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씨라는 이름은 [사기] <대완열전>에 처음 나타난다. 당나라 시기 장수절의 사기정의에는 월씨를 월지(月支)로 읽어야 한다고 하였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에 보이는 우씨(禺氏)를 월씨(月氏)로 보고 있다.
서기전 3세기에 월씨는 이미 감숙 하서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월씨족의 발생과 분화를 보면, 서쪽 새지(塞地)로 이도한 일파는 대월씨(大月氏)라 하였고, 기련산 일대에 머물러 사는 월씨족의 나머지 무리들은 소월씨(小月氏)라고 하였다.
월씨족의 원류는 대부분이 서쪽에서 이동해 온 아리안계로 보고 있다. 주요한 근거는 귀상시기(貴霜時期)에 대월씨가 사용한 토화라문(吐火羅文)이 인구어 계통의 동이란어 지어이기 때문이다. 근래에 중국의 학자들은 [후한서] <서강전(西羌傳)>의 소월씨에 대한 기사에 근거하여 월씨는 강족(羌族)과 상당히 가까우며, 하서지역에서 발생하고 성장한 토착민족으로 보고 있다.
월씨족이 남긴 하서지역의 사정문화(沙井文化)는 북방초원문화의 특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문화는 비록 황하상류에 강한 토착적 성격을 지닌 강족의 문화와 서로 다른 특징이 뚜렷하지만, 짐승의 모양을 칼자루에 조각하는 수법은 알타이식 청동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또한 내몽골자치구 오란찰포 양성현 모경구에서 출토한 북방초원부족의 무덤양식과 부장품은 월씨족의 사정문화 무덤양식과 같다.
월씨는 춘추시기에 감숙 하서에서 활동하였지만 시기가 늦은 모경구 적인(狄人)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월씨가 북방초원에서 벗어난 시기는 서주말기, 동주 초기에 이동하였다. 이들 월씨는 감숙 하서주랑의 동부지역에서 독특한 문화를 가꾸며 황하 상류의 문화를 흡수하여 북방초원의 문화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민족공동체인 월씨문화를 이루었다.
하서주랑의 동부에 이동한 월씨족은 동쪽의 중원문화 및 주변 토착문화와 교류하는 가운데 전국시대 중기부터 점차 철기시대의 과도기에 접어들었고 서부지역에 10만에서 20만에 이르는 기마궁사라는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였다.
진나라 시기에 동호(東胡)는 막강하고 월씨는 흥성하였다. 흉노의 초대 선우인 두만선우조차도 월씨에 아들인 모돈을 인질로 보냈다. 흉노의 모돈이 선우에 오르자 흉노와 월씨의 대립은 점차 격화되었다. 한고조 6년(서기전 201)에 모돈선우의 세력이 급성장하여 동호를 격파하였고, 또한 서쪽으로 월씨를 무찔렀다. 월씨는 흉노의 압박으로 점차 하서 중서부로 영토가 축소되었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월씨가 서쪽의 오손(烏孫)을 격파하고 우두머리인 난두미(難兜靡)를 살해하고 그들의 땅을 탈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한문제 전원 3년(서기전 177), 월씨가 오손을 격파하고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흉노는 기마군단을 이끌고 월씨를 다시 공격하였다. 이때의 타격으로 월씨의 대부분은 하서지역에서 쫒겨나 이리하 상류의 천산북로로 이동하여 새왕(塞王;스키타이)을 격파하고 그 지역에 거주하였다. 월씨 가운데 이동하지 못한 남산강족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를 소월씨라고 한다.
노상선우 말년인 서기전 162년경에 흉노에서 자란 오손국의 난두미의 아들 곤막(昆莫)은 선우에게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싶다고 군사를 요청하였고 드디어 서쪽으로 대월씨를 공격하였고 대월씨는 패하여 더욱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서기전 2세기 중엽부터 대월씨는 석이하(錫爾河) 북쪽에 이동하여 점차로 안정을 찾아 아모하(阿姆河) 북부 및 대하(大夏)읮 ndtlawl를 통제하였다. 한나라 장건(張騫)이 서역에 사신으로 갔다 중앙아시아에서 보았던 대월씨가 바로 이들이다. 서기전 100년 이후로 대월씨는 남쪽으로 아모하를 넘어 파극특리아-토화라사단에서 자신들의 통치권력을 확립하고 5흡후(五翕侯)라는 분봉제도를 실시하였다. 1세기 중엽에 이르러 5흡후 가운데 귀상흡후(貴霜翕侯) 구(丘)는 4흡후를 공격하여 스스로 왕중의 왕을 칭하고 귀상제국을 세웠다. 이로부터 100년동안 지금의 아프칸과 북쪽으로 호라이즘, 남쪽으로 문적아산, 서쪽으로 이란 동부, 동쪽으로 타림분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귀상제국의 통치권역에 들어갔고, 세계역사를 한, 귀상, 안식, 로마제국이 대치하는 국면을 이루었다.
