀에게 그런 신공이 있었단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녀가 바로 칠교
주겠군요."
"소녀 잔양신공은 무공 경서 안에서 삼절신공 중의 하나로 받들어졌으나
이 절학은 누구나 습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오. 듣자 하니 이 절학을 습
득하려면 세 살 이전부터 연마하기 시작해야 하며 습득한 뒤에도 결코 동
정을 잃어선 안된다 하오. 오늘 밤 빈승은 궁한방 도시주의 상처를 진단
해 본 결과 잔양장에 부상당한 것임을 밝혀 냈고 또한 도시주를 상해한
사람은 어쩌면 팔 년 전 그 여자일 것이라고 추측했소이다."
몽천악은 눈썹을 찌푸리고 속으로 칠교주의 나이를 계산해 본 뒤 입을 열
었다.
"그렇습니다. 칠교주는 바로 그 소녀입니다."
고라화상이 말했다.
"빈승은 팔 년 동안 상처를 치료하는 가운데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을
약간 알아냈으므로 궁한방 도시주도 생명만은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무공은 다시 복원되지 않을 것이오."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었다.
"소녀 잔양공은 경서 안에 이것을 구할 수 있는 약이 없는 절공으로 기록
되어 있으니 도소호형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만도 불행중다행입니다.
아! 그렇다면 무아진교 중에서도 칠교주가 강호 무림의 최대 적이겠군요."
고라신승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 소녀가 세 살부터 소녀 잔양신공을 연마하기 시작했다고 본다면 적어
도 오늘까지 이십 년간의 수련을 했을 것이오. 그렇다면 그녀는 벌써 제
구단공까지 연마했을 것이고 만약에 앞으로 삼 년간만 더 경과한다면 그
녀는 전 공을 습득할 것이오. 그렇게 되면 그녀는 무쇠 같은 몸이 되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오."
말을 하는 고라신승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짙게 드리워졌다.
몽천악은 소녀 잔양신공의 습득 과정을 몰랐지만 한 권의 경서에서 소녀
잔양신공은 무림에서 가장 사악하며 현묘한 절학이라고 기술된 것을 읽은
적이 있었다.
몽천악은 돌연 어두운 음성으로 물었다.
"대사께 여쭈어 보겠는데 천하에 그 소녀 잔양신공을 대항할 수 있는 사
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겠지요?"
고라신승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지었다.
"빈승은 아직 그 칠교주를 만나지 못했으므로 그녀가 도대체 소녀 잔양신
공을 어떤 경지까지 연마했는지 모르오. 그러나 만약 그녀가 정말 제구단
까지 연마했다면 그야말로 큰 두통거리가 아닐 수 없는 것이오."
고라신승은 한숨을 내쉬고 다시 말을 이었다.
"빈승을 파관하기 전에 먼저 고수들을 파견하여 은밀히 무림의 정세와 무
아진교의 인물 조직을 염탐하도록 했소. 거기에서 얻는 소식은 무아진교
의 제일에서부터 제구교주까지 모두 뛰어난 무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오.
그러나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이 아홉 교주의 신분과 내력, 그들의 동
태이오. 현 무림 대국을 보건대 적은 숨어 있고 우리는 나타나 있으므로
이미 피동의 위치에 놓여 있소이다. 앞으로 중원 무림도가 이 약세를 만
회하려면 역시 암수로 적을 제압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할 것이오."
"무엇이 암수로 적을 제압하는 방법입니까?"
고라화상은 천천히 말했다.
"그 방법은 중원 무림의 구대문파 권외에 따로 저격대를 하나 조직하여
적을 견제하는데 종사하는 것이오."
몽천악은 고라화상의 말을 듣고 난 이후 이 노화상이 앞으로 있을 무아진
교와의 싸움에 자신을 갖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무아진교가 일찍이 팔 년 전 이 고라신승에게 독수를 쓴 것은 가히 극악
무도한 것이었다.
현 무림의 영수는 소림 신승 고라화상과 철장건곤권 호창부인데 만약 이
두 사람 모두 화를 당한다면 중원 무림을 용에 머리가 없는 격이 되는 것
이다.
오늘날 무아진교의 삼교주가 고라신승의 이름을 도용하고 무림 맹주부에
잠복한 것을 그들이 고라화상을 이미 죽은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
다.
'이번에 중원 무림은 장계취계(將計就計)하여 필히 무아진교의 제삼교주
가짜 고라화상을 생포해야 한다.'
몽천악은 한차례 깊이 생각하고 나서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사님, 이 후배는 대사께 한 가지 알려 드릴 일이 있습니다. 지금 무아
진교는 제삼교주를 파견하여 소림 신승을 가장하고 무림 맹주부에 잠복해
있습니다."
그리하여 몽천악은 지난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들을 고라신승에게 상세히
알려 주었다.
그러나 자기의 신세 내력만을 여전히 비밀에 붙여 두었다.
고라화상은 몽천악의 말을 듣자 양 눈썹을 잔뜩 찌푸리고 만면에 비통하
고 처량한 기색을 띠며 길게 탄식하며 말했다.
"아...... 빈승이 대국을 철저하게 살피기 위해 잠시 발동하지 않고 무림
맹주부에 잠입해 있는 첩자들을 철저히 소탕하지 않은 것이 공손시주의
무고한 생명을 비명에 가게 할 줄은 생각지 못했소. 아...... 고시주가
말한 소식을 들어보니 지금 무림 맹주부에 잠입해 있는 적은 바로 제삼
교주와 제십오교주구려. 제삼교주는 누군지 알겠지만 제십오교주는 누구
인지 모르겠구려."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었다.
"후배도 아직 자세히 모릅니다."
고라화상은 돌연 정색을 하더니 엄숙하게 말했다.
"고시주는 마음이 충후하고 재기가 안에 함축되어 있어 결코 강호의 일반
무사와 비교할 수가 없소이다. 그러나 빈승은 온갖 심사를 기울여도 시주
의 신세 내력을 알 수가 없소. 시주는 자신의 신분을 밝혀 중원 무림도의
혐의를 벗는 것이 어떻겠소?"
몽천악은 신색을 처량하게 변화시키고 한숨을 내쉬었다.
"후배가 신세 내력을 밝히지 못하는 것은 말 못할 깊은 고충이 있기 때문
입니다. 원래 후배는 멀리 떠나 강호의 일에 다시는 참여하지 않으려 했
었습니다. 그러나 사부님의 원수를 갚지 않고는 그대로 산중에 묻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고시주의 원수는 어떤 사람이오?"
"무아진교의 소행이란 것을 알았지만 어떤 사람인지는 아직 모릅니다."
고라화상은 탄식했다.
"하불감 사질이 고시주의 신세 내력이 늘 마음에 지워지지 않아 빈승을
청해 고시주의 신세 내력을 알아보도록 부탁했는데 시주께서 말씀하기 곤
란하다면 하지 않아도 좋소."
"하대리 맹주도 대사......."
고라화상은 그가 물으려는 것을 알아채고 재빨리 말했다.
"하불감 현질은 벌써 적이 빈승을 가장한 것을 알고 있소."
몽천악은 기쁜 빛을 띠었다.
"그렇다면 더욱 잘되었습니다. 만약에 이 소식을 하대협에게 알리려 했다
면 얼마나 많은 심기를 허비해야 할지 모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고시주, 빈승이 시주에게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 응낙해 주실 지 모르겠
군요."
몽천악은 낭랑하게 말했다.
"후배, 죽음도 불사하겠습니다."
"시주는 빈승이 잠시 나서지 않는 이유를 아셨을 것이오. 그러나 현 무림
맹주부의 국세가 매우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어 빈승은 하현질 혼자의 힘
으로는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라는 걱정이 들어 시주의 도움을 청하려는
것이오."
몽천악은 미간을 모았다.
"후배는 군협들과 싸운 적이 있어 무아진교의 제삼교주 등은 이미 저의
얼굴을 아는데 후배더러 어떻게 하대협을 도우라고 하시는지 대사의 명백
한 지시를 바랍니다."
고라신승은 잠깐 생각을 하고 말했다.
"빈승이 고시주에게 도움을 청하는 일은 시주께서 하불감 현질을 도와 그
제삼교주를 제압해 달라는 것이오."
"신승께서는 왜 즉각 행동을 취하지 않는 것입니까?"
고라화상은 탄식했다.
"무아진교는 강호 무림에서 행동이 극히 비밀스럽기 때문에 빈승 등은 무
아진교의 모든 자료에 대해서 아는 것이 극히 적소. 그래서 빈승과 하현
질은 잠시 풀을 헤치다가 뱀을 놀라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소......."
몽천악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제삼교주가 무림 맹주부 안에 잠복해 있으면서 무림 고수들을 하나
하나 모살하려는 독계를 획책하고 있으니, 만약 그를 더 이상 잠복해 있
도록 내버려둔다면 무림 맹주부 안의 고수들이 또다시 목숨을 잃을 것입
니다."
고라화상은 머리를 끄덕였다.
"빈승도 바로 그 일을 난처하게 생각하는 것이오. 아......우리들은 머지
않은 장래에 무아진교와 충돌을 면하지 못할 것이오. 빈승이 가장 공포감
을 느끼는 것은 무아진교가 얼마나 많은 첩자를 보내 천하 무림 각파 안
에 잠복시켜 놓았는가 하는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가 일단 행동을 취한
다면 적이 괴멸적인 도살을 발동할 것이요, 그렇지 않소?"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사태의 엄중함을 느꼈다. 무아진교는 확실히 중원
무림도의 행동을 견제하여 약세에 처하게 했으니 고라신승의 안색이 시종
엄숙하고 심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돌연한 줄기 영광이 몽천악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낭랑한 소리
로 말했다.
"대사님, 우리가 그 교도 한 명을 사로잡아 엄히 다스려 보는 것이 어떻
겠습니까?"
고라신승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아진교의 중심 권력은 대부분 아홉 명의 손에 조종되고 있으므로 나머
지 교도들을 사로잡아 다스려 본다고 해도 별로 중요한 소식을 얻지 못할
것이오."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후배는 그 칠교주를 사로잡으려고 생각합니다."
고라신승은 고개를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칠교주가 연마한 것은 소녀 잔양신공이므로 고시주는 가급적이면 그녀와
부딪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오."
"칠교주는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살인을 하는 흉악한 인물이니 그녀를
제거하지 않는 한 천하 무림에 편안한 날이 단 하루도 없을 것입니다."
고라화상은 침중하게 말했다.
"고시주, 절대 경거 망동한 짓은 하지 마십시오. 빈승이 결코 불길한 말
을 하는 것이 아니오. 헤아려 보면 지금까지 벌써 십여 명의 강호 고수들
이 그 소녀 잔양신공에 사상했고 아직도 완치시킬 자신이 없으므로 빈승
은 시주에게 일시적인 호기를 부리지 말도록 부탁하는 것이오."
몽천악은 어쩔 수 없어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후배는 대사의 분부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고시주, 빈승은 먼저 제삼교주에게 손을 쓰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중
원 무림도의 도사와 협사들은 더 이상 어떤 손실도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갑자기 몽천악은 날 듯한 신색으로 손뼉을 치며 외쳤다.
"아주 비할 데 없이 좋은 결정입니다. 제삼교주가 신승을 가장한 용모는
그렇게 같을 수가 없어 진짜와 가짜를 가려내기가 힘들 정도이니 만약 그
삼교주를 제거할 경우 신승께서는 역시 무아진교에 스며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고라화상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탄식했다.
"시주는 생각이 매우 민첩하군요. 빈승은 벌써부터 그렇게 행동하기로 결
정했었소. 그러나 그 동안 하현질 등 여러 사람들의 반대가 있어서 겨우
오늘 밤 늦게나마 이런 결정을 내린 것이오."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문득 고라화상은 앞으로 무림도 저격대의 지휘자
인데 만약 그분이 적의 교 안에 잠입해 들어간다면 누가 저격대를 통솔할
것이며 또한 용의 우두머리가 호랑이 굴에 잠입해 들어간다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자 몽천악은 다급하게 말했다.
"대사님, 제 생각에 이 결정은......."
고라화상은 그의 말을 가로챘다.
"고시주, 더 이상 주저할 필요가 없소이다. 빈승은 적진에 잠입해 들어가
는 것에 대해서 이미 차선책을 연구해 두었고 빈승의 사무를 대신 맡아
줄 사람도 이미 안배해 놓았으니 고시주는 내일 무패 무렵에 부성 동남쪽
삼 리 교외의 능운보탑으로 가서 협사 한 분을 만나 함께 힘을 합쳐 제삼
교주를 제압하시오. 빈승은 지금 급히 가서 중요한 일의 연락을 취해야
하므로 여기서 잠시 작별을 해야겠소. 고시주는 모든 것을 그 협사와 의
논하고 그의 분부만 따르면 될 것이오."
고라화상은 말을 마치자 바위에서 일어나 사정이 급박한지라 조금도 머뭇
거리지 않고 훌쩍 몸을 날려 눈 깜박할 사이에 육칠 장 밖으로 날아가 내
려섰다.
몽천악은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후배는 대사의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말을 마쳤을 때 고라화상은 이미 멀리 떠나가고 있었다.
하룻밤의 긴장으로 매우 피로했던 몽천악은 그날 밤 개봉부 성안에서 묵
었으며 이윽고, 무패 무렵이 되었다.
몽천악은 고라화상의 지시에 따라 경공을 전개하여 동남쪽을 향해 질풍같
이 달렸다.
삼사 리쯤 달리자 과연 세 줄기의 우뚝 솟은 높은 탑이 별빛에 반사되어
웅장하고 엄숙한 모습을 나타냈다.
몽천악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능운보탑이구나.'
몽천악의 신영이 산마루에 가까이 접근하자 돌연 왼쪽 보탑 위에서 한 줄
기의 절속한 인영이 떨어져 내려와 맞이해 오며 물었다.
"고장사이십니까?"
몽천악은 낭랑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고봉이라고 하는데 형씨의 성함은 어떻게 되십니까?"
그 사람은 남의의 유사 차림의 청년으로 왼손에는 종이 부채 하나를 들고
있었고 풍채가 훤출한 것이 완전히 문사의 기질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는 무공이 대단한 협사인 것을 몽천악은 미처
알지 못했다.
남의의 유사는 몽천악을 한참 동안 살펴보다가 말했다.
"저는 정음천이라고 하는데 고라신승의 분부를 받들고 이곳에서 고장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몽천악은 정음천이란 이름을 듣자 자신도 모르게 숙연해지며 공손한 어조
로 말했다.
"아, 바로 운주 대유협이셨군요. 대명은 오래 전부터 익히 들어왔는데...
... 실례가 많았습니다."
운주 대유협 정음천은 근 십수 년 이래의 무림
후기지수(後起之秀)였다.
몽천악은 이제 막 삼십이 넘은 이 문약한 서생이 절기를 지닌 무림의 대
표적인 인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운주 대유협 정음천은 손을 합쳐 포권의 예를 표했다.
"고장사, 겸손해 하지 마십시오. 고라신승께서 당부하신 일을 고장사께선
모두 알고 있겠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저는 정대협의 분부만을 따를 뿐입니다."
"고라신승께선 우리들과 하대리맹주가 힘을 뭉쳐 무아진교의 제삼교주를
제압하라 하셨소. 또 신신당부하신 것은 이 일은 일거에 성공해야 하며
절대 실수해서는 안된다고 하시며 사전에 우리 두 사람이 대책을 강구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몽천악이 물었다.
"정대협께선 혹시 무슨 안배가 있으신지요?"
운주 대유협 정음천을 고개를 들고 야색을 바라보며 말했다.
"자정까지는 아직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으니 무방하다면 우리 탑 꼭
대기에 올라가 잠시 의논합시다. 높은 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면 사방의
동정도 살필 수가 있을 테니까요."
"정대협의 말씀이 옳습니다."
