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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 시집 『눈물을 자르는 눈꺼풀처럼』 (창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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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역에 스크린도어를 설치한 계기가 된 사건이 있었다. 2003년 남대문시장에서 부인복매장을 운영하던 42세 여성이 회현역 승강장에서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대문 평화시장으로 원단을 끊으러 가는 길이었다. 전동차가 역내로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리자 그녀는 전동차를 타기위해 앞으로 서너 걸음 발길을 옮겼다. 그 순간 뒤에서 비틀거리던 한 남자가 몸을 기울여 그녀의 등을 거칠게 밀어버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선로 위에 떨어진 그녀를 열차가 덮쳤다. 말 그대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종로 3가역 지하철 경찰대에 재직 중이던 그녀의 남편은 어이없는 참사에 억장이 무너지고 넋을 잃었다. 장례를 치루고 정신을 차린 뒤 억울하게 먼저 간 아내를 위해 경찰 남편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안전망을 설치해 다시는 이런 참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서울메트로에 '더 이상 억울한 인명 피해가 없도록 안전 문을 설치해 달라'는 탄원서를 내는 등 여러 경로에 이를 호소했다. 탄원이 받아들여져 2008년에 시작하여 2009년 말에는 서울지하철 모든 승강장에 스크린도어의 설치가 완료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서울시는 ‘시가 흐르는 서울’이란 슬로건으로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시를 ‘주련’처럼 내다 걸었다. 강화 ‘촌사람’인 시인이 모처럼 서울지하철을 이용하면서 스크린도어의 시들을 보고 좀 민망스러웠던 모양이다. 하지만 ‘세계의 강자, 대한민국’이란 제목의 시를 보지 않아서 다행이지 만약 그걸 보았더라면 토를 했을지 모를 일이다. “G20의 의장국으로 뛰어오른/ 대한민국은 더 높은 하늘처럼 희망차다/ 떠올라라, 아침 해처럼 황금빛으로 찬란하게!/ 모두 너를 쳐다본다/ 이젠 세계1등의 기술국으로 올라/ 빼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시’는 계속된다. “양궁도 골드만 맞추는 신궁이다/ 그뿐이랴, 골프도 홀인원이다/ 나가자 나가, 세계의 강국으로/ 서울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런 도읍이다” 한국문협 소속 모 원로시인의 ‘시’ 전문이다. 이명박 정부 오세훈 서울시장은 당시 스크린도어 주련 사업을 통해 시민들의 문화적 감수성과 문화적 수준이 높아지고 서울이 품격 있는 문화도시로 거듭나길 기대한다고 했다. 그리고 시인들은 시민들이 시를 읽으면서 기쁨과 위안을 얻고 문학적인 감수성을 일깨우는 작은 계기가 되리라는 희망으로 이 사업을 반겼지만 과연 그렇기만 할까.
시민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동안 수없이 지하철을 타보았어도 스크린도어의 시들을 눈여겨 읽는 승객들은 거의 만나지 못했다. ‘작품’의 수준은 차치하고라도 이런 시들을 보며 오글거려하는 시민들은 시인이란 존재를 어떻게 생각할까. 서울시가 시민공모를 통해 뽑은 시들을 포함하여 작품 수준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지속적으로 받아왔다. 장소와 시의 분위기가 어울리지 않는 작품도 적지 않았다. 문학단체 추천방식으로 게재된 시도 문학단체 간 경쟁 과열이 도를 넘고 추천과 심사의 공정성 시비로 잡음이 끊이질 않았다.
2016년엔 복효근 시인의 '목련꽃 브라자'가 외설 시비를 낳으며 스크린 도어에서 철거되기도 했다. “내 볼까봐 기겁을 해도/ 빨랫줄에 널린 너 브라자 보면/ 내 다 알지”라는 구절이 성희롱에 가깝다고 지적을 받은 것이다. 참 웃기는 짬뽕이다. 이후 서울시는 스크린도어 시 운영개선책에 따라 현재는 애송시 70%, 시민 시 30%로 구성되었다. 문학단체 추천 대신 전문가, 독서지도가 등의 추천으로 시를 선정한단다. 그러나 작고 시인의 작품과 외국 명시까지 게시 대상에 넣었지만 반응은 여전히 차갑다.
아무튼 전철 밖 사정은 그렇고 전철 안에는 나란히 앉아 청진기를 끼고 시대의 총아 스마트폰을 조물거리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다’ 하지만 폰이 손에서 떨어지면 불안 초조해져서 그들 스스로 의사가 아니라 환자 신세가 되고 만다. 전원이 꺼질까봐 전전긍긍 배터리의 노예가 되어간다. 고만고만한 수평적 사고의 평준화로 그 깊이를 더해갈 뿐이다. ‘예상’대로라면 시집을 읽는 승객도 한둘 보여야 마땅할 것 같은데 손에 시집이 들린 승객은 여전히 눈을 씻고 봐도 없다. 누구는 안전 문이 없어서 죽고 다른 누구는 스크린도어 때문에 죽었다.
권순진(2019. 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