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잠언 11:23-31
야고보서 2:14-26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가끔 혼선을 일으킬 때가 있습니다. 특히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읽을 때 그렇습니다. 로마서에서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였는데,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로마서에서 는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믿음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야고보서에서 는 행함 때문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로마서 연구를 통하여 믿음을 강조하다 보니 행함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그 가치가 떨어진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로마서 뒷부분은 행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강조하고 있는 믿음은 율법과 대조된 것으로 복음에 대한 확신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해도 할 수 없는 것은 죄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므로 의로운 자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하여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을 때 비로소 율법을 지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율법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을 바르게 지키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해하고 바른 관계를 갖게 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은 의로운 삶으로 바뀔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서 12장에서 믿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믿음과 행함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행함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바른 행함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길과 진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비로소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바르게 사는 것이고, 어디로 가야 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믿음이 없는 행함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한 채 사막을 헤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헤매어도 결국 그 사막을 벗어나지 못한 채 죽고 말게 되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동시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사막에 어디에 오아시스가 있는지 알면서도 그곳을 향해 가지 않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거기에는 나의 공로가 조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를 늘 감사하면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찾은 바른 길을 열심히 걸어가는 일만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은 삶의 목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를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설교 결론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의 목표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며, 자기만 구원받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 되었고, 따라서 나만을 위하여 살던 삶에서 벗어나 이제는 그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기 위한 삶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언제나 자기 만족과 자기 구원에만 집중되어 있습니다.
나의 믿음 자라게 해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지만, 믿음은 행함을 통해서 자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행할 때 우리의 믿음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가 깨어있는 동안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활동할 때 건강하게 자라는 것처럼, 우리의 신앙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일할 때 건강하게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지난 일주일의 삶이 하나님의 뜻을 따른 삶이었음을 감사하면서 앞으로 맞는 일주일도 그 뜻을 더욱 충실하게 따라 살겠다는 약속을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 모두에게 똑같이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께서 각각 다른 은사를 주셔서 그 은사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자의 은사를 살펴서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할 것입니다.
실천적인 믿음의 사람으로 이윤재 장로님이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이윤재 장로님은 1929년 안동교회에서 장로가 되신 분입니다. 그는 일찍이 예수를 믿었고, 마산 창신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그 지역 청년면려회장과 유년주일학교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그 때 김우현 목사님도 창신학교 교사로 함께 일하면서 서로 가까이 지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1919년 평안북도 영변학교(寧邊學校)에서 교원으로 재직 중 3.1 독립 운동이 일어나자, 이 지방에서 앞장이 되어 독립 운동을 일으키다가 일제 관헌에 의해 동지들과 검거, 평양 감옥에서 이후 3년간 옥중 생활을 하였습니다. 출옥후 중국 북경대학에 유학하여 3년간 공부를 마치고 돌아와 서울에 자리잡게 되면서 안동교회에 나오기 시작하였고, 시온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으로 봉사하였습니다. 이윤재 장로님은 한글 학자로 한글에 미쳐서 산 분이었습니다.
"이 윤재 선생은 한글 보급을 위한 사람이요, 한글을 통해 조선 민족 정신을 선전한 투사이었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는 한글 선전 보급을 위해 미친 분이었다.
한글 맞춤법 통일안이 발표되기 전부터 <동광> 잡지에 신철자를 쓰게 권한 것도 그였으며, <동아일보>의 한글 질의란을 도맡아 글을 썼고,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의 종교 단체의 잡지 편집자를 경향을 물론하고 찾아가서 한글 새 철자법 쓰기를 권유했고, 출판업자를 찾아다니면서 새 철자 쓰기를 권유하여서, 당시에 한글 하면 으레 이 윤재 선생이었고, 문학 전집에 '한글 교정 이 윤재'의 일곱 자를 책 앞에 내세워야 권위가 섰던 것이다. 그는 비록 많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이 나라의 한글 문화 발전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석린 "<한글>지와 이 윤재 선생"에서, <나라사랑> 제13집 63쪽.
1930년 초반에는 한글 강습회 순회 강연을 위해 평양·선천·정주·황주 등지에 수차례 여행을 하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렵 우리 안동교회는 한글 학자들의 집합소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 덕분에 안동교회는 일찍이 한글 철자법을 따라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1930년대 주보를 보면 아래아자를 쓴 글씨가 전혀 없습니다. 전에는 무심히 보았는데 그것이 바로 이윤재 장로의 한글 운동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의 강직함을 나타내는 여러 가지 일화가 있습니다. 그의 셋째 따님 이영애 선생이 쓴 글에 보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괴벽에 가까울이 만큼 철저한 그 예의 하나는, 화동집에서 연희 전문학교로 출근하시는데 단 5전의 전차 삯을 왜놈에게 보태 주기 싫으셔서 걸어다니셨다. 그런데 안국동에서 종로로 빠져 곧바로 서대문으로 가시면 될 것을 안 보려 하면 할수록 곁눈에 들어오는 조선 총독부의 모습이 영상으로라도 떠올라, 일부러 종로에서 남대문으로 빠져 봉래동을 거쳐 아현 고개를 넘어 학교로 가셨다."
