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三月)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네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타령조, 기타>(1969)-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감각적, 회화적, 환상적, 신비적, 주지적
◆ 표현 : 현재형의 시제를 사용하여, 생동감 있는 이미지를 표현함.
각 문장은 의미 전달이 단절된 채, 서술적 이미지만으로 연결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샤갈의 마을에는 → 특별히 샤갈의 마을이라고 한 것은, 샤갈의 특징적인 그림
('눈 내리는 마을' '나와 마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고, 샤갈이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세계의 그림을 주로 그리는 화가라는 데서 연상된 이미지일 수도 있다.
* 삼월에 눈이 오는 샤갈의 마을 → 실재하지 않는 환상의 세계
* 정맥의 떨림 → 봄의 생명감을 감각적으로 표현함.
* 봄을 바라고 섰는 ~ 바르르 떤다. → 눈을 맞는 사나이의 모습에 드러난 봄의 생명감이
동맥과 말초신경을 거쳐 정맥에까지, 곧 전신에 퍼져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일상적 언어 서술과는 거리가 먼 이미지를 중시한 표현이다.
*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내려오는 눈 → 맑고 순수한 생동감과 생명력을 효과적으로
표현함, 활유법
* 올리브빛으로 물이 드는 쥐똥 만한 겨울 열매들
→ 추위를 견뎌내고 봄에 새롭게 생명력을 얻은 열매
올리브 빛은 '순수하고 맑은 이미지'를 나타냄.
*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 → 맑고 순수한 봄의 생명력을 시각적 이미지로 표현함.
◆ 제재 : 3월의 눈(새로 돋는 정맥, 올리브빛 열매, 제일 아름다운 불)
◆ 주제 : 맑고 순수한 생명감의 이미지
[시상의 흐름(짜임)]
◆ 1행 : 샤갈 그림 속의 눈 내리는 마을
◆ 2 ~ 4행 : 정맥의 떨림에서 감지되는 봄의 생명감
◆ 5 ~ 9행 : 생동하며 마을을 덮는 삼월의 눈(생명력의 확산)
◆ 10~15행 : 새롭게 소생하는 맑고 순수한 생명력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의미를 찾기보다 대상의 순수한 이미지를 감상하기에 좋은 시다. 감각적인 이미지를 통해, 인간 존재의 신비스러움과 자연의 조화로운 정신을 보여 주고 있는 시이다. 현대적 시의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김춘수는 관념의 시를 쓰던 1950년대를 거쳐 1960년대에 이르면 관념과 의미를 해체하고 대상이 갖는 순수한 이미지만을 추구하는 무의미의 시를 쓴다. 이 시도 그런 계열에 속하는 작품이다. 따라서, 이 시의 각 행들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심상들을 감각적인 언어로 포착하였다고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시에 나오는 샤갈의 마을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적 세계이다. 이런 세계를 배경으로 '눈'과 '새로 돋은 정맥', '올리브빛', '불' 등의 이질적인 시어들은 모두 독자적인 이미지를 가지면서도 순수하고 맑은 생명감이라는 공통적인 심상을 연상시켜 준다.
이 작품은 '꽃'을 주제로 한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김춘수의 초기 시와는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이 시에는 시인이 줄곧 관심을 기울인 이미지에 대한 인식이 드러나면서도 아주 낭만적인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샤갈의 마을'은 낭만적이고 이상적인 공간이다. 그 공간은 샤갈의 그림에서 차용한 것이지만, 김춘수에 의해 독창적으로 변용되면서 아름답고 따뜻한 시적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이 작품은 샤갈의 그림처럼 따뜻하고 낭만적이며 신비로운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있고, 천사나 올리브 열매들은 신비한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또 가난한 서민들의 삶에 내리는 따뜻한 눈이 손에 잡힐 듯 느껴진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단순화되기보다는 충만한 시적 의미의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 샤갈의 그림과 '샤갈의 마을'
'샤갈의 마을'은 프랑스의 표현주의 화가 마르크 샤갈의 <나와 마을>이라는 회화 작품에서 모티프를 취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작가가 자신의 고향 모습을 떠올리며 그린 작품으로, 동화 속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굳이 김춘수의 시와 함께 감상하지 않더라도 그림 자체에서 순수한 생명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샤갈의 이 그림을 본 독자라면 이 시가 어떤 분위기를 전하고 있는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시인은 상상의 공간을 배경으로, 실제 사물이나 사건의 이미지가 아닌 순수한 상상의 이미지를 그리고 있는 것이다.
● 이 작품의 표현 기법
이 시는 전체적으로 봄의 생동감과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있다.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는 정맥, 3월의 눈, 겨울 열매, 아궁이를 지피는 아낙들은 상호 연관성이 떨어지는 소재들을 병치시킨 것이다. 또한 푸른색, 정맥과 흰색 눈, 올리브 빛 겨울 열매, 불 등 대비적인 이미지가 나타나 있다. 즉, 시인이 샤갈의 그림을 보고 마음 속에 떠오르는 순수한 심상을 감각적인 언어로 형상화하여 환상의 분위기를 부각시키고 있다.
