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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의자
- 박문숙
“으으, 뭐지?”
오른손으로 엉덩이 밑을 훑어보았다. 일어나서 의자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뒤집어 보아도 만져지는 것이 없었다.
‘이상하다?’
시계는 벌써 9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하품이 나왔지만, 다시 의자에 앉았다.
“아얏!”
이번에는 찌르는 느낌이 확실하게 났다. 선생님의 무서운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은 급한데 의자에 앉을 수가 없었다. 슬그머니 다시 앉아 보았다. 역시나 뭔가가 엉덩이에 닿는 느낌이 들었다.
“혹시?”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팔에는 오돌오돌 소름이 돋아나고 있었다.
‘귀신은 무슨.’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가뜩이나 하기 싫은 숙제를 서서 하려니 왈칵 짜증이 밀려왔다.
‘학원은 꼭 다녀야 하는 거야? 학원에 안 갔으면 벌써 숙제를 다 했을텐데……. 아, 준섭이는 정말 좋겠다.’
학원 다니는 것이 힘들다는 말을 꺼낸 적이 있었다.
“준섭이처럼 공부 잘하면 뭐하러 학원 다니니? 공부 못해서 창피한 것이 힘들지, 학원가는 게 뭐가 힘들어? 엄마는 학원에 가고 싶어도 안 보내줘서 못 다녔어.”
정말 충격이었다. 엄마 표정과 말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엄마는 숨김없이 얼굴에 언짢음을 드러냈다. 그때 알았다. 엄마는 나를 부끄럽게 생각한다는 것과 더이상 말해도 소용없다는 것을.
“명하야, 어서 일어나. 학교 늦겠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벌써 아침이다.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허겁지겁 학교로 뛰어갔다.
잠을 설쳐서 수업 중에 꾸벅꾸벅 졸다가 혼이 났다. 쉬는 시간에는 괜히 준섭이와 시비가 붙어 기분이 더 나빠졌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학교가 끝나고 영어학원에서 공부한 후 보습학원으로 갔다. 선생님은 내가 푼 문제지에 색연필로 빨간 빗줄기를 수도 없이 그었다. 추운 겨울날 비에 젖은 것처럼 마음이 추워졌다.
“명하야, 오늘도 다시 풀고 가야겠다.”
친구들은 가는데 혼자 남아있으려니 한숨이 나왔다. 공부를 끝내고 돌아오는데 벌써 어두컴컴해지고 있었다.
“다녀왔습니다.”
“오늘도 나머지 했어? 어휴. 다른 애들은 학원 가면 성적이 오른다고 하던데.”
‘그럼, 다른 애들 엄마하지 그래요?’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꾹 삼켰다. 말해봤자 혼만 날 것이 뻔했다. 손가락을 움직일 기운도 없었다. 방에 들어와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에 누웠다.
‘어제는 꿈을 꾼 걸까?’
벌떡 일어나 의자에 천천히 엉덩이를 내려보았다.
“앗!”
이제 의자에 앉기 싫다. 아니, 잠깐도 앉을 수가 없었다.
“명하야, 손 씻고 밥 먹어야지.”
엄마가 방문을 열고는 눈썹을 찌푸렸다.
“그새 또 서 있니? 의자에 진득하니 앉아 있지 못하고……. 공부가 그렇게 싫어?”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서.”
자초지종을 말해도 내 말을 믿어주지 않는 엄마가 미웠다. 이 세상에 나 혼자 있는 것만 같았다.
보습학원 맞은편에 공방이 생겨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우연히 공방 아저씨가 물건을 만드는 것을 보고는 할아버지 생각이 났다.
엄마가 아파서 나는 일곱 살 때 할아버지 집에서 지냈다. 할아버지 집에 간 첫날은 엄마, 아빠가 보고 싶어 울기만 했다.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는 팽이를 만들어주었다. 나는 팽이가 돌아가는 것을 보고는 울음을 뚝 그쳤다. 그날부터 할아버지를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다녔다. 할아버지는 썰매도 만들어주고, 새총도 만들어주었다.
처음에는 작년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만 들여다보았다. 뚝딱 물건을 만드는 솜씨가 볼수록 신기해서 넋 놓고 보다가 학원에 늦어 혼이 나기도 했다. 다음부터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후로도 공방 구경은 계속되었다. 나는 마음에 드는 의자가 있어 엄마를 졸라 공방으로 갔다.
