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 논거 대부분이 풍납토성이 백제의 한성이다라는 내용에 관한 것임을 유념해주십시요....
1.위치가 부적합하다.
침수 지대이자 아차산에서 감시가 가능한 곳으로 왕도를 이러한 곳에 정할 이유가 없다.
==>침수 지대는 제가 잘 모르겠지만 감시를 운운하기 위해서는 왕도 바로 건너편이 적국 영토라는 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 일대가 다 백제 땅이었다면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 신경쓸 이유가 없지요.
### 제가 잘 모르겠습니다만 마한왕의 허락을 얻어 땅의 일부를 얻었다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그 일대가 모두 백제의 땅으로 볼 수는 없는 것 같습니다.....
2. 규모가 너무 작다.
고대의 왕도라 하면 최소한 300만평 이상은 되어야 하지만 이곳은 겨우 22만평 정도이며 이러한 규모의 성은 한강권에 여러곳에 산재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공주가 300만평입니다. 아래 제가 정리한 글에도 정리되어 있지만 백제가 가장 쇠락한 시기에 왕성이 300만평입니다. 송파구 강동구 전체가 왕성이라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송파 강동 전지역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지정하라....^^
==>왕도는 반드시 주민구역에 대한 방어선을 두어야 할 의무는 없습니다. 신전이나 왕성, 주요 관청에 대한 방벽을 구축해도 큰 무리는 없습니다. 그때의 방벽을 설정하는 이유는 외부 세력에 대해 주민들과 주민들이 이용하는 토지구역 내의 시설물들을 보호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때에나 가능한데 그것은 상공업이 도시 주변에서 발달했을 때나 가능한 것으로 초기 수도에서 거대 규모의 왕성이 처음부터 출현한다는 발상은 말이 안됩니다. 그리고 제가 알기로는 풍납토성보다 몽촌토성이 더 작은 것으로 알고 있고 1~3세기 무렵에 풍납토성보다 더 큰 토성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리고 초기 신라의 왕도 역시도 현재 경주시 구역에서 여러개의 소형 성을 쌓아놓고 이주하는 형태를 띄었습니다. 오늘날 알고 있는 천년고도 경주의 모습은 통일신라기에 조영된 '제도'로서의 경주 이미지입니다. 고대제국 고구려조차도 평양성 천도 당시에 바로 장안성 축조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학궁성과 대성산성이라는 구역을 따로 설정했습니다. 백제에게서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닌지요?
### 풍납토성을 백제 한성이라 주장하신 분들에 대한 반론이며 원문 댓글에 써놓았습니다만 중국 은나라에 풍납토성보다 대략 3배 더 큰 토성이 있었습니다....
3. 유사시에 항전 할 수 있는 산성과 연계되어 있지 않아 왕도가 될 수 없다.
-> 배산임수가 가장 중요한 풍수지리설의 하나인데...풍납동이나 성내동 하다못해 길동, 암사동 방향으로 가봐도 산다운 산은 없습니다.
==>이 당시는 풍수에 대한 개념정립이 제대로 일어난 때는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의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항전 할 수 있는 산성과 연계가 되어 있지 않다고 했는데 이런 식의 성 구조는 중국 왕도에 흔한 경우입니다. 오히려 이것을 군사목적상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성이라는 가정하에 반론이 제기된 것이라면 방어입지에 불리한 평지에 왜 성을 쌓은 것인지에 대한 의문부터 전제되어야 합니다.
### 풍수에 관한 내용은 명칭여부는 별론하고 아래 내용을 보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강을 앞에 두고 산에 인접하여 집을 짓듯이 왕궁역시 한강에 인접한 것이 아니라 산에 인접하여 왕궁을 짓지 않았을까 하는 내용입니다.....
4. 왕도는 거대한 종교 시설이 있어야 함에도 이러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백제의 모든 왕성 지역은 이와 동일한 신성라인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방향 쪽으로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면 이러한 종교적 유적지가 일자로 배치되어 있어야 합니다. 정방향 네군데니깐 정확히는 십자 모양이군요. 여기서 검단이라는 명칭이 붙은 것이 가장 큰 키포인트입니다. 단군->제사장, 검단-> 제사장소-> 왕국으로 변화하면서 제정일치의 사회..즉 백제 초기 시대가 가장 강력한 제정일치 (왕권보다는 신정일치의 사회겠죠?)
5. 거대한 건물지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왕궁의 건물과 관련된 거대한 초석과 건물지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 당시 함께 힘을 겨루었던 고구려의 안학궁은 건물지 면적 만도 10만평이 넘는다.
==>서기 1~3세기의 편년을 갖는 초기 국가와 고대제국의 형태를 완성한 고구려 전성시기의 궁터를 비교하다니 어불성설입니다.
