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지극정성으로 간호했지만 부인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인이 남편에게 “여보, 나 죽고 나면 당신 새 장가 들어도 나 원망하지 않을 거야!”
남편은 “여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절대 새 장가 가지 않고 당신과의 추억만을 그리면서 한평생을 살 거야!”
부인이 흐뭇한 마음으로 꼴까닥~~ 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의 묘비에 슬픔을 표현하기를 거창하게~~
<내 영혼의 빛이 꺼졌다!!!>
더 이상 부인에 대한 슬픔을 대신할 다른 표현이 없지요.
내 영혼의 빛이 꺼졌다!!!
한 일년 견뎠을까요!
여기 저기 중신이 들어오고/ 혼자 밥 해먹는것도 지겹고/ 밤이 되면 적적하고 이 잡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러다 중매를 통해 한 여자를 소개받았는데~~
그 전 여자하고는 게임이 안 돼~~ 끝내주는 여자야^^
다른 사람이 수군거리고, 웅성거리는 것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가 이 여자 만나 행복 찾으면 그만이지~~
양심에 좀 께름칙하긴 하지만~~
본당신부님께 가서 “다시 혼배성사 좀 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양심에 제일 걸리는 게 묘비명인데 ‘내 영혼에 빛이 꺼졌습니다!’ 라고 써서... 묘비를 뽑을 수도 없고.....“
신부님께서 이틀을 기도하시고 난 다음에 지혜를 짜 내서 방법을 알려 주시기를~~
“좋은 수가 있다. 묘비명 <내 영혼의 빛이 꺼졌다!> 그 옆에 <그리고 새로운 빛이 또 생겼다!!!>
이 세상에서 믿을 분은 하느님 한 분입니다!
인간은 서로가 신뢰하려고 애 쓸 뿐이지~~
절대로 믿음의 대상은 아니죠?
이 세상에 이혼하기 위해 결혼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만은 현실적으로 이 좁은 땅덩이에서도 통계가 2.5명 가운데 하나가 도장 찍고 헤어진다고 그래요....
아무튼 우리가 살면서 사람을 믿지는 맙시다!
그냥 신뢰하려고 애쓸 뿐이요!
저 인간 내 가슴에다가 칼을 박았듯이~~
나도 저 인간 등에다가 칼을 꽂을 수도 있는 약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그 약한 부분을 신앙고백하면서 살아갈 때 그 인간관계는 지속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특별히 많은 면담을 합니다.
면담이 전국에서 오는 순서대로 하다보니깐 요즘 만나서 얘기 하는 분들이 작년 이맘때 예약했던 분들이 지금 면담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면담을 신청하면 1년 후에나 면담을 하게 됩니다.
하루 종일 면담을 하면 수십 명을 면담할 수 있지만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시간을 내서 짬짬이 면담을 하게 됩니다.
많은 분들이 면담을 청하는데 그 내용 중에서 주된 ‘테마’ 가 뭐냐?
첫 번째는 자식에 대한 면담이 가장 많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신앙문제입니다.
세 번째는 자기 건강문제입니다.
몸이 약한데 신부님 안수기도 좀 주십시오!
내적인 상처, 외적인 상처!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남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면담을 한 것을 돌아보면 옛말이 맞아요.
대개 남편 복 없는 사람이 자식복도 없습디다.
면담해 보면 ‘참, 이 자매는 자식이 속 썩이면 남편이라도 다정다감하게 자식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끌어안아주면서 아픔을 나누는 게 아니라 남편은 이건 나무때기야, 남편이 한 술 더 떠!
이야기를 들어보면 혼자 사는 이 신부가 얼마나 상팔자인지~~^^
정말 저는 행복합니다!
교우들은 사제보고 “아이고, 신부님~~ 혼자 이 세상 사시느라고 얼마나 힘드십니까?”
저는 속으로 ‘난 니가 불쌍하다~~^^’
내 속으로 난 자식이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부모들의 고통에 때로는 사제가 주는 것이 한계가 있습니다. 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런 자식 앞에 어떻게 해결책을 제시해야 하는지~~.
