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낙지를 먹으면서 떠오른 단상
지금, 정말 재미있게 읽고 책중에서 중국작가 티에닝의 소설
<無雨之城: 비가 오지 않은 도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논쟁은 인간에게 혀가 있는 한 불가피 한 것이다.
그 혀를 그냥 쉬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는 것인가.“
저는 부안 곰소(熊沼)에서 산낙지를 먹을 때,
내내 티에닝이 한 이야기가
머릿속에 맴돌았습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
혀가 있기 때문인가. 아니면 인간의 본성인가.
내가 아닌 상대편을 씹으면 내가 그 상대편보다 도덕적
우위에 올라서는 즐거움 때문에 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술안주값이 모자라서 그러는가?
아무튼 이런 소모적인 우문현답을 피하고,
산낙지 입장에서 저는 철학적(?) 고찰을 한번 해보았습니다.
“선배! 혹시 산낙지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나요?”
“......”
“산채로, 그것도 몸은 토막난체, 그것도 모자라서 맛소금에 찍혀서 씹혀 먹히는 입장.“
“............”
“산낙지 입장에서 본다면, 아마 그렇게 잔인한 형벌이 없을 거예요.”
나는 벌써 세잔째 소주를 마셨습니다. 선배는 산낙지에 소주가
도대체 어울리는 안주냐 하면서 즐거운 핀잔을 줍니다.
“극과 극이 통한다는 사실 아닙니까. 한 몸에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가지고 있는 건전지처럼 말입니다.“
“..............”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인이라고 구설수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거대한 사물일수록 그림자가 크듯 그 그림자는 사물과 비례할 것입니다.
테에닝이 말처럼,
인간에게 말할 수 있는 혀가 있는 한 씹고 씹히는
인간관계는 아마도 종속관계이자,
먹이사술이 아닌가 싶습니다.
누구든 혀가 있는 이상 말할 수 있고,
씹을 수 있는 것은 아무튼 다행이자 불행일 것입니다.
세치의 혀 때문에 죽임을 당하기도 하고, 출세하기도 합니다.
그럼 산낙지의 기분은 어떨까?
여러 사람의 입맛에 맞는다고 씨가 마를 정도로 남획되어
우리 식탁과 술안주로 나오는 산낙지.
방금 수족관에 흐믈흐물 있다가 도끼같은 칼로 절단되어 발버둥을 치다가
다시 맛소금 맛을 보아야하는, 정말 인간의 형벌로 친다면
사지가 절단되고, 절단된 곳에 소금을 뿌려 고통을 배가시켜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는 낙지인데,
그것도 모자라 담배 냄새나는 입안에서 또 씹혀야 하는 산낙지의 운명이
어쩌면 글을 쓰는 작가들의 운명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해하거나 알지못하고 주관적으로 모든 것을
폄하되는 작가들이 그 누군가의 입에 올라 구설수가 된다는 사실은
분명 산채로 절단되어 다시 맛소금에 찍혀 담배 냄새나는 입안으로 들어가
씹히는 것하고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뭐, 세상 살아가면서 직장 상사와 정치인은 술안주에 가장 잘 어울리고.
만약 남의 이야기를 하면서 상사와 정치인이 술안주가 되지 않는다면,
술꾼들은 안주값 때문에 술을 마실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세치혀로 가장 훌륭한 안주를 씹는 것이죠.
붉은 해가 살얼음처럼 셈세한 리델글라스에 빠져있는
곰소의 카페에서 간단.대략 적어 올립니다.
변산바람꽃 올림
첫댓글 산낙지의 쫄깃쫄깃하고 혀에 발판이 닿은 촉감... 님의 글을 읽으며 되새겨봅니다... 맛있기는 하지만.. 님의 글을 보니 새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규보의 슬견설... 몸집이 큰 생물체건, 작은 것이건 죽을 때 고통스럽기는 매한가지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 앞으로도 많이 들르셔서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자신의 가슴을 잘 그려내는 것도 큰 재주입니다. 님은 참으로 독특한, 훌륭한 재주를 가지고 계시네요. 그리하여 타인에게 기쁨을 준다면 ..그것도 문인으로서의 사명에 충실한 거죠. 변산기행 두번째 글...또한 큰 감동입니다. 날개 단 천사처럼 마음껏 여행할 수 있는 님이 부럽습니다. 남자이기에 가능하겠지요. 여자인 나는...불가능한 일이지요. 님의 여행 족적을 따라 덩달아 지금 행복합니다. 여행을 사랑하는 또 한 사람, 여기 있습니다.
산낙지에 대한 단상---남자들 다 그렇죠. 그게 사는 모습아닐까요. 진솔해서 좋습니다. 잘 읽고 갑니다.
이 카페는 정말 아름다운 소통의 공간입니다. 이렇게 예쁜 댓글을 달아주시니..........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