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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입주가정교사 이야기
1971년 봄~1972년 여름까지의 과외 아르바이트
내가 대학생 시절에 과외교사를 2년간 했었다
그 시절에는 아주 부잣집 자식이 아니면 대충 그랬다
부잣집이라고 하더라도 고생을 해봐야 한다며
과외교사를 하는게 통상적인 일이었다
1971년 1학년 때에는
친구 고종사촌 여동생과 친구들 4명해서
모두 다섯명의 여학생 들을 몇 달 가르쳤다
동대문여중 3학년 학생 들이었다
제기동에 사는 여학생 집에서 공부를 했다
내가 공릉동에 있던 교양과정부를 다녔기 때문에
방과 후에 청량리까지 스쿨버스를 타고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제기동까지 갔었다
거기서 서울사대 담을 끼고 올라가야 했다
여학생 들이라 시기심이 강해 내 속을 썩였다
두 달인가 세 달만에 때려 치우고 말았다
여자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걸 그 때 배웠다
이어서 아버님 이종사촌 아줌마의 아들을 가르쳤다
지금 정부종합청사 뒤 광화문 내수동에 빌딩을 갖고 있었다
그 꼭대기층이 살림집이었는데 그리로 몇 달을 다녔다
영어를 확실하게 마무리해 주기로 약속을 하고 다녔다
그리고 여름방학 때부터는 고등학교 때 사귀었던 여학생
그 여학생의 남동생을 가르치게 됐다. 중2였다
상도동에 있는 여자친구네 집으로 다녔다
그렇게 그 곳에서 다음해 여름까지 과외교사를 했다
아버님이 건설회사 전무셨고 유복한 집안이었다
1972년 중3 여름방학이 되자 그룹과외를 하겠다고 했다
당시 공군사관학교 교장하던 분 아들과 절친이었는데
몇 명이 모여서 그룹과외를 시작한다고 했다
친구동생의 가정교사 요청
그리고 잠시 쉬고 있었는데,
중1때부터 절친이었던 친구집엘 가게 됐다
우리보다 두 학년 아래인 동생이 마침 고3이었는데
뭔가를 내게 가져와서 진지하게 물어 보았다
아는 데까지 성의껏 가르쳐 주었는데
며칠 있다가 친구한테서 연락이 왔다
동생이 부탁하는데 네가 와서 공부를 좀 봐줘야겠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잘 가르치더라 그런 말이었다
워낙 절친이라서 조금 망설여졌다
물론 부모님들과는 두말할 것도 없이 잘 아는 사이였고...
부모님과 의논하니 네가 알아서 하라고 하셨다
과외공부가 시작되고, 친구는 입대
친구네를 다녀온 뒤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과외공부
얘기가 나오고 나서 바로 과외공부를 시작했고,
얼마 안 있어 친구는 예정된 입대를 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승마를 해서 특기병으로 입대했다
논산훈련소 기본훈련을 마치고 나면
바로 육사 승마교관으로 부임하기로 예정돼 있었다
친구가 승마 국가대표선수였다.
여러번 국제대회에도 나가고 그랬다
다른 한 명의 고등학교 동기 승마선수와 함께였다
그 친구는 내가 다녔던 학교 재단이사장이 큰아버지였다
그리고 아버님이 한국승마협회를 만든 분이셨다
형님은 로마올림픽에도 참가하셨다고 했다
셋이서 함께 고교시절 공부도 같이 하고 그랬다
주로 시험기간 중에 함께 모였다
그 친구네 집도 장충동에 어마어마한 저택이었다
그 친구도 나중에 미국 LA쪽으로 이민을 갔다
역촌동 친구네 집으로 입주
1972년 당시 나는 수원으로 기차통학을 하고 있었다
공덕동에서 버스를 타고 영등포역으로 가서 기차를 탔다
수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다시 서울역까지 기차를 타고와서
버스를 갈아타고 역촌동으로 갔다.
