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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주님...
이 종에게 괴로움이 있나이다.
주님께 아뢰오니 주여 이 종의 간구를 들어주소서.
나의 죄악이 나를 둘러 진치며 나를 넘어뜨리오니 오직 주의 말씀으로 나를 구하소서.
주의 말씀이 나의 피할 곳이 되게 하시고 그곳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강을 누리게 하소서.
주님...
오늘도 하루살이의 하루를 시작하오니 나를 지배하려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시고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나의 소망이 오직 주께만 있게 하소서.
주님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케 하소서.
내 영혼이 주 안에서 쉬게 하소서.
내 안에 새 영과 새 마음을 두사 주의 영으로 가득 채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시 34:1-10
제목 : 주의 선하심(영생)을 맛본 자가 피하는 자리, 주의 품.
1.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 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 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5. 그들이 주를 앙망하고 광채를 내었으니 그들의 얼굴은 부끄럽지 아니하리로다.
6.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의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7. 여호와의 천사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 치고 그들을 건지시는도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9.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10.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 나의 묵상
이 시는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라고 표제어에 표기되어 있다.
이 시는 삼상 21장을 전후를 배경으로 하여 기록되었다.
사울이 왕으로 있는 이스라엘은 블레셋과의 전쟁을 치르기 위하여 엘라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다.
그 때 다윗의 아버지 이새는 자신의 아들 3명이 전쟁터에 나가서 싸우고 있으므로 안부가 궁금하여 막내 다윗을 보내 안부를 살펴보고 오라고 하였다.
그런데 전쟁을 하려고 진 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보고 두려워하여 어떤 이들은 도망을 가는 자들도 생겨났다.
(삼상 17:24)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하며
한편 다윗은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는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에 대하여 의분이 일었다.
그래서 골리앗을 대하여 자신이 싸우겠다고 말한다.
그 말은 사울 왕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사울은 다윗을 부른다.
비록 다윗은 어리지만 그보다 더 어려서부터 양을 치면서 곰이나 사자를 물리쳤던 이야기를 하면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할례 받지 않은 골리앗이야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말한다.
사울은 다윗에게 자신의 군복과 갑옷을 주어 입히게 하지만, 그것을 입어보고는 동작이 자유롭지 못함을 보고 벗어버린다.
그리고 손에 막대기 하나와 시내에서 매끄러운 돌 다섯 개를 골라서 물매를 가지고 골리앗 앞으로 나아간다.
그 때 골리앗은 조그만 다윗이 싸우러 나오는 것을 보고 그를 업신여기면서 이렇게 말한다.
(삼상 17:44) 그 블레셋 사람이 또 다윗에게 이르되 내게로 오라. 내가 네 살을 공중의 새들과 들짐승들에게 주리라 하는지라.
그러자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한다.
(45-47)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골리앗이 다윗을 향하여 다가올 때 다윗도 골리앗을 향하여 빠르게 달리면서 물매에 있는 돌을 던져 그의 이마에 정확하게 명중시킨다.
그 돌에 맞은 골리앗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윗은 그에게로 달려가서 자기의 발로 그를 밟고 골리앗의 칼로 그의 목을 베어 죽였다.
다윗이 비록 어리지만 사울은 다윗을 군대의 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어느 누구하나 불평하는 사람이 없이 합당히 여겼으며 사울의 신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올 때 여인들이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한다.
이 노랫소리를 사울이 듣고 그의 분노가 하늘을 찌른다.
애송이 같은 다윗이지만 사람들이 그를 칭송하며 그를 자기보다 높이는 것을 보고 나중에 다윗이 얻을 것은 나라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사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다윗을 죽이려고 온갖 술수를 다 꾀한다.
심지어 다윗을 그의 사위를 삼아서 가까이 두었다가 해하려고까지 한다.
그러나 언약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친히 지키고 보호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다윗을 대하여 이렇게 말씀한다.
(삼상 18:14) 다윗이 그의 모든 일을 지혜롭게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시니라.
(28)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계심을 사울이 보고 알았고 사울의 딸 미갈도 그를 사랑하므로
이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을 두려워하되 크게 두려워하여 그의 평생동안 다윗의 대적이 된다.
그래서 사울은 틈만 나면 다윗을 죽이려고 하지만, 다윗은 그를 죽이려는 사울을 대적하지 않는다.
그저 그의 칼을 피하여 도망간다.
그렇게 도망을 간 곳이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블레셋 가드였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곳에 들어갔기 때문에 아무도 몰라볼 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가드 왕 아기스에게 말하기를 “이는 사람들이 노래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했던 그 다윗입니다.” 라고 하자 자신의 정체가 드러난 것을 알고 다윗은 미친 체 하며 대문짝을 긁적이면서 침을 질질 흘렸다.
이를 본 아기스 왕은 미친 사람이 우리에게 부족하여 이 미친 자를 더 데리고 왔느냐라고 하면서 다윗을 쫓아버렸다.