“어서 와요. 가게 앞에서 매일 구경하던 꼬마 손님이네.”
공방 아저씨는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밖에서 보던 것보다 멋진 물건들이 많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 의자만 보였다.
“엄마, 저 의자 사주세요.”
“명하야, 의자 있잖아. 그런데 사달라고? 구경만 하자고 하더니.”
“엄마, 저 의자에서 공부하면 성적이 오를 것 같아요. 네에?”
엄마는 마지못해 사주었다. 정말로 그 의자에서는 공부가 잘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열심히 공부한다고 사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공부하기 싫으니까 의자 탓을 해? 의자가 어떻게 공부를 방해하니?”
“저도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말이라니까요.”
엄마는 문을 세게 닫고 나갔다. 억울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정말 엄마 말처럼 공부하기 싫어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어쨌든 이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마가 알면 돈이 아깝다고 잔소리를 할 게 뻔했다. 나는 엄마 몰래 의자를 바꿔오기로 했다. 방문을 살짝 열고 망을 보았다. 엄마는 방에 들어갔는지 안 보였다. 의자를 조심스럽게 들고 살금살금 창고로 갔다.
“저기 있다!”
짐작대로 저번에 쓰던 의자가 그대로 있었다.
얼른 의자만 바꿔서 나오려는데, 뒤통수 쪽에서 빛이 느껴졌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떠올랐다.
“허어어.”
나는 순식간에 큰 나무 위에 앉아 있었다.
“놀라지 마라. 널 만나고 싶었단다.”
나무가 말을 하고 있었다. 믿기지 않아 팔을 꼬집어보았다.
“아야.”
“왜? 나무가 말을 하니 이상하니? 하하하.”
나무가 가지를 펼치고 빙그르르 돌기 시작했다. 나무는 천천히 돌다가 허리케인 회오리처럼 감아 돌았다.
“어, 어지이러워요. 그으만!”
잠시후 조용한 기운이 느껴져 눈을 떠 보니 숲이 우거진 곳에 와 있었다.
“여, 여기가 어디지?”
찬찬히 살펴보니 낯이 익었다.
“시골 할아버지댁 뒷산 같은데? 헉, 나잖아?”
어린 나와 엄마가 보였다.
“엄마, 이 나무 좀 봐요.”
“와, 우리 명하처럼 멋지네.”
우리는 두 손을 모아서 나무를 감싸고 있었다. 나무는 엄마 손과 내 손에 쏙 들어왔다.
“너 내 나무 할래?”
엄마와 어린 내가 웃는 웃음 속으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지고 있었다.
“뻐꾹 뻐꾹, 닥닥 닥다닥.”
내 나무는 나뭇가지에 모여든 새들과 함께 어우러져 반짝였다. 우리가 내려간 후에도 다람쥐와 꿩 가족도 놀러 왔다. 잠시도 혼자 있지 않았다.
“나무가 참 행복해 보인다.”
‘나도 저 때는 행복했었는데…….’
할아버지 집에 엄마가 가끔씩 내려와 같이 보냈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때는 엄마가 친절하고 다정했었다.
나를 앉힌 나무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았다.
“아, 아 아아, 아아.”
한참을 어지럽게 돌던 나무가 멈췄다.
“여기는 어디지?”
꿈에도 그리던 할아버지와 어린 내가 보였다.
“할아버지, 저 나무 위에 올라가고 싶어요.”
“높이 올라가면 위험하니까 조금만 올라가거라.”
할아버지는 나무 위에 올라갈 수 있도록 잡아주었다. 나는 굵은 가지에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어린 나는 할아버지를 보고 쫑알거리면서 깔깔깔 웃었다.
“명하야, 같이 놀자.”
“할아버지, 저 내려갈래요.”
그때는 동네 친구들과 매일 즐겁게 놀았다.
갑자기 폭풍우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몰아치고 나무들은 미친 듯이 가지를 흔들어댔다. 나무도 울부짖었다.
“살려줘어어어…….”
“뚜두두둑!”
내 나무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졌다. 그걸 보는 순간 뭔가가 내 머리를 때렸다.