어떨 땐 저도 막막합니다.
그냥 손 잡아 주고 기도 한 번 해주고~~
그거 이상은 특별한 해결책이 없지만, 그래도 교우들은 특별한 해법을 못 얻어도 사제와 같이 이야기 하고 힘을 얻고 기운을 냅니다.
부모들은 자식들 때문에 힘들어 하지만 자식들은 부모의 고통을 잘 모릅니다.
부모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고, 또 세상 삶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다만 부모는 자기 키워주는 사람이고 필요할 때 돈 달라면 돈 주는 사람,
이런 존재이지, 부모가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 존재인지 잘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마음을 제일 몰라주는 피조물이 누구겠습니까?
산천초목은 하느님의 뜻대로 순종하면서 살아갑니다.
짐승들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온갖 정성을 다 해 만든 인간만이 자기를 만든 창조주를 부정하고 대들고 손가락질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제일 많이 아프게 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들이 아닌가!
인 간이 아무리 머리를 동원하고 두뇌를 동원하여 하느님의 속성을 파헤치고 하느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려고 하지만은 인간은 성서에 나오는 몇 가지 안 되는 말로써 어렴풋이 짐작하고 추측할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느님의 마음을 절대로 모릅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사람에게 인격이라고 하는 것이 있듯이 하느님에게는 위격이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하느님이의 위격이 몇 개냐?
세 개라고 그럽니다.
성부, 성자, 성령
그럼 하느님이 세 분이란 말입니까?
성서에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밝혀지고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세 위격이 오직 한 분이라고 하십니다.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많은 비유를 합니다.
촛불이라고 하면 초의 형상이 있어야 되고, 빛이 있어야 되고 열이 나야 됩니다.
한 남자를 놓고 보면 집에서는 아버지요, 직장에 가면 과장님이고 아내에게는 남편이 됩니다.
형광등을 하나 놓고 볼 때도 빛이 나오고 그리고 열이 나오고 형광등이라고 하는 고유한 형상이 있습니다.
이렇게 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설명을 시도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설명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절대로 삼위일체의 신비를 머리로 깨달을 수는 없는 겁니다.
죽어서 직접 뵙기 전에는 완전히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성서말씀이기에 믿는 겁니다.
그래서 그리스드교는 계시종교라고 그럽니다.
인간 쪽에서 만들어 낸 종교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하느님께서
‘나는 바로 이런 존재다!’
하는 것을 계시를 통해 알려 주신 계시종교입니다.
하느님이 자신이 어떤 존재이다! 하고 알려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는 믿을 뿐입니다.
왜 위격이 세 위격이냐!
그런데 왜 하느님은 한 하느님이냐!
하는 것은 우리들이 논의할 것이 아닙니다.
토의 대상이 아닙니다.
성서의 말씀을 믿고 있는 이상 그냥 믿으면 됩니다.
오늘 우리 묵상해야 되는 키포인트는 위격에 대한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그 분들의 관계성입니다.
그 세 위격은 어떤 관계로 이루어졌기에 깨어지지 않고 한 하느님이면서 세 위격을 가지고 있을까!!!
여러분들 셋이 하나가 되는 것이 쉽지 않지요?
바오로 사도는
“나는 내가 행하려고 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내가 하기 싫은 악을 행하고 있으니 아, 나는 비참한 인간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도 잘 모릅니다.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을 것이요, 그 놈과 일치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 압니다.
자기 자신 하나도 하나 되지 못하고 내가 나도 나를 모를 때가 많은데 하나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부부가 몸은 하나가 될 수 있어도 마음도 하나입니까?
천만의 말씀....
몸은 하나가 될지 몰라도 마음은 따로따로 사는 부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는 늘 사제단 피정이 기다려지는데 저는 유일하게 쉬는때가 그 때입니다. 잠도 싫컷 자고 만나보고 싶은 사람도 만나고 제가 서품 받을 때 제 동창신부들이 세분 더 있습니다.