과외공부가 끝나면 공덕동 집으로 왔다
며칠 그렇게 다니던 중에 친구 부모님께서 부르셨다
너무 힘들어 보인다. 그러지 말고 아예 이 곳으로 오너라
마침 둘째도 입대를 했으니
네가 그 방을 써라 그렇게 말씀해 주셨다
그 집 식구들은 모두 각자 방이 있었다
친구방도 엄청 넓었고, 침대도 있었고
내가 지내기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하고
짐을 싸서 친구네 집으로 가게 됐다
그리고 역촌동에서 수원으로 기차통학을 시작했다
마침 친구와 내가 덩치도 비슷하고 해서
그 날부터 친구방 옷장의 옷이 모두 내 옷이 됐다
3년 복무하고 나오면 다 헌 옷이 될터이니
네 옷으로 생각하고 맘대로 입으라고 하셨다
친구네가 새로 신축해서 이사했던 집
원래 친구네는 효자동에서 살았고 우리는 통인동에 살았다
서로 맞붙은 동네다. 매일 아침 함께 걸어서 등교를 했다
안국동을 거쳐서 학교까지 30분 남짓 걸어가면 됐다
친구 아버님은 은행 지점장을 하셨는데
가장 요지라는 광장시장 옆의 동대문지점이었다
나중에는 본점으로 옮기셔서 중역을 하셨다
아버님은 평양고보를 졸업하셨고,
어머님은 대구 신명여고 출신이셨다
우리가 고3시절, 효자동 집은 그대로 비워둔 채로
당시 신개발지였던 역촌동에 450평의 땅을 사서
한양공대 건축과를 졸업한 형님의 설계로
어마어마한 3층짜리 대저택을 지으셨다
그 곳에서 서오능이 멀지 않았고
바로 앞에는 예일여고란 여학교가 있었다
1층에 형이 쓰는 커다란 공간이 있었다
음악실도 있고 서재도 있고 침실도 있고 널찍했다
음악실에는 고급 오디오시설과 더불어
클래식 판이 무려 2천장이나 소장돼 있었다
1층의 반정도는 창고나 수납공간 등이 차지했었고...
널찍한 계단을 외부에서 바로 올라가면 2층이었는데
앞쪽에 아주 넓은 테라스같은 공간이 있었고
커다란 유리문을 열고 들어가면 거실겸 주방, 식당,
안쪽으로 안방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 방이 있었다
뒷쪽의 계단을 통해 3층으로 올라가면
형제들 방이 복도 양쪽으로 배치돼 있었다
층층이 목욕탕이 있었고
안방 안쪽에는 부모님들만 쓰시는 욕실이 있었다
그리고 넓은 옥상에는 휴식공간과
갖가지 운동기구들이 있었다
골프연습도 할 수 있었다
형은 아마추어 대학생 골프대회 우승자였다
10월유신과 역촌동에서의 과외수업
그렇게 그 곳에 가서 지내며 통학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10월16일인가 10월유신 사태가 터졌다
다음 날부터 2학기 내내 휴강이 이어졌다
대학 캠퍼스마다 군인 들이 주둔했다
학교엘 가고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친구집의 내 방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친구옷 입고 외출할 일도 별로 없었다
어쩌다 심심하면 서대문에 있는 화양극장엘 갔다
평일날 낮에 가면 관객이 별로 없어 썰렁했다
대부분은 친구동생 가르칠 내용을 정리하고
또 내 전공에 관한 공부도 하고 그랬다
내가 맡았던 건 영어과목이었다
따로 단어장도 내가 만들어 주고 그랬다
동생이 다른 과목 공부에 워낙 바빴기 때문이었다
다른 과목도 질문을 하는대로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다른 과목 들은 시내의 유명학원과
학교선생님들한테 따로 과외를 받고 있었다
동생이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오면
내가 이어서 가르쳤다
주말에도 늦잠을 자고 일어나 가르치고...
딱할 정도로 공부에 시달렸다
그래도 동생이 몸이 건장하고 유도 유단자였다
다행이 학교 성적도 올라가기 시작했다.
