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고 싶으면 퇴계의 말 머리를 보라는 말이 있다. 경상도 예안(禮安) 사람 이황(李滉)이 말을 타고 서울로 향하면 사람들은 조정이 좀 맑아졌다고 생각했고, 반대로 말의 머리가 예안을 향하면 소인배들이 권세를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유가 어떠했건 조선 전기 사족 관료는 서울서 벼슬살이를 하다가 벼슬이 떨어지면, 혹은 하기 싫으면 향리의 집으로 돌아가고, 기회가 닿으면 다시 서울로 올라가 살았다. 이런 삶의 방식은 별반 특별할 것도 없었다. 유희춘(柳希春)의 경우 역시 전라도 해남(뒤에는 담양)의 향리와 서울을 오가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서울은 벼슬살이를 위해 일시 머무르는 공간이었을 뿐이다. 서울에 세거하는 사족도 물론 있었으나 그들이 주류였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런 삶의 형태가 사라진 것은 대체로 17세기 중반부터로 생각된다. 이것은 당쟁과 관계가 있다. 당쟁은 관직을 차지하기 위한 사족 간의 전쟁이다. 숙종조의 격렬한 당쟁에서 영남의 남인들이 패배하자, 서울과 향리를 오가며 살던 사족들의 삶의 방식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곧 17세기 중반 이후, 18세기 초반의 당쟁을 거치며 관료를 많이 배출했던 호남과 영남 지방의 사족들은 관직에서 배제되는 경향이 뚜렷했던 것이다.
피비린내 나는 싸움은 이처럼 관직에서 영원히 배제되는 집단의 폭을 넓히는 한편, 관직을 독점할 수 있는 소수의 집단을 만들어내었다. 계속된 당쟁의 결과 서울과 경기도, 충청도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경화사족(京華士族)이 출현했는데, 다름 아닌 관직을 독점하는 사족 가문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서울에 세거(世居)하는 축들이야말로 진정한 경화사족들이었다. 조선시대의 관직이란 곧 국가권력을 뜻했으니, 권력투쟁에서 살아남은 서울의 경화사족은 사실상 국가를 소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이들 서울의 소수 경화사족 가문은 자기 집안의 겸인을 중앙관서의 서리로 박아놓고 국가행정을 장악했고, 한편으로 관찰사와 군수·현감 따위의 지방관직을 거치며 부를 축적했다. 물론 뇌물을 받고 지방관직을 팔기도 하였다. 대다수 서울의 경화사족에게 국가의 이익 혹은 운명과 지방 백성의 삶은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결코 아니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과 가문의 권력독점과 영원한 번영이었을 뿐이다.
서울은 사실상 경화사족을 위한 공간이었다. 19세기가 되면 왕과 왕실도 경화세족 권력을 지지하는 장치일 뿐이었다. 좀 과격하게 말한다면, 관청의 서리도, 별감도, 군사도, 궁녀도, 시전상인(市廛商人)까지도 경화사족과 어떤 형태로든 연결되어, 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었다. 경화사족이 곧 서울이고, 서울이 곧 경화사족이었던 것이다. 경화사족은 달리 벌열(閥閱)로 불린다. 벌열이란 양반 중 계속 정권에 참여한 세력으로 그들의 권력 독점이 조선이란 국가의 쇠락으로 이어졌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서울은 20세기 후반부터 급격히 팽창하였다. 서울 바깥은 의미 없는 ‘지방’이 되었다. 서울에는 여전히 경화사족이 똬리를 틀고 있다. 서울 집중, 수도권 집중이 야기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가, 생뚱맞게 김포시를 서울에 끌어다 붙이려는 자들의 배후에 경화사족, 아니 벌열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강명관 인문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