말을 마치고 두 사람을 보탑을 향해 걸어갔다.
정음천이 말했다.
"우리 잠시 탑 꼭대기에 숨어 있습시다."
그는 말을 하며 곧장 솟구쳐 올라갔다. 그는 한 번에 사 장 높이 솟구쳤
으며 공중에서 재주를 넘어 사층 처마를 짚고 다시 새처럼 삼 장 오륙 척
올라가 제일 꼭대기 층 지붕 위에 내려 앉았다.
이 절정 경공은 보고 있던 몽천악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는 곧 뒤따라 올라갔는데 매 층마다 힘을 주고 올라갔다. 그 속도는 보
는 이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할 정도로 빨랐으며 눈 깜박할 사이에 탑
꼭대기에 올라갔다.
정말 전광 석화 같은 절륜한 경공이었다.
능운보탑의 결투
정음천은 놀라는 빛을 띠며 물었다.
"고형의 경공신법은 혹시 운제분이 아닙니까?"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운제분과는 아직 일단의 차이가 있으니, 정대협의 웃음거리가 되었습니
다."
운주 대유협 정음천은 사전에 몽천악의 무공이 뛰어나게 절교하다는 귀띔
을 들었었다. 그러나 조금 전 몽천악을 보았을 때는 어느 정도 그 말을
불신하고 경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가 발휘한 경공 절기를 보자 자신도 모르게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은 과연 몸에 절학을 지니고 있구나. 그의 운제분 경공 제승법은
이미 노화순청의 경지에 다다랐으니 이 정도의 경공을 가지고 만약 팔에
힘을 주어 솟구친다면 아마 이를 훨씬 능가할 것이다.'
정음천을 그런 생각이 들자 즉시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고형은 참 실력을 감추고 나타내지 않으니 확실히 보기 드문 일이며, 고
라신승은 정말 인재를 잘 선택하셨습니다."
"정대협께서 이처럼 과찬을 해주시니 정말 고개를 들 수 없습니다."
"고형, 우선 여기 앉읍시다."
마침내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몽천악이 물었다.
"정대협, 제삼교주의 교활함은 여우같은데 만일 그가 허점을 발견하고 하
대리맹주와 오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지요?"
운주 대유협 정음천은 무거운 소리로 말했다.
"제삼교주를 제압하기로 결정한 것은 고라화상이 어젯밤 일시에 그렇게
결정한 것이므로, 이 일은 고형과 나 그리고 하대리맹주만이 알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소식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고 하대리맹
주도 허점을 드러내지 않으리라고 생각되나 한가지 걱정되는 것은 제삼교
주가 포위 공격 때 도망쳐 나가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제삼교주의 무공이 비록 고절 하다고는 하지만 하대리맹주는 결코 우둔
한 인물이 아니며 또한 정대협의 도움이 있으니...... 생각건대 적에게
머리가 세 개가 있고 팔이 여섯 개가 있다할지라도 머리를 숙이고 체포될
것입니다."
정음천은 머리를 끄덕였다.
"오직 모든 것이 순조롭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그 암담
한 결과를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만약의 사태를 방비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대책을 연구해
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당 그래야지요."
정음천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제 조금 있으면 하대리맹주와 제삼교주가 이 능운보탑에 당도할 것입
니다. 그때, 하대리맹주는 즉각 제삼교주와 대치하여 상대방의 정체를 폭
로하고 곧 싸움이 시작될 것입니다. 만일 하대리맹주가 대적해내지 못할
경우 나는 싸움에 가담하여 적을 공격하겠소. 그때 고형은 적이 패해 도
주하는 퇴로를 차단하는 임무를 맡아 주시오. 그리고 만약 나와 하대리맹
주도 역시 적을 상대해 내지 못하면 고형께서도 즉시 공격에 가담해 주십
시오."
"정대협, 나는 정대협과 임무를 바꾸고 싶습니다."
"그렇게 해도 좋습니다."
"나는 제삼교주가 이곳에 도착하는 즉시 나타나 하불감 대리맹주를 앞질
러 출수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현재 하불감형의 신분이 일대 맹주이시니
함부로 출수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음천을 고개를 끄덕였다.
"고형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고형에게 너무나 수고를 끼치는 게 아
닐지......."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무아진교와 불구 대천의 원한이 있으므로 무아진교의 사람이라면
그 씨를 말려 놓을 결심입니다."
"고형, 우선 사방의 지세를 잘 살펴보시고 은밀한 은신처를 선택해 두십
시오. 시간은 이제 겨우 삼각 밖에 안 남았습니다."
"내 의견으로는 정대협께서는 이곳을 지키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
다. 만약 제삼교주가 패한다면 공중으로 해서 도망칠 가능성이 있으니 그
가 몸을 날려 세 줄기의 높은 탑으로 도망치는 것이 보이면 나는 안심하
고 오른쪽 탑 뒤로 돌아가 쉽게 막을 수가 있으며 시간 상으로도 선기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정음천을 고개를 끄덕였다.
"고형의 견해는 매우 좋습니다. 설령 제삼교주가 날개가 있다할지라도 도
망치기 어려운 것입니다."
"시간이 가까웠으니 나는 일찌감치 오른쪽 탑 아래를 지켜 제삼교주에게
멀리서 행적이 발견되는 것을 피하겠습니다."
말을 마치자 몽천악은 기왓장에 몸을 바싹 붙인 채 뒤쪽으로 굴러 내려가
걸음을 옮겨 오른쪽 보탑 앞으로 어두운 곳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정음천은 높은 곳에서 희미하게 몽천악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이 무렵 삼라만상은 죽은 듯이 고요했고 달도 없는 밤하늘에는 수없는 차
가운 별들만이 깜박거리며 대지에 미약한 빛을 뿌려 주고 있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 마치내 자정이 되었다.
돌연 몽천악은 풀 위를 밟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번쩍 눈을 떴다. 잠시 후, 보탑의 산문으로 두 줄기의 인영이 천천히
들어왔다.
앞의 한 사람은 회색의 가사에 목에는 묵직해 보이는 염주를 걸고 있었으
며 오른손에는 총채 하나를 들고 있었으므로 이는 묻지 않아도 고라화상
을 가장한 무아진교의 제삼교주라는 것을 첫눈에 알 수 있었다.
뒤에 체격이 중후한 중년인이 대사형 패왕궁 하불감이라는 것도 몽천악은
단번에 알아 차렸다.
패왕궁 하불감은 이미 계산이 있는 듯 산문을 들어서자 일부러 걸음을 늦
추더니 문 앞을 막아섰다.
제삼교주는 극히 눈치가 빨랐으므로 앞으로 몇 걸음 걸어가더니 돌연 걸
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하현질, 자네는 무슨 중요한 일이 있기에 빈승을 이곳으로 데려 왔는
가?"
몽천악은 하불감의 대답을 허용하지 않고 재빨리 일어나 낭랑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하대리맹주께서는 당신을 데리고 나를 만나러 왔습니다."
말이 끝났을 때 몽천악은 이미 제삼교주의 앞 일 장 밖에 와 있었다.
고라신승으로 가장한 제삼교주는 어리둥절했다.
"이제 보니 고시주였군요. 그렇지 않아도 빈승과 하대리맹주는 시주를 찾
고 있던 중이었소."
몽천악은 차갑게 웃었다.
"하하하...... 제삼교주, 당신은 더 이상 자비를 가장할 필요가 없소.
진짜 소림 신승 고라대사께선 돌아가시지 않았으니 당신은 오늘 밤 순순히
정체를 밝혀야 피륙의 고통을 면할 수 있을 것이오."
이 말에 제삼교주는 안색이 돌변했다. 그는 하불감을 한 번 돌아보는 순
간 곧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없어 침착하게 말했다.
"고봉, 자네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지, 빈승은 조금도 모르겠군."
이때 패왕궁 하불감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제삼교주, 이제 당신이 우리가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을 한다면 우리는
절대 당신을 사지로 몰아넣지 않을 것이오. 당신이 고라신승을 가장한 일
에 대해 나는 벌써부터 훤히 알고 있었소."
이때 제삼교주는 판이 깨지고 올가미에 걸려든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눈앞의 두 고수쯤 별로 마음에 두지 않는 듯 음침하게 웃었다.
"좋다. 조만간 부딪칠 날이 있었을 테니까. 본 교주는 무림맹을 파괴하라
는 명을 받았으므로 먼저 용의 머리를 자를 수밖에 없다."
패왕궁 하불감은 무거운 음성으로 외쳤다.
"제삼교주는 들으시오.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는 누구요?"
제삼교주는 음흉하게 웃었다.
"염라대왕에게 가서 물으면 잘 알 것이다."
패왕궁 하불감은 눈썹을 찌푸렸다.
"일이 이쯤 되었는데 그래도 귀하는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겠소? 우
리는 오늘 밤 당신의 정체를 폭로시키고 깨끗이 제거하기고 결심했으므로
교주를 용납치 않을 것이오. 그러나 만약 귀하가 순순히 합작을 한다면
귀하의 생명을 고려해 볼 수도 있소이다."
제삼교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너희 두 사람 정도로는 아직 본교주의 자유를 구속하지 못할 것이다."
몽천악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시오. 결과는 시험해 보면 곧 알 수 있을
것이오."
이때 제삼교주는 예리한 눈길로 잽싸게 사방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러나
그의 신색으로 보아 하불감 외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한 듯했
다.
패왕궁 하불감이 재차 고함쳐 물었다.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는 누구요? 어서 말하시오!"
제삼교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름을 알게 되면 너희들은 오경까지도 살지 못할 터이니 역시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몽천악은 냉소를 지었다.
"나는 그런 미신을 믿지 않으니 어서 말해 보시오."
제삼교주는 번개같은 눈길로 몽천악을 한 번 쓸어 본 뒤 말했다.
"보건대 귀하는 무공의 기초가 심후하니 본교주는 귀하를 본교에 소개시
켜 중직을 담당케 하고 싶소. 그러니 귀하는 아직 고려할 시간이 있으니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십시오."
몽천악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 그건 어젯밤 이미 제삼교주 휘하 호법의 입을 통해 알았고 제
칠교주도 내 앞에서 그 말을 한 적이 있었소. 그러나 나는 모두 한마디로
거절했소. 그것은 과연 누가 나를 구사할 자격이 있는가를 알아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소."
제삼교주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네가 본교의 많은 비밀을 알았으니 본교에 가입하지 않는다면 죽음 밖에
다른 길이 없다."
몽천악이 말했다.
"귀하는 어째서 자신을 걱정하지 않소?"
제삼교주는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앞으로 한 시간 후면 십 리 주위의 초원은 본교 제자들로 꽉 찰 것이며
겹겹이 포위해 올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이 어떻게 빠져나
가겠느냐?"
패왕궁 하불감을 이 말을 듣자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귀하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오?"
제삼교주는 웃었다.
"절대 위협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다."
몽천악이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대협, 그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지 마십시오."
제삼교주는 껄껄 웃었다.
"하하하, 사람은 경계하는 마음을 품지 않을 수는 없는 법, 본교주가 하
형과 이곳에 오기 전 이미 본교의 제자들이 미행을 했다. 이와 같이 본교
주의 발길이 닿는 곳은 감시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우니 이것은 무아진교
의 장점이기도 하며 또한 단점이기도 하다......."
몽천악은 움찔하며 물었다.
"그 장단점이란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오?"
"장점이란 소식이 끊어지지 않고 수시로 연락할 수 있으며 적이 파 놓은
함정에 빠지는 것을 방비할 수가 있다는 것이고 단점은 무아진교의 상하
가 서로 믿지 못해 피차가 감시한다는 것이다."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무아진교는 무아(無我)로 호칭되며 일단 교에 가입하면 영육을 모두 교
에 바치는 것인데 귀하는 지금 교구에 비판을 가해 이미 불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니 이 기회에 사를 버리고 정(正)으로 전향하는 것이 어
떻겠소?"
이 말을 들은 제삼교주는 안색이 돌변하더니 외쳤다.
"닥쳐라! 본교주는 무아진교 제삼교주의 신분으로 군웅을 지휘 통솔하며
한 사람 다음으로 만인 위에서 생사 대권을 쥐고 있거늘 어찌 불만이 있
겠느냐?"
몽천악이 냉랭하게 말했다.
"귀하가 그렇게 말한다면 나는 손을 써서 제거하는 수밖에 없소이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몽천악은 손을 뻗쳐 쌍장을 휘둘러 번개 같이 쳐
갔다.
장세가 뻗쳐 나가자 평지에 풍운이 몰아치듯 강맹한 경풍이 예리한 소리
와 함께 천지를 뒤엎을 듯한 기세로 몰아쳤다.
몽천악이 발동한 공세는 번개 같이 빨랐고 또한 사전에 아무 예고도 없었
으므로 제아무리 무공이 높고 교활한 제삼교주라 할지라도 거의 속수무책
이었다.
그리하여 제삼교주가 경악하고 있을 때 마치 강철 같은 바람이 우뢰와 같
은 기세로 그를 눌러 왔다.
이런 국면을 맞이하면 오직 결정성을 채택하여 맞부딪쳐 나가는 도리 밖
에 없는 것이다.
"얏!"
벼락같은 고함 소리와 함께 제삼교주는 쌍장을 합장하여 십자로 교차시키
며 휘둘러 댔다.
"펑!"
산천을 진동시키는 일진의 커다란 폭음.......
동시에 제삼교주는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몽천악의 머리 위를 스친 후
마치 하늘을 나는 거대한 학(鶴)처럼 곧장 고탑을 향해 솟구쳤다.
몽천악은 이미 적이 장풍을 이용하여 허공으로 솟구쳐 도망칠 것을 알고
있었던 듯 어느 틈에 손에는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는 장검 한 자루를 빼
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무지개와 같은 차가운 검광이 번개같이 제삼교주를 뒤쫓아
올라갔다. 용의 신음 같은 가벼운 휘파람 소리와 함께 저녁놀 같은 검광
이 회전하고 천만 줄기의 검영이 번쩍이더니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갔던
제삼교주의 몸이 회전하며 다시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그러자 번개와 같은 무지개가 돌연 걷히고 몽천악이 손에 들은 서릿발 같
은 석 자 장검이 싸늘한 빛을 발하며 제삼교주와 일곱 자 떨어진 곳에서
가로막았다.
제삼교주는 얼굴에 한 줄기 경이의 기색을 나타내며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몽천악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그는 몽천악의 놀라운 절학을
예측하지 못했던 것이다.
평생 그는 단 한 번도 자기의 생명에 위협, 긴장, 공포를 만나지 못했으나
뜻밖에 오늘 이 자리에서 만난 것이다.
일 장의 접촉으로 그는 적의 웅휘한 내공이 자기보다 삼분이나 강하며 일
검의 추격은 정확하고 기묘하여 귀신도 예측할 수 없음을 느꼈다. 이미
자기는 패국에 처했고 옆에는 또 패왕궁 하불감이 있으니 말할 나위가 없
는 것이다.
어떻게 이 액운을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몽천악은 그가 대책을 강구하도록 용납하지 않고 다시 선제 공격
을 발동했다.
그의 장검은 서서히 제삼교주의 요혈을 핍박했다.
이 일겁은 언뜻 보기엔 극히 평범하고 추호의 경력도 없는 것 같았지만
사실 그 안에는 무궁한 변화와 악독한 절초가 내포되어 있었다.
제삼교주도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닌지라 이런 검세를 목격하자 온몸을
산악처럼 굳히고 제자리에 우뚝 버티고 섰다.
몽천악은 적이 자기의 검식에 유인되지 않는 것을 보자 원식을 변화시키
지 않고 곧장 번개처럼 찔러 갔다.
차가운 검이 바람처럼 번쩍이고 인영이 휘청거리는 사이에 제삼교주는 곧
장 찔러 오는 일 검을 간신히 피해 냈다.