특히 영어과목 성적이 괄목할만하게 올랐다
부모님 들께서 무척 좋아하셨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예비고사를 거쳐 본고사까지
무사히 시험을 치렀다. 나도 시험장엘 갔다
1차로 지원했던 고대에는 실패하고
2차로 성균관대학교에 합격했다
그래도 친구 부모님들께서 무척 기뻐하셨다
과외비
과외비에 대해서는 전혀 얘기한 적이 없었다
그냥 봉투에 담아 주시는대로 받았다
오히려 더 많이 못줘서 미안하다고 하셨다
마지막 달에는 날도 안 채웠는데 한 달치를 받았다
그때 과외비로 매달 2만원씩을 받았는데
당시 막 결혼을 했던 매형이 만오천원을 받았다
세금 떼고 만삼천 얼마를 갖고 온다고 했다
수원 원예시험장에 당시로 5급공무원이었다
또 당시 우리대학 한 학기 등록금이 2만7천원이었고
이듬해 기숙사에 내려가니 한 달 식비가 6,600원이었다
하루에 220원 꼴이었다
2만원이면 기숙사 식비 석달치 몫이었다
짜장면 한 그릇에 아마 80원이었을 것이다
역촌동에서의 일상생활 이야기
거기서 반년 남짓 생활하면서 많은 걸 배웠다
아버님께서 정기구독하시던 뉴스위크와 타임지
해묵은 잡지 들을 들고 올라와 열심히 읽었다
형님이 구독하시던 건축계통 일본잡지도 있었다
공간이라는 잡지였는데 거기서도 많은 걸 배웠다
사진을 좋아하셨던 두 분이 보셨던 사진잡지
일본에서 발간된 아사히카메라라는 잡지도 보았다
사진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넓은 집안에 텃밭을 일구어 농사도 지었다
김장용 배추와 무우를 심었는데
내가 시간이 제일 많이 나는 관계로 밭을 돌봤다
시골출신 일하는 아주머니와 처녀의 도움을 받았다
수확하던 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엄청나게 크게 자란 배추와 무우를 뽑아서
집안 창고로 옮겨 놓고 가슴이 뿌듯했었다
온 식구들이 다 모여서 함께 수확을 했다
당카라는 것을 만들어서 열심히 날랐다
내 덕분에 잘 컸다고 아버님께서 칭찬을 해 주셨다
집안에 농구틀도 설치해 놓고 농구도 했다
형님과 둘이서 야구공을 받기도 했다
대식구였던 관계로 늘 부산했던 집안
그리고 집안에는 늘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그 속에서 어울리면서 사회생활도 배웠다
부모님, 형님, 누님, 남동생2, 여동생, 그리고 나
거기다가 일하는 사람들이 세 명 더 있었던 대가족이었다
한 명은 장도 보고 하셨던 어른이었고
나보다 약간 어린 처녀가 집안 일을 많이 하였고
작은 꼬맹이가 이런저런 잔심부름을 다녔다
우리 들은 중고등학교 동창생
남동생 둘은 모두 나와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내 친구까지 3형제가 같은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어머님이 학교에 오시면 칙사대접을 받았다
치맛바람이 좀 센 어머님이셨다
그 바람에 나에 대해서도 아주 소상히 알고 계셨다
내 친어머니보다도 오히려 더 잘 알고 계셨던 거 같다
학교에 오시면 나에 대해서도 꼭 물어보셨다고 한다
나에 대한 믿음이 아주 강하신 분이셨다
과외교사 일도 어머님의 입김이 80%정도는 작용했을 터였다
몇 주간 기차통학을 할 때
내 도시락반찬에도 엄청 신경을 써주셨다
학교 친구들이 그랬다. 너 도시락 반찬이 확 달라졌다고...
