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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信心)이 지극하면 깨달음이 온다.
(주장자 세 번 내려치시고)
사부대중은 회마(會麽), 아시겠습니까? 이 산승(山僧)은
학림사 오등 선원에서 한걸음 나오기 전에 이미 모든 법문을 다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사부대중께서도
집에서 한걸음 내어 딛기 이전에 이미 법문을 다 들은 것입니다.
지금 제가 이렇게 말씀드린 이 자체도 크게 기특한 말이 못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이 자리에서 대중들에게 뭐라고 말씀을 드린다면
그것은 바로 여러분의 인격에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저 자신도 그 허물을 면치 못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 앉은 것은 조계사 주지 스님 그리고 여기 계시는 사부대중의 요청 때문입니다.
앉기는 앉았지만, 한 글귀도 여러분에게 드릴 말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한 글귀도 들어야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바로 아신다면 오늘 참석하신 대중은 정말 보람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제가 드려야 할 말이 있고 여러분이 들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진흙 바닥에서 뒹구는 꼴이 되고 오줌을 뒤집어쓰는 꼴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바로 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 참석한 사부대중 가운데 바로 보지 못하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이 산승(山僧)이 부득불 동설수설(東說西說)이라,
동을 말하게 되고 서를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전부 거짓말입니다.
지금부터 제가 그 거짓말에 대해서 몇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오늘 ‘선과 깨달음’을 주제로 법문하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선’이냐. 그것을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을 드립니다.
찬풍음로(餐風飮露)라. 바람을 먹고 이슬을 마신다.
이렇게 대답을 드립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깨달음이냐?’라고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석인정오타삼경 산고수심백화향(石人正午打三更 山高水深百花香)’이라.
돌사람이 정각 열두 시, 밤 삼경에 종을 치니 산은 높고 물은 깊은데 백 가지 꽃의 향기로다.
이렇게 저는 대답을 드립니다.
저는 아주 간단하게 말씀을 다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다시 좀 더 깊은 말을 들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의심하는 분이 있을 겁니다.
〈원각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글귀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원각경〉에서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 종종환화(一切衆生 種種幻化)가 개생여래원각묘심(皆生如來圓覺妙心)’이라 했습니다.
일체 모든 중생이 다 환하다. 모두 꿈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중생은 꿈속에 살면서 꿈인 줄 알지 못합니다.
꿈을 진실로 착각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꿈을 꿈으로 바로 본다면 그 사람은 꿈을 여읜 사람입니다.
그래서 부작방편(不作方便)이라. 거기에는 방편이 필요 없다고 했습니다.
이환즉각(離幻卽覺)이라. 꿈을 여읜즉 바로 깨달은 것이라.
역무점차(亦無漸次)라. 점차가 뭡니까. 깨달음의 오십오 점차를 논할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삼세제불과 역대 조사와 팔만사천법문이 두두물물(頭頭物物) 모두 다 꿈이라 했습니다.
그러면 묘심(妙心)은 어떤 것입니까?
이렇게 묻자, 회당 선사가 답하기를 그랬습니다. (주장자 한번 내려치시고)
비단 이불에다가 원앙 수를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수놓은 것은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지만 수놓은 바늘은 주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 일구(一句)에서 터득하면 부처님과 조사의 스승이라 했습니다.
제 이구(二句)에서 터득하면 인천(人天)의 스승이라.
하늘 세계와 인간세계의 스승이라고 했습니다.
제 삼구(三句)에서 터득하면 자기도 구하기 어렵다 이랬습니다.
어떤 것이 제 일구냐. 이 산승(山僧)이 자리에서 일보 이보 걸어서 이 법당에서 말없이 앉았다.
이것이 제 일구(一句)입니다.
여러분과 말없이 얼굴을 마주했다. 이것이 제 이구(二句)입니다.
어떤 것이 제 삼구(三句)냐. 이 산승이 법당에서 말하고 묻고 답하고 하는 것이 제 삼구입니다.
보십시오. (주장자 한번 내려치시고)
이것은 어느 글귀에 해당합니까. 이것은 마음입니까. 부처입니까. 아니면 물건입니까.
아니면 있는 것입니까. 없는 것입니까. 있다고 해야 합니까. 없다고 해야 합니까.
아니면 중도실상(中道實相)이라고 해야 합니까. 뭐라고 해야 합니까.
일구(一句)라고 해도, 이구(二句)라고 해도, 삼구(三句)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있다. 없다 해도 맞지 않습니다. 중도실상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
중도실상이 무엇입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말 한 적 없습니다. 어디에 중도실상이니 그런 말을 합니까.
그런 표적을, 규정을 둔다고 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이것은 만약 있다고 해도 실상이요 없다고 해도 중도실상입니다.
어떤 사람은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고 주먹을 드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빙빙 도는 사람이 있고 절을 하는 사람이 있고
문을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이 있고 별의별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이 세상이 이뤄지기 전에 나는 이뤘다.
또 부모님으로부터 태어나기 전에 나는 이미 이뤘다.