몽천악은 놀라운 절기를 지니고 있는 사람인지라 일단 검초를 발동하게
되자 섬광과 같이 빨랐으며 팔을 회전하는 사이에 검기는 예리한 휘파람
소리를 끌며 상하로 바람같이 공격해 갔다.
제삼교주는 완전히 선수를 빼앗겨 반격은 고사하고 무사히 검식을 피하는
것에도 상당한 곤란을 느꼈다. 그는 합장을 한 채 가볍게 한 꾸러미의 염
줄을 쥐고 바람과 같이 발을 놀려 좌우로 움직이며 몽천악의 십삼 초 검
식을 피했다.
두 사람의 이십여 초의 접촉은 옆에서 보고 있던 패왕궁 하불감과 탑 꼭
대기의 운주 대유협 정음천으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그들은 몽천악의 검술이 기이하고 절교하나 제삼교주도 상당한 강적이라
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이 박투를 벌이고 있는 사이에 하불감을 그가 명성을 얻는데 의지
한 정강철궁을 들어 화살을 먹이고 경계하고 있었다. 이때 그는 몽천악의
제십칠 초 검식이 빗나간 것을 보자 참지 못하고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
다.
"고형, 혹시 내 도움이 필요치 않습니까?"
사실 패왕궁 하불감은 몽천악이 남이 끼어 들어 협공하는 것을 언짢아하
지 않을까 하는 우려로 주저하며 손을 쓰지 못했던 것이다.
몽천악은 큰소리로 말했다.
"하맹주, 걱정 말고 손을 쓰십시오. 우리들은 시간을 벌어야하니 속전속결
을 합시다."
바로 이때 제삼교주는 몽천악이 말을 하느라고 정신이 잠시 분산된 틈을
놓치지 않고 날카롭게 냉소를 짓더니 손에 쥐고 있던 일백여덟 알의 보리
염주를 일시에 몽천악을 향해 마치 탄환처럼 쏘아 댔다. 그 염주가 퍼져
나간 범위는 거의 칠팔 장에 달했다.
이 암기 수법은 보통이 아닌지라 제아무리 무공이 높은 인물일지라도 이
일백여덟 개의 염주알이 교차하는 칠 장 원근의 사격을 피해내기가 어려
운 것이다.
이것을 본 패왕궁 하불감은 크게 외쳤다.
"고소협......!"
다음 말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
활에 먹여진 깃 없는 쇠화살이 동시에 시위를 떠나갔다.
하불감의 패왕전은 태양을 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천하에 이름을 떨친
무림 일절이므로 깃 없는 쇠화살이 시위를 떠나자 그림자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쾌속함이 형용하기 어려웠다.
제삼교주는 염주알을 쏘아 내자 귀신처럼 민첩하게 오른쪽을 향해 가로
질러갔다. 그러나 그의 재빠른 동작도 뒤에서 쏘아온 패왕전을 피해 낼
수 없었다.
"윽!"
신음 소리와 함께 패왕전은 제삼교주의 왼쪽 옆구리를 관통하여 허리 앞
쪽으로 뚫고 나왔다. 시뻘건 선혈은 즉시 가사를 붉게 물들였다.
이 일전은 비록 요혈에 명중되지는 않았으나 삼교주는 중상을 입고 만 것
이다.
그러나 몽천악 역시 왼쪽 어깨에 두 알의 염주알이 격중되어 옷을 뚫고
들어가 선혈이 낭자했고 오른손의 장검도 세 알의 염주에 맞아 삼 장 밖
으로 날아갔다.
패왕궁 하불감은 몽천악이 부상당한 것을 보자 급히 물었다.
"고소협, 상처가 어떻습니까?"
몽천악은 급히 외쳤다.
"하맹주, 나는 괜찮으니 어서 적의 도주를 막으십시......."
이때, 제삼교주는 몸을 날려 마치 하늘로 솟구치는 학처럼 신속하기 이를
데 없이 위로 삼사 장 정도 날아올라 왼쪽으로 도망치려고 했다.
이때였다. 왼쪽 보탑 꼭대기에 잠복해 있던 정음천이 창공을 진동시키는
용의 울음 소리 같은 휘파람을 일으키며 마치 천마가 하늘을 달리듯 탑
꼭대기에서 가볍게 내려앉아 곧장 제삼교주를 향해 갔다.
제삼교주는 탑 꼭대기에 강적이 매복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
다. 그는 조금 전 사방의 형세를 살펴보았었기 때문이었다.
이 생사 존망의 중요한 순간, 그는 있는 힘을 다해 일격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제삼교주의 허공에 떠 있는 몸이 한 번 굽혔다 펼쳐지더니 쌍장을 수평으
로 밀어내는 것이 보였다.
정음천은 진기를 모아 질풍같이 쏘아 가 정면을 향해 거센 두 줄기의 광
풍을 쳐 댔다.
허공에서 네 줄기의 노도와 같은 장력이 접촉했다.
"윽......."
제삼교주는 두 번째 신음을 토해 내더니 마치 실이 끊어진 연처럼 아래로
굴러 떨어졌으며 정음천도 한 줄기 장력에 진동되어 가슴의 기혈이 용솟
음 치고 몸이 위를 향해 두 번 재주를 넘었다.
제삼교주는 피격되어 아래로 굴러 떨어졌지만 발부터 떨어져 땅 위에 안
전하게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의 안색을 보기가 흉했으며 입가에는 두 줄
기의 핏자국이 보였고 눈은 벌겋게 충혈된 채 극도로 화가 난 듯 좌우에
서 포위해 오는 하불감과 몽천악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때 정음천도 무사히 땅에 내려앉아 즉시 제삼교주의 뒤쪽 수장 밖으로
가로막아 섰다.
이 무렵 제삼교주는 자신의 패배를 뚜렷이 의식했으며 오늘 결코 이 세
명의 절세 고수의 협공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 순간 갑자기 제삼교주의 입에서 처량하고 날카로우며 귀를 거슬리게
하는 귀신이 우는 소리 같고 늑대가 울부짖는 것 같은 긴 웃음 소리가 새
어 나왔다.
탑에서 만난 소녀
제삼교주는 돌연 허공으로 몸을 솟구치더니 몽천악을 향해 질풍같이 덮쳐
갔다.
그는 몽천악이 염주에 부상을 입었으므로 세 사람 중 실력이 제일 약할
것으로 믿고 비록 오늘 전사한다고 할지라도 그들 중 한 사람은 격살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제삼교주가 덮쳐 간 기세는 한층 매섭고 절륜했다.
하불감은 이미 제삼교주가 몽천악을 향해 덮쳐 가리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으므로 적이 몸을 움직이기가 무섭게 철궁을 휘두르며 가로막아 갔
다.
제삼교주의 기세는 부상을 입은 야수와 같았으며 철궁이 무서운 위력으로
쓸어 오는 것을 보자 쌍장을 뒤집어 철궁을 낚아채 갔다.
"팍!" 하는 울림이 일어났다.
제삼교주의 왼쪽 늑골 한 개가 하불감의 출궁에 맞아 부러진 것이다.
그러나 이 전광 석화와 같은 순간에 제삼교주는 치명적인 반격을 가해 오
른손을 마치 재빠른 뱀처럼 하불감의 왼쪽 가슴을 향해 쳐냈다.
그러자 한 줄기 무형 장력이 하불감의 철궁을 손에서 벗어나게 하면서 몸
이 뒤집힐 정도로 울렸다.
한 사람이 자신의 생명을 버릴 각오를 하면 무서운 용기와 힘이 생기는
법이다.
제삼교주는 하불감을 격퇴시키자 성큼 한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재빨리 몽
천악을 향해 덮치면서 쌍장을 교차시켜 쳐냈다.
장력은 천지를 뒤엎을 듯이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몽천악은 제삼교주가 죽기를 각오하고 덤비는 기세를 보자 마음이 서늘해
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만만치 않은 몽천악은 적이 그러한 기세로 덤벼들자 피하지 않고
역시 쌍장으로 포물선을 그리며 마중해 나갔다.
이러한 장식에 제삼교주도 응당 단단히 화가 올랐을 것이다. 사실 몽천악
은 장공에 뛰어났으며 그 위력은 풍운을 무색케 할 정도였다.
첫번째 장력이 부딪치자 쌍방은 그 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두 번째 사 장이 부딪치자 두 사람은 모두 뒤로 세 걸음씩 물러났다.
세 번째.
제삼교주는 쌍장을 십자로 교차한 채 천천히 밀어 갔다.
몽천악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벼락 같이 고함을 지르며 오른손을 반
쯤 주먹으로 쥐고 내려치는 것 같은 모습으로 휘둘렀다.
"으으......."
순간 몽천악은 코가 막힌 듯한 신음 소리와 함께 휘청거렸다. 쿵쿵쿵...
... 연달아 다섯 걸음을 물러나더니 안색이 창백해진 채 그 자리에 주저
앉아 버렸다.
그러나 제삼교주는 여전히 제자리에 쌍장을 십자로 교차시킨 채 버티고
서서 눈을 왕방울 같이 커다랗게 뜨고 있었다.
패왕궁 하불감과 정음천은 이런 상황을 보자 일제히 고함을 지르며 덮쳐
가 손을 합쳐 협공을 하려고 생각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덮쳐 가 채 손을 쓰기도 전에 우뚝 버티고 서 있던 제
삼교주가 꽂꽂이 굳은 채 나무 둥지처럼 앞으로 고꾸라질 줄이야.......
이때 하불감과 정음천은 제삼교주의 얼굴과 손 그리고 전신에서 붉은 피
가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피는 전신의 털구멍에서 솟아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그들은 삼교주가 몽천악이 조금 전에 휘
두른 일 권에 생명을 잃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몽천악의 일 권은 도대체 무슨 무공이란 말인가? 제삼교주를 온
몸의 털구멍에서 피를 흘리도록 했으니.......
전투는 멈추었다. 그러나 이 일 장의 싸움은 처절하고 흉악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었다.
제삼교주의 완강하고 악독한 전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할 수 없이 꺼림
칙한 것을 느끼게 했다.
처량하고 길게 탄식한 하불감은 천천히 몽천악 앞으로 다가가 허리를 굽
혀 읍을 한 뒤 말했다.
"오늘 만약 고소협의 절세 무학의 도움이 없었다면 제삼교주의 간계를 수
습하려고 한 것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이곳에서 고소협에게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그런데 고소협의 상태가 좀 어떤지 모르겠군요."
몽천악은 비록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재빨리 일어나 길게 읍을 하
여 답례하면서 말했다.
"하맹주,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아...... 무아진교의 한갓 제삼교주의 무
공이 이렇게 놀랍도록 무서울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오늘 만약
하맹주와 정대협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저도 이 사람을 대적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 말은 사람들의 안색을 심각하게 만들었고 이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
리우게 했다.
세 사람은 제삼교주의 용맹함과 악독함을 직접 목격한 터라 이로써 무아
진교의 다른 교주들의 무공을 연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닥칠
중원 무림의 위기는 결코 단순한 것이 아닐 것이다.
운주 대유협 정음천이 씁쓸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늘의 싸움은 어떻든 간에 성공한 셈입니다. 하맹주께서는 혹시 나로
하여금 제삼교주의 시체를 치우게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불감이 말했다.
"정형께서 좀 수고를 해주십시오."
정음천은 오른손을 품속에 넣어 흰 사기병 하나를 꺼내 뚜껑을 열더니 약
간의 녹색 분말을 시체 위에 뿌렸다.
하불감과 몽천악은 무림에 일종의 소골화시산이라는 약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정음천이 시체 위에 약가루를 뿌리자 제삼교주의 빳빳하게 굳어진 시체가
수축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커다란 시체는 미미한 액체로 변했고 오직 손톱과 머리카락, 수
염 그리고 옷 한 벌만을 덩그렇게 남겨 놓았다.
약물의 기이함은 실로 오묘했다.
정음천은 시체를 없앤 뒤 다시 불을 피워 제삼교주의 유품을 깨끗이 태워
버렸다.
정음천은 그제야 길게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이제 우리는 제삼교주를 제거하기는 했으나 무아진교에 대한 자료는 조
금도 얻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결국 모험을 하여 고라 노선배님으로 하여
금 제삼교주의 신분으로 대처케 해야한단 말입니까?"
하불감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그건 앞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쯤 고라 노선배님께서는
무림 맹주부 안에 진주해 계실 테니 우리는 여기서 계획을 의논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몽천악이 돌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저는 고라 노선배님께서 모험을 해 가며 무아진교에 깊이 들어가시는 것
을 반대합니다."
정음천이 물었다.
"고형은 어째서 반대하시는 겁니까?"
몽천악은 대답했다.
"만약에 고라 노선배님께서 제삼교주를 가장하여 무아진교에 잠입하신다
면 머지 않아 적에게 발각되어 해를 당할 것입니다. 그러는 것보다는 차
라리 신승이 잠시 맹주부 안에 머물러 그 안에 잠복해 있는 적의 첩자와
연락을 취하게 하여 그들을 먼저 섬멸하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무림 맹
주부 안의 첩자들을 모두 소탕한 뒤에 우리는 곧 정정당당하게 무아진교
와 접전을 벌일 수가 있습니다."
패왕궁 하불감은 고개를 끄떡였다.
"고소협의 의견은 매우 옳습니다. 지금 우리는 그 첫 단계를 진행 중입니
다. 그러나 고라신승께서는 지금 우리가 무아진교에 대한 내막을 아는 것
이 매우 적어 그들이 즉시 모든 행동을 중지한다면 중원 무림도는 적을
철저히 소탕할 수 있는 단서가 한 가지도 없다고 걱정하셨습니다."
몽천악은 미소를 지었다.
"무아진교가 무림을 전복하려는 음모를 꾸민 것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
므로 그들은 결코 제삼교주와 무림 맹주부에 잠복해 있는 첩자들이 해를
당했다고 해서 행동을 중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추측으로는 무아
진교는 이것으로 인해 오히려 더욱 적극적인 행동과 정면 공세를 전개할
것 같습니다."
정음천이 말했다.
"고형의 말씀에는 일리가 있습니다. 현재의 사정으로 볼 때 역시 맹주부
에 잠복해 있는 첩자들을 제거하는 일이 가장 시급한 일이니 우리는 곧
그 방면으로 행동합시다."
"아!"
하불감은 가볍게 탄식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제삼교주는 죽기 전에 무아진교의 제자들이 뒤를 밟아 곧 소식을 알릴
것이라고 했는데 그게 정말 사실인지 그 여부를 모르겠군요."
정음천이 말했다.
"저는 탑 꼭대기에 숨어 있었으므로 일 장 이내의 것은 바람부는 것이나
풀잎이 움직이는 것까지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습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소."
몽천악이 웃으며 말을 받았다.
"그것은 제삼교주가 어떻게든지 시간을 끌어 벗어나려고 꾸민 것에 불과
하니 하맹주께선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불감이 말했다.
"무아진교의 사람들은 들어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며 행동의 비밀스러운
것은 마음이 오싹할 정도입니다. 그러나 나도 그와 이곳에 오기 전에 미
행하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를 주의했으니 아마 그는 거짓말을 한 것 같습
니다."
그러나 그의 말이 막 끝나자 돌연 몽천악이 전음입밀의 공력을 운용하여
급히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큰일났습니다. 적이 미행하여 지금 중간 고탑의 어두운 곳에 한 명이 잠
복해 있으니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물러났다가 다시
돌아와 삼각 포위로 적의 도주를 막읍시다."
이 말을 들은 정음천과 하불감은 대경실색했으나 그렇다고 머리를 돌려
살펴볼 수는 없었다.
이때 몽천악의 낭랑한 음성이 들렸다.
"하맹주, 시간이 이르지 않으니 우리 빨리 맹주부로 돌아갑시다."
정음천과 하불감이 일제히 대답했다.