“설마?”
“이제야 나를 알아보는구나! 부러진 나를 보고 공방 아저씨가 의자로 만들었지.”
“그럼, 할아버지댁 뒷산에 있던 나무가 내 의자라고?”
“그래. 이제 알겠지?”
“믿기지는 않지만. 근데, 내 나무였으니까 친구라고 불러도 될까?”
“그래, 그러렴. 사실은 내가 나이가 많긴 하지만.”
“그런데, 나를 왜 여기로 데리고 온 거야?”
나무가 잎을 흔들자 햇살이 들어와 반짝였다.
“네가 의자에 앉을 때마다 네 마음이 느껴졌지. 저 생각 많이 했잖아. 사실 나도 네 방에 있으면 숲속에서 즐거웠던 일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거든.”
“맞아. 하지만 지금 현실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고, 학교 끝나면 영어학원, 보습학원에 가고. 집에 돌아와서는 밥 먹고. 학원 숙제, 학교 숙제를 하고 나면 잘 시간이 되어버려.”
“힘들지?”
“나도 의자였으면 좋겠어. 돌아다닐 수 있다고 해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어. 차라리 너처럼 가만히 쉬고 싶어.”
“그럴 것 같아? 후웃. 정말 좋을까? 의자인 나는 온종일 너를 기다리다가 네 한숨 소리를 듣는 게 다야.”
“내가 너를 기쁘게 해주지 못했네. 더구나 나는 공부도 못하고…….”
“준섭이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한 엄마 말 때문에 속상했지?”
“엄마는 내가 공부를 못해서 아들인 것도 싫은가 봐. 어, 근데 그건 어떻게 알아?”
“네가 잠꼬대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래서 더더욱 너를 도와주고 싶었어.”
저쪽에서 살랑바람이 다가와 나뭇잎을 흔들어댔다. 힘내라며 손을 흔들어주는 것 같았다.
“놀지도 않고 공부하는데도 잘할 수가 없어.”
“저런, 속상하겠구나!”
“공부도 공부지만, 같이 놀아야 친구를 사귈 수 있을 텐데…….”
“친구는 어른이 돼서 사귀면 된대. 엄마는 친구 사귈 시간에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고 했어.”
“명하야, 친구가 없으면 외롭잖아. 너도 친구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명하는 친구들과 뛰놀던 생각에 눈이 뜨거워졌습니다.
“나는 너를 신나게 해주고 싶었어. 네 친구도 되어 주고.”
“그래서 내 엉덩이를 찔렀구나! 의자에 앉아 있어도 온통 놀고 싶은 생각뿐이었거든.”
나는 뺨이 발그레해졌다.
“명하야, 우리 또 만나기로 약속하자. 힘들면 언제든지 말해. 나는 네 친구니까.”
“정말? 약속하는 거지? 보고 싶으면 내가 너를 창고로 데리고 갈게.”
명하는 나무를 껴안고 볼을 댔다. 스르르 눈이 감기면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명하야!”
저 멀리서 엄마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이제 갈 시간이 된 것 같구나!”
“벌써? 우리 꼭 다시 만나. 꼭!”
나는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명하야, 어디 있니?”
엄마 목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돌아보았다. 강렬한 빛이 비치더니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아아, 어지러워.”
하늘이 빙빙 돌다가 어느 순간 확 낚아채는 느낌이 났다.
눈을 떴다. 창고였다. 눈앞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다. 의자, 아니 내 나무가 옆에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든든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의자를 번쩍 들고 거실로 갔다.
“명하야, 너 어디 갔다 오니?”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왔어요.”
“이 시간에? 의자까지 들고? 엄마가 지금은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했지?”
“엄마! 저는 이제부터 친구도 사귀고 놀기도 할 거예요. 모든 것은 다 때가 있거든요. 지금은 친구를 사귀는 때라는 것도 알았어요.”
엄마는 어리둥절해하며 쳐다보았다. 이제 엄마의 잔소리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가슴 속 깊은 곳에서부터 희망이 용솟음쳤다.
- 출처: <한국아동문학> 2021 제38호
첫댓글 올려주셔서 고마워요. 잘 읽을게요.
은가비 님의 새로운 작품을 만나서 반가웠어요. 정감어린 동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