또 노산 이은상 선생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가 북경에 가서 유학하는 동안 그의 부모를 보호하여 준 어떤 유지의 아들이 서울에서 결혼식을 거행하게 되었었는데, 하필이면 진고개(지금의 충무로, 그 때 일본인들만이 살던 본정) 호텔에서 거행하게 된 것이었다. 의를 지키는 선생으로서 그 예식에 참례해야 하겠으나 일평생 '왜놈들의 거리'라고 해서 맹세코 자기 발걸음을 들여놓아 본 일이 없는 그러한 진고개(혼마찌)라, 또한 차마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지금 중앙 우체국 앞 진고개로 들어가는 어귀에서 결혼식을 하는 2시부터 잔치를 파하고 모두들 돌아 나오는 시간까지 거의 두서너 시간 동안을 길장승처럼 서 있었던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무엇인지 충격을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1937년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일경에 검속, 이듬해 여름까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겪었고, 1942년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최 현배·김 윤경 선생 등과 함께 10월 1일 검거되어 함경남도 홍원 경찰서에 구금, 잔혹한 고문과 악형을 받았으며, 이듬해 9월 12일, 다시 함흥 지방법원 예심으로 회부되었다가 12월 8일 새벽 5시, 조국의 영광이 회복되는 날을 보지 못한 채 차디찬 감방에서 옥사하였습니다. 이런 분이 안동교회 장로님이셨다는 사실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보여주신 분입니다.
또 한분 유억겸 집사님은 한말 개화 사상의 거두 구당 유길준 선생의 둘째 아드님으로 연희 전문학교의 학감으로 연희 발전에 지대한 공을 끼친 분입니다. 연희 전문학교는 이 분이 있음으로 해서 사실상 그 기틀을 잡았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해방 후 연희 대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있다가 미군정의 문교부장이 되어 해방된 조국의 교육의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해 학제 개편, 교재 편찬 등 실로 경이적인 일을 감당하여 오늘의 우리 교육제도의 기틀을 마련해 놓았던 것입니다. 아깝게도 한참 일할 나이인 53세에 뇌일혈로 쓰러져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선생의 죽마고우이며 시인인 변영로(卞榮魯) 선생은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습니다.
"군의 부음을 듣고 가회동 막바지로 달려갔다. 상가의 조객들은 줄을 있고 있으나 어느 의미로는 쓸쓸하기 짝이 없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시탄이 없어서 방안은 냉골이요 쌀이 부족하여 밤새움하는 사람들에게 밤참을 내기 어려운 상태였다. 이 어인 淸貧인고! 이 어인 廉潔이었던고! 속담에 사람은 관뚜겅을 덮어놓고 평을 하라는 말도 있지만 그것이야말로 고인에게 적용될 말이었다. 걸핏하면 吏道니 부패척결이니 하지만 부패할 대로 부패한 이 판국에 모든 것을 초월하여 이제는 속절없이 고인이 된 유군 만큼 국가 사회에 봉사하는 한결같은 정신으로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장관의 집에 땔감이 없어 냉골이고 쌀이 부족해 밤참을 낼 수 없을 정도였다면 그의 청빈한 생활이 어떤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가 월급을 받지 못해 그런 것이 아니라 받은 돈으로 남을 도왔기 때문입니다. 학감 시절 월급을 200원 정도 받으셨는데, 당시 그만한 월급이면 꽤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 돈을 모두 가난한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실감이 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이런 분들이 바로 행동하는 믿음을 가졌던 참으로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이 아니겠습니까?
이 분들은 바로 사도 바울과 같이 열정적 신앙으로 그 삶을 살다가 가신 분들이 라고 믿습니다.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위대 한 일꾼들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일하도록 부름 받고 있습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부름을 따라 열심히 헌신하고 온힘을 다해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일을 감 당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각각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고 그 뜻을 받들어 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 다. 계속하여 움직이고 바른 삶을 이룩해 갈 때 여러분의 믿음은 생동하는 믿음이 되어 마침내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에게 보여 주시는 오늘의 길이 무엇 인지를 발견하시면서 그 부름에 충성을 다해 따르며 헌신하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