### 한성 백제 얘기입니다.....하지만 부여의 후손으로 고구려에서 나왔다면 적어도 왕궁의 형태에 대한 관념이 존재하였을 것이고, 풍납토성을 축조할 정도라면, 단순한 건물지와는 다른 왕궁이 존재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6. 왕도는 복잡한 구조로서 여러 겹의 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풍납토성과 같은 단일 구조의 성은 왕도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초기국가의 왕도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것 같습니다. 풍납토성의 추정 축조 인원이 연인원 100만이라는 말 때문에 생긴 '고대국가' 백제라는 환영 때문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겟습니다. 위의 경우는 성의 축조 목적 자체가 다양한 전투상황에 대비하기 위한 목적에서 지어진 것이라는 전제가 붙습니다만 초기국가 성립단계의 도시 구조는 전투의 목적이 아니라 지배층의 거주지와 신성지역에 대한 보호, 및 금지(禁地), 경계의 의미를 가진다는 점을 간과하는 듯 합니다.
###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왜 하필 침수지에 왕궁을 마련하였을까?? 하는 의문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7. 출토 유물이 너무 왜소하고 분포 면적도 좁고 고급적인 유적과 유물이 풍납 토성에는 출토되지 않고 있다. -> 두가지로 볼수 있는데요...하나는 백제는 전방후원분 (묘제, 금성분)을 초기 백제 시대에 사용한 바 왕성 주위에 반드시 있어야 하고 두번째 이 전방후원분을 중심으로 4대 수호 동물(주작, 현무, 백호, 청룡 형태)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조형물이 있어야 합니다.
==>출토유물이 왜소하고 분포 면적이 좁다..? 저는 한반도에서 단일 면적 내에 가장 많은 유물이 나온 지역은 경주를 제외하고 풍납토성이 그 2번째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만,,전체 양도 왕성으로 추정할 만큼 출토량이 많았다고 들었습니다. 최초 발굴한 시공사가 공사 중단될까 덮어서 훼손시켰다는 걸 제외하고서도 말입니다.
### 하단에 도요지 관련 부분에 적도록 하겠습니다....또한 풍납토성의 유물은 깨어지지않고 존재하는 완제품이 많은데 이것이 바로 침수당해 퇴적되었다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8. 풍납토성은 포위당하면 퇴로가 없다.
전채의 도시 구조와 인근 성들의 배치의 연계성에서 보면 중심이 되지 못하고 주변의 위성에 해당되는 군사성이다
==>평지 지형에 군사 위성도시를 건설하는 멍청이도 있던가요? 보통은 교통 결절지나 방어입지에 유리한 곳에 군사위성도시를 건설하지 뻥 뚤린 지역에 군사도시를 건설하진 않습니다. 더구나 1번 같은 이유로 위의 반론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 백제 한성을 전제로 한 내용입니다....풍납토성이 한성을 방어하기 위한 사성이었다는 내용인 것 같습니다......또한 삼성동토성, 몽촌토성, 풍납동토성, 암사동토성을 모두 고구려군에 대비하고, 한성을 보호하기 위한 방어용 토성들로 보고 있는 주장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9. 풍납동에서 토기와 기와등의 출토가 많은 것은 예로부터 도요지였기 때문이다...한강의 범람으로 퇴적한 질좋은 흙들과 둔촌동 다양한 색깔의 흙들로 인하여 풍납동 일대는 도요지였습니다.... 07.08.25 17:36
씨~익!
맞아요. 07.08.26 18:53
==>도요지였다는 근거부터 제시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도요지였다고 반론자가 가정할 정도로 많은 토기와 기와유적이 나왔다는 것은 근방에 그 수요가 많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는 물류 교통이나 상업이 발달하지 않은 시기였고 산업의 분업이 활발하지 않던 시기이기 때문에 질량이 많이 나가는 물건들은 주로 현지에서 생산해서 소모하곤 했습니다. 특히 큰 '상품가치'를 가지지 못하는 토기나 기와는 더합니다. 그리고 반론을 제기하시던 분의 관점에서의 도요지 이미지라면 만드는 족족 수요지로 공급되어 도요지 자체에서 출토되는 기와나 토기들은 거의 없어야 합니다. 특히 기와들은 건물지에서 나왔으니 도요지 운운하는 건 말 그대로 뭘 몰라서 하는 얘깁니다.
### 마을명 유래에서 나온 내용입니다....조선시대에 도요지였다는 내용이 분명히 있고, 근래까지도 도요지였습니다.... 이 내용으로 백제시대에도 도요지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뭐라 말 할 수 없겠지만 풍납동이 예로부터 도요지인 것만큼은 사실입니다.....
10. 대형 쓰레기장이나 말머리뼈 등이 발견된 것은 제사용이 아닌 군사시설이라는 것을 반증한다.... 전장에 필수인 몇마리 없는 말의 머리를 잘라 제사를 지내는 그런 우를 범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군사시설이었기에 전쟁중 죽었거나 나이를 먹어 죽은 말의 고기를 나누어 먹고서 버려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됩니다.... 07.08.27 01:53
씨~익!
