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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묵상글 ( 8/10. 22:50, 04:55, 05:40. )
저는 아래 몇 분의 글만 공유합니다.
1차 공유하는 묵상글: 고인현, 호명환 신부님.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차 공유할 묵상글: 05 - 06시 이후 04:55. 현재, 05:40 현재
< 김찬선 신부님: 04:55. 추가, 호명환 신부님: 05:40. 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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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회원 어느 분이나 이 곳에 들어 오시는 분들을 위하여
다른 분(신부님 등)의 오늘 묵상글, 강론글을 이 곳 뜨락에 게재하실 수 있습니다.
오늘 글이 아닌 지난 묵상글은 5-1. 소금(나눔) 뜨락 .1. 묵상글 등 나누기 뜨락에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 이 묵상글 뜨락을 '8월 15일 이후 어떻게 운영할 것인지' 에 대한 의견을
전체 공지 H. 260707을 참고하셔서 저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간 (3 곳을 다니고 참가하며: 2. 2-3. 52번 참조) 이곳 뜨락에서 한 분의 묵상글이라도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나눔의 장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08. 06부터 08. 10. 22:05까지 게재후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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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독서<그 두루마리를 내 입에 넣어 주시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에제2,8-3,4)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8 “너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하는 말을 들어라. 저 반항의 집안처럼 반항하는 자가 되지 마라. 그리고 입을 벌려 내가 너에게 주는 것을 받아먹어라.”
9 그래서 내가 바라보니, 손 하나가 나에게 뻗쳐 있는데, 거기에는 두루마리 하나가 놓여 있었다.
10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
3,1 그분께서 또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네가 보는 것을 받아먹어라. 이 두루마리를 먹고, 가서 이스라엘 집안에게 말하여라.”
2 그래서 내가 입을 벌리자 그분께서 그 두루마리를 입에 넣어 주시며,
3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내가 너에게 주는 이 두루마리로 배를 불리고 속을 채워라.” 그리하여 내가 그것을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
4 그분께서 다시 나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아, 이스라엘 집안에게 가서 그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복음<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마태18,1-5.10.12-14)
1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물었다.
2 그러자 예수님께서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에 세우시고 이르셨다.
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4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
5 또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10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12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 둔 채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느냐?
13 그가 양을 찾게 되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길을 잃지 않은 아흔아홉 마리보다 그 한 마리를 두고 더 기뻐한다.
14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
<또는, 클라라기념일 독서(필리 3,8-14)와 복음(마태 19,27-29)을 봉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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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2026.08.10 20:31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마태 18,1-5.10.12-14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묻습니다.
크기와 높이를 다투는 물음입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세우십니다.
그리고 뜻밖의 답을 주십니다.
가장 큰 사람은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라고.
하늘 나라의 셈법은 세상과 거꾸로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는
어린이의 ‘작음’ 속에서 복음의 핵심을 봅니다.
어린이는 지위도, 자랑도, 계산도 없이
그저 아버지를 ‘신뢰하며 매달립니다.’
바로 그 ‘낮고 단순한 신뢰’가
하늘 나라의 큼이라는 것입니다.
이어 주님께서는 ‘작은 이들’을 지키라 하십니다.
그들의 천사가 아버지의 얼굴을 늘 뵙고 있으며,
그 하나라도 잃는 것은 아버지의 뜻이 아니라고.
목자는 아흔아홉을 두고 ‘잃은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오늘 기리는 성녀 클라라가
이 복음을 그대로 살아 낸 ‘작은 이’입니다.
성녀는 아시시의 부유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 모든 지위와 재산을 버리고
프란치스코를 따라 ‘작아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스스로를 ‘프란치스코의 작은 나무’라 불렀고,
가난과 겸손 속에서 그리스도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의 눈에는 ‘작아진’ 그녀가,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사람’이 되었습니다.
친절·선행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선행의 ‘방향’을 일러 줍니다.