1973년 3학년 때는 수원으로 내려가 기숙사생활을 했다
열심히 전공공부를 했던 3학년을 마치고 드디어 입대하였다
휴가를 나오게 되면 친구 부모님께 꼭 인사를 다녔다
내 결혼식 때는 아버님, 친구, 친구동생 그렇게 셋이 왔었다
친구와의 해후
친구는 1985년에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
이후 1988년 서울올림픽 때 호주 승마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
또 1993년 내가 호주 시드니로 출장가서 사는 집까지 방문
그리고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 귀국, 딱 세 번 만날 수 있었다
친구 아버님 돌아가셨을 때는 3일을 가서 꼬박 접수를 봤다
마지막 납골당 모시는 절에 까지 따라 갔었다
어머님께서 내 손을 꼭 붙잡고 정말 고맙다고 하셨다
친구와 친구네 식구들을 만난 건 그 때가 마지막이다
친구동생과의 꿈같았던 미국생활
친구가 호주이민을 가고 나서
친구동생이 미국 LA에 있는 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그 때쯤해서 내가 마침 릴리 본사에 근무하고 있었고
4개월간 영업실습을 위해 1987년 LA지역으로 가게 됐다
친구동생네와 겨우 5마일 떨어진 곳에 아파트를 얻었다
한 집안 식구처럼 매일 붙어서 살았다. 행운이었다
동생부인은 나더러 아주버님, 집사람을 형님이라고 불렀다
솜씨가 있어서 늘 내 머리도 깎아주고 그랬다
친구동생과 나머지 두 아들 들 머리도 다 깎아 주었다
아이 들도 나이가 엇비숫했다
LA인근 명승지를 함께 놀러 다녔다
코리아타운에 장도 함께 보러 다니고, 식당에도 함께 갔다
샌프란시스코, 샌디에이고, 옥스너드, 레돈도비치,
갈 수 있는 곳은 거의 다 휘젓고 다니며 즐거웠다
매직마운틴, 디즈닐랜드, 넛스베리팜, 그 밖에 여러 곳
기억조차 다 나지 않는다.
우리 아파트가 유니버살 스튜디오 바로 옆에 있었다
저녁 식사후 차를 끌고 할리우드로 산책을 다녔다
베버리힐즈의 저택들도 구경다녔고, 스타거리를 거닐었다
친구동생네가 곁에 있어서 든든했다. 거기 주민이었으니까
저녁도 거의 매일 함께 먹었다
나중에 귀국해서도 아주 가깝게 지냈다
친구네 식구 들과의 후일담
지금 어머님은 호주에 가서 내 친구네서 사신다
내가 가르쳤던 동생네도 나중에 호주로 이민을 갔다
막내 여동생도 친구가 사는 시드니에서 산다
삼남매가 친구를 필두로 줄줄이 이민을 갔다
이 곳에는 형님과 누님 그리고 남동생 하나가 산다
형님은 현대건설 중역까지 하시고 은퇴를 하셨다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 사신다
누님은 연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하셨고
매형은 금융회사의 중역을 지내셨다
누님과 같은 연대 상대를 나오신 분이다
장인과 사위가 서로 다른 라이벌 은행에 근무했었다
내가 친구네 가서 있을 당시 막 결혼을 하셨는데
늘 친정집에 와서 살다시피 했다
처갓집으로 퇴근을 해서 저녁을 함께 먹었다
모두 정말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이다
한 식구나 마찬가지였던 분 들이다
아버님께서는 은퇴 후에 양돈업을 시작하셨다
일산 근처 봉일천이란 곳에 땅을 사셔서 시작하셨다
나중에는 맨 아래 남동생이 모든 걸 다 물려 받았다
그 곳 친구네집 역촌동에서의 6개월간의 생활로
나는 그 집 식구들과 가족같은 관계가 되었다
마침 10월유신으로 학교도 폐쇄되고 휴강이라서
하루 24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했다
자연스레 어머님, 형님, 동생 들과 대화를 많이 했다
명절이나 식구들 생일날이나 그런 날이면
날 꼭 넓은 안방으로 불러서 합석시키셨고
찾아온 친척 분 들에게도 일일이 소개를 해 주셨다
그러면서 농담으로 나를 둘째 아들이라고 하셨다
아버님은 벌써 돌아 가셨고,
지금은 어쩌다 보니 어머님 소식을 놓친지 몇 년 되었다
부디 오래오래 사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호주가서 사는 3남매도 모두 잘 살기를 바란다
이 곳에 남은 3남매도 늘 건강하시기를 바란다
첫댓글 실력이 있으시니 가정교사도 하셨군요.
본인의 열공 덕이겠지요.
지나간 과거 글 잘읽고 갑니다.