이곳이 왕성이라칩시다. 조금만 나가면 왕성밖인데, 굳이 왕성안에다가 쓰레기 버리고 왕성을 더럽히는 사람들이 백제인이었을까요? 07.08.26 18:57
===>제사용으로 말머리 바치는 경우는 허다하게 많습니다. 상(商)에서는 인신공양도 하는데 말쯤이야.. 먹고 버리는 뻐였다면 왜 머리가 집단적으로 발견되고 말 뼈의 나머지 부분이 없는지에 대한 생각은 왜 못할까요?
### 옛날엔 가장 우선적인 것이 군사와 농사 그리고 치수였습니다...말의 군사적인 면을 강조한 내용입니다...역으로 생각한다면 제사지내고 난 후에 나머지 말뼈는 어떻게 하였는지도 같은 질문이 됩니다....발표된 내용에 따르면 왕궁중심부에 저장창고, 대형쓰레기장이 있었다는 내용이 이상하다는 것입니다....측면도, 외각도 아닌 중심부에 이런것을 두었나하는 내용입니다.....
11. 경당의 유구가 제사용 유구라 하더라도 이는 왕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나 그 후로도 백성들에게 역시 필요하고 항상 존재하는 것들이다....지금도 어디에서나 무당을 찾아 볼 수가 있고,, 특히나 옛날에, 더군다나 군대에선 그 의존도가 더욱 높다는 것은 모두들 아시는 바와 같습니다.... 07.08.25 17:41
씨~익!
맞아요. 심청이가 임당수?에 빠진것이 국가에서 한 것인가요? 아님 유력한 해상세력에 의한 것인가요? 전국적으로 토템이나 무속은 존재하였던 것이고, 세력있는 무리는 국가와는 별개로 언제든지 자신의 길흉화복을 위해 제사를 지냈을 것입니다. 07.08.26 19:04
==>조선시대의 천대받던 민간 무당을 생각하시나보군요. 고대의 무당은 기본적으로 사회 지도자층이기 때문에 권력에 어떤 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습니다. 민간을 위해 종사하는게 아니라 민간을 의식적으로 지배하고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일례로 아테네 초기 시민들은 각 가족 수호신 종교의 제사장들이 시민의 시초였습니다.
### 이 내용이 아니라 말씀하신대로 제사장이나 관련자들은 지도자급으로 그당시 군사작전시에도 무척 필요한 존재였다는 것을 말씀드리고픈 것입니다....즉, 풍납토성이 사성이라는 측면에서 쓰여진 글입니다....
12. 왕궁으로 비상시킨 대부라 쓰여진 토기는 오히려 왕궁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한다.... 백제에는 대부라는 관직이 없으며 글씨체가 너무 조악하여(사학자님들의 표현 그대로 입니다.) 고관들이 사용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이 토기가 왕궁에서 사용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오히려 백제를 폄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듭니다....고구려 유리왕은 황조가를 읊고 있는데....대백제왕궁의 토기에 성의없이 쓰여진 大夫와 井자는 서민이 쓸만한 너무 서민적인 글이 아닌지요?? 조선시대의 서민들이 썼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07.08.28 00:22
씨~익!
백제인들은 검소박하였지만 백제시대 향로, 귀걸이등을 보면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합니다. 또 백제인들은 해상세력으로 쉽게 말해 장사를 잘해 돈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대부라는 글씨가 다비님 말씀처럼 너무나도 조악하여 나중에 진품명품에 나올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이상 그런 골동품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07.08.26 19:12
==>백제가 관등, 복색을 제정한 것은 3세기 중엽 8대 고이왕 때부터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고이왕 때 관등, 복색이 완성된게 아니라 고이왕 때부터 관등과 복색 관념이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개선되었을 것이라는 것이 현 학계의 정설입니다. 물론 고이왕 때 관등, 복생 제정이 완료되었다고 하더라도 풍납토성의 축조시기가 1~3세기 사이로 추정되는 만큼 위의 대부라고 쓰여진 토기가 어느 시대에 만들어 진 것이라는 전제 없이는 위와 같은 추론의 반론은 터무니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관등, 복색 제정 이후의 것인지, 이전의 것인지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고조선에서도 대부라는 관직의 사용 흔적이 보이는 것으로 봐서 만주에서 이주한 백제가 대부라는 관직명을 사용하지 않았을 개연성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글자의 조악도가 가치판단의 대상이 되는 건 처음 듣는 일이군요. 폄훼라니..