선행은 높고 화려한 이에게가 아니라,
‘작고 길 잃은 한 사람’에게로 향합니다.
그 한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고’ 찾아 나서는 것,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을 닮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크고 높아지기’만을 다투고 있지 않은가?
나는 어린이처럼 ‘낮고 단순한 신뢰’를 지녔는가?
나는 ‘작은 이 하나’를 업신여기지 않는가?
나는 ‘길 잃은 한 사람’을 찾아 나서는가?
주님,
어린이처럼 낮고 단순한 신뢰를 주소서.
작은 이 하나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시고,
길 잃은 한 사람을 찾아 나서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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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유한성 안에 계신 무한하신 분!
2026.08.10. 16:27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우리는 각자 하나의 신성한 우주의 한 부분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프란치스코와 클라라의 신비주의
유한성 안에 계신 무한하신 분!
2026년 8월 10일 월요일
리처드 신부는 프란치스칸 신비주의가 어떻게 우리를 초대하여,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만나게 하는지를 밝혀줍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는, 유한성이 무한하신 하느님을 드러내며, 물질이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 곧 우리가 "육화"라 부르는 근본 원리를 깨닫는다면 —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바로 지금, 여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곧 저쪽으로 가는 길입니다! 달리 말해, 지금 여기가 바로 저곳으로 가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하늘은 땅을 품고 있으며, 시간은 우리를 영원으로 열어주고, 공간은 우리를 무한으로 열어줍니다. 우리가 그것들을 분명한 문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세상에는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거룩한 것'과 '거룩함이 훼손된 것'만 있을 뿐이며, 거룩함을 훼손하는 이는 다른 누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경외심을 잃을 때, 사물과 장소와 시간이 더럽혀지는 것입니다. 우주는 하나의 거룩한 전체이며, 우리는 모두 그 안에서 한 부분을 이루고 있습니다. 영적 비전으로서 이것보다 더 단순하고 더 깊은 것은 없습니다.
구체적인 현실이 우리를 보편적인 진리로 열어 준다는 깨달음은, 결국 가장 신뢰할 만하고 가능한 길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감각을 지닌 인간은 본래 그렇게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추상적인 이념만으로는 멀리 가지 못합니다. 많은 종교가 실제로는 "현존과의 만남"보다는 이념에 머물러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자기 삶의 작은 체험에서 출발하여 거기서부터 신앙을 쌓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위에서 내려오는" 이념적 종교 형태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옳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육화의 신비를 정말로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 논리적 결론까지 차근차근 확장해 나갈 때, 프란치스코 안에서 공간과 시간의 한계가 단번에 극복됩니다. 그리스도의 신비는 결코 모호하거나 추상적이기를 거부하며, 언제나 구체적이고 분명합니다. 우리가 일상의 작은 현현들에 머물러 있을 때, 모든 것이 하느님의 계시임을 보게 됩니다—바위에서부터 우주선에 이르기까지. 그러므로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드러나심, 혹은 계시에는 더 이상 사각지대가 없습니다. 우리의 눈으로 현재를 볼 때에도 그렇거니와 과거를 뒤돌아볼 때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 안에 경탄과 겸손, 호기심과 경외, 그리고 앞으로 이끌림을 받아들이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칸 영성은 보는 이와 보이는 것 사이에 참된 상호성, 곧 서로의 연결과 동등함을 강조합니다. 보는 이의 마음과 영혼은, 그가 무엇에 주목할지를 결정하는 데 깊은 영향을 줍니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자신을 "작은 형제" 혹은 "미천한 형제"로 여겼기에, 다른 존재들—동물, 별, 자연의 요소들—을 "형제"와 "자매"라 부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피조물에게도 상호성, 주체성, 인격적 존엄을 부여했는데, 이는 먼저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로서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그에게 투명한 양방향의 거울과 같았으며, 어떤 이들은 이를 "온전히 성사적인 우주"라고 부릅니다.