"갑시다."
세 사람은 경공을 전개하여 바람같이 산문을 날아 나와 급히 치달았다.
대략 백 장쯤 달렸을 때 정음천이 급히 물었다.
"고형, 정말 적의 미행이 있었습니까?"
몽천악이 말했다.
"적은 경공이 절고하여 언제 탑 꼭대기에 잠복해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만약에 우연히 고개를 들어 그 차가운 흰 빛을 보지 못했다면 끝내
적의 그림자를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오."
하불감은 크게 놀랐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 번째 행동을 완성할 수 없겠군요."
몽천악이 말했다.
"그러니 우리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그 사람을 도망가게 해서는 안됩니
다. 이제 앞으로 반 리를 더 달려갔다가 다시 방향을 돌려 능운보탑으로
돌아가 그 사람을 포위해야 합니다."
말하는 사이에 세 사람은 이미 반 리를 달려갔다. 그러자 몽천악은 방향
을 돌려서 남쪽으로 돌아갔고 하불감은 동북 쪽으로 돌아갔으며 정음천은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세 사람의 경공은 모두 노화순청의 경지에 달해 있었으므로 반 리 정도의
왕복은 잠깐 사이에 불과했다. 정음천이 먼저 능운보탑의 산문으로 돌아
왔다.
몽천악과 하불감도 거의 동시에 서남과 동북 쪽 담을 넘어 날아갔다.
희미한 별빛이 비치고 있는 광장 안에는 과연 한 줄기의 아름다운 인영이
서 있었다.
그녀는 몽천악 등 세 사람이 소리 없이 돌아온 것을 보자, 잠시 넋을 빼
앗긴 듯 그 자리에 멍청히 서서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이 접근하는 것을 바
라보고 있었다.
이때 하불감과 정음천은 몽천악의 예리한 안력에 놀라고 감복했다. 두 사
람은 조금 전 몽천악의 말을 듣고 반신반의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과
연 적이 있는 것을 보자 내심 말할 수 없는 놀람이 일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 아름다운 인영은 뜻밖에도 한 홍의의 소녀로 머리를
양 갈래로 길게 닿아 어깨 위로 늘어뜨렸고 얼굴은 깨끗하고 아름다웠으
며 나이는 약 열대여섯 정도로 앳된 기가 보였다.
이때 그녀는 영롱하면서도 호수같이 맑고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면서 하불
감 등 세 사람을 바라본 뒤 돌연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를 띠고 애교가 넘
치는 음성으로 말했다.
"세 분 협사님들 어서 오셔요."
몽천악이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낭자는 저 가운데 고탑의 사층 그늘에 잠복했었소?"
홍의의 소녀는 몽천악의 말을 듣자 웃으며 말했다.
"오빠의 눈빛은 정말 예리하군요. 나는 당신이 삼 권을 쳐내 그 사람을
격사시켰을 때 몸을 날려 탑 위로 올라간 거예요."
몽천악은 차갑게 말했다.
"낭자는 매우 총명한 사람이오. 오늘 그대가 이곳에 와서 제삼교주를 죽
인 광경을 보았으니 낭자가 무아진교의 사람이건 아니건 쉽사리 떠나게
할 수 없소."
홍의의 소녀는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며 말했다.
"당신들은 저를 어쩔 생각이세요?"
이때 하불감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말했다.
"우리는 우선 낭자의 성명과 내력을 알아야겠소."
홍의의 소녀는 대답했다.
"저의 성은 예(倪)이고 이름은 구요(九瑤)라고 하며 집은 강소성 남쪽이고
부모는 안 계시며 오직 할머니와 단 둘이 외롭게 의지해 가며 살고 있어
요."
그녀는 말주변도 좋아, 한마디 막히는 데도 없이 성명과 내력을 말했다.
하불감과 정음천은 이 말을 듣자 이마가 깊이 찌푸려지는 것을 금치 못했
다.
하불감이 다시 물었다.
"낭자의 할머니는 뭐라고 부르오?"
홍의의 소녀는 짜증난 소리로 말했다.
"당신들은 뭘 그렇게 많이 묻는 거예요! 저의 할머니는 원래 강(江)씨였
는데 할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예강(倪江)이라고 개성 했어요."
하불감이 또 물었다.
"낭자는 누구에게 무공을 배웠소?"
"정말 당신들은 귀찮은 사람들이군요. 당신들이 이럴 줄 알았다면 나는
호기심이 일어나 이곳에 오지 않았을 거예요."
하불감은 정색했다.
"낭자 들어보오. 오늘 낭자가 이 시비의 소용들이 속으로 뛰어들었으므로
화를 자초한 것이오. 만약에 낭자가 우리의 물음에 솔직하게 대답하지 않
는다면 우리는 사람 하나를 잘못 죽일망정 절대 낭자를 돌려보내지는 않
을 것이요."
홍의의 소녀가 말했다.
"당신들은 강호 무림의 이름 있는 협사들이신데 이렇게 연약한 소녀를 괴
롭히시겠단 말씀이신 가요?"
이 한마디의 말에 하불감의 얼굴에는 부끄러운 기색이 떠올랐으며 또한
대꾸할 말도 없게 만들었다.
정음천이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제 말은 분명히 했으니 예낭자는 가능한 한 묻는 말에 사실대로 대답
해야 좋을 것입니다."
홍의의 소녀는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없군요. 정말 운이 없는가 봐요. 저의 무공은 할머니께서 가르쳐
주신 거예요. 이젠 됐나요?"
몽천악은 얼굴에 살기를 띠고 냉랭하게 웃었다.
"예낭자는 무아진교의 사람이니 더 이상 발뺌을 할 필요가 없소."
몽천악이 단도직입적으로 지적하자 하불감은 자신도 모르게 물었다.
"고소협, 무슨 증거가 있소?"
몽천악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이 여자는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초인적인 담량이 있으며, 그 담량이 절
대 보통 사람이 소유하고 있는 정도가 아닙니다."
홍의의 소녀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들은 요귀 악마가 아닌데 뭐가 무서울 게 있겠어요."
몽천악이 차갑게 말했다.
"물론 낭자가 우리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엔 뭔가 믿는 것이 있기 때문이
겠지만 그대가 오늘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하늘의
별을 따기보다 더 어려울 거요. 믿지 못하겠다면 당장 시험해 보시오."
홍의의 소녀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저를 무아진교의 사람으로 인정한다면 저도 구태여 변명을 하지
않겠어요."
몽천악은 담담하게 말했다.
"물론 낭자는 무아진교 사람일 뿐만 아니라 교내에서도 매우 중요한 신분
일 것이오."
홍의의 소녀가 말했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아시지요?"
몽천악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것은 일종의 영감이오."
홍의의 소녀는 돌연 깔깔대고 웃었다.
"호호호, 그건 당신이 잘못 본 거예요. 저는 결코 무아진교의 사람이 아니
에요. 그러나 저는 무아진교의 내막을 조금 알고 있어요."
하불감이 급히 물었다.
"예낭자는 무슨 내막을 알고 있소?"
"저는 당신들이 무아진교의 제삼교주를 죽였으므로 무아진교가 당신들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어요."
하불감은 화도 나고 우습기도 했다.
"그건 낭자가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소."
"당신들은 무아진교가 보복을 할 것을 알면서도 왜 빨리 도망치지 않는
거예요?"
몽천악이 차갑고 매서운 어조로 말했다.
"지금 낭자에게는 두 갈래 길밖에 없소. 하나는 순순히 우리를 따라 무림
맹주부에 가는 것이고 그것이 싫다면 여기서 죽는 것이오."
홍의의 소녀는 코웃음을 쳤다.
"죽인다구요? 그러나 당신의 생각처럼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을 걸요. 믿
어지지 않는다면 당장 시험해 보세요."
몽천악은 차갑게 냉소를 날렸다.
"좋소 낭자, 그럼 공격을 받으시오."
말을 마치자 몽천악은 괴이하게 몸을 날려 신속하기 이를 데 없이 홍의의
소녀의 오른쪽으로 돌며 왼손을 뻗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홍의의 소녀
의 얼굴을 향해 쳐갔다.
홍의의 소녀는 그의 공세를 보자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왼발을 안쪽으로
약간 회전시키고 동시에 오른손을 맹렬히 쓸어 가며 몽천악이 쳐낸 왼손
의 맥문을 낚아 갔다.
몽천악은 이 소녀가 절학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아는터라 제일 초
를 출수할 때 더욱 기괴하고 높은 제이 초의 변화는 감추어 두고 있었다.
이때 그는 뻗쳐 낸 왼손으로 돌연 반원을 그리며 날카로운 기압소리를 발
하고 홍의의 소녀가 방어하고 있는 오른손의 빈틈을 뚫고 들어가 질풍같
이 기해혈을 찔러 갔다.
이 초식은 실로 괴기하고 오묘하여 독랄했다.
홍의의 소녀는 안색이 돌변한 채 도답칠설의 보법으로 한걸음 내딛는 순
간에 일 장 밖으로 물러났다.
홍의의 소녀는 뒤로 물러난 후 다시는 몽천악에게 선기를 빼앗기지 않고
열 손가락을 펼쳐 앞을 향해 퉁겨 내면서 접근해 오던 몽천악의 열 군데
요혈을 핍박해 갔다.
이 번개같은 반격에 몽천악은 깜짝 놀라며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나 경악한
빛을 띈 채 물었다.
"낭자는 밀종의 문하요?"
홍의의 소녀는 미소를 지었다.
"조금 전 당신이 제삼교주를 격사시킨 소공 일 권 속엔 서장 밀종의 절기
인 달뢰라마선공이 내포되어 있었으니 그럼 당신도 밀종문의 제자겠군
요."
몽천악은 내심 크게 놀라며 무거운 음성으로 물었다.
"낭자는 도대체 어느 파의 문하요? 만약 말을 하지 않는다면 독수를 쓰겠
소."
"당신이 비록 밀종파의 달뢰라마선공을 훔쳐 배웠다고 할지라도 반드시
저를 죽일 수는 없을 테니 이렇게 사람을 핍박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
두 사람이 겨룬 이 초를 보고 또 그들의 대화를 들은 하불감과 정음천은
안색이 변했다. 서장의 무공은 수백 년 동안 라마외의 다른 사람에게 전
해 졌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두 사람의 속가 제자가 밀
종문의 절학을 터득한 것을 본 것이다.
몽천악은 홍의의 소녀가 밀종파의 무기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고 난 뒤
안색이 더욱 심각해졌으며 찰나지간에 두 손을 단전 앞에 교차시키고 가
만히 눈을 감은 채 그 자리에 조용히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홍의의 소녀는 시종 개의치 않는 듯했으나 이때 몽천악이 이런 자세를 취
하는 것을 보자 얼굴에 즉시 긴장한 빛을 띠었다.
그녀는 두 손을 하나는 앞으로 하나는 뒤로하여 가슴을 보호하고 옆 걸음
질을 쳐서 왼쪽으로 이동했으나 두 눈은 한 번도 깜박이지 않고 몽천악을
주시하고 있었다.
도망친 홍의의 소녀
패왕궁 하불감과 운주 대유협 정음천은 몽천악이 산처럼 앞에 버티고 있
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그의 다음 격출이 석파천경이라는 절세의 무공일 것이라고 깨달았
다.
다시 홍의의 소녀를 보자 그녀는 상대방을 매우 두려워하여 조심하는 표
정을 지으며 정신을 집중시켜 경계하고 있었다.
이미 그녀는 몽천악이 격출한 초식의 두려움을 알고 있는 듯했다.
이때 몽천악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나 그의 얼굴은 홍의의 소녀가
움직이는 대로 방향을 돌리며 그녀를 겨냥하고 있었다.
사방은 온통 쥐죽은 듯이 고요했으며 무한한 긴장과 공포와 상기가 가득
차 있었다.
홍의의 소녀는 마치 달팽이처럼 느린 옆 걸음질로 왼쪽을 향해 일곱 자쯤
이동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은은하게 구슬 같은 땀방울이 번져 있었다. 갑자기 홍의
의 소녀가 애처롭게 외마디 탄식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더 이상 시합을 계속할 수 없어요. 나는 기꺼이 패배를 인정하겠어요."
이렇게 말하며 그녀는 쌍장을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몽천악은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으며 정(精), 기(氣), 신
(神)을 합일시킨 채 그대로의 자세를 유지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홍의의 소녀는 이런 광경을 보자 신색이 확 변했다. 그리고 매우 놀라고
두려운 듯이 말했다.
"무공의 시합은 정해진 데서 그쳐야 하는 법이에요. 당신은 끝내 나를 죽
여야만 속이 시원하겠어요?"
하불감과 정음천은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서로 한 번 마주
본 뒤 말을 하려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때 몽천악은 마치 노승이 입정한 듯 무아지경에 들어가 있었다. 그래서
홍의의 소녀의 말을 미처 듣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자 홍의의 소녀는 더욱 놀라고 당황해서 "아!" 소리를 지르더니 돌연
다급하게 흐느끼는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나를 죽이지 마세요. 나를 죽이지 말란 말예요....... 빨리 초
식을 거두어들이세요!"
이런 돌변은 하불감과 정음천으로 하여금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몽천악이 정말로 그녀를 살해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비록 홍의의 소녀가 정말 무아진교에 속하는 사람이라 해도 죽여 버릴 것
까지는 없지 않은가.
홍의의 소녀는 이때 땅바닥에 주저앉은 채 몹시 슬프게 울고 있었다.
그런 모습은 나이 어린 한 소녀애 불과해 보였다.
비록 만악을 용서할 수 없는 자라 해도 지금 그녀의 흐느끼는 모습을 본
다면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 수 없으리라.
참다 못해 하불감이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고소협, 빨리 초식을 거두어들이십시오."
몽천악은 하불감의 말소리를 듣자 갑자기 두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이 전광 석화와 같은 찰나, 홍의의 소녀는 몸을 한 번 휘청
하더니 허공을 가로지르는 제비처럼 정음천의 머리 위로 가볍게 날아 넘
어갔다.
그 빠름이란 어디에 비할 데가 없었다. 몽천악은 외마디 고함을 치고 쌍
장으로 좌우 허공을 쳐갔다.
일진의 무영 무형의 가벼운 바람이 불고 지나가자 홍의의 소녀는 이미 칠
팔 장 밖에 있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몸을 날리더니 즉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몽천악은 화가 나서 발을 구르며 말했다.
"내가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 바로 그녀가 도망하는 것이었는데, 과연 계
략에 걸려 버렸군요."
그러자 하불감과 정음천 두 사람은 서로 얼굴을 마주보며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얼굴에는 매우 부끄러운 기색이 나타나 있었다.
패왕궁 하불감이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녀가 도망가도록 내버려 둔 것은 순전히 나의 잘못이오. 저는 정말 고
소협을 대할 면목이 없습니다."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하맹주,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그녀의 애걸하는 모습을 보면 쇠로 된
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 무아진
교에 속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모두가 여우처럼 교활하니 중원 무림도는
정말 그들의 상대하기가 곤란할 것입니다."
운주 대유협 정음천이 안색을 심각히 하고 물었다.
"고형께선 정말로 그녀가 무아진교의 제자라고 인정하셨습니까?"
몽천악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확실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십중팔구는 무아진교에 속하는 사람일 것입
니다. 만약 나의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이 나이 어린 홍의의 소녀는 바로
무아진교의 제구교주일 것입니다."
정음천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오늘 제삼교주를 죽인 것은 정말 헛수고를 한 것이
오. 무림 맹주부안의 첩자도 완전히 제거할 수 없겠군요."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모두 나의 일시적인 동정심 때문이오. 만약 내가 마음을 독하게 먹고 일
격을 가했다면 그녀가 도망치지 못했을 것이오. 그런데 나도 도저히 그렇
게 마음을 먹을 수 없었소. 이제 우리들은 빨리 맹주부의 부서로 돌아가
모든 상황을 고라선배님에게 말씀 드립시다. 그리고 다시 대책을 상의합
시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급급히 경공을 전개하여 무림 맹주부로 돌아왔다.