대월씨의 귀상제국은 229년에 위(魏후)나라 명제에게 사신을 보내 중국과 교루하였다. 237년에 구상제국은 사산왕조(薩珊王朝)의 공격으로 제국이 무너졌고, 5세기에 이르러 귀상의 잔여세력은 남하한 염달인(염噠人)에게 멸망당하였다. 기련산 일대에 거주하던 소월씨는 빠르게 생존조건을 적응시키며 세력을 회복하였다. 한나라 시기에 이들의 힘은 서북지역의 형세를 좌우하는 세력으로 커졌다. 이들은 하황지역의 강족과 잡거하면서 혼인을 통해 강족과 융합되어 갔고, 일부는 서기전 122년에 한나라 지역으로 투항하여 한족과 섞여 살면서 한족에 융합되었다.
첫째는 흉노설이다. 오손과 흉노는 풍속이 같고, 오손의 왕족은 흉노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둘째는 돌궐설이다. 오손과 돌궐의 개국시조는 모두 늑대(狼)와 관계가 있으며, 국왕은 모두 곤막(昆莫) 또는 곤미(昆彌)를 칭한다. 일부의 오손족은 돌궐어족에 속하며 돌궐의 아사나씨는 오손계열에 속하는 후손이다. 오손의 분포지역은 훗날에 돌궐족이 흥기하는 터전이다.
셋째는 동이란족설(東伊朗族說)이다. 일부의 러시아 학자들은 오손이 동이란족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하였다. 오손족은 동이란의 스키타이(塞佧人)의 일파라고 보았다.
오손은 일찍이 흉노의 신민으로 장기간 흉노의 기미에 속하였다. 그래서 오손에는 흉노언어가 가깝다. 어떤 학자는 오손의 족속은 흉노어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알타이어계의 돌궐어족에 속하는 고대민족이다고 하였다. 오손은 전한시기(서기전 206-서기8)에서 남북조 초기까지 천산산맥 북쪽의 이스크호(키르키스탄 경내)에서 일리강 남쪽에서 유목생활을 하였다.
전국시대에 오손은 노예제사회에 들어가 오손왕국을 세웠다. 초기의 오손왕국은 흉노의 서쪽에 위치하였는데 대체적으로 신강의 알타이산맥 지역이다.
서기전 177년 가을에 흉노 우현왕에게 멸망을 당하여 오손왕 난도미는 살해 당하였으며 나머지 백성들은 흉노지역인 몽골고원으로 끌려왔다. 그때 난도미의 아들 엽교미(獵驕靡)가 막 태어나서 들판에 버렸는데 까마귀가 먹이를 물고 그 위를 날고 늑대가 가서 그 아이에게 젖을 먹였다. 흉노의 선우가 신령스러운 아이라 여기고 거두어 길렀다. 청년이 되었을때 전쟁터에 보내니 여러차례 군공을 세웠다. 노상선우는 다시 아버지인 난도미의 백성을 엽고미에게 주고, 서역지방을 지키도록 하였다. 엽교미가 주둔한 곳은 오늘날 신강의 언기(焉耆)이다. 엽교미는 백성을 잘 먹이고 다스렸으며 이웃의 작은 나라를 공격하여 점차 활을 쏘는 병사가 수만에 이르고 공격하는 방법을 익혔다.
서기전 161년에 노상선우가 세상을 떠나자 엽교미는 백성을 이끌고 멀리 이주하여 흉노에게 조회를 하지 않았다. 이것이 훗날의 오손왕국이다.
오손왕국은 이리하, 이스크호 유역이 위치했으며 왕도는 적곡성(赤谷城)으로 오늘날 키르키스 경내의 이스코호 남쪽에 위치한다.
전한 후기 오손은 12만호, 63만명에 병사는 188,800명이었다, 서역도호부가 관할하는 가장 강대한 국가였다. 국왕인 곤미(昆彌)라 부르며, 그 아래로 상, 대록(大祿), 좌우 대장 2인, 후(侯) 3인, 대장과 도위 각 1인, 대감 2인, 대이(大吏) 1인, 사중대이(舍中大吏) 2인, 기군(騎君) 1인이 있다.