Story From Our Community
저는 리처드 로어 신부님이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 쓰신 글을 읽고 너무 기뻤습니다. 그의 말씀이 제 마음을 깊이 울리며, 평화와 희망으로 저를 가득 채워 줍니다.
—Dianne S.
References
Adapted from Richard Rohr, “Franciscan Mysticism: A Cosmic Vision,” Radical Grace 25, no. 1, Franciscan Mysticism (Winter 2012): 12, 13, 2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Pouya Hajiebrahimi, untitled, 2025, photo.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안개 속에 홀로 서 있는 우리의 모습은 변모를 기다리며 성녀 클라라가 말한 거울 앞에 고요히 서 있는 모습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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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이 마르첼리노 M. 수사님.
2026.08.10 20:51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세 번째 이야기
하느님의 선은 나에게만 맡겨진 것이 아닙니다. 형제에게도 고유한 은사가 있고,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모든 일을 통제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공동체는 한 사람의 완전함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은사들이 관계 안에서 흘러갈 때 세워집니다.
포르치운쿨라의 작은 돌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하나의 돌은 다른 돌보다 더 아름답게 보이려 하지 않고, 가장 아래에 놓인 돌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으며, 가장 위에 놓인 돌은 혼자 지붕을 받치고 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모든 돌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서로의 무게를 받아 줍니다. 어떤 돌은 문을 이루고, 어떤 돌은 벽이 되며, 어떤 돌은 제단의 받침이 됩니다. 모든 돌의 모양이 같지 않지만 서로의 차이 때문에 작은 성당은 더 단단하게 서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빠지면 벽 전체가 흔들리듯 공동체 안에서도 중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말이 적은 형제도 공동체의 한 돌입니다. 몸이 아픈 형제도 공동체를 이루는 귀한 돌입니다. 일을 빨리 하지 못하는 형제도, 감정을 쉽게 표현하지 못하는 형제도, 실수를 반복하여 다른 이들을 힘들게 하는 형제도 하느님께서 포르치운쿨라 안에 놓으신 하나의 돌입니다. 우리는 능력과 효율을 기준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쉽습니다. 공동체에 얼마나 기여하는지,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다른 이에게 얼마나 유익한지를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합니다. 그러나 복음의 형제성에서 사람의 존엄은 유용성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형제도 존재 자체로 공동체를 가르칩니다. 병들고 늙어 다른 이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형제는 우리의 속도를 늦추고, 효율보다 돌봄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 주며, 사람이 무엇을 해낼 수 있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받는다는 복음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그런 형제를 부담으로만 바라본다면 우리는 아직 형제성을 모릅니다. 형제를 그의 기능으로만 평가한다면 그는 이미 한 인격이 아니라 도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도구는 쓸모가 없어지면 버려지지만, 형제는 약해질수록 더 깊이 품어야 할 선물입니다.
포르치운쿨라의 형제성은 사람을 도구화하지 않는 관계입니다. 형제를 나의 외로움을 달래 주는 사람, 나의 계획을 도와주는 사람, 나를 인정해 주고 지지해 주는 사람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하느님 앞에서 고유한 이름과 얼굴과 역사를 지닌 존재입니다. 참된 사랑은 형제를 내 안으로 삼켜 나와 같게 만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그가 그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공간을 내어줍니다. 그의 생각이 나와 다를 수 있고, 그의 길이 내가 기대한 방향과 다를 수 있으며, 그가 하느님께 응답하는 방식이 나의 방식과 다를 수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한 사람의 상처와 침묵과 행동의 이유를 다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은 이해할 수 있을 때만 곁에 머무는 태도가 아닙니다. 이해되지 않아도 떠나지 않고, 설명할 수 없어도 그의 신비를 존중하며, 그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형제를 해석합니다.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는지, 무엇이 문제인지 단정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해석을 진실이라고 믿으며 판단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우리의 판단보다 깊고, 그의 삶은 우리가 아는 몇 가지 사건보다 넓으며,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이루시는 일은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큽니다.