밤은 이미 삼경 무렵이 되었으나 하불감, 정음천 그리고 몽천악 세 사람
은 그대로 그 별원 동쪽의 누각으로 달려갔다.
세 사람이 막 누각 아래에 당도했을 때 누각에서는 한 줄기 등불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고라신승이 계단 입구에서 기다라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의 신색은 엄숙
해 보였다.
패왕궁 하불감 등 세 사람은 다급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고라신승은 기다
리기에 지쳐 재빨리 물었다.
"일은 어떻게 처리하였소?"
하불감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후배는 일시 방심하여 먼저 성사시킨 일을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게 하였
습니다."
네 사람은 재빨리 마루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패왕궁 하불감은 모든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고라신승에게 알려 주었다.
고라신승은 경과를 듣고 난 뒤 눈을 감고 긴 생각을 한 후 비로소 서서히
말했다.
"하현질 등이 제삼교주를 죽인 것은 이미 대성공을 거둔 것이 아니오? 어
째서 먼저 성사시킨 일을 수포로 돌아가게 했다고 말하는가? 홍의의 소녀
의 출현은 너무나 뜻밖이었으므로 누구라도 그 갑작스런 행동에 대처하지
못했을 것이오. 게다가 각자는 자기의 전력을 다하지 않았는가!"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노선배님께서 도리어 책망하지 않으시니 후배들은 더욱 송구스럽고 부끄
럽기 짝이 없습니다."
고라신승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고소협, 말이 지나치시오. 홍의의 소녀의 출현으로 빈승은 한 가지 귀중
한 단서를 발견했소. 어쩌면 이 단서가 맹주부 안의 첩자를 제거하는 것
보다 더욱 중요할지도 모르오. 맹주부 안에 잠입해 있는 첩자들 중 제일
중요한 인물은 바로 빈승을 가장한 제삼교주였소.
그런데 오늘 이 사람을
제거했으니 나머지 사람들은 거의 힘을 잃었을 거요. 그러므로 맹주부 안
에 아직 남아 있는 첩자들은 조만간 스스로 정체를 나타내거나 멀리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오."
말이 끝나자 돌연 정음천이 물었다.
"고라사백님께선 어떤 중요한 단서를 발견했습니까?"
운주 대유협 정음천은 바로 고라화상의 한 속가 제자가 기른 제자였기 때
문에 고라 하상을 사백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홍의의 소녀가 정말로 무아진교 안의 사람인 것이 증명만 된다면 무아진
교의 제일총교주는 분명히 서장 밀종문과 관련이 있을 것이네."
말을 마치자 고라신승의 차가운 눈동자가 몽천악의 얼굴을 향해 돌려졌
다.
그리고 계속해서 말했다.
"고소협, 그대는 어떤 사람에게서 밀종문의 절학을 전수 받았는지 알려
줄 수 있겠소?"
몽천악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불구의 몸이 된 한 고독한 노인입니다. 후배는 그 노인장의 성명과 내력
을 알지 못합니다. 단지 그분이 몸에 무공 절학을 가득 지녔으며 천하 각
문파의 모든 무공을 거의 망라한 것만을 알 뿐입니다."
정음천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말했다.
"그 노선배님은 어디 계십니까?"
몽천악은 담담하게 말했다.
"그분은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후배는 그분과 조석으로 칠 년의 세월을
같이 지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석 달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하불감이 말했다.
"그 기인은 몸이 불구라고 했으니 그렇다면 고소협께선 그의 구술(口述)
로써 무공을 전수 받았겠군요. 그러면서도 이처럼 조예가 깊으시니 실로
깨우침이 높기 이를 데 없군요."
몽천악은 미소를 짓고 말했다.
"저는 그분을 만나기 전에 이미 유명한 한 스승에게서 십여 년의 고심스
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 두 번째 사부님이 입으로 전수해
주신 무공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었습니다."
하불감은 말했다.
"고소협, 고소협께선 복이 많아 계속 유명한 사부님의 가르침을 받았군요.
정말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몽천악은 고개를 들어 고라신승을 한 번 바라보고 나서 말했다.
"후배가 한 말은 결코 한마디도 거짓이 없습니다. 그리고 서장 밀종문 일
파의 무학이 절대로 외문 제자에게 전수되지 않는다는 사실도 후배는 이
미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고독한 노인은 절대로 밀종문의 제자가 아니었
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또한 소림파의 절예에도 훤하셨기 때문입니다.
후배와 그 노인장은 절곡사동 안에서 칠 년이란 기나긴 세월을 함께 지냈
습니다. 저는 온갖 방법을 생각해 내서 그 노인장의 신분과 내력을 알려
고 했으나 끝내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고라신승이 돌연 물었다.
"그럼 시주가 무아진교를 상대로 원수를 갚겠다고 하는 것은 분명히 첫
번째 사부님을 위해서군."
몽천악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노선배님의 추측이 옳습니다."
고라신승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시주께선 그 기인의 얼굴을 좀 상세하게 얘기해 줄 수 있겠는지요?"
몽천악은 말했다.
"두 번째, 사부님은 제가 그분을 만나기 전에도 이미 긴 세월을 절동에
벽거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이미 피골이 상접해 아예 형용할 수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고라신승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분은 끝내 몸이 불구인 원인을 말하지 않았소?"
몽천악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분은 단지 임종의 순간에 간단하게 몇 마디 말씀하셨을 뿐입니다. '노
부는 일생 동안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러 왔다. 그리고 공명과 부귀를
얻는 것이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나 칠십여 년의
일생을 복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헛되게 만들었다.
강호 무림의 은혜와
원한의 보응은 순환되는 것이니 노부가 이 삼십여 년 동안 불구가 되어
시달림을 받은 것은 일종은 천벌이라고 할 수 있다.' 고 몹시 쓸쓸한 표
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몽천악은 여기서 잠시 머뭇거리다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순간이 되었을 때 그분께서 하신 말씀은 너는 노부가
전수해 준 무공의 제이인자이니 스스로 잘해 나가길 바라겠다는 것이었습
니다."
정음천은 물었다.
"그렇다면 제일인자라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몽천악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만약 그것을 알 수 있었다면 두 번째 사부님의 내력 또한 알았을
것입니다."
정음천이 고개를 끄덕이자 몽천악은 계속 말했다.
"나의 두 번째 사부님이 돌아가실 때 연세는 칠십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노인장께서 임종 전에 하신 말씀으로 추측컨대 삼십여 세 장정 때 돌
변이 발행해 몸이 불구가 되어 절곡사동 안에 은거를 하셨을 것입니다.
고라 노선배님께선 혹시 그 당시의 무림 기인 중에서 어느 분이 나의 두
번째 사부님과 흡사하신지 생각나지 않으십니까?"
고라화상은 몽천악이 자세히 말한 고독한 노인의 유언을 들은 뒤 눈을 감
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서 겨우 눈을 뜨고 말했다.
"지난날 제일 뛰어났던 무림 고수는 바로 전 무림 맹주 철장건곤권 호창
부, 북협 천걸 노인, 서필진 우환, 마검신군 조전신, 강남 제일미인 후난
향......."
고라화상은 여기까지 말을 하자 다시 두 눈을 감고 서서히 말을 이었다.
"이 다섯 사람은 강호 무림에서 어떤 큰 나쁜 짓은 하지 않았소. 만약 나
이로 추측한다면 서필진 우환과 마검신군 조전신이 비교적 가깝고 또한
신분 내력이 좀 기묘하오."
몽천악은 눈썹을 찌푸리고 말했다.
"그렇다면 마검신군 조전신일까요? 조전신이 지난 날 강호에 출도한 나이
는 스물 여섯 살에 불과했습니다. 삼십 칠 년 전의 나이가 마흔 살이었으
니 그 또한 칠 년의 세월이 초과된 것이오."
몽천악은 말했다.
"이 다섯 사람을 제외하고 의심스러운 사람이 또 있는지요?"
고라화상은 말했다.
"아직 네 명의 명성이 불미한 사람이 있소. 그들은 독지금강 뇌광법사, 천
면호리 만리표, 천상우왕 학육, 혈면귀 설일정이오."
패왕궁 하불감이 말을 받아 이었다.
"이 네 사람 중 세 사람이 가사에게 제거되었습니다."
몽천악이 다급하게 물었다.
"어느 한 사람만이 고 호맹주님에게 제거 당하지 않았는지요?"
하불감은 말했다.
"천면호리 만리표요."
몽천악은 말했다.
"그에게 어떤 악명이 있었는지요?"
고라화상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만리표는 삼십칠 년 전에 무림 강호에서 가장 나쁜 짓을 저질렀소. 간음,
절도, 살인 등 큰 죄를 범해 지난날 무림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소. 그래서
이구동성으로 이 사람을 제거하겠다고 말하였소이다......."
몽천악은 물었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아무런 결과도 없었소이다."
몽천악이 다급히 물었다.
"어째서입니까?"
고라화상은 말했다.
"만리표는 별명이 천리호리인데 글자 그대로 그의 꾀가 비할데 없을 만큼
교활하오. 또한 그는 변장술에 뛰어나 천하에서 그의 진짜 얼굴을 본 사
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느 누가 그를 체포해서 죄를 다스리겠습니까?
다행히 삼십여 년 전에 천리호리 만리표는 신비스럽게 자취를 감춰 버렸
소이다."
몽천악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나의 두 번째 은사가 바로 천면호리 만리표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
군요."
하불감은 말했다.
"고소협은 어째서 그 사람이라고 단정하는 거요?"
몽천악은 말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전에 남긴 참회의 말로써 그분이 천리호리 만리표임
이 족히 증명되는 것입니다."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렇소이다. 고소협의 두 번째 은사는 만리표임이 틀림없소. 그를 제외하
고는 더 이상 의심스러운 사람이 없는 것 같소. 원래 빈승은 천리호리가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라고 추측했었소. 그러나 지금 와서 생각하니 무아
진교의 총교주는 다른 사람인 것 같군요."
고라신승은 말을 마치자 안색이 더욱 심각해졌다. 분명히 그의 뇌리 속에
는 이미 만리표가 오늘날 무아진교의 괴수로 인정되어 새겨져 있었던 것
이다.
그러나 만리표에 대한 혐의가 벗겨진 지금이야말로 무아진교의 제일총교
주라고 가상할 만한 인물은 더욱 망막하여 찾기 힘들 것만 같았다.
몽천악 등은 고라신승의 심정을 알아차리자 역시 마음이 침울해져서 각자
묵묵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겨우 고라신승이 자상스런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들렸다.
"밤이 거의 다 지새 가니 세 분은 어서 가서 쉬시오."
하불감이 돌연 말했다.
"고라사백님께 여쭙겠습니다. 제삼교주의 일에 관해 여러 군협들에게 선
포해야 할까요?"
고라화상은 말했다.
"이 일은 잠시 비밀로 해 두는 것이 좋겠네. 다음에 적당한 시기를 기다
려 선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불감은 얼굴에 난처한 기색을 띠고 말했다.
"그러나 고소협이 맹주부 안에서......."
고라화상은 말했다.
"음, 그렇지! 빈승은 고시주와 여러 군협들이 싸운 일을 잊을 뻔했군..
.... 그러나 군협들이 무림 맹주부에 온 것은 고 호맹주를 조상하고 대리
맹주를 선출하는 임무 때문이었네. 이미 하현질이 맹주의 자리를 대리했
고 고 호맹주의 시체도 잠시 매장하기로 결정되었으니 여러 무림맹 위원
들은 이제 자유로이 해산해도 되겠지.
그럼 내일 오후 세 시 우리들은 곧
장 모든 상세한 내막을 알리세. 그래서 제삼교주가 군협을 선동해 고소협
을 포위하고 체포한 일에 대해 오해를 풀어야겠네."
정음천은 물었다.
"고라사백님께 묻겠습니다. 앞으로 우리들은 어떻게 무아진교를 상대해야
되겠습니까?"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고 대답했다.
"대국은 이미 정해져 있네. 그러니 하나 하나 보는 대로 끝까지 쫓아가
잡을 수밖에 없는 것이네."
"그렇다면 제칠교주는 바로 개봉성안에 있으니 우리들이 쫓아가서 그를
포위한 뒤 체포하면 안됩니까?"
정음천의 이러한 말에 고라화상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제칠교주에 관해서 당부해야 할 것을 내가 깜박 잊었군. 그 여자는 소녀
잔양신공을 연마해 천하 무적이라 할 수 있네. 자네들은 만일 그녀를 만
나게 되어도 가능한 한 멀리 피하고 맞서지 않도록 하게."
정음천이 놀라며 말했다.
"사백님께서 그렇게 말하신다면 우리들은 앉은 채 죽음을 기다리라는 겁
니까? 제칠교주는 거리낌없이 찾아와서 우리들을 해치울 수 있을 게 아닙
니까?"
고라화상은 두 눈에 신광을 번쩍이며 말했다.
"빈승은 팔 년 동안 면벽하면서 그녀의 무공을 제압할 수 있는 방법을 생
각했네."
몽천악이 돌연 말했다.
"노선배님께서 말씀하시려는 방법은 중원 무림도의 손실이 너무 큰 것입
니다."
고라화상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설마 그가 노승의 마음속의 뜻을 알아냈단 말인가?'
이때 정음천이 다시 입을 열고 물었다.
"사백님께선 혹시 단독으로 제칠교주를 맞이해 싸우시려는 것이 아닙니
까?"
고라화상은 말했다.
"노승이 아는 바에 의하면 천하에는 소녀 잔양신공의 잔양장의 습격을 당
하고 죽지 않는 사람이 없을 걸세."
정음천은 처량하게 말했다.
"사백님께서 제칠교주를 맞이해 대적하다가 만일 의외의 일이 발생한다
면......."
다음의 말을 그가 더 이상 계속하지 못하자 고라화상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팔 년의 세월에 걸친 연구로 빈승은 적이 어떤 허점을 가지고 있는지 알
아냈네."
정음천은 돌연 물었다.
"혹시 사백님께선 이미 제칠교주를 향해 도전장을 낸 게 아닙니까? 사백
님, 숨기시지 말고 우리들에게 알려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있던 몽천악과 하불감은 깜짝 놀랐다. 두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고라화상의 대답을 조용히 기다렸다.
고라화상은 몸을 흠칫하며 말했다.
"노승은 아직 제칠교주에게 도전장을 내지 않았네. 그러나 그녀는 이미
빈승에게 사망의 날을 약속하였네."
몽천악은 놀라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고라화상은 돌연 품 안에 손을 넣어 편지 한 통을 꺼내 등불이 밝게 비치
는 곳에 가만히 놓고 말했다.
"이 편지는 자네들이 돌아오기 한 시간 전에 보내 온 것일세."
그러자 하불감, 정음천, 몽천악 등 세 사람의 여섯 줄기 눈빛은 일제히
편지의 글월 위에 던져졌다.
짤막하고 깨끗한 글씨가 다음과 같이 씌어져 있었다.
'소림 고라대사 전상서...... 제삼교주의 죽음은 바로 첩의 실책입니다.
제일총교주가 추궁해 오면 첩은 장차 엄벌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첩
은 대사님께서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삼 일 안에 오셔서 저의 목숨을 끝장
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 않다면 사 일째 자정 전에 첩이 직접 찾아
가 저승으로 보내 주시기를 애걸하겠습니다.
무아진교 제칠교주 친필'
하불감 등 세 사람은 편지를 보고 나자 한편으로는 화가 나고 또 크게 놀
랐다. 몽천악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정말 버릇없는 말투구나!"
정음천은 잠시 움찔하더니 물었다.
"편지는 어떻게 송달된 것입니까?"
고라화상을 말했다.