그런데 이 네 명의 개성이 너무너무 강하다 보니까 서로 무지하게 바쁩니다.
일년에 몇 번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네 명 가운데 한 사람은 양업고등학교 교장선생님입니다.
거기서 특수사목 하느라고~~
또한 양반은 미국에 오랫동안 나가서 교포사목 하느라고 18년 동안 안 들어 왔어요.
또 한사람은 로마에서 공부하고 또 신학교 들어와서 아이들 가르치느라고 만나기가 어렵고~~
또 한 사람 저는 세상 돌아다니면서 피정하느라고 뭐가 그리 바쁜지~~
그러나 항상 피정 때 동창들이 가능한 한 식탁에서 만나 우리가 어느새 은경축일이 되어가고 ‘어!’ 하다보니 꺾어져 내려가는 마당인데 우리 좀 자주 만나서 하나가 되어 보자.
피정 때 약속을 하지만 약속뿐이요, 약속한대로 되지 않습니다.
성서에 보면 성부, 성자, 성령이 하나이다! 라는 이야기가 특히 요한복음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요한복음 5장 19절에 보면
아들은 아무것도 자진해서 할 수 없다.
요한복음 10장 30절에 보면
아버지와 나는 하나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2절에 보면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성서에서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에 대해서 가장 잘 알려진 관계성은 하나라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처럼 보이지만 하나가 아닌 것이 참 많습니다.
계모임이라는 돈으로 뭉쳐진 관계들이 있습니다.
안 모이면 점심 값 물어내야 하니까 나만 손해입니다. 기를 쓰고 나가서 점심 먹어야 됩니다.
정치적인 견해로 당원이라고 하는 것이 생겼지만, 겉으로는 하나처럼 보입니다.
‘박동지’ , ‘이동지’ 하면서 형님, 아우 하지만 당이 바뀌면/ ‘이 놈’, 저 놈‘ 하면서 싸웁니다.
혈연, 지연, 학연으로 세력이 만들어집니다.
겉으로는 하나처럼 보이지만 이 단체는 영적인 평화와는 거리가 멉니다.
계모임에 가서 재미는 있을지 모르지만 평화는 없습니다.
나는 계모임 갈 때 행복하다! 하는 사람, 그런 사람 정신 병원에 가야 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단체는 늘 깨질 소지가 있습니다.
계주가 돈 떼먹고 튀면 그 계 깨집니다.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었다가도 언젠가는 깨어져 버립니다.
그곳에는 상처와 미움이 공존합니다.
이 세상에 하나인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가 아닌 수많은 단체들이 있는 것에 비하여
성부, 성자, 성령 셋을 하나로 이어주는 접착제가 뭐냐?
바로 사랑과 평화라고 하는 접착제가 있었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은 하나가 되신 겁니다.
우리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아가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이해관계로 모인 세속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물론 돈 많은 사람, 적은 사람/ 정치적으로 견해로 한나라당이냐, 열린 우리당이냐
전라도 사람이냐, 충청도사람이냐, 경상도 사람도 있고 이북사람도 있습니다. 학력도 초등학교도 못 나온 사람, 박사등.....
성당에는 수많은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이 모여 삽니다.
이 모든 것이 달라도 그 중심에 예수그리스도가 우뚝 중심에 자리 잡고 계시기에 그 공동체는 하나가 뭉칠 수가 있습니다.
12사도를 보면 다 달랐습니다.
12사도 가운데 열혈당원이었던 유다~~
로마인들에게 빌붙어 세금을 걷었던 마태오~~
그 둘이 길에서 만난다면 서로 칼로 찔러 죽이는 관계였지만, 예수그리스도 계셨기에 서로 사랑과 평화와 관용으로 서로 끌어들이면서 12공동체가 깨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지 않는다면 오합지졸입니다.