### 말씀하신대로 대부라는 관직은 관등제정 이전인지 이후인지를 알 수 없기때문에 풍납토성이 백제의 왕성이라는 논거로 사용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13. 풍납동은 한강변 수해지인데 민가가 물에 잠겼다는 글은 있으나 왕궁이 피해를 입었다는 글을 보진 못했다....따라서 왕궁은 한강변 풍납토성 내에 위치하진 않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07.08.25 17:58
==>침수에 대해서는 제가 풍납토성의 지질조사 결과를 잘 몰라 답변하기 어렵습니다만 성 유지에서 흔히 발견되는 해자유적이 풍납토성에서도 있었다고 가정할 경우 성내의 배수로를 통해 성내 침수가 되는 것을 막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강이 범람하는 경우라면 성벽이 강 연안을 따라 배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일정한 둑 역할을 하리라고 생각되어 기록에는 왕궁의 침수피해에 대한 기록이 없다는게 이상하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빈다.
### 그보다 발전된 최근까지도 침수지였다는 것을 보면 그 때는 더 하리라 생각됩니다....
14. 자고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풍전등화라는 말을 합니다. 우리동의 한자풀이는 '바람이 드는 동네'인데, 백제인들은 바람 잘날없는 동네에다 왕성을 짓는 사람들이었을까요? 07.08.26 19:19
==>풍납동이라는 지명이 백제시대에도 있었는지 묻고싶군요.
### 풍납동이 '바람드리'라 불린 내용을 말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위례성, 직산, 한성이라는 지명들은 다 존재하고 있구요....
15. 몽촌 고대 삼한때부터 이곳을 [곰말]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한자음으로 고쳐져 몽촌이 되었다는 것이다. 몽촌의 전이름은 고원강촌(古垣江村)이나 고원성의 고원, 옛날 흙으로 쌓은 담장이나 성루의 의미를 넘어서 「곰말」과도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곰말」의 곰은 고어로 큰 것을 뜻하므로 큰마을이란 뜻이 되고, 또 큰마을이란 으뜸되는 마을이란 뜻도 되므로 고원(古垣)이란 한자이름도 뜻으로 새기면 「옛 울」이란 뜻이다. 그러면 왕성에 사는 사람들이 바로 옆에다가 버르장머리없이 큰동네, 으뜸이 되는 동네라는 뜻의 지명을 쓰게 만들었을까요? 07.08.26 19:22
==>이건 완벽한 '아전인수' 식 해석입니다. 고원강촌의 古는 옛 원강촌이라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곰말로 해석하게 된다면 백제 초기수도는 웅진으로 표기되어야지 위례성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거기에다 처음에는 고원을 음차로 해석하더니 뒤에서는 뜬금없이 훈차 해석을 하는데 해석의 일관성이 없는 관계로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 14, 15는 다른 분 글이 함께 있어 빼지 않고 그냥 가져 왔습니다.....몽촌토성 얘기입니다....
16. 풍납토성 내에는 벌말(벌판이 있는 마을)이 있어 군사훈련하기에 딱이었는데 이로써 동북아의 대국 백제는 아무런 조경도 갖추지 못하고 왕궁에 군사훈련장만 갖추었으며 그 크기는 더 좁아져야 하는가? 벌말주민들이 왕궁으로 무단침입하는 것을 막기위해서는 풍납토성 내에 또다른 성벽이 필요했을 텐데 어디에 있을까요? 그리고 그 성벽때문에 백제의 왕궁은 더더욱 작아져야 하겠습니다.....아차산과 마주하는 벌판(풍납1동)에서 군사훈련을 하고 벌말(풍납2동)에서 숙식하는 사성으로써의 모습이 오히려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듭니다.... 07.08.27 02:03
==>위에서는 풍납토성의 규모가 주민구역을 감싸안기에는 좁다라는 얘기를 하면서 뜬금없이 주민들의 왕궁침입을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풍납토성이 왕궁지와 상류계층, 신성지역이나 핵심 관청지구만을 포함하는 것이라면 위의 반론은 의미가 없어집니다.
### 이것도 한성백제를 전제로하는 내용입니다... 한성기의 왕성으로는 규모가 작다는 내용을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17. 고구려군-한강-백제왕궁(벌말포함)-마을(성안말)과 고구려군-한강-방어용토성(벌말포함)-마을(성안말)-백제왕궁 중 어느 구조가 더 잘 어울리는가? 또한 풍납토성 아래에는 성안말(성내동)이 있어 전쟁 패배로 퇴각시 백성들로부터 추궁당하기 쉬운 위치이며, 피난행렬로 자칫 퇴로가 막힐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였을지 이해하기 힘들 뿐더러, 왕궁내 성문과 주작대로를 어디에 어느 방향으로 두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마을과 관계없이 쌩뚱맞게 한강쪽 방향으로?? 마을쪽 방향이라면 한강을 볼 것도 아니면서 왜 굳이 한강옆에 왕궁을 지었을까요?? 07.08.27 02:14
==>1번과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성 축조당시부터 근거리에 외부세력과 전쟁이 전제가 되어야 합니다만 초기 백제의 영역이 아무리 작다고 하더라도 감시지역 구실을 할 수 있는 아차산 근방까지 영향력 행사가 못되었을까 하는 의문을 생각해보면 위의 가정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주작대로의 개념은 중국 왕도 조영의 전형으로 그 당시에 한반도와 만주에 도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없습니다.
