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마태오 12,46-50
‘뜻’이 결정하는 ‘집’
조선 말기 힘든 시절에 조선 땅에서 승승장구한 조선의 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이완용입니다.
그는 항상 성공했고 자녀에게 성공하는 법도 알려주었습니다.
가장 강한 나라를 섬기라는 것이었습니다.
이완용은 과거에 합격하기 전에 벌써 영어를 배웠던 사람입니다.
그는 미국이 우리와 가까이 지낼 때 친미파의 주동인물이 되었고, 세상이 변하여 러시아의 발언권이 강해지자 어느새 러시아어를 구사하며
친러파의 중심인물이 되더니, 러일 전쟁으로 일본이 승리하자 이번엔 유창한 일어를 앞세워 친일파의 거두가 되고 이어서 국무총리까지 역임합니다.
그 후 우리나라가 일본의 손으로 넘어갈 때 그는 서슴없이 일본인이 되어 그 나라 귀족으로 둔갑했고 마침내 후작이라는 작위까지 받습니다.
조선 땅에서 당시 가장 성공했던 이완용을 지금 누구도 자랑스럽게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선의 피가 흐르지만 그는 일본사람이고 러시아 사람이며, 미국 사람입니다.
피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피 안에 흐르는 뜻이 더 중요합니다.
누구의 뜻을 따르느냐가 누구에게 속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가족임을 증명하는 것은 그 가족에 흐르는 피가 아니라 그 가족에 흐르는 뜻입니다.
‘뜻’은 ‘본성’과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나 자신이 선택하는 뜻에 갇혀 살아갑니다.
내가 육체의 뜻을 선택했다면 그 육체로부터 오는 ‘땅’에 갇혀 살아가고, 내가 하늘의 뜻을 택했다면 ‘하늘’에 살게 됩니다.
육체는 지옥의 본성이고 영은 하늘의 본성입니다.
하느님의 본성에 살게 되느냐, 사탄의 본성 안에서 살게 되느냐는 내가 선택하는 뜻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사랑을 실천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고, 육체의 욕망을 선택했다면 이미 지옥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육체의 욕망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주님이 이런 사소한 죄들은 용서해 주실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합니다.
그러나 그 어떤 죄도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죄인 줄 알면서 그것을 선택한다면 그 순간은 지옥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따르는 뜻이 천국과 지옥, 둘 중의 하나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뜻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자주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잠자기 전에 다음 날 해야 할 일들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그 일들을 순서대로, 시간의 흐름대로 적되, 그 일들이 주님의 뜻이기를 기도하며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날 그렇게 적힌 시간표대로 살았다면 그 사람은 천국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 아버지가 네 살 된 아들과 맥도널드에 갔습니다.
아들은 버거, 콜라, 튀김 등 맥도날드 대표 음식을 시켰습니다.
아버지는 몸 생각을 해서 드레싱을 곁들인 따분한 샐러드를 시켰습니다.
아들이 먹는 것을 보고 입에 군침이 돌아 “아빠가 튀김 하나 먹어도 되지?”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때 네 살 된 아이는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싫어요!”
아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이 어디에서 나온 줄 모르는 것일까요?
이런 소리를 듣고 아버지가 또 사주고 싶으실까요?
주님의 뜻대로 십일조도 내지 못하고 봉헌을 하더라도 아주 아까운 듯이 하면 하느님도 그런 섭섭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 모든 것을 봉헌하신 분이 있습니다.
바로 성모 마리아이십니다.
성모 마리아는 아브라함이 외아들을 바치려 했던 것보다 더 바쳤습니다.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입니다.
당신 자신을 아버지의 뜻에 봉헌하셨고 그렇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길을 가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습이 하느님 나라에 사는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모범이 되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라는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은 삼손의 뜻이 아니라 필리스티아인들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몸은 삼손과 같이 있었지만 뜻은 필리스티아인들과 함께 있었습니다.
결국 들릴라를 자신의 편으로 생각했던 삼손은 눈이 뽑히고 머리카락이 잘리는 수모와 고통을 당해야했습니다.
하느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육체의 욕망을 따르는 사람은 이렇게 내 안에 머무시려 하시는 하느님의 눈을 뽑고 사탄의 소굴로 집어넣는 행위와 같습니다.
나는 두 뜻 중 하나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라고 하실 때, 성모님은 오히려 칭찬으로 들으셨을 것입니다.
