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오랫동안 우리는 신이 바깥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 믿음은 우리의 그리움을 긴장하게 만들었다.
인간을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 신에 대한 그리움이므로 그 상황은 우리를 너무도 외롭게 한다.
우리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우리가 가진 신에 대한 그리움이다.
따라서 그 그리움은 영적인 것이고, 무한한 깊이를 지니고 있다.
그리움을 멀리 있는 신에게 맞춘다면, 그것은 자신의 그리움을 불필요하게 긴장시키는 일이다.
그러면 그 그리움이 멀리 있는 신을 향해 뻗어나가야 하는 일이 자주 일어난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을 너무 긴장시키기 때문에 좌절과 허무, 또는 부정적인 태도로 돌아가게 만든다.
그것은 그대의 예민한 감성을 파괴할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에 대해 긴장할 필요가 없다.
만일 육체가 영혼 속에 있고 영혼이 신의 근원이라고 우리가 맏는다면, 신은 온전히 이곳에 있고 우리 가까이에 있다.
육체는 영혼 속에 있기 때문에 감각은 영혼으로 가는 출발점이다.
그대의 감각이 세상을 향해 열려 있을 때, 감각이 만나는 첫번째 존재는 그대의 영혼이다.
관능적이거나 감각적이 된다는 것은 곧 그대의 영혼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했듯이, 감각은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의 존엄성을 입증해 준다.
감각을 통해 그대 안의 세계와 바깥 세계의 신성함이 그대 가까이 연결된다.
감각에 자신을 맞출 때, 경직된 믿음은 유연해지고 굳어진 시각은 부드러워진다.
감각은 그대를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서로를 분리시키는 장애물인 위축된 느낌을 따뜻하게 치유한다.
그때 그대는 언제나 비밀스럽게 그대 안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신의 세계로부터 더 이상 추방되지 않는다.
감각 기관들은 언제나 함께 작용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감각들은 서로 섞인다.
사람들이 색깔에 대해 보이는 서로 다른 반응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색이 단지 시각적으로만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준다.
첫번째로 생각할 감각은 보는 것, 곧 시각이다.
인간의 눈은 인간 존재의 강렬함이 고도로 집중된 매우 독특한 곳이다.
우주는 인간의 눈에 자신을 가장 잘 비추고, 또 그곳을 통해 일체감을 발견한다.
산조차도 눈을 갖는 꿈을 꾼다고 나는 상상하곤 한다.
눈을 뜨는 것은 밤에서 새벽이 열리는 것과 같다. 눈을 뜰 때 새로운 세계가 거기 있다.
눈은 또한 거리의 어머니다.
눈을 뜰 때 눈은 다른 사람들과 세계가 우리 바깥에 있고, 우리로부터 떨어져 있음을 보여 준다.
서양 철학을 애태운 것은 주체와 대상을 하나로 만들려는 갈망이었다.
주체를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아마도 거리의 어머니인 눈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의 대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무한과 연결된다.
하나의 대상은 무한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다.
또한 거리의 어머니인 눈은 매우 훌륭한 방식으로 우리의 바깥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신비에 놀라움을 갖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눈은 또한 친밀함의 어머니이며, 모든 것을 우리 가까이로 가져온다.
진정으로 무엇인가를 응시할 때, 그대는 그것을 그대 안으로 가져오는 것과 같다.
바라봄이라는 신성한 세계에는 아름다운 영적 경험이 깃들었다고도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바라봄의 반대는 침범하듯 노려보는 것이다. 누군가 그대를 노려볼 때 그의 눈은 폭군의 눈이 된다.
그리하여 그대는 자신을 모욕하고, 도발하고, 위협하듯 노려보는 눈길의 대상이 된다.
그대가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깊이 바라볼 때, 그것은 그대의 일부분이 된다.
이것은 텔레비전이 가진 나쁜 점 중 하나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공허하고 거짓된 모습을 바라본다.
그리하여 그 빈곤한 모습들이 내면 세계를 가득 채운다.
오늘날 전자 매체의 세계와 이미지들은 플라톤이 보여 준 뛰어난 동굴의 비유를 떠올리게 한다.
발목에 쇠사슬이 채워진 재수들이 일렬로 앉아 동굴의 벽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 뒤쪽에 있는 불빛이 동굴 벽에 그들의 모습을 비춘다. 동굴의 벽을 보면서 죄수들은 그것이 실체라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은 벽에 비친 자신들의 그림자일 뿐이다.
텔레비전과 컴퓨터 속 세상은 텅 빈 그림자의 나라다.
그대를 응시하는 어떤 것, 고요함과 깊이가 있는 어떤 것을 바라볼 때,
그대의 눈은 비로소 치유되고 그대의 시야는 깊어질 것이다.
세상에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어둡고 단조로운 풍경 속에서 전생애를 살아간다.
그들은 결코 파도와 돌, 별과 꽃, 하늘과 다른 인간 존재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세상에는 눈을 뜨고 걸어다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반대로 완전한 장님이지만 완벽하게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몸 담고 살아가는 세계를 너무 익숙하게 느끼는 나머지 더 이상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다.
밤 시간에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라. 나는 오늘 진정 무엇을 보았는가?
그대는 자신이 아무 것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랄 것이다.
아마도 그대의 눈은 깨어 있는 마음 없이 하루 종일 무조건적인 반사 작용을 했을지도 모른다.
밖을 바라보는 동안 결코 어떤 것을 응시하거나 진정으로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눈에 비치는 것들은 언제나 복잡해서 그대의 눈이 모든 것을 볼 수는 없다.
그대가 시얄르 최대한 넓히려고 한다면 눈은 초점 없이 흐려질 것이다.
반대로 한 곳만 집중한다면 자세히는 보겠지만 큰 그림은 놓칠 것이다.
인간의 눈은 언제나 보고 싶은 것만을 선택해서 보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피한다.
그렇다면 핵심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보고 싶은 것을 결정하고, 보고 싶지 않은 것을 보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을 이용하는가?
그 좁혀진 시야에서 많은 부정적이고 갇힌 삶이 생겨난다.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그대가 실제로 보는 것들이
그대가 무엇이 되고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한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내면에 영향을 미치는 흥미로운 방법 중 하나는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특별한 시각을 개발하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는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가?
이 물음을 통해 그대는 사물을 보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을 발견할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서로 다른 시각이 있다.
영혼의 동반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