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老峰(오로봉)
이백(李白, 701~762)
오로봉을 꺾어 붓을 만들고
삼상 강물을 끌어 벼룻물 삼아
푸른 하늘 한 장 큰 종이 위에
내 마음의 시를 써 보리라
五老峰爲筆(오로봉위필)
三湘作硯池(삼상작연지)
靑天一張紙(청천일장지)
寫我腹中詩(사아복중시)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안중근 장군은 뤼순 감옥에서 약 200여 점의 유묵을 남겼다.
대부분 일본인의 손에 들어갔고 국내에는 보물 569호로 지정된 26점
만 남았다. 그중 이 시를 쓴 유묵은 홍익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시는 이백의 작품이라 전해오지만 《이백전집》에는 포함되어 있자
않아 불명확하다. 안중근 장군의 친필에는 세 번째 구에 “청천일장선
(靑天一丈線)”이라고 쓰여 있다. 그러나 이 시를 휘호로 남긴 것으로
추측건대 안 장군의 애송시인 것만은 확실하고, 이로써 안 장군의 호
연지기(浩然之氣)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복중시(腹中詩)는
‘민족독립’과 ‘동양평화’ 그리고 경천(敬天)이라 하겠다.
[작가소개]
이 백(李 白)(701-762) : 盛唐의 詩人.
字는 太白, 號는 靑蓮 또 스스로 酒仙翁이라했다.
中宗 長安 元年(701, 신라 효소왕 10년) 사천성에서 났다.
10살에 벌써 詩書에 통하고 百家書를 탐독했다.
고향에서 소년시대를 보내고, 뒤에 각지로 방랑, 襄州 漢水로부터 洞庭湖로,
다시 長江으로 내려가 金陵을 거쳐 楊州로 가 호방한 생활을 하고, 35살때에는
太原에 놀고, 산동성 任城에서 孔巢文․韓 準․裵 政․張淑明․陶 沔등과 만나,
이른바 竹溪六逸의 교유를 맺고, 742년 42살 때 翰林院에 들어갔다.
시와 술로 명성이 높았으나, 결국 술이 원인이 되어 744년에 실각, 陳留에 이르러
道士가 되고, 8578년에 江南에서 玄宗의 아들 永王의 모반에 가담한 죄로
옥에 갇혔다가 이듬해 夜郞에 유배되어 가다가 도중에서 풀렸다.
代宗이 즉위하자 拾遺에 배명, 11월에 當塗에서 62살로 죽었다.
李 白은 自然兒였다. 喜悲哀歡을 그대로 노래에 옮겨, 그의 작품은 한껏
자유분방하여 天衣無縫의 神品이라고 하거니와, 당시 그와 아울러 일컬은
杜 甫가 새로운 詩風을 일으킨 것과는 달리, 李 白은 漢魏 六朝이래의
詩風을 集大成했다. 모랄에 민감하고 정치에 관심을 보인 杜 甫와는 달리,
현실을 떠난 감정의 소유자였다. 그는 당나라 문화의 爛熟期에 生을 받아,
그 퇴폐적 기풍에 젖은데다가 불우했기 때문에 술과 여자에 憂愁를 잊으려 했다.
詩文集 <李太白集> 30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