성모님도 당신만큼 주님의 뜻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뜻’의 중요성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핏줄을 배신한다고 여겼습니다.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 “내 뜻만을 따른 이들만 내 나라에 들어와라!”라고 명하실 때, 주저함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우리들이 됩시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밖에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3일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12,46-50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우리에게 보여주신 놀라운 일 한 가지가 있습니다.
사실 그분은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구세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아버지로부터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실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말씀 한마디로 세상의 질서를 뒤바꿀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30년 세월 동안 이스라엘의 변방 나자렛에서 조용히 사셨습니다.
인간에게 명령하셔야할 만왕의 왕이신 분이 인간 마리아와 요셉에게 순종하며 서른해를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수였던 양부 요셉의 일을 기쁘게 도와드렸습니다.
때로 요셉의 부탁으로 열심히 대패질도 하셨고 못도 박으셨습니다.
가사 일로 늘 바빴던 마리아의 일손도 거들었습니다.
때로 마늘도 까고 양파도 까면서 매워 눈물도 흘리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그 어떤 자식보다 효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꽤 의아하게 다가옵니다. 효자이셨던 예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도무지 이해하기가 힘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냐?”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 48-50)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마리아와 요셉, 사촌들을 폄하하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주님 말씀에 가장 충실하셨던 마리아를 향한 극찬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주님 말씀을 씹고 곱씹고, 새기고 되새기던 사람은 역사상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길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신원과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는 나자렛이라는 작은 고을에만 머물며, 가족 친지들과 알콩달콩 한평생을 사셔야 할 분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자렛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전역, 더 넘어 인류 전체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입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더 큰 바다로 나아가셔야 할 분, 온 세상의 구원이라는 큰 사명을 부여받으신 분입니다.
결코 혈육이나 지연, 학연에 연연하시면 안되는 분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을 지나치게 고집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역시 작은 시냇물에서만 놀 것이 아니라 더 큰 강물로 나아가야 마땅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공동체, 내 본당도 중요하지만, 활짝 마음의 문을 열고, 세상 모든 가정, 모든 공동체와 본당이 다 내 공동체요 우리의 공동체, 주님의 공동체라는 연대와 공유 의식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6주간 화요일 강론>
(2024. 7. 23. 화)(마태 12,46-50)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군중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그분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그분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님과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당신께 말한 사람에게,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하고 반문하셨다.
그리고 당신의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마태 12,46-50)”
1)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려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생각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이들이 있는데, 즉 앵무새처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만 반복하는 이들이 있는데, 참 딱한 일입니다.>
요한복음 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7-40).”
마태오복음 18장에도 ‘아버지의 뜻’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의 구원’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모든 사람’이라고 해도 ‘남의 일’이 아니라 ‘나의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내가 원하는 것보다 더 간절하게 나의 구원을 바라십니다.
따라서 ‘하느님 뜻의 실행’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2) 하느님과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면서도
구원받으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믿는다고 말만 하거나, 믿는다고 생각만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야 신앙입니다.
신앙생활의 궁극 목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 목표를 향해서 나아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나는 나름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일 수도 있고, 진짜로 열심히 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목표가 잘못되어 있다면, 또는 목적의식도 없이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니라 그냥 취미생활입니다.
간절함이나 절실함도 없고, 시간 여유가 있을 때나 성당에 가고, 바쁘면 안 가고... 겉으로 보기에는 착하고 성실한 신앙인으로 보이더라도 겉모습만 그런 것이고, 평소에는 주님을 찾지도 않다가 뭔가 아쉬운 일이 생기면 그때서야 기도하고... 그러다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실망해서 기도를 중단하고... 믿는 것도 아니고, 안 믿는 것도 아닌, 그런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주님께서는 몹시 싫어하십니다(묵시 3,15-16).>
3)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나의 가족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구원받을 수 있다.)” 라는 뜻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러한 믿음이 그 사람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 2,14.17).”
4)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새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9-10.12).”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 그것은 ‘예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하느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사랑 실천’도 ‘하느님의 뜻’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고,
‘행동으로’(온 삶으로) 실천하는 사랑만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을 ‘삶’으로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중으로 죄를 짓는 일입니다.
거짓말을 하는 죄와 ‘사랑이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
<루카복음 10장의 ‘착한 사마리아인’은 아버지의 뜻을 제대로 실천한 사람입니다.
그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믿는다고,
또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말은 잘하는데 실천은 안 하는 사람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