형제성은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겸손입니다. 판단을 멈추고 묻는 것이며, 충고하기 전에 듣는 것이고, 상대방의 말을 내가 이미 알고 있는 틀 안에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형제의 말을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픔이 내 마음 안에 머물 자리를 내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형제가 아픔을 말할 때 너무 빨리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의 슬픔을 견디기 어려워 서둘러 위로하고, 그의 혼란을 빨리 끝내 주고 싶어 충고하며, 침묵이 불편해 말을 채웁니다. 그러나 때로 형제에게 필요한 것은 해답이 아니라 함께 머무는 사람입니다.
형제의 상처 앞에서 말없이 곁을 지키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 고통을 혼자 두지 않겠다는 가장 깊은 사랑입니다. 울고 있는 사람과 함께 울고, 답을 찾지 못한 사람의 곁에서 같이 기다리며, 그의 아픔을 재촉하지 않는 것이 형제성입니다. 형제성은 타인의 속도에 나의 걸음을 맞추는 사랑입니다. 세상은 빠른 사람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늦은 사람에게 서두르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가장 약한 사람의 속도에 공동체가 자신을 맞추도록 부릅니다. 한 사람이 뒤처졌을 때 그를 남겨두고 먼저 목적지에 도착하는 공동체는 효율적일 수는 있어도 형제적이지는 않습니다.
형제는 함께 도착해야 합니다. 병든 형제가 천천히 걸으면 우리도 천천히 걸어야 하고, 마음의 상처 때문에 쉽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형제가 있다면 그의 시간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계획이 늦어질 수 있고, 일이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사람을 잃으면서 이루는 성공은 복음의 성공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사람을 일보다 먼저 바라보셨습니다. 율법의 완성보다 상처 입은 사람의 회복을 먼저 선택하셨고, 군중의 기대보다 길가에 멈춰 선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분에게 한 사람은 결코 전체를 위하여 희생해도 되는 작은 숫자가 아니었습니다.
포르치운쿨라의 형제성은 바로 이 그리스도의 눈으로 형제를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의 외적인 모습과 능력과 과거를 넘어 그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형상을 보는 것입니다. 그의 허물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선을 믿고, 그의 실패가 그의 마지막 이름이 되지 않도록 기다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할 수 있지만 변화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오래 참아 주셨듯이 우리도 형제의 성장을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림은 잘못을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한 사람을 그 잘못과 동일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의 행동은 잘못되었지만 그의 존재까지 부정하지 않고, 책임을 묻되 존엄을 빼앗지 않으며, 다시 시작할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 용서의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용서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잊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를 가볍게 여기거나 잘못을 정당화하는 것도 아닙니다. 용서는 그 잘못이 우리 관계의 마지막 말이 되지 못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상처보다 더 큰 미래가 있음을 믿고, 죄보다 더 깊은 하느님의 자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포르치운쿨라 전대사의 정신은 바로 이 자비의 문을 모든 사람에게 열어 주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는 돌아오기에 너무 늦은 사람이 없고, 용서받기에 너무 큰 죄인이 없으며, 다시 시작하기에 너무 깊이 무너진 인생도 없습니다.