한무제(漢武帝;서기전 141-서기전 87) 시기에 오손왕국은 3부로 나누어 졌는데, 곤미인 엽교미가 1부를, 태자인 잠취가 만기(萬騎)를 이끌고 1부를 통솔하였고, 아들 대록이 약 만기를 이끌고 다른 1부를 다스리는데, 두 아들의 부(部)는 곤미에 속해있다.
오손국은 오손족을 주체로, 스키타이족, 대월씨족이 있었다. 오손국은 땅이 평평하고 비가 많이 오는 천연의 목장이다. 산에는 소나무가 많고 새와 짐승도 많이 뛰어난 수렵장이다.
오손인들은 수렵과 목축에 종사하며 수초를 따라 다니며 목축을 하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다. 말, 소, 양, 낙타, 노새가 있으며, 양마(良馬)로 이름나서 중국의 한대(漢代)에 오손마를 서극마(西極馬)라고 불렀다. 말은 오손인들이 재산을 가름하는 주요 수단으로 여겼는데 부자의 경우는 5,000필의 말을 지니기도 하였다.
오손은 전한왕조와 일찍부터 정치관계를 맺었다. 서기전 121년에 흉노의 곤야왕이 휴도왕을 살해하고 그 무리를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을 하여, 하서(河西)가 텅텅 비었다. 서기전 116-111년간에 장건(張騫)이 한무제에게 건의하기를 오손을 이곳에 끌어들여 살게하고 한나라와 동맹을 맺고, 이로부터 흉노의 오른팔을 끊으면, 서역의 서쪽에 있는 대하(大夏)의 무리들도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될 것이라 하였다. 이에 한무제는 장건을 서역에 파견하여 오손을 흉노 혼야왕의 거주지로 옮기도록 설득케 하였다.
장건은 오손이 만일 동쪽으로 옮겨 혼야왕의 옛땅으로 옮기면 공주를 시집보내겠다고 제안하였다. 오손에서는 한나라와 멀리 덜어져 있어 한나라의 국력을 제대로 몰랐으며, 흉노와 가까이 가는 것을 모두 두려워했다. 한무제는 오손이 이동을 하지 않자 한나라 백성을 하서에 옮기고 무위군(武威郡)과 주천군(酒泉郡)을 두었다. 서기전 111년에는 다시 두 군에서 장액군(張掖郡)과 돈황군(敦煌郡)을 나누어 설치하고 옥문관(玉門關)과 양관(陽關)을 세웠다.
흉노는 오손과 한나라가 교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오손을 공격하려고 하자 오손왕이 놀라 한나라에 사신을 보내 공주을 시집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나라와 오손국은 혼인동맹을 맺었다. 이때가 서기전 110-105년간이다.
서기전 71년에 흉노가 고사(姑師)가 함께 오손을 공격하자, 한나라는 15만의 기병을 5갈래로 보내 흉노의 좌부와 중부를 공격하였고, 오손은 서쪽에서 흉노를 협공하였다. 오손국왕은 친히 5만의 기병을 이끌고 흉노 우부를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흉노는 더 이상 오손을 침공하지 않았다.
서기전 54-53년간에 오손은 대곤미와 소곤미로 분할되면서 국세가 약해졌다. 그후 흉노는 여러차례 오손을 공격하여 승리했다.
후한 초기에 오손과 서역의 여러나라는 흉노에 복속당하였다. 이때 오손은 궁사 10만의 대국이었다. 서기 80년에 반초(班超)가 구자(龜玆)를 공격할 때 오손과 함께 협공을 하였다. 89-105년(한나라 화제)에 오손은 다시 흉노에게 복속당하였다. 127년에 반용(班勇)이 거사(車師), 언기(焉耆)를 공략하여 서역 17국이 복속하였으나 오손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드디어 관계가 끊어졌다.
147-167(환제년간)에 선비족의 단석괴가 흥기하여 여러차례 오손을 격파하니 오손은 더우 쇠약해졌다. 위진(魏晋)시기(3세기-4세기)에 오손과 중국 왕조는 더 이상 왕래가 없다. 북위 태무제 3년(437)에 오손과 북위가 교류를 하였는데, 유연에게 여러차례 패한뒤에 파미르고원으로 이동하였다. 수나라 시기에 오손의 기록은 끊어졌다. 다만 하사크 경내에 지금도 오손부락이 있는데 바로 먼 옛날 오손의 후예들이다.
첫댓글 전에 어떤 서적을 통해보니 오손을 알란족(몽골어 : 아수드)으로 보더군요.
알란족은 고대 이란게통의 스키타이계통의 사르마티아 족중 유럽으로 들어가지 않고 카프가스산맥으로 간 민족입니다 물론 지금도 있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