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만석은 진주강씨 참판공파의 후예로서 증조부는 강수곤인데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의 이종사촌 동생이었으며,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으로서 벼슬은 돈령부 첨정이었다. 조부는 강선경으로 목천현감을 역임하였으며 부는 강원희로 한성판관에 이르렀다. 17세기초인 1622년(광해 14)에 출생하여 1699년(숙종 24)에 서거하였으니 17세기에 태어나서 17세기에 생을 마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강만석의 부인은 전주류씨 문중의 후예로서 선조 대에 영의정에 이르렀던 류영경의 현손녀이며, 증조부는 현감을 역임하였던 류열이다. 선조의 딸 정휘옹주와 혼인한 전창위(全昌尉) 류정량은 조부가 된다. 부는 예조참판을 역임한 전평군(全平君) 류염인데 이러한 가문과 강만석이 혼인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강만석의 가문도 당시의 위세가 대단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강만석과 관련하여 한가지 흥미로운 일화가 전해지고 있으니 그것은 송시열과 인연이 있다는 것이다. 진주강씨 참판공파 족보에 의하면 송시열이 강만석을 별군직(別軍職)에 천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고 1664년(현종 3) 43세에 당당히 무과에 급제하였다는 것으로 볼 때 범상치 않은 기개를 엿볼 수 있다.
무과에 급제한 이후 강만석은 다양한 벼슬을 하였는데 대표적인 벼슬은 흔히 병사라고도 불리우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였다는 사실이다.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는 육군을 지휘하는 장군으로서 오늘날의 군단장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승정원 일기에 의하면 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를 역임하였다는 것인데 이런 사실을 통하여 당시 군부에서의 강만석의 위상을 어느 정도 유추해 볼 수 있다.
송시열이 1607년(선조 40)생이니 강만석이 15세 연하라고 할 수 있는데 송시열이 어떤 경위에 의하여 강만석을 천거하였던 것인지 그 배경이 궁금하게 생각된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대목이 있으니 외삼촌이 생전에 강만석을 언급하였다는 것이다. 외삼촌은 강만석과 관련하여 평택을 언급하였는데, 특히 병판공으로 불리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여기서 병판은 병조판서를 일컫는 것인데 실제로 현직에 있었던 것은 아니고 서거후에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외삼촌이 말씀하신 평택은 요새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현재 평택시 안중읍 성해리 행락동을 지칭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당시에 강만석이라는 이름은 선명히 각인되었지만 평택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자세히 몰랐던 것이다.
강만석의 벼슬과 관련하여 서두에서 대표적인 벼슬을 소개한 바 있으나 승정원 일기에 근거하여 주요 벼슬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안동판관을 비롯하여 영흥부사,회령부사.도총관,부총관,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남병사(南兵使),북병사(北兵使),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등등인데, 이러한 벼슬들을 통하여 당시 조정에서 강만석의 위상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벼슬을 역임하였던 강만석은 17세기의 마지막에 해당되는 1699년(숙종 24) 1월 10일 세상을 떠났다.그러나 안타깝게도 80평생에 이르는 생애에 비추어 볼 때 강만석에 대하여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강만석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행적을 추적하는데 혼신의 힘을 쏟을 것이다. pgu77@naver.com
*필자/문암 박관우.작가.칼럼니스트.<역사 속에 묻힌 인물들>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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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위의 칼럼은 브레이크뉴스에 외11대조부이신 강만석 선조의 생애를
소개한 칼럼입니다.
사실 본래 이 칼럼을 올릴 계획이 없었는데, 조금전에 영감이 떠올라 올리게
되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으나 문암의 11대조부와 외11대조부께서 무인 출신
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군의 지휘관이었다는 것인데, 강만석 선조는 현재의 군단장에
해당하는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셨으나 박춘학 선조도 지휘관을 지내신 것으로
보이나 오늘날의 어느 계급에 해당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브레이크뉴스에 강만석 선조를 소개한 칼럼을
올리게 된 것입니다.
2024년 6월 10일(월) 문 암 올 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