프란치스코가 원했던 것은 사람들이 죄책감에 눌려 성당 문밖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자비 안으로 들어와 자신의 존엄을 회복하고, 다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랐습니다. 자비는 사람을 무책임하게 만드는 값싼 위로가 아닙니다. 자비는 잘못한 사람에게 다시 살아갈 책임을 돌려주는 힘입니다. “너는 네 잘못보다 더 큰 존재이며, 너는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말해 주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공동체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이 아니라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상처 입혔고, 누군가에게 용서받았으며, 지금도 하느님의 인내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형제 위에 서서 그를 완전히 판단할 수 없습니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내려 하기 전에 내 눈 속의 들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관대하고 형제에게는 엄격한 이중 기준, 내 실수는 상황 때문이라고 설명하면서 형제의 실수는 성격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태도, 내가 상처를 주었을 때는 이해받기를 원하면서 형제가 나를 아프게 했을 때는 그를 쉽게 정죄하는 마음이 바로 우리 안의 들보입니다. 들보를 빼낸다는 것은 자신을 비난하는 일이 아니라 진실해지는 일입니다. 내 안에도 같은 어둠이 있고, 나 역시 하느님의 자비 없이는 설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기 인식이 있을 때 형제를 향한 우리의 말은 날카로운 판단이 아니라 자비로운 권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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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치운쿨라 1. 다시 처음으로 ( 2026.08.02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30
포르치운 쿨라 2. 다시 복음으로 ( 2026.08.03 )
http://www.ofmkorea.org/ofmkfb/583181
포르치운쿨라 3. 관계 속에 흐르는 선의 강물처럼 ( 2026.08.04 )
http://www.ofmkorea.org/ofmkfb/583256
포르치운쿨라 4. 다시 형제성으로 첫 번째 이야기 ( 2026.08.07 )
http://www.ofmkorea.org/ofmkfb/583330
포르치운쿨라 다시 형제성으로 두 번째 이야기 ( 2026.08.09. )
http://www.ofmkorea.org/ofmkfb/583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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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8.11 04:11
- 사랑 받아 사랑하는, 상처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저는 지금 클라라 성녀의 축일을 지내기 위해 수녀원에 와 머물고 있는데
이 새벽에 오늘 축일을 맞이하는 클라라 수녀님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수녀님들께서 클라라 성녀처럼
사랑하기 위해서 깨어나고
사랑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사랑 안에서 잠들기를 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수녀님들이 되기 위해서,
곧 사랑받고 사랑하는 수녀님들이 되기 위해서
먼저 사랑을 잘 받는 수녀님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빌었습니다.
왜 이런 바람을 가지고 기도했냐 하면
갈수록 제가 Multi(여러 가지 동시 수행)가 안 되며 어쩔 수 없이,
저절로 단순해지고 사랑 하나로 단순해지는 저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보면 많은 사람이 사랑은 하고 싶어 하는데
사랑을 받지 않고 사랑하려다가 사랑의 탈들이 나는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녀님들을 위해서는 더 구체적으로
상처받은 사랑을 받는 수녀님들이 되시기를 바라고 빌었습니다.
왜 이런 바람을 가지고 기도하게 되었느냐 하면
어제 저는 강론을 올린 다음에 성무일도 독서 기도와 아침기도를
수녀원 앞마당을 오가면서 했는데 앞마당에 예수성심상이 있어서
거기서 잠깐 머물며 기도하는 중에 이런 묵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수녀님들 마음이 상처받으신 예수 성심처럼 되셨으면,
사랑을 받되 상처받으신 주님의 사랑을 받음으로써 상처를 사랑으로 승화하여
상처를 받은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은 것이 되게 하셨으면,
아니 상처받는 것이 사랑을 받는 것이 되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상처가 사랑이 되게 하는 것은 일생을 다미아노 십자가를
관상하며 살았던 클라라처럼 참 관상가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것은 상처받는 순간 상처를 준 사람을 보는 것도 아니고,
자기 상처를 보며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도 아니고,
상처받으신 사랑을 관상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실로 오늘날 많은 사람이 상처를 많이도 받아 신음하고
자기 연민에 빠져 살고 있습니다.
제가 자주 얘기하듯 준다고 다 받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사랑만은 주는 족족 다 받고 주는 것보다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이 요즘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때에 관상은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받는 것이고,
그저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클라라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이런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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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1. 성녀 클라라 동정 기념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애틋한 갈망과 사랑을 품고 길 잃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주님!~~~
2026.08.11. 05:26
옛날부터 위대한 영웅들이 우리에게 본받을 모범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이를 가까이 부르시고, 우리가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곧 어린이를 우리 제자들이 본받아야 할 영웅으로 세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행동의 의미를 제대로 받아들이려면,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의 어린이를 상상해야 합니다.