"빈승이 누각 위에서 정좌 입정할 때, 돌연 한 야행인이 한 줄기 바람 소
리와 함께 당도했네. 그리고 창문 밖에서 이 편지를 던져 넣었네. 그때 빈
승이 잠시 주춤하자 편지를 보내 온 사람은 이미 질풍같이 치달려 가 버
렸지. 그 경공의 높음은 무림안의 일류 고수에 못지 않았지. 빈승은 재빨
리 달려나가 한참 동안이나 사방을 살폈으나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
네."
몽천악은 미간을 찌푸리고 말했다.
"홍의의 소녀 예구요가 도망쳐 간 것과 우리들이 달려 돌아온 시간과의
차이는 단지 한 시간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그녀가 급급히 칠교주에
게 달려가 삼교주가 피해 당한 소식을 알려 준다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습
니까?"
몽천악이 이렇게 말하자 하불감과 정음천도 동시에 이상함을 느끼었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조금 전 자네들이 제삼교주의 죽음을 말할 때 노승은 곧 이상하다고 느
꼈소. 혹시 제칠교주도 능운보탑에서 제삼교주가 피살되는 광경을 목격하
였을지도 모르오. 그러나 그녀는 나타나지 않고 자네들이 홍의의 소녀를
체포하는 시간을 틈 타 맹주부에 온 게 아니겠소."
정음천은 고개를 끄덕이고 말했다.
"그것도 가능한 얘깁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능운보탑에 돌아가 홍의의 소
녀를 포위 체포할 무렵 도망가는 사람이 있었다면 목격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또 하나의 증거는 제칠교주가 우리들이 제삼교주를 모살할 것을 알고 있
었다는 것이오."
몽천악은 말했다.
"이 일은 단지 우리들 네 사람만이 알고 있는데 누가 소식을 누설시켰을
까요?"
"물론 소식을 누설시킨 사람은 없소이다. 그러나 노승의 행적이 어쩌면
제칠교주에게 발견되었을지도 모르오. 그녀는 이미 진가를 알아낸 것이
오."
대의를 위해서
"그렇습니다. 제칠교주의 편지를 보니 이미 제삼교주를 모살하려는 우리
들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것 같군요."
고라화상은 다시 말했다.
"홍의의 소녀가 능운보탑에 달려간 것은 절대로 우연이 아니었네. 어쩌면
그녀는 제칠교주의 명을 받들고 구원을 하러 갔을 것이네. 그러나 한걸음
늦어 제삼교주는 이미 고소협의 일 권에 맞아 죽었던 때일 것이네."
하불감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능운보탑 아래서 홍의의 소녀를 살해하지 못한 것은 정말 큰 잘못입니
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과거의 일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네. 원래 제칠교주가 빈승에게 도전
한 일에 관해 빈승은 혼자서 처리하려고 했기 때문에 지금껏 자네들에게
알려 주지 않은 것일세."
몽천악은 가슴 속에 뜨거운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끼며 말했다.
"노선배님께서 제칠교주를 맞이해 싸우시려는 일은 후배로 하여금 대신
수고케 해 주십시오"
고라화상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소협, 시주의 가슴에는 영기가 충만해 있어 앞길이 창창하오. 제칠교주
를 제외하고도 제일총교주는 더욱 강대한 적이오."
정음천이 말했다.
"정현질, 자네의 무공 조예가 이미 자네 사부님보다 뛰어난 것만은 사실
이네, 그러나 제칠교주의 소녀 잔양신공은 결코 보통 무학이 아닐세."
하불감은 돌연 물었다.
"고라선배님께선 언제 제칠교주를 맞아 싸울 생각이십니까?"
고라화상은 고개를 흔들고 말했다.
"빈승은 아직 결정하지 않았네. 물론 이삼 일 안으로......."
여기까지 말하고 나서 약간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노승이 제칠교주를 영전하는 일에 대해 자네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네.
노승은 이미 자신만만하니까."
하불감은 말했다.
"고라선배님께서 단독으로 적을 만나 싸우신다면 적들은 혹시 우리들이
제삼교주를 모살한 것처럼......."
고라신승은 신색이 약간 변하면서 말했다.
"빈승도 그 점을 고려해 놓고 있으니 하현질은 마음을 놓게."
하불감은 말했다.
"정말 걱정이 됩니다."
오경을 알리는 북이 울리자 창 밖에 은은히 동녘이 터 오는 것이 보였다.
기나긴 밤이 이미 다 지난 것이다.
고라화상은 서서히 몸을 일으키고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창을 열
고 신선한 공기를 길게 한 모금 들이마신 뒤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
다.
"호창부 도형이 무림 맹주의 직책을 맡은 뒤부터 강호 무림은 한동안 조
용했었네. 천하 만물에는 자연적으로 일정한 정율이 있어 모든 사물이 그
극에 달하면 정지 상태에서 다시 움직임이 생기듯이 이번 살겁은 하늘이
이미 정한 것 같군.
비록 노승이 정말 눈을 감고 저승으로 돌아간다 해도
무림도는 한바탕 변동을 겪은 뒤 자연 구세주 한 분이 나타날 것이네. 그
렇게 되면 동란은 평정되고 적의 우두머리는 소멸할 것일세."
이렇게 말을 마치자 그는 몸을 돌리고 다시 포단 위에 앉은 뒤 말했다.
"고소협, 하현질, 정현질, 그대들 세 사람은 바로 미래의 중원 무림도의
기둥들이오. 그러므로 장차 무림의 부흥, 강호의 정의를 유지하는 것은 당
신들 세 사람의 합심에 의지해야 할 것이오. 그대들의 목숨은 어느 누구
보다도 중요하니 절대로 일시적인 만용을 부리지 마시오.
대영웅, 대호걸
은 많은 조건을 구비해야 되는 법이지 오직 용맹한 힘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오. 삼국 시대의 여포(呂布)가 천하에서 제일 용맹스러웠으나 지
모(智謀)가 없는 일종의 필부지용 밖에 갖추지 않았었소. 영웅 호걸이란
진퇴를 알고 상황을 이해하며 먼 곳을 내다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
이오."
고라화상의 이와 같은 훈시는 하불감, 정음천, 몽천악 등 세 사람의 심정
을 더욱 침중케 하였다.
그들은 암암리에 한 가닥 불길한 예감이 덮쳐 오는 것을 느꼈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그대들은 이제 가서 잠시 휴식을 취하시오."
그리하여 하불감 등 세 사람은 각자 고라화상을 향해 인사를 하고 물러났
다.
세 사람은 모두 서쪽 누각의 객청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패왕궁 하불감이
침묵을 깨뜨리고 말했다.
"고라사백님께선 이미 홀로 제칠교주를 영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노
인장께선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한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니 어찌
하면 좋겠습니까?"
정음천이 말했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제칠교주가 중인들을 이끌고 포위 공격을 하거
나 혹시 간사한 계교를 발휘할까 하는 것입니다."
몽천악은 서서히 말했다.
"우리들이 지금 필히 알아야 할 것은 고라선배님이 어느 날, 어느 시각,
어느 곳에서 제칠교주를 영전하는냐 하는 것입니다."
하불감은 말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몽천악은 말했다.
"지금부터 우리들은 계속 고라 노선배님의 행동을 감시해야 하오. 그리고
약간이라도 무슨 낌새가 있으면 곧 연락을 해서 뒤를 따릅시다."
정음천은 말했다.
"고형의 말이 옳습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들은 그들이 많은 인원으로 포
위 공격을 해도 방비할 수 있겠지요."
하불감은 고개를 흔들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는 고라사백님의 마지막 그 훈시 속에 이미 이번 싸움의 불길함을 깨
달았습니다."
몽천악도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고라 노선배님께선 일찍이 팔 년 전에 이미 제칠교주의 암습을 받았습니
다. 어쩌면 그분께서는 팔 년에 걸쳐 소녀 잔양신공을 견제할 수 있는 무
학을 연구해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그 노인장께서 제칠교주의 손에
패한다면 천하에서 누가 그녀를 대항해 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제칠교
주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제거해야 합니다. 고라 노선배님과 제칠교주와
의 대전은 필연적인 것이었으나 단지 시일이 예상보다 빨라진 것 뿐입니
다."
하불감은 말했다.
"그럼 정형과 고소협께선 먼저 휴식하십시오. 나는 지금부터 고라 노선배
님의 동정을 감시하겠습니다."
몽천악은 말했다.
"하맹주께선 편할 대로 하십시오. 저는 별로 자고 싶은 생각이 없습니다."
어젯밤 한 번의 악전(惡戰)으로 중인들은 모두 극도의 피곤을 느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건강한 데다가 지금 마음이 지극히 무거웠기 때문
에 쉽게 휴식을 취하려 들지 않았다.
점심 무렵, 하불감은 여러 군협과 단장홍 유한수, 호천옥 등 중요 인물을
불러 들였다.
그리고 제삼교주가 소림 고라신승을 가장한 일과 앞으로 무림 국세가 변
화되어 나아갈 상황을 선포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의 결론을 내렸다.
구대문파의 무림맹 위원 중 소림파의 원과대사, 무당파의 황학도장, 점창
파의 원비금도 홍통남, 공동파의 현천관주 욱청풍 등 네 사람은 계속 무
림 맹주부에 남아서 패왕궁 하불감을 도와 무림맹의 위엄을 다시 일으키
도록 결정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각자 본파로 돌아가 모든 무림 대세를 각파 장문인에게
전달하기로 했다.
그리하여 남몰래 무아진교가 잠복시켜 놓은 첩자들을 제거하고 적극적으
로 경계를 하며 무아진교가 공세를 취하여 문파를 도살할 수 없도록 미리
대비하려는 것이다.
이로부터 중원 무림 구대문파는 하루 사이에 하나의 극히 거대한 무림 세
력으로 변해 족히 어떠한 돌변에도 응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고라신승이 제칠교주를 영전하려는 일에 관해서는 몽천악, 정음천
등만이 알고 있었다.
하불감은 여전히 어느 누구에게도 그 사실을 알려 주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삼일이 지나갔다. 무림 맹주부는 지난날에 비
할 수 없이 더욱 고요해졌다.
그러나 부 안의 상하 수백 사람의 심정은 한때라도 안정되어 본 적이 없
었다.
더욱이 하불감, 정음천, 몽천악 세 사람은 요 며칠 동안 얼굴에 약간 초췌
한 기색조차 엿보였다.
소림 신승 고라화상은 이 삼일 동안 밤이나 낮이나 동쪽 누각에서 한걸음
도 나가지 않았다.
몽천악 등 세 사람은 서쪽 누각 안에서 고라화상이 책상다리를 하고 포단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석양이 서쪽으로 기울고 밤의 장막이 점점 내려앉을 무렵 하불감, 정음천,
몽천악은 여느 때처럼 서쪽 누각 위에 모여 있었다.
하불감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고라사백님께선 아직 불을 켜지 않았군요. 분명히 오늘 밤 변동이 있을
것입니다."
정음천이 말했다.
"제칠교주가 고라사백님에게 편지에서 약속한 기한은 이제 자정이 되면
다되는 것입니다."
몽천악은 돌연 말했다.
"우리들 세 사람은 지금부터 각각 이 별원 밖에서 수호하면서 멀리서 동
정을 감시합시다."
그리하여 세 사람은 어둠 속에서 협의하고 난 뒤 하불감이 우선 세 명의
위사를 불러왔다.
그는 위사들을 검은 색깔의 옷으로 갈아 입히고 창문을 닫은 뒤 등을 켜
고 서쪽 누각의 동실(東室)에서 지키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세 사람은 소리 없이 서쪽 누각을 빠져 나왔다. 복장은 부내
위사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몽천악은 바로 서북 모퉁이의 지붕, 어두운 곳을 지키게 되었다.
달이 밝은 밤이었다. 저녁 일찍 떠 오른 달이 동쪽에서 서서히 이동하여
대지는 별로 어둡지 않았다.
집의 그림자, 수복 등은 백 장 밖에서도 환히 볼 수 있었다. 가을 바람이
점점 차가워지면서 밤도 점점 깊어 갔다.
그때 돌연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민첩하게 동북 모퉁이의 정원으로 지나
갔다. 밝은 별과 달빛이 그 사람의 머리 위를 내리비쳤다.
번쩍번쩍하는 날카로운 빛이 반사되어 분명히 화상의 머리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몽천악은 제비처럼 날쌔게 몸을 날려 동북방을 향해 날아갔다.
그와 함께 동남, 서남에서도 지키고 있던 하불감, 정음천도 동시에 행동을
개시하여 뒤쫓아갔다.
이 네 사람의 그림자는 속도가 매우 빠르고 기민했다. 그리하여 비록 맹
주부의 경계가 삼엄하였지만 그들의 행적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
도 없었다.
순식간에 그들은 맹주부를 둘러싼 담을 넘어 나왔다. 이때 앞에서 달려가
던 사람의 그림자는 걸음의 속도를 더욱 재촉하여 동남쪽을 향해 질풍같
이 치달려 가고 있었다.
한 일 리쯤 추격해 갔을 때 몽천악과 하불감, 정음천 세 사람은 끝내 한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몽천악은 돌연 '아!' 하고 속으로 외쳤다.
'이상하다. 앞의 저 사람이 만약 고라 노선배님이라면 달리는 동안 어찌
저렇듯 조금도 꺼려함이 없을까?'
고라화상은 제칠교주와 약전한 일에 대해 다른 사람의 참여를 원치 않았
으므로 행동에 반드시 주의를 기할 것이다.
적어도 한 번쯤은 은밀한 곳을 찾아 고개를 돌리고 뒤를 살펴보았어야 옳
을 것이다.
그런데 앞의 그 사람은 맹주부에서 나온 뒤로 발을 멈추지 않고 곧장 앞
으로 치달렸고 마음속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는 것 같았다.
몽천악이 이처럼 깨닫는 것과 동시에 하불감과 정음천도 앞의 그 사람이
고라신승같지 않음을 느꼈다.
그러자 하불감이 소스라치게 외쳤다.
"큰일났습니다! 우리들은 조호이산의 계략에 빠진 것입니다."
몽천악이 물었다.
"그럼 앞의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하불감은 말했다.
"아마 원과대사일 것입니다."
몽천악은 말했다.
"아무튼 쫓아가 봅시다."
이렇게 말을 마치자 세 사람은 속력을 더해 마치 세 줄기의 유성처럼 그
사람 뒤, 칠 장 가까이 쫓아갔다.
이때 앞의 그림자는 이미 뒤에 따르고 있는 사람이 있음을 알아차린 듯
갑자기 속도를 늦추었다.
몽천악, 하불감, 정음천 등 세 사람은 급급히 그 사람의 앞을 가로막고
바라보았다.
그 사람의 얼굴을 둥근 달 같고 피부는 하얗고 불그스레한 윤기가 번쩍
였다. 그리고 몸에는 커다란 회색 가사를 걸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과
대사임에 틀림없었다.
원과대사는 하불감 등 세 사람을 보자 즉시 얼굴에 미소를 띠고 말했다.
"대백사께서는 나를 보고 오늘 밤 해시 조금 전에 슬그머니 맹주부를 떠
나 곧장 동남방으로 달리면 즉시 하맹주 등을 만날 수 있다고 하였소. 과
연 세 분이 이처럼 달려오신 걸 보니 무슨 분부가 계셨습니까?"
몽천악 등 세 사람은 이 말을 듣자 마음속으로 다급하기도 하고 또한 우
습기도 했다.
하불감은 원과대사의 묻는 말에 대답조차 없이 다급하게 물었다.
"고소협,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고라사백님을 뒤쫓을 수 있겠습니까?"
몽천악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고라사백님께선 우리들이 원과대사님을 뒤쫓은 동안 이미 약속 장소에
닿았을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이 어느 곳에서 그분을 찾을 수 있겠습니
까?"