### 위에 언급된 내용대로 백제가 마한왕으로 부터 땅을 일부 할양받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지역보다 더 컸을 가능성이 무척 적으며, 주작대로는 명칭만 가져온 것이며, 왕궁이라면 적어도 궁 앞면에 넓은 대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며, 그러면 그 방향이 어느쪽이냐 하는 것이 궁금하다는 것입니다....
18. 백제의 최전성기인 한성백제기는 아울러 불교문화도 대단히 융성하였는데,, 풍납토성에는 불교 관련 유물이 얼마나 있는가? 그 유명한 마라난타가 활동한 시기에 최소한 왕궁이라면 주변에 사찰이나 불상들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07.09.08 15:45
==>이건 참,, 백제 침류왕의 불교 도입이 384년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불교도입 1년만에 침류왕이 사망하면서 국가 주도의 불교도입은 고구려나 신라만큼 탄력받은 진행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국왕 중심의 불교도입은 중앙집권화의 의도가 숨어있기 때문에 자기 전통적 종교관을 고수하려는 귀족들이 불교사원을 지으려고 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또한 진사, 아신왕 때 고구려와의 전쟁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대규모 불교건축 조영행사를 가졌다고 보기 어려우며 결정적으로 5세기 중엽에 고구려 장수왕의 남침으로 성이 파괴되면서 불교유적이 위례성에 남아있었다라고 가정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입니다.
### 역시 한성이다라는 내용에 대한 반박 내용이며, 하남일대로 주장하시는 분들이 하남지역에는 사찰과 불상등 불교관련 유적이 많다라는 내용으로써 성이 파괴되더라도 단과 같은 돌로 만들어진 불교유적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신 내용입니다....
19. 풍납토성의 건축에 있어 바다의 뻘흙을 가져왔다거나, 100만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강변에 즐비하게 퇴적된 흙을 놔두고 바다에까지 가서 뻘흙을 가져왔다거나, 풍납토성 전체를 둘러 싸는데도 3만명정도면 충분하고 100여만명은 오히려 작업에 방해가 되는 숫자이며, 훗날 수백년 뒤인 개로왕 때는 인원이 더 많았을터인데 불과 35000여명의 고구려군에 패퇴 당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내용입니다.... 07.09.08 16:14
==>바다 뻘흙은 연구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 잘 알지 못하는 관계로 언급을 못하겠습니다만 100만여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연인원이 100명이라는 얘기지 100만명을 불러다가 계속 일을 시켰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연인원에 대한 개념부터 숙지하고 반론을 제기해야 할겁니다. 한마디로 이 반론은 낚시글이나 다름없습니다.
### 중국 은나라 토성의 경우 풍납토성에 비해 길이는 대략 3 배이나 높이는 풍납토성이 더 높습니다...그 토성은 1만여명의 인원이 18 년동안 축조하였다고 합니다....여기서 언급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 연평균 100 만여명이라는 내용인데 이렇듯 일반인들은 100 여만명이 동원된 것으로 오인하기 쉽게 표현되어져 있고, 백제의 초도이며, 대개 이주민들이라면 그 인원이 얼마가 되겠으며, 축조기간은 얼마나 길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또한 책을 세우려 하자 마한왕이 뭐라하여 세우지 못하였다라는 내용을 보아도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20. 유물의 탄소측정 연대로 토성의 축조시기를 정확히 판단할 수는 없다...토성 내부의 유물이었다면 이는 토성이 그 유물이 만들어진 이후에 축조되었다는 것 뿐이고, 토성 외부의 유물은 토성축조의 시기를 가늠해줄 수 없습니다....서로 무관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07.09.08 17:05
==>반대로 생각해보면 토성이 축조되고 나서 유물이 묻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나와서 말인데 몽촌토성이나 이성산성의 편년 방식도 마찬가지일텐데,,거기에서는 왜 그런식의 반론을 하지 않는 걸까요?