당시 어린이는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었고,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니라 미완성된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높은 영아 사망률과 경제적 의존성 때문에 어린이는 보호받기보다는 취약한 계층으로 분류되었으며, 공동체 안에서 권리나 발언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던 어린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본보기로 세우신 것은 혁명적인 가르침이었습니다.
실제로 지위와 권위에 집착하던 제자들(마르 9,33; 10,37 참조) 앞에서 예수님은 어린이를 모범으로 내세우십니다. 마태오, 마르코, 루카 모두 이 사건과 대화를 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감상적 일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의 핵심임을 보여줍니다. 오늘의 예수님 가르치심이 복음서의 다른 말씀들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봅시다!
"너희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12). "민족들을 지배하는 임금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민족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자들은 자신을 은인이라고 부르게 한다. 그러나 너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처럼 되어야 하고 지도자는 섬기는 사람처럼 되어야 한다."(루카 22,24-26).
우리가 성장 과정에서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 중 하나는 우리가 지닌 자연스러운 어린이 같은 특성을 잃어버리는 경향입니다.
어린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고유한 자질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그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곤 합니다.
이러한 '잃어버림'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나 문화의 영향 때문일 수도 있고,
성장하면서 겪는 다양한 경험들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음을 직관적으로 알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에고'의 지배 아래서 이런 아름다운 직관을 잃어버리고 단절되고 외로운 삶을 살아가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그것을 억누르고, 결국 언젠가 폭발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우리를 돌보는 이들을 쉽게 신뢰하고 의지했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오히려 두려움이나 불신으로 그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현재의 순간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었지만, 어른이 되면서 우리는 과거의 덫에 갇히거나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리곤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리 존재 안에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 가장 순수한 영을 일깨우시기 위해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는 목자의 아름다운 이미지를 보여주십니다. 길을 잃은 양의 울음소리는 목자의 마음을 찌르고, 양이 직면한 위험은 목자의 마음을 몹시도 아프게 합니다. 그래서 목자는 그 잃은 양 한 마리를 위해 잃지 않은 양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남겨둔 채 지체 없이 길을 나서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어린이 같은 믿음과 확신을 잃고 길을 잃은 우리를 향해 깊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애틋한 갈망과 사랑을 품고 우리를 찾아와 주시는 분이십니다!
엊그제 말씀드렸듯이,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겁이 나자 물에 빠져들어가며 주님께 외친 몇 마디를 우리는 자주 외치면서 길 잃은 우리를 찾아와 주시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크나큰 사랑으로 내미시는 주님의 손을 붙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를 구해 주십시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실제 어린이를 본보기로 드셨지만, 그 말씀은 단지 어린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마태 18,6; 10,42 참조)은 곧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낭만적으로 이상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했다면 어린이를 별도의 작은 집단으로 격리시키는 셈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어린이됨"을 통해 어른들에게 더 충만하고 더 겸손하고 진솔한 인간성을 상기시키시며 당신의 제자들인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러한 삶으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녀 클라라 축일입니다. 클라라는 하느님께 굳건히 신뢰하는 삶으로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는 성녀입니다.
일전에도 한 번 언급해 드렸습니다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녀의 말씀은 그가 죽음 직전에 자기 영혼에게 한 말입니다. 이 이야기는 성녀의 어린이와 같은 순수하고 굳건한 믿음의 영을 드러내 줍니다.
클라라는 이렇게 말합니다.
"불안스러워 말고 떠나거라, 너의 여행길에 좋은 호위원이 있다. 떠나거라, 너를 만드신 분이 너를 거룩하게 하셨다. 어머니가 자기 아이에게 늘 그랬듯이 그분은 너를 감싸시면서 너를 온화하게 사랑해 주셨다. 오! 주님, 당신께 축복이 있으소서! 저에게 생명을 주신 당신이여!"(토마스 첼라노에 의한 클라라의 전기 46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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