정음천은 말했다.
"우리 네 사람 각자는 네 군데로 방향을 정해 찾도록 해봅시다."
원과대사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하맹주,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소?"
하불감이 말했다.
"시간이 급박하므로 자세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즉시 방향을
나누어 고라사백님을 찾아야 합니다. 일단 발견하면 남몰래 뒤따라가 그
노인장을 도웁시다."
정음천은 말했다.
"맹주부를 중심으로 해서 나는 동쪽을 찾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마자 그는 고개를 쳐들고 달려나갔다. 하불감도 북쪽을 향
해 수색해 가기 시작했다.
장내에는 단지 몽천악과 원과대사밖에 남지 않았다. 그들은 제자리에 서
서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
원과대사는 물었다.
"고시주는 어느 쪽을 찾을 생각입니까?"
몽천악은 말했다.
"남쪽입니다."
원과대사는 말했다.
"그럼 빈승은 곧 서쪽을 찾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그는 즉각 몸을 움직여 서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갔다.
몽천악은 고개를 들고 하늘의 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사방을 훑어
보고 나서 중얼거렸다.
"고라신승께선 원과대사에게 곧장 동남쪽으로 달리도록 명하고 나서 또한
우리들 세 사람이 속은 것을 발견하자 다시 제길로 돌아가...... 이렇게
가정한다면 그분이 약속한 지점은 동남쪽이 아니면 남쪽일 것이다......
동남쪽은 바다에 임하고 남쪽은 구릉과 평원이니...... 아, 맞았다! 분명
히 그곳이다."
몽천악은 한동안 중얼거린 뒤 돌연 절속하고도 놀라운 경공을 전개하여
한 가닥 연기처럼 남쪽을 향해 질풍같이 달려갔다.
그의 경공 위력은 극히 깊고 그 속도의 빠름이란 천리마조차 경탄할 지경
이었다.
불과 일각 사이에 십여 리 길을 달려나와 드디어 구릉이 기복을 이룬 하
나의 언덕 앞에 당도했다.
몽천악은 어려서부터 개봉부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이곳이 유명한 귀두령
이라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눈길을 들어 앞을 바라보자 높고 낮게 기복을 이룬 구름이 도처에 있었으
며 한층 한층씩 남으로 뻗어져 나갔다.
구릉의 고봉들은 수평선에서 삼십여 자나 높이 솟아 있었다.
마치 그 형상이 하나하나 사람의 머리 같은 모습이었으므로 귀두령이란
이름으로 불려지는 것 같았다.
몽천악은 잠시 주춤했다가 경공을 전개하여 곧장 귀두령의 가장 높은 구
령으로 뛰어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자 달빛과 별빛이 싸
늘하게 비치는 귀두령은 밤 공기만이 차가울 뿐 사방은 쥐 죽은 듯이 고
요했다.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한 것이 아닌가?'
몽천악은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곰곰이 생각했다.
'남쪽이라 할지라도 결투에 적합하다는 것 외에는 별로 다른 점이 없을
텐데.......'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몽천악은 돌연 북쪽의 구령에서 사람의 그림자
하나가 민첩하게 날아오는 것을 발견했다.
몽천악은 이미 자기의 그림자를 숨길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놓았었다.
그래서 잠시도 주저하지 않고 숨어 이 귀두령에 점차 가까워지는 사람을
주시했다.
과연 그는 소림의 고라신승이었다.
고라화상은 한 벌의 황색 가사를 입고 있었다. 가슴에는 염주를 늘어뜨리
고 손에는 총채를 들었다.
태연한 모습으로 구령을 올라오던 고라화상은 돌연 그 칼날같이 차가운
눈동자로 사방의 지형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가벼운 걸음으로 언덕 가운데에 펼쳐진 잔디로 걸어가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몽천악이 숨은 곳은 바로 고라화상이 앉아 있는 곳에서 왼쪽 뒤에 있는
한 덩어리의 암석 뒤였다.
암석 앞에는 공교롭게도 두 그루 키가 작은 소나무가 가려져 있었다.
몽천악은 고라화상이 지금에서야 도착하리라곤 생각지 않았었다. 그는 고
개를 들고 하늘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미 자정이 일각쯤 지나 있었다. 그
러나 고라화상이 제칠교주와 약속한 시간이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고라화상이 책상다리를 하고 지면 위에 조용히 앉아 있는 모습은 마치 노
승이 입정하고 있는 것 같았다. 몽천악은 감히 가볍게 움직일 수가 없었
다. 왜냐하면 고라신승이 일단 정좌하면 귀가 매우 예민하게 되어 바로
이십 장 밖의 호흡 소리도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몽천악은 즉시 구흡법을 운용하여 암석 위에 찰싹 달라붙었다. 시
간은 일 분 일 초씩 흘러가 자시가 이미 지났으며 축시에 가까워졌다.
축시가 지나자 인시에 이르렀으며...... 끝내 하룻밤이 거의 다 지나갔다.
몽천악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상하다. 제칠교주가 약속을 어긴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고라화상이
어찌 이곳에서 하룻밤을 꼬박 밝히겠느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죽음의 성같이 고요하던 귀두령 위로부터 한
줄기 얼음같이 차가운 음성이 울려왔다.
"고라화상, 당신은 언제 왔습니까?"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찔끔하며 재빨리 두 눈의 시력을 다해 바
라보았다.
한 줄기 아름다운 백색 그림자가 몽롱하고 엷은 안개에 가려져 있었다.
그림자는 마치 애처로운 혼처럼 고라화상의 칠 장 밖에 서 있었다.
고라화상은 여전히 지면 위에 앉은 채 서서히 대답했다.
"빈승은 자시 초각에 당도하였소이다."
제칠교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노화상, 그처럼 일찍 오신 것은 혹시 내가 암암리에 매복이라도 숨겨 두
었을까 걱정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고라화상은 말했다.
"빈승이 어찌 감히......."
제칠교주는 더욱 냉소를 띠고 말했다.
"제삼교주는 능운보탑 안에서 당신들에게 포위 공격을 받고 죽었습니다.
오늘 당신이 또다시 얼마나 많은 인원을 매복시켜 놓았는지 모두 불러내
보시죠. 공연히 본교주로 하여금 쓸데없이 손발을 놀리게 하지 마시
고......."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그녀는 내가 이곳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일까?'
고라화상은 말했다.
"다른 사람이 이곳에 매복해 있다 하더라도 결코 여시주의 눈초리로부터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오."
제칠교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오경의 약속은 당신과 나의 생사를 가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은 곧 승부를 결정하기로 합시다."
고라화상은 말했다.
"잠깐!"
제칠교주는 말했다.
"노화상, 무슨 유언이 있습니까?"
고라화상은 말했다.
"싸움을 하기 전에 빈승은 여시주에게 물어 볼 일이 약간 있습니다."
제칠교주는 말했다.
"의문이 있다면 서슴없이 말해 보시오."
고라화상은 말했다.
"여시주는 혹시 팔 년 전 소실봉 뒷산에서 나와 싸운 적이 없소? 그때 그
어린 여시주가 바로 당신이 아닌가 알고 싶소이다."
제칠교주는 말했다.
"노화상의 기억력은 매우 좋은 편이군요. 그렇습니다. 바로 나였어요."
고라화상은 이미 그녀임을 짐작하고 있었으나 직접 그녀의 입을 통해서
확실히 듣게 되자 마음속으로 다시 놀라움이 솟아났다.
잠시 후 고라화상은 다시 말했다.
"팔 년 전 여시주는 잔양장 공력을 사용해 빈승을 타격했습니다. 빈승과
여시주 사이에 어떤 깊은 원한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제칠교주는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팔 년 전 나는 이미 노화상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명을 받들고
당신의 목숨을 노린 것 뿐이며 개인적으로는 결코 원한이 없습니다."
고라화상은 염불을 외고 나서 말했다.
"여시주, 여시주는 몸에 무림 절학을 지녔으나 그 기예를 믿고 함부로 사
람을 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천리를 어기는 일입니다."
제칠교주는 거만한 웃음을 얼굴에 떠올리며 말했다.
"나의 사부님은 이십여 년의 기나긴 세월에 걸쳐 나를 가르치셨습니다.
화상께선 더 이상 쓸데없는 말을 허비해 가며 나를 선도할 필요가 없습니
다."
고라화상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여시주의 사부님이 누구이신지 알려 줄 수 있겠소?"
제칠교주는 말했다.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입니다."
고라화상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제일총교주는 남자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여자입니까?"
제칠교주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여자입니다. 이런 말을 당신에게 알려주어서는 안될 터이지만 당신을 곧
저승으로 사라질 것이므로 거리끼지 않고 말한 것입니다."
고라화상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빈승의 추측이 과연 틀림없었군요. 여시주가 기왕 말을 꺼냈으니 다시
영사의 명호까지도 말해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제칠교주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갈수록 태산이군요. 사실 나도 명호를 알지 못합니다."
고라화상은 급히 물었다.
"또 한 가지 묻겠습니다. 여시주의 소녀 잔양신공은 어떤 경지까지 연마
했는지요?"
제칠교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미 제구단 초에 들어섰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런 것을 물으십
니까?"
고라화상이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것은 빈승이 오늘 여시주와의 싸움에서 결코 이길 자신이 없기 때문이
오. 또한 내가 여시주의 손에 죽을 경우 무림에서 당신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오."
제칠교주는 교만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화상은 중원 무림 제일 고수로 호칭됩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죽이면 무
림에서 나를 이겨낼 사람이 과연 어디 있겠습니까?"
고라화상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무학 일도란 바다 같이 넓어 결코 한계라는 것이 없소이다. 자고 이래로
자질이 뛰어난 수많은 사람들이 절학을 연마하여 천하에 무적수라 자부하
였습니다. 그러나 끝내 다른 사람의 손에 죽어 갔소이다. 여시주는 총명한
사람이므로 당연히 이같은 이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오."
제칠교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오경이 이미 다 지나갔으니 쓸데없는 소린 그만 합시다."
고라화상은 나직하고 침울한 음성으로 염불을 외우고 나서 말했다.
"자고로부터 성현 중에 누가 과실이 없었겠소. 개과천선이라는 말을 안다
면 그 이상 다행한 일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여시주는 어서 마음을 고쳐
먹으시오."
이 몇 마디 말은 우렁차게 울려 구령에 메아리를 불러 일으켰다.
제칠교주는 안색이 약간 변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내가 오늘 약속한 것은 결코 대사의 담경 설교를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닙
니다. 그러니 대사는 무슨 절학 호신이 있는지 마음껏 발휘해 보십시오."
고라화상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빈승은 이미 수십 년 동안 살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내 말을
따르지 않고 끝내 고집을 피우겠다면 여시주는 곧 손을 써 보십시오."
이때 동쪽에서 오색 찬란한 아침 해가 떠올라 왔고 엷은 안개는 점점 흩
어졌다.......
제칠교주는 몸에 눈같이 흰 나삼 한 벌을 걸쳤으며 어깨에는 하얀 여우털
로 된 어깨걸이 한 자락을 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더할 수 없이 요염하고 아름다웠다.
또한 소림 신승 고라는 황색 가사에 염주를 목에 걸고 합장한 쌍장에 총
채를 쥐었으며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 있었다. 그러한 모습은 엄숙하고 장
엄했다.
이 두 명의 절세 고수는 서로 칠 장 거리를 두고 있었다. 별안간 네 줄기
신광이 번개 같이 교차되었다.
한바탕 경천동지할 공전절후의 결투가 전개될 순간이었다.
갑자기 제칠교주의 요염한 몸이 허공으로 석 자쯤 솟구친 뒤 번개처럼 칠
장 밖에서 곧장 고라화상을 향해 날라 왔다. 그 속도의 빠름이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고라화상은 번개처럼 덮쳐 오는 제칠교주를 못 본 척했다. 그는 쌍장을
합장한 채 총채를 가볍게 쥐고 책상다리를 하고 주저앉아 꿈쩍도 하지 않
았다.
그러자 휙! 하는 소리와 함께 제칠교주의 몸이 허공으로 날아왔다. 그녀
는 고라신승과 칠팔 자쯤 떨어진 곳에서 길을 돌아 밖을 향해 날아갔다.
그리고 사 장 밖에 내려앉았다.
제칠교주의 안색이 돌변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외쳤다.
"노화상의 공력이 깊은 것으로 보아 놀랍게도 이미 달마암기를 연마해 냈
군요."
일단 이처럼 말하자 제칠교주는 다시 허공으로 질풍같이 날아왔다.
약속한 싸움
그리하여 귀두령 위에서는 생사를 가리는 싸움이 전개되었다. 제칠교주의
몸이 고라신승의 일곱 자 밖에 임했을 때 그녀는 하얀 오른손을 잽싸게
내밀어 연속 사 장을 쳐냈다.
그러자 고라화상도 반격을 시작했다. 양손으로 가볍게 잡혀진 총채의 늘
어진 실들이 돌연 일제히 펼쳐지더니 바람 한 점 없는 공중에 번개같이
난무했다.
휙!하는 소리가 났다. 제칠교주의 두 번째 공세가 다시 성공을 거두지 못
하고 사 장 밖으로 물러 나간 것이다.
몽천악은 옆에서 고라신승과 제칠교주의 두 번에 걸친 접촉을 바라보았
다.
그리고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생각했다.
'나는 절대로 제칠교주의 첫번 공세도 막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제칠교주는 두 차례를 덮쳐 나간 뒤 갑자기 움직이지 않고 우뚝 서 버렸
다. 아름다운 얼굴에 차가운 표정이 서리며 미간 사이에 무서운 살기가
나타나 있었다.
고라화상의 얼굴 표정도 더욱 심각해졌다.
드디어 제칠교주의 손이 서서히 들려졌다.
옥같이 희고 아름다운 손 하나가 천천히 직선으로 뻗어 나갔다. 이때 희
미하게 장심에 붉은 빛이 번쩍였다. 마치 화륜이 질풍같이 회전하는 것
같았다.
몽천악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저것이 필히 비할 데 없이 매서운 소녀 잔양장이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을 때 제칠교주는 몸을 다시 허공으로 날아 올렸다. 그
리고 세 번째 공격을 전개했다.
몽천악은 이 일격으로 어쩌면 승부가 결정될 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앞서
두 차례의 결투도 그 시간은 극히 짧은 찰나에 불과했던 것이다.
몽천악은 매우 긴장한 채 정신을 집중시키고 관전했다.
제칠교주의 몸이 느리게 움직여 고라화상에게로 점점 가까이 다가가는 것
이 보였다.
돌연 제칠교주의 갸름한 왼손에 붉은 빛이 번쩍였다. 그것은 막 떠오르는
아침 햇살 같은 화륜이 맴돌고 오색 찬란한 빛을 수없이 쏟아 냈다.
바로 이 순간 고라하상은 갑자기 똑바로 일어났다. 가슴 앞을 방어했던
쌍장이 펼쳐졌다.
그러나 제칠교주의 소녀잔양장이 이미 고라화상의 달마암기를 뚫었다는
것을 몽천악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다음 순간 쌍방은 괴이하기 짝이 없는 초식을 변화시켜 수장을 교환했다.
갑자기 외마디 고함이 울려나온 것과 동시에 싸움은 끝났다.
제칠교주가 오른쪽을 향해 허공으로 퉁겨 나간 것이다. 동시에 팍!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칠 장 밖에 나가떨어져 움직이지도 않았다.
이때 고라화상은 황색의 가사가 몇 군데 갈라진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
히 제자리 멈춰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몽천악은 이 광경을 보자 속으로 비할 데 없이 기뻤다. 의외로 제칠교주
는 패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대로 달려나가려고 생각했으나 그때 고라신승이 제자리
에 버티고 선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며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반각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고라화상은 겨우 처량한 외마디 탄식을 토해
냈다.
