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4. 큐티
마태복음 16:24 ~ 28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관찰 :
1) 자기를 부인하고 따를 것
- 24절.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예수님 자신이 달려 죽으실 십자가 사역에 대해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정말로 하시고 싶은 셨던 핵심 메지지를 증거하고 계십니다.
- 주님을 따르려거든 누구라 할지라도 자기 자신을 부인하여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직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지 않은 상황에서 이렇게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짐을 지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환경이나 질병, 습관, 죄성, 타인과의 어려운 관계 등등의 극복해야 할 문제들은 내가 짊어져야 하는 짐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 십자가는 죽음이 목적인 것입니다. 당시의 가장 무서운 사형틀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는 죽는 것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이 어렵고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죽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죽어야 되는 것입니다. 죽지 않는 것은 십자가가 될 수 없습니다.
- 십자가를 진 자는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그냥 십자가만 지고 가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죽이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참된 주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지셔야 할 십자가를 설명하신 뒤에 우리도 자기 자신의 십자가, 자기 자신을 죽이는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2)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고 제 목숨을 잃으면 찾을 것이다.
- 25절.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 자기 자신의 것을 탐하는 욕심이 있어서는 주님을 얻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이들이 자기 자신의 명예와 물질적인 유익을 얻고자 하다가 주님을 온전히 좇아가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주님은 물질과 명예와 자녀의 유익과 기타의 좋은 것을 다 취하면서 좇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 26절.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 온 천하를 얻는다 하더라도 천국을 얻지 못하면 의미없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알렉산더나 징기스칸이 위대한 삶을 살았지만 그들이 그 황제로서의 권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어떠한 이유도 없습니다. 그들의 영혼이 지옥에 있다면 그것은 비참한 인생을 살았을 뿐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신 이 세상에서 자기 멋대로 활개를 쳤을 뿐이지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못했기에 끝은 생명이 아니라 사망인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목숨과 바꾸어서 자기 목숨을 살 수 있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진시황도 그렇게 불로초를 얻고자 했으나 얻지 못했고, 신선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도인들, 브라만이 되고자 했던 수많은 구루와 요기들이 다 그렇게 죽었습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는 것입니다(히 9:27).
3) 인자가 다시 올 때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을 것이다
- 27절.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 이 심판의 주체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사람들이 자신을 누구라고 아는 가에 지극히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안다는 것은 예수님의 통치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주인이시고,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구약과 신약의 말씀을 믿고 날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따르는 자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믿고 따르지 않는 이들은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실 것입니다. 주님의 심판의 범위는 나의 행위만이 아니라 홀로 있는 가운데 이어지는 모든 마음의 죄악까지도 백일하에 드러나서 온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알게 되고 그 중심으로부터의 죄악까지 다 심판이 행해질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예외가 없고,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이 될 것입니다. 모든 음란의 죄, 모든 저주의 죄, 모든 미움의 죄, 모든 사랑 없음과 무관심의 죄, 모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죄, 어려서 죽을 때까지의 모든 종류의 죄악들이 다 드러나서 온 세상에 보여지고 심판될 것입니다.
- 그러나 주님은 예수님을 믿고 십자가의 보혈을 의지하여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이 복음이고 은혜가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성도는 모든 죄악으로부터 돌이켜서 주님의 품안에 거할 수 있습니다.
4)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2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인자가 그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 => 엿새 후에 예수님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한 산에 올라가셔서 변화되시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빛나는 구름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변화산 사건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 변화산에서의 왕권을 가지신 주님을 만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자를 대표하는 모세와 엘리야를 통해서 예수님의 권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율법과 선지자들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된 그분이라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가 인자로서 하나님의 왕권을 가지고 오는 분이시라는 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그 일을 이미 아시고 제자들에게 설명하신 것입니다.
- 주님은 때로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넘어서서 말씀하십니다. 이미 다 아시는 전지(全知)하신 분이시기에 이렇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이기에 주님의 말씀을 다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주님의 말씀을 완전히 다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과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이 유한한 인생에게 열려지고 해석되는 것이 가능한 것입니다.
가르침 :
1) 주님은 왕이십니다. 목숨을 걸고 좇아야 할 왕이십니다. 목숨을 잃어서라도 얻어야 할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 곧 죽음을 전제로 하는 추종이어야 합니다. 내가 얻을 유익을 다 얻고, 내가 빨아먹을 단 것을 다 추구하면서 주님을 좇는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내가 손해를 밥 먹듯이 보면서 주님을 좇는 것이, 그래서 내가 죽는 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결국은 손해 보지 않는 것이 주님을 좇는 것입니다. 나를 의지하면서 그렇게 손해를 보는 삶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의지하고 나를 죽일 때 그렇게 손해 보는 삶이 가능합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왕이셔야 그런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2) 사람이 얻어야 하는 것은 천하가 아닙니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가 인생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자지로(君子之路)는 멋진 길이지만 그렇게 하고도 자신의 생명을 얻지 못한다면 안타까울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완전한 군자는 존재하지 않기에, 그것을 주창한 공자도 그렇게 살지 못했기에 그러한 주장의 형이상학적 이론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땅에서의 인생의 목적은 십자가를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영원한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채워져가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말만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하신 분이 아니시고, 실제로 그 왕권을 가지고 오심을 보여주실 수도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것이 변화산 사건이고, 주님의 말씀이 옳음을 증명하는 사건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한 고백에 따르는 주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증명으로 그렇게 다시 한번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가에 대해서 바른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보게 됩니다.
적용 :
1) 나를 부인함. 내 십자가를 짊. 이것의 의미를 많이 생각하고, 많이 실천하도록 하겠습니다.
2) 나를 부인한다는 것이 나를 죽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나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죽어야 예수님이 살고,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내가 죽어야 진리가 사는 것입니다.
3) 그렇다면 오늘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 그것이 진짜로 죽는 것인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 내가 산 것 아니요 오직 내 안에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2:20의 바울의 고백이 힌트를 줍니다. 내가 스스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 함께 죽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내가 주님과 함께 함이 비결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 할 때에라야 나를 십자가에 달아 죽일 수 있습니다. 주님의 본이 없다면, 그 주님을 내가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기적인 내가 어떻게 나를 죽일 수 있겠습니까? 역설이 성립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나보다 더 사랑하시기에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도록 스스로 죽이는 길을 가셨기에 내가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나를 죽이는 길이 됩니다. 오늘 무엇을 하는 상황속에서도 주님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나를 죽이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