### 탄소측정여부는 제가 잘 모르는 내용입니다.....
21. 다른 사학자들은 하남일대에도 백제의 유물과 유적이 많다고 주장하고 있다... 많은 유물과 유적이 발견되었으나, 유적층이 파괴 내지 교란되고, 특히 유물과 관련해서는 감춰졌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에 대한 확인 작업도 이루어져야 하겠습니다... 07.09.08 17:20
첫댓글계속 적자하니 말만 길어지고 잘 시간을 넘긴 것 같습니다......답변주신 한단인님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풍납동주민들은 프랑스 리옹이나 일본의 오사카와 같은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지는 백제 마을을 만들고자하는 바람밖에 없습니다...지금은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한성백제박물관도 몽촌토성에 지어져 풍납토성은 그 자체와 출토되는 유물의 제공지로써 밖에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이제는 문화재와 사람이 공존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하고 있는데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조언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재청에서도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했다가 한성백제의 북성이라 했다가 다시 하남위례성이라 해서 이를 반박하려 한 위에 적힌 내용들도 뒤죽박죽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생각하시는데, 한성을 전제로 한 반박글들이라 이상하셨을 겁니다....죄송합니다.....본의 아니게 글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답글을 달까 싶었는데 말이 길어질거 같아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지적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은나라 토성을 예로 드신것처럼 풍납토성의 3배 운운하시면서 백제는 왜 그러느냐,,라고 하셨습니다만, 국가의 역량차이가 곧 왕도 규모의 차이로 나타나는 건 일종의 편견입니다. 일종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풍납토성이 왕도였던 시기에는 그정도 규모의 왕성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로 드신 은의 왕도는 하나가 있었던게 아니라 적어도 3~4개로 계속 천도가 이루어졌으며 다비도프님이 말씀하신 건 가장 마지막 시기 왕권 과시용으로 거대하게 만들어진 성일 뿐입니다. 다비도프님은 손빈의 전차전 전략에 말린 조나라장군인가요?
백제는 왜 그러냐 이런 생각은 추호도 가진적이 없습니다...너무 비약시켜서 생각하지 마십시요... 저는 백제가 중국과 고구려에 비견되는 나라로써 일본으로 부터 섬김을 받은 강국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분 글은 하남위례성이라면 동원인력과 시간에 있어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하는 내용일 뿐입니다....
즉, 같은 초기국가라고 하더라도 은와 초기 백제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오류를 범하신 것입니다. 고대제국으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형성기의 고구려조차도 평양성 천도 당시에는 장안성과 같은 거대 도성보다 안학궁성이라는 정치적 공간과 대성산성이라는 군사공간을 따로 조영하여 2원적인 운영을 했습니다. 신라의 초기 왕도 경우도 이미 말씀드린바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반론은 단 하나도 하고 계시지 않군요.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질 않고 단편적인 것에 대한 반론만 취하다보니 나오는 '음모론'적 반론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모론적이다 라고 까지 확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풍납동주민들이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이런 부분이 있어 고민하던 차에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것 뿐이었는데, 이상한 눈으로 보시는 것 같군요....저도 이러한 고민들이 이젠 지긋지긋하여 더이상의 관련 글들을 적지 않을 생각인데, 한단인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남위례성과 백제의 한성은 여기다 라는 결론적인 얘기만은 들어보고 싶습니다....
적당한 표현이 생각이 나지 않아 음모론이라는 부적절한 표현을 저모 모르게 무심코 쓰고 말았는데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 음모론..이라기 보다 일종의 편견..이라고 써야 할지..이를 표현할 적당한 표현이 생각이 나질 않는 군요. 일단,, 한번 의심하게 되면 모든게 의심스럽다는 옛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 다비도프님의 논지 대부분이 총체적인 판단보다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무는 형태로 되어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저런 반론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다른 학계는 정-반-합 으로 반대 의견을 들어보면서 절충하기도 하고 유연성이 있는데, 사학계는 참으로 색채가 너무나 강렬한 것 같습니다... 역사 그 자체는 진리이지만, 인간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진리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사회과학적인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지금의 통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시던 분들이 과거에는 왕따여서 괴로우셨다고 회고하셨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위치가 바뀐 상태에서 다른 분들을 왕따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셔야 할 부분입니다.....마지막으로 11월에 방영될 하남위례성은 직산에 있다라는 내용을 소개하고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정반합에 대한 절충론도 그 반론이 적절한 것이어야 절충이 됩니다. 위에서 반론을 제기하셨던 것들은 총체적인 반론이 아니라 부분의 의혹들에 대한 단편적인 의견개진에 불과합니다. 정반합까지 들먹거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사학계가 보수적인 학문집단이라고까지 하시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또한 방송 피디가 학자보다 학술적 판단력과 설득력을 지닌다고 생각하긴 어렵겠습니다. 방송이 되고 안되고가 하남 위례성이 직산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기 위한 분기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뭔가 착각을 하시는 듯,,,
다비토프님이 하남위례성과 백제 한성이 어디냐고 제게 물어보셨는데 저는 백제에 대한 공부가 얕고 초기 백제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은 관계로 그 방면에 아는것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제 반론의 주된 근거는 고대의 도시 조영에 대한 일반론을 근거로 다비도프님이 언급하신 풍납토성 위례 부정설을 반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주장들을 보면 주로 현대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선들과 들어맞지 않아 발생하는 의문들을 모아 반론들이 제기된 것인데 이것은 현대인들이 고대의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질서에 대한 몰이해로 발생하는 오류로서 비전공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에 속하는 바입니다.