또 부처님이 오시기 전에 이뤘다. 또 달마 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기 전에 이뤘다.
이렇게 한다면 그것이 옳을까요.
벌써 그것은 제 이구(二句)에 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어~억!
그런데 여기에서 법문하는 글귀를 하나만 알아듣는다면 상당한 수준에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고 왔지만, 사실은 큰 맛이 없는 소리입니다.
맛이 없지만 여러분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를 때는 깊이 잘 생각해 봐야 합니다.
팔만 사천 부처님 법문이 전부 깨달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조사 스님 말씀이 모두 깨달음의 말씀입니다.
바로 그 말씀에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전부 깨닫는 말씀을 해 놨는데 왜 깨닫지 못하느냐 말입니다.
지네는 발만 많은 게 아니라 입도 많습니다.
게다가 입은 못으로 된 입이요, 혓바닥은 쇠로 된 혓바닥입니다.
그래서 더욱 부질없이 추한 것만 더했다. 여기에 이르러서
모든 걸 몽땅 다 털어 버리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어떤 사람은 주장자를 이렇게 들어서 세우고, 어떤 사람은 불자를 들어서 보이고,
어떤 사람은 눈을 깜빡깜빡하고, 어떤 사람은 미소를 지어 보입니다.
불자를 든다든지 주장자를 든다든지 하는 것은 진흙밭에서 진흙을 닦는 것과 같습니다.
눈을 깜빡깜빡한다 미소를 짓는다. 하는 것은 닭이 둥우리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면 부처님도 조사도 이르지 못한 것에 가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법문은 간단하지만, 이것으로 다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선 법회라고 하니 조금 더 차원을 낮게 해서 몇 말씀 덧붙이겠습니다.
40년 정도 선방에 다니셨다는 분이 저를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공부를 지었으며, 어떻게 깨달은 바가 있으며,
어느 분에게 선지식을 지도받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분 말씀이 기가 막힌 말씀을 했습니다.
그 스님이 “저는 선지식(善知識)을 믿지 않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럼 무엇을 믿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그 스님은 “열심히 정진하면 불보살님이 나타나서 가르쳐줍니다.
가르쳐 준 것을 공부하면 되지 뭐 믿을만한 선지식이 있어야지요”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제가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부처님 밑으로 가섭존자, 아난존자 밑으로, 우바국다 존자가 있습니다.
부처님과 우바국다 존자까지 100년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니 우바국다 존자는 항상 마음속에 그리워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다가 백 년 뒤에 태어나 부처님을 왜 만나 뵙지 못했나, 억울하다 이겁니다.
하루는 오늘처럼 우바국다 존자가 법회 도량에서 법문을 하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풍악 소리가 울리고 천지가 진동했습니다.
꽃비가 날리고 허공에서 오색 무지개 광명이 내리더니
그 광명 한줄기를 타고 어떤 거룩한 사람이 큰 코끼리를 타고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기막힌 일이라서 사람들이 존자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거기에 집중했습니다.
존자가 선정에 들어서 살펴보니 그것은 마왕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왕의 신통술(神通術)을 제압했습니다.
그러자 그 마왕은 “아직은 정법의 기운이 있어서 안 되겠군요” 하면서 존자에게 절을 했습니다.
존자가 “그대가 마왕이라면 신통술(神通術)이 있으니
부처님 모양 그대로 내 앞에 나타내줄 수 있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마왕은 “그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존자께서 저에게 절은 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하며
부처님 모양 그대로 나타냈습니다.
그러자 존자가 자기도 모르게 절을 했습니다.
마왕이 “존자여 절을 하지 않기로 약속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존자는 “제가 절을 한 것은 마왕을 보고 한 것이 아니라
부처님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를 한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마왕은 “존자께서 이러하건 데 이천 년 삼천 년 후 말세에 제가 부처님 몸으로 나타난다면
그 누가 속지 않겠습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렇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제가 스님에게 “현몽(現夢)으로 보인다면 마구니도 부처님의 몸으로 나타나실 수 있는데
어떻게 가릴 수 있겠습니까. 가릴 수 있다면 스님은 선지식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와 같은 공부는 정말 위험천만입니다. 참선하다가도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고,
염불 기도를 하더라도 이상한 경계가 나타나고, 주력(呪力)하다가도 이상한 신이 나타나고,
이렇게 속아서 외도로 빠지는 사람이 무수히 많습니다.
속지 않으려면 올바른 선지식을 만나야 합니다.
본래 깨칠 것이 없다고 말하는데 여러분이 왜 이 자리에 와 있습니까.
깨칠 것이 없는 것을 알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이 뭣 고’ 화두는 내려오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모든 공부를 다 해봤지만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보리수나무 아래서 일주일 동안 앉은 다음 깨닫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겠다고 했던 것입니다.
부처님이 어느 날 나무 밑에 앉았는데 장사꾼이 돼지 새끼를 메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이 “네가 메고 가는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상인이 “여래의 지혜를 다 갖춘 분이 이 돼지 새끼도 몰라요.”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그냥 물어봤노라.” 그랬습니다. 왜 물어봤겠습니까.