실력은 아니고 열심히 공부했지요
그리고 주위에 좋은 분 들을 여럿 만났습니다
내게는 다 부모님처럼 잘 해 주신 분 들입니다
지금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때에 가정교사가 있었습니다
나는 시간제 가정교사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런데 가정교사의 학교에 따라서 각자 실력이 차이가 납디다
나는 언젠가는 친구 집에서 새로운 가정교사에게서 배우다가 이틀만에 도망간 적두 있습니다
내친구도 우리집에서 함께 가정교사에게서 배우다가 한달만에 도망간적두 있구요
나 대학 다닐때 같은 대학을 다니는 내 친구도 가정교사를 한적이 있는데 한군데에서는 실력이 딸려서 짤리고
또 한군데에서는 수업료를 안주어서 그만 두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결론은 실력이 있어야지 가정교사도 할수 있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위 글을 쓴 청솔님은 좋은 대학교를 다녔구 실력도 있는 분인거 같습니다
맞습니까?
충성 우하하하하하
저는 비교적 순탄하게 가정교사를 했습니다
거의 과외비 받은 걸로 학비를 충당했습니다
3학년 때 기숙사비도 제가 저축했던 돈으로
모두 충당했을 겁니다
그 시대에는 알바하면 과외였지요
좋은 시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
맹~호!
청솔님 글은 읽다보니
사실 공부만 일등했다고
가정교사가 일등은 아니더라고요
저도 잠시 서울유학파 선배님들
세분이 잠시 절 도와주셨는데
요령껏 암기력이 특이한 분이
계시더군요
청솔님은 그런 실력을 갖추셨던 분 같아요
인기 과외 교사.ㅎ
치마바람 얘기에서 잠깐
아이들 초등학교때
우리집에 학부모들이 많이 놀러왔는데 그때 치맛바람 유행어
앞집 소년이 학부모들이 다녀가고
절보고 아주머니
저분들이 모두 치마를 입어서
치맛바람이라고 하나요?
그때 내가 황당한 질문에
한바탕 웃던 기억이 나네요.
청솔님의 지난 삶이야기
고급스러움이 느껴집니다.
늘 행복하세요.
제가 수학, 물리, 화학은 젬뱅입니다
그 과목들 부탁받았으면 안 했을겁니다
단 국어, 영어, 독일어, 지리, 역사
지학, 생물, 그런 과목은 자신있었지요
특히 국어와 영어
영어는 중1때부터 과외를 받았고
중2때부터 시작해서 EMI라는 학원에 가서
안현필씨가 지은 영어실력기초,
삼위일체영어 등을 마스터했지요
중고등학교 영어의 맥을 안다고 할까요?
영어실력의 70%는 암기입니다
단어와 숙어를 누가 많이 아느냐?
그 다음에 구문론이지요
그 것만 마스터하면 겁날게 없습니다
단어 외우기에 어려워하지요
단어도 요령있게 외워야 합니다
동사, 명사, 형용사를 함께
같은 계열의 단어를 세트로 외워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덜 들고 오래 기억됩니다
낱개로 외우려면 품이 많이 듭니다
아는체해서 죄송합니다. ^^*
대학 시절 가정교사
아무나 하진 않지요~
좋은 대학 다니거나
교수법이 좋거나 그래야
제대로 가정교사를 하지요~
청솔님은
좋은 대학은 보증됐고
교수법은 어땠을까 궁금해요~ ^^
가정교사 했던 댁과
좋은 인연을 이어가신 거
좋게 보여요~
제가 뵐쩌게
청솔님의 교수법은 이랬을거에요
ㅋㅋ
청솔님은
애들보다 분명 학부형들이 좋아하는
선생님이셨을거에요
착실하고
꼼꼼하고
알아들을때까지
설명하실것같은~~~~~
@온유
청솔 님이 아직
교수법에 대한 얘기 안 했지만~
만일 학부형이 좋아하는 가정교사였다면
혹시...
장래 사윗감으로??
드라마에 나오는 것처럼요~^^
네 제가 영어를 가르치면
학생들이 매우 즐거워 했습니다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지요
단어와 숙어를 다 외우고나서
구문론을 알고나면
어떤 지문이 나와도 술술 풀리니까요
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국어와 영어는 외우는게 70%입니다
네 대충 다 아는 집 들이라서
좋고 나쁘고 할 것도 없었습니다
다들 제게 너무 잘 해 주셨지요
과외비도 후하게 주시고
여러가지로 신경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행운이었다고 생각하구요
너무너무 고맙게 생각합니다
복 받은거지요 ^^*
@두용 일단
빡시게 가르치셨을거 같다는.......