제가 수차례 언급한 총체적이지 못한 단편적 비판이 만들어내는 오류란 그 범주에 속하는 것이며 보다 고대에 대한 선이해 없이 논지를 진행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고 의문으로만 남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도프님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보든 반론의 판단 기준에서 다비도프님은 다비도프님이 가지고 있는 현대인으로서의 상식이 동원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대도시 조영에 대한 일반론에 선이해가 있는 저도 감히 그런 말을 못하겠습니다만,,
저는 저와 풍납동주민들의 의견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다른 학설을 음해하려 하는 등의 그런 목적의식을 갖고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이러한 의견들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을 묻고 있었는데, 제 글에 대한 답변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님들의 글 속에 더 의도적인 면들이 보이지 않는지요?? 또한 상식이 동원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는지도 묻고 싶습니다...한단인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제가 잘 알겠습니다만, 그것도 부분집합적인 내용일 뿐입니다.... 극단적인 사고도 피하셔야 합니다....제가 방송이 되고 안되고로 학설이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한단인님의 생각대로 단순한 의견개진을 넘어서까지는 다른 아무런 생각도 가진바 없고, 그대로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의혹, 편견, 음모 이런 말들은 다 적절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학설을 지닌 사람들과 교수님들도 항상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 아닌지요?? 그리고 제 글이 비전공자인 저만의 생각으로 적혀 있다고 생각하셨나 본데, 여러분이 싫어하시는?? 한종섭, 오순제 박사외에 많은 사학자님들의 글과 논문, 신문기사에서 빼온 내용입니다...원하신다면 이 곳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첫댓글 계속 적자하니 말만 길어지고 잘 시간을 넘긴 것 같습니다......답변주신 한단인님과 여러분들께 감사드립니다....풍납동주민들은 프랑스 리옹이나 일본의 오사카와 같은 과거와 현대가 어우러지는 백제 마을을 만들고자하는 바람밖에 없습니다...지금은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 주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한 상태입니다....한성백제박물관도 몽촌토성에 지어져 풍납토성은 그 자체와 출토되는 유물의 제공지로써 밖에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이제는 문화재와 사람이 공존하는 방향을 추구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하고 있는데 좋은 생각이 있으시면 조언 해주시기 바랍니다....
문화재청에서도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했다가 한성백제의 북성이라 했다가 다시 하남위례성이라 해서 이를 반박하려 한 위에 적힌 내용들도 뒤죽박죽인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께서는 풍납토성을 하남위례성으로 생각하시는데, 한성을 전제로 한 반박글들이라 이상하셨을 겁니다....죄송합니다.....본의 아니게 글이 길어져 죄송합니다.....
답글을 달까 싶었는데 말이 길어질거 같아 본질적인 것에 대한 지적만 하고 끝내겠습니다. 은나라 토성을 예로 드신것처럼 풍납토성의 3배 운운하시면서 백제는 왜 그러느냐,,라고 하셨습니다만, 국가의 역량차이가 곧 왕도 규모의 차이로 나타나는 건 일종의 편견입니다. 일종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으로 풍납토성이 왕도였던 시기에는 그정도 규모의 왕성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예로 드신 은의 왕도는 하나가 있었던게 아니라 적어도 3~4개로 계속 천도가 이루어졌으며 다비도프님이 말씀하신 건 가장 마지막 시기 왕권 과시용으로 거대하게 만들어진 성일 뿐입니다. 다비도프님은 손빈의 전차전 전략에 말린 조나라장군인가요?
백제는 왜 그러냐 이런 생각은 추호도 가진적이 없습니다...너무 비약시켜서 생각하지 마십시요... 저는 백제가 중국과 고구려에 비견되는 나라로써 일본으로 부터 섬김을 받은 강국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 부분 글은 하남위례성이라면 동원인력과 시간에 있어서 문제가 있지 않을까하는 내용일 뿐입니다....
즉, 같은 초기국가라고 하더라도 은와 초기 백제는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비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한 오류를 범하신 것입니다. 고대제국으로서 강력한 중앙집권 형성기의 고구려조차도 평양성 천도 당시에는 장안성과 같은 거대 도성보다 안학궁성이라는 정치적 공간과 대성산성이라는 군사공간을 따로 조영하여 2원적인 운영을 했습니다. 신라의 초기 왕도 경우도 이미 말씀드린바가 있는데 여기에 대한 반론은 단 하나도 하고 계시지 않군요. 문제를 총체적으로 보질 않고 단편적인 것에 대한 반론만 취하다보니 나오는 '음모론'적 반론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음모론적이다 라고 까지 확대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풍납동주민들이 무슨 음모라도 꾸미고 있다는 말씀이신지요?? 이런 부분이 있어 고민하던 차에 의견을 들어 보고 싶은 것 뿐이었는데, 이상한 눈으로 보시는 것 같군요....저도 이러한 고민들이 이젠 지긋지긋하여 더이상의 관련 글들을 적지 않을 생각인데, 한단인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하남위례성과 백제의 한성은 여기다 라는 결론적인 얘기만은 들어보고 싶습니다....