삼상 21장에 보면 가드 왕의 이름이 아기스로 나오는데 오늘 본문의 표제어에는 아비멜렉으로 나온다.
아비멜렉은 가드 왕의 이름이 아니라 당시 왕들의 호칭이었다.
애굽 왕의 호칭을 ‘바로’라고 하는 것처럼 블레셋의 도시국가였던 가드와 같은 나라들 역시 왕들의 호칭이 ‘아비멜렉’으로써 이 뜻은 ‘왕의 아버지’이다.
한편 가드 왕에게 쫓겨난 다윗은 아둘람 굴로 피한다.
그곳에 환난 당한 모든 자, 빚진 모든 자,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 역시 그에게로 모였다.
아둘람은 ‘피난처’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비록 그의 육신은 피난처인 아둘람 굴에 피하였지만, 그의 영혼은 온전한 피난처이신 하나님의 품에 피하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8)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는 여호와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시는 것을 날마다 경험하고 알기에 신실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날마다 맛보았다.
그래서 주의 선하심을 맛보아 아는 자들은 주님께로 피하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맛보고 누려야 할 것은 다름 아니라 영생이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주시기로 약속하신 것이다.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심지어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기까지 하신 것보다 더 큰 선하심이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되심 그리고 부활과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신 것까지 계시로 다 보았던 다윗은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육신적 물질적으로 좀 부족하여도 그것이 나에게 영생을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선하심이라면 우리는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을 거역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다윗은 주의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권고한다.
(9-10) 너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오늘 우리가 주님을 경외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자가 먹을 것이 없어서 굶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다.
들에 나가면 어디든 사자의 먹잇감은 널려 있다.
특히 힘이 세고 날렵한 젊은 사자들이야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잡아서 먹고 배를 불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젊은 사자가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릴지라도 주를 찾고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굶주리거나 핍절하지 않고 항상 풍족함을 누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이는 물질적 육신적으로는 사실 이 세상, 만물 안의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물 안의 세상은 무상성에 지배받기 때문에 항상 부요하며 풍족할 수 없다.
있던 것도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이 바로 이 만물 안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바고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지 않은가?
불과 얼마전까지만 해도 천하를 호령하던 대통령이나 그 대통령 옆에서 한 나라를 떡 주무르듯 하던 비선 실세들이 하루 아침에 몰락하여 철창 신세를 면키 어렵게 된 것을 보면 육신의 세상은 완전한 것이 없다.
그렇지만, 비록 이 땅에 살더라도 부요할 수 있다.
이 부요함은 결코 육신적 물질적 부요함이 아니라 마음의 부요함이요 영적 부요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부요함이란 결코 살이 쪄서 완악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인하여 심령이 부요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마 5:3절에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는데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하였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세상적 욕심, 땅의 것인 물질이나 명예 그리고 권력이나 자식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그런 가난한 마음에 예수로 채울 때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인 것이다.
다윗은 아둘람을 하나님 아버지의 품으로 여겼다.
그래서 그곳에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할 때 임하는 쉐키나의 영광을 보게 된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시는 하나님.
그는 하나님의 이러한 선하심을 날마다 맛보며 하나님이 그토록 주시기 원하시는 영생을 누렸던 것이다.
나는 지난 두 주에 걸쳐서 요 13:21-30절을 본문으로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가 거할 곳’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주께서 사랑하시는 자, 곧 요한이 주의 품에 누워있다는 것은 상징이다.
요한만 주님의 사랑을 받아서 주님의 품을 독차지 할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모든 이들이 거해야 할 곳이 바로 주님의 품이다.
그러나 주님을 팔려고 마음먹은 가룟 유다는 주님의 품에 거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열심당원으로써 예수님을 이용하여 그의 야망을 이루려는 탐욕이 가득한 자였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모아놓고 떡을 나누어 주고, 잔을 나누어 마시게 하셨다.
주님의 모습에는 비장함이 엿보였다.
제자들은 그동안 주님의 행동을 보면서 그들의 야망을 넉넉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을 먹었다.
그것은 질병을 고치고 귀신도 쫓아내시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가난하고 굶주린 자들을 넉넉히 먹이시는 모습이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도 남을 만 하였다.
이런 생각은 12명의 제자들의 공통된 관심사였을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성만찬을 하는 자리에서 예수님의 거사를 꿈꾸었을 것이다.
이제 내가 로마를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킬 것이라는 뭐 그런 야망어린 말을 기대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제자들의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었다.
이제 나는 죽어야 한다.
내일이면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내가 주는 이 떡은 나의 살이고, 이 잔은 내 피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는 거사의 말이 아니라 오히려 죽어야 한다는 말에 제자들, 특히 열심당원이었던 가룟 유다의 마음은 한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래서 그는 나가서 대제사장들에게 예수를 판 것이다.