ㅎㅎ
@온유 부모님들만 좋아하시면 안 됩니다
학생들이 이해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학생들이 아하! 하고 고개를 끄덕여야
비로서 잘 가르칠 수 있습니다
끈질기게 설득해야 하구요
반드시 할 수 있다는 믿음
나만 믿고 따라오면 된다
그런 신뢰감을 줘야 합니다
한 달 공부하고 시험보면
점수가 확 오르거든요
그 때부터는 저절로 됩니다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지요
더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
@온유 빡시게 아니구요
재미있게 가르쳤습니다
제가 배웠던대로...
EMI 학원에서 배웠던대로
김광의 선생님, 고인홍 선생님
그 분들 프린트물을 보고 가르쳤지요
고인홍선생님은 나중에
등용문이라는 기숙학원을 만들어서
크게 성공을 하신 분입니다
영어 정말 잘 가르치셨지요
제가 이 두 분들을 기초로 해서
제 특유의 비법까지 해서 가르쳤지요
학생들 성적이 많이 올랐습니다
@청솔
@청솔
청솔 님 교수법 듣고 나니까
지금 당장
제가 영어 과외 받고 싶어지네요~
영어를 못해서
한이 맺혀 있거든요~ ㅎㅎㅎ
@두용 지금은 중단했지만...
한동안 제가 영어게시판에 글을 올렸습니다
매일 한 개씩...
거기 초창기에 올린 거 보시면
영어공부하는 요령에 대해
상세하게 써 올린게 있습니다
관심있으시면 한번 가서 보시기 바랍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실지 모르겠습니다
3월15일~5월7일까지 올렸네요
학생들 수험용이 아니고
성인들 영어회화를 잘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잘읽고 갑니다.
입주과외로 학창시절을 보낸 저지만
당시의 대학생활을 다양하게 소개하셨네요.
타임캪슐에 묻어두고 오래 뒤에 볼 글입니다.
난석선배님도 입주과외를 하셨군요
반갑습니다
대학입학하고 2년간 알바를 했지요
3학년때는 기숙사에 들어가 공부했구요
마지막 1년 군제대 후에 복학해서
정말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덕분에 지금 먹고 사는 거 같습니다
지금 다시 되돌아보니
참 먼 길을 걸어 온 거 같습니다
인생이 결코 짧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그 시절엔 괴외가 무성할 때이였지예
그나마 좋은 인연으로 만나서 좋은 관계로 이어지신 해문이네예
울집애 수험생 때두 서울대생 일주일에 두번 독선생님으로. 오셨쥬
그래서인지 유학생으로 영어강사 자격증 따왔드라구예
바이오오몬은 통역하는정도로 안착
한 동 아파트 고3 수험생 가르져 달라고해두 직장인 휴일은 꼭 쉬어야 한다고라고예
맞습니다
그 시절엔 너도나도 과외교사 했습니다
저는 조용히 잘 한 편입니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수원까지 통학 하시느라 시간을 다 뺏겼을텐데
참 엘심히 하셨군요
성실함에 친구부모님도
대견하게 잘 보셨구요
우리얘들은 논술 고사 과외를 했는데 제가 데리고 가고 끝나면 데리고 오고 했답니다 청솔님 의 특유의 영어 교수법이 유명한
연속극 일타 강사 같으셨을것 같군요
친구 부모님들은 중1때부터
저를 아주 잘 아셨지요
저를 아주 대견해 하셨습니다
제 집사람도 애를 실어 날랐습니다
미술학원으로 사탐, 과탐으로
영어, 수학으로, 정신이 없더군요
영어강의는 제가 배웠던대로
EMI 김광의선생님과 고인홍선생님
두 분의 프린트물을 기초로 해서
최신판 참고서를 하나 선정해서
꼼꼼하게 훑었습니다
운좋게 결과가 좋게 나왔지요
감사합니다
다양하신 경력과 함께 정으로 자리 매김을 한
가족과 같은 분위기 읽을 수록 부러워지네요 ㅎㅎ
저는 알바 를 철 공소 에서 했답니다
사회에 나가면 필요한 것이기에 선반도 돌려보고 용접도 하면서
학교에서는 이론을 알바 에서는 실기를 그렇게 배웠답니다
지금은 기계공학에 여성들이 있지만 당시에는 여성들 구경하기가 힘든 공과 였고
사회에 나와서도 여성들과 함께 일하는 곳이 아니라서 여성들이 일하는 곳에
취업한 동기 생 들을 많이 부러워 하고 그랬답니다
청솔 님의 글을 읽으며 학창 시절을 떠올려 봅니다 감사합니다^^
그냥 당시 대학생들의 대표적인 아르바이트
과외교사를 했던 경험이지요
주로 인연이 닿는 분 들과 했던 거 같습니다
행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셨군요
철공소일이 참 힘들지요
저도 군대생활을
기갑부대에서 해서 조금은 압니다
더구나 정비과에서 차량계를 했으니까요
우리 정비과에 용접병도 있었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더라 그게 입소문이고 실력이라
옷도 마음대로 꺼내입고 고생보다 재미있어보입니다.
