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맛
내 취미는 글쓰기다. 본격적으로 글을 쓴 지 이제 7년이 넘었다. 한동안 겸연쩍어서 취미로 글을 쓴다는 말을 못 했는데, 이제는 부담 없이 말하고 다닌다. 취미는 전문적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인데, 내가 그동안 취미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잘하느냐 못하느냐는 취미를 대상으로 할 얘기가 아니라는 것을 늦게 깨달은 까닭이다. 또 다른 취미는 글쓰기를 추천하는 일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글 쓰는 즐거움을 설파하는 글쓰기 전도가가 되어 있었다.
K의 이야기는 어쩌면 이 책을 쓰게 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몇 년 전, 나는 K에게 글쓰기를 권했다. 그는 같은 방송국 선배이자 방송계에서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아는 기획의 권위자다. 한국에서 BBC 다큐멘터리와 같은 수준의 다큐멘터리를 자주 볼 수 있게 된 것은 전적으로 K의 공이 크다. 방송뿐 아니다. 그가 이야기하는 ‘한 가지 본질적 속성에 집중하는 법’,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기획의 방법론’ 등은 여러 후배에게 깊은 통찰을 안겨 주었다.
나는 K에게 몇 차례 글을 써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비슷했다. “딱히 글로 할 얘기가 없다.” “너무 바쁘다.” 이 두 가지가 글을 쓰지 못하는 주된 이유였다. 그리고 K가 직접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가지 이유가 더 있었다. 바로 ‘글쓰기에 대한 엄격함’이다. 언젠가 K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글을 쓴다는 자체보다 내 글을 누구에게 드러내는 것이 두렵다.”
실제 K가 회사의 안과 밖에서 공개적으로 글을 쓴 것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적어도 내가 그와 직장생활을 함께한 15년 동안은 그랬다.
그러던 K가 2017년부터 본격적으로 글을 썼다. 정확히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나에게 “글을 쓰고 있다.”고 말한 때에는 이미 글을 쓰는 일이 그의 취미가 된 시점이었다. 더불어 그는 출간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책의 주제는 그의 전문 분야인 ‘기획’이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K는 글을 쓰면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인생에서 그 어느 시기보다 지금 가장 많이 책을 읽는다고 했다. 또 글을 쓰기 위해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은 물론 전에 없던 나름의 바지런 떠는 습관도 생겼다고 했다.
실제로 2018년 가을 K는 책을 펴냈다. 방송에 관한 전문서도, 개인 경험을 기술한 에세이도 아닌 경영서이자 사상서다. 《딜리트》(delete)라는 책의 제목처럼 K는 집필 과정에서 스스로 많은 것을 딜리트했다. 그 시작은 바로 ‘글쓰기에 대한 엄격함’을 제거한 것이었다.
☆ 글을 쓰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느낌
한번은 공공기관에서 근무하는 영양학 박사 P에게 책을 써보라고 권유한 적이 있었다. P는 처음에 “에이, 제가 어떻게 책을 써요.”라고 대수롭지 않게 응수했다. 그러더니 며칠 뒤 나에게 글로 쓰고 싶은 아이템을 문자로 보내왔다. 무려 세 가지였다. 아동이 요리로 할 수 있는 놀이 활동, 아동 편식 개선법, 그리고 자신이 평소 좋아하는 그림에 관한 이야기. 아동에 관한 두 가지 주제는 자신의 업무와 관련이 있었고, 나머지는 개인 관심사에서 뽑은 주제였다. 이처럼 내 주변만 보아도 대부분 글쓰기에 대한 실행 의지가 없을 뿐이지 욕구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글쓰기에 흥미를 보인 사람 중 대부분이 뒤돌아서는 순간 어제와 같은 일상으로 무심하게 돌아간다. 욕구가 의지로 넘어가기 전에 흥분이 식어서 그렇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욕구를 누르는 압력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압력을 느끼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큰 원인 중 하나는 글쓰기에서 느껴지는 무게감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글을 쓴다고 하면 곧 책을 내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떠올린다. 물론 이런 인식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글을 책으로 펴낸다는 것은 오히려 좋은 동기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종종 기대를 빗나간다. 걷기에 비유해 보자. 처음 나서는 길이 동네 산책이 아니라 수천 킬로미터의 대장정이라면? 아마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책을 쓰는 여정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일단 글을 쓰기 시작하고 쓰는 과정에서 쾌감을 맛봐야 지구력도 생긴다.
또 하나, 책이라는 생산물에만 집착하면 글쓰기는 해치워야 하는 숙제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렇게 되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오는 즐거움은 점점 멀어진다. 결과와 평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야 진짜 글쓰기의 맛을 느낄 수 있다. < ‘일단 오늘 한 줄 써봅시다, 평범한 일상을 바꾸는 아주 쉽고 단순한 하루 3분 습관(김민태, 비즈니스북스, 2019)’에서 옮겨 적음. (2020.10.18.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