한편 예수님이 심문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제자들은 다 도망갔지만, 그 이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으므로 자신들의 죄와 잘못을 회개하고 주님을 용납하였다.
그래서 그들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주를 위하여 순교할 정도로 사도의 직분을 감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팔고 나서 십자가에 죽으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는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후회하였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후회는 하였지만 회개하지는 않았다.
회개란 나의 죄를 주님께 자백하고 주의 보혈로 씻음을 받으면 이제 이런 나를 용서해 주신 주님을 용납하는 것이다.
그런데 가룟 유다는 그런 주님을 용납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길로 가서 자살하고 말았다.
그는 회개하여 주님을 용납할 수 있는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은 바로 용납이다.
그들의 죄를 씻어준다는 것은 곧 그들을 용납하신 것이다.
이런 주님을 우리 또한 용납해야만 한다.
제자들은 비록 주님을 배반하고 다 도망갔을지언정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은 이후로 자신들의 죄를 자백하고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해 주신 주님을 용납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주님의 품에 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자신의 뜻과 목적을 가차없이 무너뜨린 주님을 용납하지 못하고 그 기회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내 안에는 가룟 유다가 들어 있다.
정말 나의 모습을 보면 나도 나를 용납할 수 없는 악질 죄인이요 죄인 중의 괴수이다.
날마다 죄를 먹고 마시는 나는 죄가 나의 친구였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런 나를 주님은 십자가에 죽기까지 사랑하심으로 나를 용납하셨고 지금도 나의 발을 씻어 주신다.
그것도 꿇어앉으시고 허리를 숙여 나보다 더 낮은 자리에서 종의 모습으로 나를 섬겨주신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나는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납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주님을 용납하지 못한다.
내 뜻과 내 목적을 이루어주지 않으시는 주님을 용납하지 못하는 내 안에 가룟 유다가 살아서 꿈틀거린다.
이처럼 나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께 연합하지 못한 자였다.
날 위하여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으니까 이제 나는 천국에 가는 것은 맡아논 당상이라고 생각하면서 이를 천국행 freepass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믿음도 신앙도 아니다.
믿음이란 주님의 메시야적 행위인 구속사건에 나도 함께 들어가 주님과 연합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진정한 믿음이다.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날마다 죽는다.
나의 옛 사람을 오늘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죄에 대하여 둔하고 말씀에 대하여 민감한 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주님과 함께 무덤에 장사된다.
지금도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이 줄지어 있다.
생각 같아서는 이것들을 한꺼번에 다 해결해 버리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그러나 나보다 주님이 나를 더 잘 아시기에 나에게 주신 것임을 믿는다.
이런 무덤의 상황에서 오늘도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하기 위하여 나아간다.
그곳이 나의 진정한 피난처요 주의 사랑하시는 자로써 내가 거할 곳인 주님의 품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걱정하고 염려한다고 안 될 것이 되고, 될 것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염려는 내일이 하도록 맡기고 오직 주님이 나에게 주시는 참된 평안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내가 할 일은 주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주께서 내게 필요한 것들을 더하여 주실 것을 믿는다.
(마 6:30-34)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완전한 자리, 주님의 품에 거할 때 부족한 물질, 연약함을 초월하여 넉넉히 고통을 삼키게 된다.
그 자리가 바로 생명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고후 5:4b)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 묵상 후 기도
주님...
염려와 근심으로 가득찼던 나의 심령을 주의 말씀을 깨끗이 쓸어 청소해주시고 주의 성령이 거하시는 전으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욕심과 탐욕, 내 뜻과 나의 목적을 이루어주시지 않고 전혀 반대로만 나를 이끄시는 주님을 용납하지 못하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했던 나는 다름 아닌 가룟 유다였나이다.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겉으로는 사람들에게 인정도 받고 칭찬도 받았지만, 나는 여로보암이 걸어갔던 그 길을 걸으며 유사 신앙인으로 살았나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나를 주님이 지신 십자가의 보혈로 용납해 주셨나이다.
이제 주님의 그 크신 인자하심, 그 사랑을 깨닫나이다.
주님을 만홀히 여기며 주님을 속여왔던 나의 지난날의 잘못을 회개하고 자백하나이다.
이미 나를 용납하신 주님을 이 시간 내 안에 용납합니다.
주님이 나의 전부가 되어주소서.
내 안에 주의 향기로 가득 채워주소서.
내 입이 열리면 주의 복음의 향기가 널리널리 퍼져나가게 하소서.
오늘도 주님과 함께 말씀으로 교제와 사귐을 갖는 이 자리가 바로 주의 품이요 영생의 자리이며 안식과 평강이 임하는 자리니이다.
주님, 이 종을 품어주시고 그곳에서 온전히 만족하게 하소서.
주의 영광이 임하는 그 자리가 나의 거할 곳입니다.
사랑합니다 주님...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