거금의 과외비도 받았네요.. ..
내 설명이 맘에 들었었나 봅니다
제 친구한테 신신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그 형하고 꼭 같이 공부하고 싶다고...
그 애가 초등학생일 때 처음 봤지요
맹장염으로 적십자병원에 입원했을 때
친구랑 함께 병문안도 갔었습니다
그 때가 우리 중2때인가?
과외비는 대충 그 선에서 받았습니다
여러명 가르치면 더 받았구요
1인당 5천원씩...
감사합니다
부러움을 안고 같은 시대를 살아 온 경험으로 슬그머니 끼어 봅니다
저는 고등학교 졸업 후 공무원 시험을 봐 말단 공직에 근무하다가 2년 후 제1회 대학 예비고사를 보고 야간대학. 법학과를 다녔습니다
주경야독인데 야독은 제대로 못하고 주경만 열심히 하여 모범공무원으로 뽑히기도 하고...
근데 입주 아르바이트가 제 월급보다 훨씬 많으셨네요
유신이 터질때가 대학 3학년 말인데 학점도 많이 놓치고.워낙 공부한게 없어서 제때 졸업이 불투명 해져 공무원 사표를 내고 얼만 안되는 퇴직금을 밑천 삼아 공부에 전념하여 겨우 졸업 하였지요. 근데 머리도 안좋고 병마까지 얻어 겨우 졸업만 하고 목적한 시험은 중도 포기 하였답니다
님의 글을 읽으며 참 열심히 잘사셨구나 감탄을 하였습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회원정보를 찍어보니 저보다 2년 선배시네요
10월유신 때가 저 대학2학년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는 다 어렵게 살았지요
저도 남들 하는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도 좋은 분 들을 만나 행복했습니다
주위에서 많이들 도와 주셨지요
법학을 전공하셨으면 고시파인데
고시를 패스하셨으면 좋았을 걸 그랬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문과생이었는데
고3 올라가며 이과로 바꾸었습니다
눈높이를 낮춘거지요
후회는 없습니다
평생을 전공으로 먹고 살았으니까요
잘 살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는 살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누구나 다 그랬을 것입니다
따뜻한 댓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빕니다
@청솔 감사합니다.
저는 평생 인관관계가 서툴러 고생 하였는데 주변인들과 좋은 관계를 평생 유지하셨네요.
가장 부러운 부분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조심하고 양보하고 손해보고를 평생 해 왔는데 성격이 소심한 탓이겠지요 그러다 한번씩 터지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일을 키우고...
여유롭고 넉넉한 품성을 가진 분이 가장 존경스럽습니다
@해피워킹 누구나 인간관계가 제일 어려울 것입니다
나와 남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겠지요
그 차이를 좁히는게 쉽지 않습니다
늘 갈등하고 아웅다웅
붙었다 떨어졌다 그러면서 사는거지요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조금 멀어지면 언젠가는 다가오겠지
지금 가까우면 언젠가는 또 떨어지겠지
그런 마음으로 편하게 지내려고 합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해피워킹님 심성이 참 고와 보이십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