그리고 발을 옮겨 곧장 제칠교주가 누워 있는 곳을 향해 걸어갔다. 이때
몽천악은 고라화상의 안색이 백지장같이 창백하여 그가 많은 정원을 소모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고라화상은 제칠교주의 움직이지 않는 몸을 몇 번 바라보다가 몸을 돌리
고 급히 귀두령을 떠났다.
몽천악은 소리를 쳐서 그를 부르려고 하다가 일단 돌이켜 생각했다.
'제칠교주가 피격 당하고 어떤 모양으로 변했는지 모르겠구나.......'
몽천악은 제칠교주를 생각하자 그녀의 아름다운 동체를 보고 싶은 마음이
참기 어려웠다.
고라화상의 걸음을 매우 빨라 눈 깜짝할 사이에 이미 기복을 이룬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그제야 몽천악은 암석 뒤에서 천천히 기어 나왔다. 눈부신 아침 해가 구
름층을 뚫고 나타났다.
오색 찬란한 빛이 제칠교주의 몸에 내리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제칠교주
의 두 눈은 꽉 감기고 꽃처럼 아름답고 옥 같이 흰 얼굴은 이미 죽은 사
람의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몸에는 한 군데도 상처가 없었으나 그녀의 입가에는 핏줄기가 스며 나오
고 있었다.
옷에도 점점이 핏자국으로 군데 군데 얼룩져 있었다. 몽천악은 한숨을 내
쉬고 속으로 생각했다.
'꽃처럼 아름답고 옥 같이 흰 이 미인의 얼굴도 머지않아 백골로 변할 것
이다.'
몽천악은 다시 생각을 이어 나갔다.
'그녀는 비록 죽어 마땅했으나 그녀의 시체를 어찌 내버려둘 수 있겠느
냐! 햇빛이 사정없이 내리쬐고 비바람이 불어 치며 이리들이 공복을 채우
기 위해 달려들 것이다. 아, 사람이란 한 번 죽으면 만사가 끝나는 것이
다. 나는 흙구덩이라도 하나 파서 그녀를 묻어 주어야겠다.'
이렇게 생각을 끝낸 몽천악은 허리춤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장검 한 자루
를 풀었다.
그리고 삽을 대신해서 그 검으로 부근 잔디 위의 한 군데를 골라 파기 시
작했다.
한 시간 정도의 시간을 허비해 세로 여섯 자, 가로 석 자, 깊이 한 자반의
구덩이를 하나 파 놓았다.
몽천악이 몸을 돌려 제칠교주의 시체를 끌어다 매장하려고 돌아갔을 때,
몽천악은 한눈에 시체가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는 깜짝 놀라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애교 섞인 목소리로 묻는 여
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은 무엇을 하려고 구덩이를 파세요?"
그 소리가 들려 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 몽천악은 고함을 지를 뻔했다.
십여 장 밖 키가 작은 소나무 아래 제칠교주가 기대앉아 있는 것이 아닌
가!
그렇다면 그녀는 죽지 않았단 말인가? 몽천악은 경악한 눈빛으로 다시 그
녀의 몸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입가와 의삼에는 여전히 핏자국이 얼룩져 있었다. 그러나 혈색이
없던 얼굴은 이미 훨씬 나아져 있었다.
제칠교주는 몽천악이 한참 동안 대답하지 않는 것을 보자 돌연 애처롭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당신은 그 구덩이를 파서 나의 시체를 매장하려는 게 아녜요?"
몽천악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 당신은 죽지 않았소?"
제칠교주는 담담하게 말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말을 할 수 있어요?"
그러자 몽천악은 갑자기 수중의 장검을 힘주어 잡으며 낭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죽지 않으면 안될 사람이오. 그러니 나는 당신의 목숨을 앗아가
겠소."
제칠교주는 안색을 바꾸지 않은 채 태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내 목숨을 앗아 버리려고 하죠?"
몽천악은 그녀의 물음에 멍하니 있다가 잠시 후 겨우 대답했다.
"당신은 현재 무림의 모든 화근이 되고 있소. 그러니 당신이 죽기 전에는
무림은 태평하지 못할 것이오."
제칠교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고라화상도 나의 목숨을 빼앗지 못했어요. 그러니 당신은 더욱 내 목숨
을 빼앗지 못할 거예요."
몽천악은 속으로 움찔하며 물었다.
"조금 전 당신은 일부러 죽은 체하였소."
제칠교주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기절했을 따름이지 결코 죽은 건 아니었어요. 노화상의 공력은 확실히
심후하고 매서우나 그는......."
몽천악은 그녀가 다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급히 물었다.
"그러나 어떻단 말이오?"
제칠교주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앞으로 칠 일 이상 더 살 수 없을 거예요."
몽천악은 그녀의 말을 듣자 놀라서 물었다.
"어째서 칠일 이상 살지 못한단 말이오?"
제칠교주는 그의 다급한 물음에 가벼운 냉소를 띠고 말했다.
"조금 전 그는 무모하게도 목숨을 각오한 기법을 발휘해 냈어요. 그래서
노화상은 이미 나의 소녀 잔양신공에 임, 독 양맥이 격상되어 버렸어요.
그가 즉시 죽지 않은 것은 심후한 공력으로 상처가 발작하지 않도록 억제
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결국 죽는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에요."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매우 놀라며 말했다.
"당신의 말은 참말이오?"
제칠교주는 냉정하게 잘라 말했다.
"지금 당신에게 한 말은 한마디도 거짓이 아녜요."
몽천악은 안색이 돌변했다. 고라화상이 여태껏 쌓아 온 노력이 끝내 수포
로 돌아가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몽천악은 고라화상의 죽음을 생각하자 가슴이 쓰려 왔다. 고라화상은 제
칠교주를 제거하는 데 자신이 희생을 감수하고 목숨을 건 전법을 사용했
던 것이다.
몽천악은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그는 제칠교주를 제거했다고 믿고 있으니 자기의 죽음도 한이 없을 것이
다. 그러나 그는 순간적으로 소홀하여 방심해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적의
생사를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총총히 떠나가서 끝내 모든 일을 수포로 돌
아가게 한 것이다.'
조금 전 제칠교주가 기절해 있었을 때, 고라화상은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어야만 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다시 그녀에게 일 장의 치명
타를 가했다면 제칠교주는 아마 다시 살아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몽천악은 자신도 자세히 살펴보지 않은 일이 몹시 후회되었다. 어찌하여
제칠교주의 목숨이 끊어지지 않았단 말인가? 제칠교주는 다시 서서히 말
했다.
"당신은 내가 죽은 것을 보고 차마 시체를 황야에 내버려둘 수 없었겠죠.
그래서 구덩이를 파 나의 시체를 매장하려고 했지요. 비록 나는 죽지 않
아 그 은덕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지만 당신의 그 인자스러운 마음은
나로 하여금 평생토록 잊기 어렵게 할 거예요."
몽천악은 그녀의 애잔한 말에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
기는 응당 그녀를 죽여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라신승이 끝내지 못한 사명을 완성시켜야 한다. 일단 이러한 결
심이 서자 몽천악은 냉랭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의 무공이 어떻든 간에 오늘 나는 당신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정했소이
다."
제칠교주는 이 말을 듣자 담담하게 말했다.
"나는 당신의 목숨을 상하게 하지 않겠어요. 그것은 나를 위해 구덩이를
판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서예요."
몽천악은 의외라는 표정을 짓고 나서 말했다.
"그럼 실례하겠소이다."
이렇게 말을 끝내자 즉시 검결을 세웠다. 그리고 한걸음 내디딘 뒤 몸을
날려 곧장 일 검을 찔러 갔다.
몽천악의 무공은 절세의 고수답게 놀라웠다. 이 일 검은 스승의 검법인
어검술의 기초 천심검법이었다.
제칠교주는 키가 작은 소나무 아래 기대고 앉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나 일단 검식이 찔러 오는 것을 보자 돌연 손가락을 내밀어 가볍게
퉁겨 냈다.
쨍! 하는 쇳소리와 함께 몽천악은 검을 채 잽싸게 뒤로 삼사 보 물러났
다.
그리고 놀라운 표정으로 외쳤다.
"검원지로구나."
"그래요. 서장 밀종문의 절학 검원지예요. 당신도 몸에 밀종문의 문학을
지니고 있다죠? 본교 제구교주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과연 그
말이 틀림없군요."
몽천악은 마음속으로 놀랐으나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급히 물었다.
"당신은 바로 그 홍의의 소녀를 말하는 것이 아니오?"
제칠교주는 담담한 목소리로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요. 예구요말이에요."
몽천악은 이 말을 듣고 그리 놀라지 않았다.
몽천악은 이미 능운보탑에서 출현한 그 홍의의 소녀가 필히 무아진교의
사람이리라고 추측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녀가 무아진교 제구교주라
는 것도.......
제칠교주는 그가 아무 말이 없자 서서히 말했다.
"당신의 내력과 신분을 나는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어요. 그러나 당신의
무학 문로를 보아하니 비단 밀종문의 무기에만 깊은 조예가 있을 뿐 아니
라 천하 각파의 무공 문로를 지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어요. 만약 내 추
측이 틀리지 않다면 천하에서 단지 두 사람만이 당신 같은 제자를 가르쳐
낼 수 있었을 거예요."
몽천악은 의외인 듯한 표정을 짓고 그녀에게 물었다.
"어떤 두 사람이란 말이오?"
제칠교주는 냉소를 띠고 말했다.
"첫 번째 사람은 제일총교주예요."
몽천악은 잠시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다가 물었다.
"당신은 무아진교의 제일총교주를 두고 하는 말이오?"
제칠교주는 몽천악의 말을 듣고도 그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살피는 듯한
눈초리로 말했다.
"나는 당신이 솔직하게 말해 주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혹시 제일총교주께
서 파견하신 특부사자가 아닌가요?"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아연해졌다.
그러나 그는 제칠교주의 이런 말속에서 무아진교 안의 사람과 사람 사이
에는 의심과 불신감이 뿌리 깊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무아진교의 조직은 제일총교주의 음의
통치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칠교주는 맑은 눈빛으로 줄곧 몽천악의 얼굴을 쏘아보다가 돌연 애처롭
게 외마디 긴 한숨을 내쉬고 중얼거렸다.
"사부님은 이십여 년 동안 나를 그처럼 잘 대해 주었는데 내가 어째서 그
분을 의심해야 한단 말이냐?"
몽천악은 이 말을 듣자 깜짝 놀랐다. 그래서 고개를 들고 제칠교주를 바
라보고 타이르듯 말했다.
"고라신승이 조금 전 귀하에게 말한 것이 생각날 거요. 자고 이래로 적지
않은 걸출의 무림 호웅이 무림 패업을 성립하려는 망상을 했었소. 그러나
그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패가망신하여 비참하게 죽어 갔는지 모르
오. 귀하는 보통 사람과 다르니 조속히 개과천선한다면 그리 늦지도 않을
것이오."
제칠교주는 담담하게 물었다.
"당신은 나더러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몽천악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개과천선하시오."
제칠교주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당신은 아직도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았어요."
몽천악은 이 말을 듣고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나는 절대로 무아진교의 사람이 아니오."
제칠교주는 "아!" 하고 가볍게 소리를 지르고 나서 말했다.
"그럼 당신은 그의 제자겠군요?"
몽천악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누구를 말하는 거요?"
제칠교주는 한마디로 잘라 대답을 해 버렸다.
"천리호리 만리표 말이에요."
몽천악은 이 한마디 말을 듣자 안색이 돌변해서 물었다.
"당신이 어떻게 그 이름을 아시오?"
제칠교주는 그 말을 듣자 이미 몽천악이 그런 질문을 해 올 것을 예상했
다는 듯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천하에 내가 모르는 무림고수의 이름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몽천악은 마음속으로 놀라며 생각했다.
'두 번째 사부님께서 죽기 전에 말하신 것이 있었지. 나에게 무공의 전수
를 받은 다른 한사람이 있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그 사람이
바로 제칠교주란 말인가?'
몽천악은 여기까지 생각하고 나자 다시 물었다.
"당신은 그분을 본 적이 있나요?"
제칠교주는 이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당신은 어째서 먼저 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는 거예요."
몽천악은 말했다.
"그렇소 그분은 나를 가르친 은사님이시오."
제칠교주는 이 말을 듣자 신색이 약간 변하며 물었다.
"그분은 죽었나요?"
몽천악은 말했다.
"돌아가신 지 몇 달 밖에 안됐소이다."
제칠교주는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분은 당신에게 어떤 것을 얘기해 주지 않았나요?"
몽천악은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급히 물었다.
"당신은 도대체 그분과 무슨 관계가 있소?"
제칠교주는 말했다.
"사십구 일 동안 밤낮으로 수업을 받은 은사님이에요."
몽천악은 대경실색하여 더듬거리면서 물었다.
"당신...... 당신은 그 노인장에게 무공을 전수 받은 첫번째 사람이군요."
제칠교주는 말했다.
"틀림없어요. 그것은 이십 년 전의 일이에요. 그리고 나와 그분이 같이 지
낸 시간은 단지 사십구 일이라는 짧은 시간에 불과한 거예요."
몽천악은 물었다.
"이십 년 전이라면...... 그럼 당신은 몇 살 때 그 노인장을 만났소?"
제칠교주는 대답했다.
"다섯 살 때예요."
몽천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섯 살의 나이로 어떻게 무공을 학습할 수 있었으며 또한 사십구 일 밤
낮으로 전수를 받을 수 있었겠소?"
제칠교주는 말했다.
"그 당시 나는 무공일도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어요. 그러나 그 노인장이
외워 준 무공 경문만은 기억해 두고 잊지 않았지요."
몽천악은 처량하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만리표 은사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
소이다. '노부는 일생 동안 너무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다. 탐욕이 있는 것
이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명과 부귀를 구하는 데 힘을 다했다. 그
러나 칠십여 년의 목숨과 세월을 헛되이 매장시키게 되었다.
아, 무림 강
호의 은혜와 원한의 인과응보는 순환되는 것이다. 이 노부가 삼십여 년
동안 불구가 되어 시달림을 받은 것도 일종의 천벌이라고 할 수 있는 것
이다.' 이처럼 안타깝게 말했소이다."
제칠교주는 물었다.
"단지 그런 말 밖에 하지 않았나요?"
몽천악은 다시 말을 이었다.
"또 말씀하시기를 그분의 무공을 이미 다른 한 사람에게 전수해 주었으니
나보고 스스로를 조심하라고 당부하였소이다."
제칠교주는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그 노인장은 너무 고독했어요."
몽천악은 물었다.
"당신은 그 노인장이 불구가 된 까닭을 아시오?"
제칠교주는 냉랭하게 말했다.
"몰라요."
몽천악은 침울한 음성으로 말했다.
"당신과 나는 같은 사문의 출신이라고 할 수 있소. 천리호리 만리표 사부
님이 임종 전에 하신 말씀은 이미 수없이 많은 악행을 저지른 사람의 결
과를 말한 것 같소. 당신은 지금 어떤 느낌이 드오?"
제칠교주는 안색이 변하며 말했다.
"당신은 나를 훈계하지 마세요. 또 당신이 만리표에게서 무공의 전수를
받은 것에 관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토로하지 마세요. 일단 토로하면 당신
의 목숨은 항시 위험할 테니까 말이에요."
"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소. 단지 보람있게 죽을 수 있다면 어느 때 어
디서 죽어도 나의 의무를 다하는 셈이오."
제칠교주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 당신과 나는 바로 한 은사 밑에서 배운 남매지간이나 마찬가지예
요.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은 서로 적의 사이니 도대체 어쩌면 좋을까요."
그녀는 이렇게 말을 하고 나서 얼굴에 큰 슬픔과 난색을 나타내었다.
<2권에 계속>
|
첫댓글 무협지네요 ^^& 예전에 많이 봤었는데요 ㅎㅎ
1권 전체를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