이러한 곳에서, 부처님은 무엇이냐. 법문한 사람이 무엇이냐.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육조 스님한테 남악 회양 스님이 찾아갔습니다.
남악 회양 스님은 나름대로 공부를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육조 스님이 많이 안다고 하니까 내가 대적해 봐야지 하고 찾아갔습니다.
갈 때 무엇을 물으면 이런 대답을 할 것이고 이런 것들을 다 준비해 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육조 스님이 ‘무슨 물건이 이렇게 오는 고’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리에 준비해 간 것이 모두 없어졌습니다.
망연자실해서 돌아가 팔 년 동안 연구해서 ‘한 물건이라고 해도 맞지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육조 스님이 ‘그렇고 그렇다. 모든 부처님이 그렇고, 모든 스승이 그러하고,
나도 그러하고 너도 그러하다. 그래 닦아 증득(證得)한 것 있느냐 없느냐’라고 물었습니다.
남악 회양 스님은 “닦아 증득(證得)한 것이 없지 않으나 물들이래야 물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도를 깨친 후 남악 회양 선사가 마조 선사에게 갔습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뭘 하느냐?” 하니,
마조 선사가 “부처가 되기 위해 앉아 있다”라고 했습니다.
남악 회양 선사가 “이 사람아, 앉아서 부처가 될 모양이면 산이고 돌멩이도 모두 부처 됐겠다.
앉아서 부처가 되겠다고 하는 것은 너밖에 못 봤다”라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조 선사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다시 남악 회양 선사가
“소가 가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되겠느냐 수레를 때려야 되겠느냐”라고 말했습니다.
옛날에 어느 절에 공부 많이 한 훌륭한 조실스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아 그거야 소를 때려야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저는 웃었습니다. “왜 웃느냐”고 조실스님이 물었습니다.
제가 “스님 소를 때리는 것은 거리가 멉니다”라고 답했습니다.
만약 마조 스님이 회양 선사에게 소나 수레를 때려야 된다고 했으면 너는 아직 안 됐다고 했을 겁니다.
그러나 마조 선사는 그 한마디에 뒤집어엎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깨달았습니다. 깨닫는 게 중요합니다.
모든 게 선이어서 선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비빔밥처럼 모두 선이라고 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선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선에는 범부선(凡夫禪), 외도선(外道禪), 소승선(小乘禪),
대승선(大乘禪), 최상승선(最上乘禪) 등이 있습니다.
범부(凡夫), 외도선 등은 선이 아닙니다.
최상승선이 바로 여래선(如來禪)이고 조사선(祖師禪)입니다.
이 자리는 깨치고 안 깨치고를 논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여래의 대각 자리를 그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역대 조사 스님들이 왜 '뜰 앞의 잣나무'나 불성이 ‘없다(無)’라고 합니까.
그분들은 대각의 이 자리에서 바로 전해줬습니다.
그 자리에서 심정 변화가 일어나 계합(契合)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안 되기 때문에, 깊이 생각하면 십 년이면 족하다는 것입니다.
이생에서 마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돈오(頓悟), 최상승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십 년 동안 해서 안 되면 내 목을 자르십시오.
그래서 오늘날도 수좌들이 선방에서 공부합니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이 행복하게 살자.
그러면 무엇이 행복한 거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합니다.
행복은 불행이 있기-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행복은 편안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불행한 것이냐 하면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고통이 없으면 행복합니다. 그러면 편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편안하냐. 이게 바로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라.
안심입명처는 마음이 편안함을 말합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요약하면 바로 안심입명처입니다.
우리 중생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욕심으로는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나 자신을 바로 알면 영원한 안심입명처를 얻는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영원한 행복을 얻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공부는 절대적으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극치에 달하면 한 글귀 깨닫습니다.
옛날에는 법문을 한다면 백 리 길도 걸어서 갔습니다.
오늘은 무슨 법문을 할까. 하고 걸어서 가면 법문을 듣고 바로 깨닫습니다.
그러나 법문을 들으러 오라고 해서 할 수 없이 가서 죽치고 앉아 있으면 들어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법문은 철저한 믿음으로 다 비워버리고 놓아버리고, 산승(山僧)의 말을 듣는 동시에
몰록 여러분의 사는 자리가 무너지고 부서지고 뒤집어져서 바로 깨달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주장자 세 번 내려치고)
어~억!
<질문>
▲ 스님께서 법문 도중에 게송을 읊으시면서
마지막에는 꼭 아미타불을 찾으시는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 천년 요괴가 몸을 벗어나니 다리가 붉은 다리가 왼발에, 머리에 쓴 모자도 없는데 한 무리더라.
▲ 깨치기 전과 후의 세계는 어떻게- 다릅니까?
* 나귀 다리는 짧고 노새 다리는 길다.
▲ “수레가 움직이지 않을 때는 소를 때려야 한다”라고 하지만
스님께서는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 구멍 없는 쇠뭉치요, 활활 타는- 불구덩이니라.
- 대원 스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