아무리 성당을 40억, 50억짜리를 으리으리하게... 성당 밖을 금으로 장식한다 하더라도 그 안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그 파들 때문에 성당은 수십 개로 갈라지고 쪼개집니다.
삼위일체로 하나 되는 성당이 있습니다.
저는 워낙 많은 성당을 다니니까 성당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 이 성당에는 정말 하느님의 냄새가 나는구나!' 하는 성당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당문을 딱 열고 들어가면 찬바람이 나고
신자들의 얼굴이 딱딱하고 그렇게 냉랭할 수가 없는 성당이 있습니다.
‘여기는 문제가 있구나!’
본당 신부님께 인사하려고 올라가보면 얼굴은 거의 똥색입니다.
삼위일체를 증거 하는 성당에는 일단 성당에 들어오면 행복해야 됩니다.
편해야 됩니다.
그리고 미사 들어오기 전의 얼굴과 미사를 드리고 나갈 때의 얼굴이 달라야 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
치유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미사 중에 성당에서 차에서 내릴 때부터 치유를 받기 시작해서 성당에 나갈 때는 들어올 때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삼위일체를 증거 하는 성당이며 사제와 신자가 아름다운 성당이 바로 삼위일체성당입니다.
다니다보면 주보가 삼위일체인 성당이 꽤 여럿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성당치고 삼위일체처럼 살아가는 성당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이름만 삼위일체이면 뭣합니까?
삼위일체는 그 안에 사는 사제, 수도자, 평신도들이 알콩달콩 깨 볶으면서 살아갈 때,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 하는 성당입니다.
삼위일체적인 가정이 있습니다.
아 버지는 사랑과 지혜가 가득 찬 권위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는 편향적이지 않고 이기적이지 않은 모성애를 가지고 있고/ 아이들은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고 건전한 인생관, 세계관을 가지고살아갑니다. 그 가정에서는 늘 기도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헐뜯고 손가락질 하는 소리보다는 '내 탓이다! ' 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이 가정을 하나 되게 이어주는 접착제가 뭐냐?
바로 사랑입니다.
삼위일체적인 미사성제가 있습니다.
엄숙하면서도 기쁨과 평화를 주는 미사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사제는 정성을 다하여 강론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힘 있게, 자신 있게 하느님을 증거 해야 됩니다. 그 강론을 통해서, 은총이 사제의 입을 통해 내려갑니다.
미 사를 드릴 때는 내 생애의 마지막 미사를 드리듯이/ 경문 한 자 한 자 움직임 하나하나에 온갖 정성을 쏟아 내는 미사/ 말씀과 그러한 정성으로 이루어진 그 미사 끝에 성체를 영한다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자 어디 있겠는가/ 감격과 기쁨으로 성체를 영할 수 있게 하는 그런 감사의 미사, 바로 이것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드러내는 미사입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우리들의 삶을 통해 맛보여 주십니다.
우리들 중에 천당, 연옥, 지옥을 갔다 온 사람은 없지만~~ 살아가면서 천당과 연옥과 지옥 맛은 그때그때마다 느낍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상대를 죽이고 싶도록 미워할 때 바로 그곳이 지옥입니다.
자존심 때문에 서로 말 안 하고 지낼 때 그곳이 연옥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둘 중 한 사람이 내가 잘못한 것이 눈꼽만큼도 없지만~~ ‘ 용서해 줘, 미안해!’ 먼저 손을 내밀 때... 두 사람 손바닥이 마주쳐지는 그 순간 거기가 바로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 삶 가운데 얼마든지 체험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작디작은 머리로 완전히 하느님을 알 수는 없어도~~
하느님께서는 저 세상을 그리워하게 하게끔 천국의 맛도 느끼게 해 주시고
죄도 짓지 않게끔 지옥이 얼마나 무섭다고 하는 것도 느끼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 미사 중에 말씀과 성체로 힘을 얻어서 삼위일체적인 일치와 기쁨과 평화의 삶을 살도록 노력합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