● '무의미시'와 김춘수의 시작(詩作) 태도
김춘수의 이른 바 '무의미시(無意味詩)'란 그가 자신의 시론(詩論)에서 밝히고 있는 '서술적 이미지'를 구현하고 있는 시들을 주로 일컫는다. 김춘수는 시론에서 이미지를 비유적 이미지와 서술적 이미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이미지가 관념이나 기타 다른 것들을 배후에 가지고 있으면 '비유적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 그 자체만을 위한 것이면 '서술적 이미지'가 된다는 것이다. '비유적 이미지'는 관념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므로 불순한 것이라고 파악한 김춘수는, 그 배후에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미지만의 시들을 시도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무의미시라고 일컬어지는 '서술적 이미지'의 시들이다. 그는 '서술적 이미지'에 대하여, 대상 자체가 소멸됨으로써 대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대상이 있다는 것은 이미 그 대상으로부터 구속을 받고 있는 것이 된다."고 하면서 김춘수는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과 자신이 지향하는 '서술적 이미지'를 서로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김춘수가 '서술적 이미지'로써 대상의 무화(無化) 상태를 지향하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시작 방법에 있어 새로운 시도로 선언된 것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는 그의 본질적 경향을 다시금 드러내주는 그러한 것이다. 지금까지 김춘수의 시적 경향을 살펴본 바에 의하면, 그의 시에서 설사 대상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해도 이는 실제의 외부 대상 세계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김춘수가 그의 시에서 어떤 대상을 묘사하거나 끌어들이고 있다 해도, 이는 언제나 외부 대상 세계와 격리된 자아의 내면에서 무의식적 투사를 통해 구성한 비실재적인 것이었거나, 혹은 고양되고 이상화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작가소개]
김춘수 : 시인
출생 : 1922. 11. 25. 경상남도 통영
사망 : 2004. 11. 29.
학력 : 니혼대학교 창작과 중퇴
데뷔 : 1946년 시화집 '애가' 등단
수상 : 2004년 제19회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2000년 제1회 청마문학상
경력 : 1991~1993 KBS 이사
1986 한국시인협회 회장
1922년 11월 25일 경남 충무 태생. 통영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기중학교를 거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과에 입학했으나 1942년 12월 퇴학 처분을 당했다.
통영중‧마산고 교사, 마산대‧경북대‧영남대 교수 등으로 재직하였다.
문예진흥원 고문, 한국시인협회장 등을 거쳐 예술원 회원으로 활동했었다.
1981년에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제2회 한국시인협회상(1958),
제7회 아시아자유문학상(1959), 경남문학상, 경북문화상, 예술원상, 대한민국문학상,
문화훈장 등을 수상하였다.
1945년 충무에서 유치환(柳致環)‧윤이상‧심상옥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어
예술운동을 전개했고, 1946년부터 조향(趙鄕)‧김수돈(金洙敦) 등과 동인지
『노만파』를 발간했다. 1948년 대구에서 발행되던 『죽순』 8집에 시 「온실」 등을
발표하는 한편 첫시집 『구름과 장미』를 간행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1956년 유치환(柳致環)‧송욱(宋稶)‧고석규(高錫珪) 등과 시동인지 『시연구』를
발행하기도 했다.
시집으로 『늪』(1950), 『기』(1951), 『인인』(1954), 『꽃의 소묘』(1959),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1959), 『타령조 기타』(1969), 『처용』(1974),
『김춘수시선』(1976), 『꽃의 소묘』(1977), 『남천』(1977), 『비에 젖은 달』(1980),
『처용 이후』(1982), 『처용 단장』(1991), 『서서 잠드는 숲』(1993),
『들림, 도스토옙스키』(1997), 『의자와 계단』(1999) 등이 있다.
시론집 『한국현대시형태론』(1958), 『시의 이해』(1972), 『의미와 무의미』(1976),
『시의 표정』(1979) 등과 수상집 『빛 속의 그늘』(1976), 『오지 않는 저녁』(1979),
『시인이 되어 나귀를 타고』(1980) 등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1986년 『김춘수 전집』(1권 시, 2권 시론)을 간행하였다. 김춘수의 시 세계는
크게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첫째 시기는 「꽃」, 「꽃을 위한 서시」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존재에의 탐구를 수행하던 시기로, 이때에는 존재와 언어의 관계가 강조된다.
둘째 시기는 「부두에서」, 「봄바다」 같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하는데,
이 시기에는 이른바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이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 곧 묘사를 지향하는 세계로, 1950년대 말에서 1960년대 전반까지의
시편들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언어유희가 두드러진 「타령조」 같은
시들도 나타난다.
셋째 시기는 「처용단장」 제2부를 중심으로 하여 탈이미지의 세계가 강조된다.
넷째 시기는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까지로 종교 혹은 예술에 대한
성찰이 강조되며, 그후 1990년대 초에는 「처용단장」 제3‧4부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춘수 [金春洙]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출처 : 서진영, '김춘수 시에 나타난 나르시시즘 연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