적당한 표현이 생각이 나지 않아 음모론이라는 부적절한 표현을 저모 모르게 무심코 쓰고 말았는데 그 점은 사과드립니다. 음모론..이라기 보다 일종의 편견..이라고 써야 할지..이를 표현할 적당한 표현이 생각이 나질 않는 군요. 일단,, 한번 의심하게 되면 모든게 의심스럽다는 옛말이 가장 적절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 생각에 다비도프님의 논지 대부분이 총체적인 판단보다 의혹에 의혹이 꼬리를 무는 형태로 되어 있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을 비판하기 위해 저런 반론을 제기했던 것입니다.
다른 학계는 정-반-합 으로 반대 의견을 들어보면서 절충하기도 하고 유연성이 있는데, 사학계는 참으로 색채가 너무나 강렬한 것 같습니다... 역사 그 자체는 진리이지만, 인간에 의해 쓰여진 역사는 진리만으로 구성되지 않고, 사회과학적인 부분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지금의 통설을 주장하고 있다고 하시던 분들이 과거에는 왕따여서 괴로우셨다고 회고하셨습니다....하지만 지금은 위치가 바뀐 상태에서 다른 분들을 왕따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셔야 할 부분입니다.....마지막으로 11월에 방영될 하남위례성은 직산에 있다라는 내용을 소개하고 이만 글을 마치겠습니다....
정반합에 대한 절충론도 그 반론이 적절한 것이어야 절충이 됩니다. 위에서 반론을 제기하셨던 것들은 총체적인 반론이 아니라 부분의 의혹들에 대한 단편적인 의견개진에 불과합니다. 정반합까지 들먹거릴 일은 아니라고 생각되며 그 때문에 사학계가 보수적인 학문집단이라고까지 하시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역사학은 기본적으로 사회과학의 영역이 아닙니다. 또한 방송 피디가 학자보다 학술적 판단력과 설득력을 지닌다고 생각하긴 어렵겠습니다. 방송이 되고 안되고가 하남 위례성이 직산이라는 가설이 힘을 얻기 위한 분기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뭔가 착각을 하시는 듯,,,
다비토프님이 하남위례성과 백제 한성이 어디냐고 제게 물어보셨는데 저는 백제에 대한 공부가 얕고 초기 백제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많지 않은 관계로 그 방면에 아는것이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제 반론의 주된 근거는 고대의 도시 조영에 대한 일반론을 근거로 다비도프님이 언급하신 풍납토성 위례 부정설을 반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위의 주장들을 보면 주로 현대인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선들과 들어맞지 않아 발생하는 의문들을 모아 반론들이 제기된 것인데 이것은 현대인들이 고대의 당대인들의 사고방식이나 사회질서에 대한 몰이해로 발생하는 오류로서 비전공자들이 흔히 범하는 오류에 속하는 바입니다.
제가 수차례 언급한 총체적이지 못한 단편적 비판이 만들어내는 오류란 그 범주에 속하는 것이며 보다 고대에 대한 선이해 없이 논지를 진행하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해되지 않고 의문으로만 남을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비도프님에게 물어보겠습니다. 보든 반론의 판단 기준에서 다비도프님은 다비도프님이 가지고 있는 현대인으로서의 상식이 동원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고대도시 조영에 대한 일반론에 선이해가 있는 저도 감히 그런 말을 못하겠습니다만,,
저는 저와 풍납동주민들의 의견이 누군가를 설득하고 다른 학설을 음해하려 하는 등의 그런 목적의식을 갖고 글을 쓴 것이 아닙니다....이러한 의견들에 대한 여러분들의 생각을 묻고 있었는데, 제 글에 대한 답변들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님들의 글 속에 더 의도적인 면들이 보이지 않는지요?? 또한 상식이 동원된 역사는 존재할 수 없는지도 묻고 싶습니다...한단인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미는 제가 잘 알겠습니다만, 그것도 부분집합적인 내용일 뿐입니다.... 극단적인 사고도 피하셔야 합니다....제가 방송이 되고 안되고로 학설이 좌우된다고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한단인님의 생각대로 단순한 의견개진을 넘어서까지는 다른 아무런 생각도 가진바 없고, 그대로 이해하시기를 바랍니다... 의혹, 편견, 음모 이런 말들은 다 적절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자신과 다른 생각, 다른 학설을 지닌 사람들과 교수님들도 항상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 아닌지요?? 그리고 제 글이 비전공자인 저만의 생각으로 적혀 있다고 생각하셨나 본데, 여러분이 싫어하시는?? 한종섭, 오순제 박사외에 많은 사학자님들의 글과 논문, 신문기사에서 빼온 내용입니다...원하신다면 이 곳에 올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