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9. 27. 큐티
마태복음 17:22 ~ 27
주님이 일하시는 방식
관찰 :
1) 갈릴리에 모일 때
- 22절.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 오늘 말씀은 언제 말씀을 하셨는지가 명확히 나오지 않습니다. 마태복음에서 그런 본문들이 있습니다. 마태가 마태복음을 기록한 것이 시간 순서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셨는지를 변증하고자, 참된 기독론에 대하여서 주의를 기울이면서 기록을 하고 있기 때문에 시간보다는 사건과 예수님의 메시지의 흐름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자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시고, 오늘 본문에서 또다시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 갈릴리에 모여 있을 때에 말씀하셨습니다. 즉, 가이사랴 빌립보가 아닌 또 다른 장소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 이후에 이 가르치심을 반복해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루셔야 할 매우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시기 위해 이렇게 준비해 가시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됩니다.
-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 여기서 사람들은 산헤드린을 구성하고 있던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 곧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주로 사두개인), 그리고 서기관들(주로 바리새인)을 가리킵니다. 주님이 이렇게 미리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이 힘이 없어서거나 몰라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예견하시고, 예정하신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23절. “죽임을 당하고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 주님이 죽음을 자초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다른 사람들을 동원하여 자신의 사역을 위하여 스스로 죽임을 의도한 것이 아니라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것에 주님은 양이 도살장에 가서 얌전히 죽듯이 그렇게 순종하여 죽음을 당하신 것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구원하시는 길이 없기에 그렇게 고통스럽고 힘든 길을 아시면서도 걸어가신 것입니다.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것들을 몰랐으면 모르되 알면서 그 길을 향해 걸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부담이었을까요? 주님은 이 사실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지만 제자들 중에 알아들어먹는 이가 없었습니다. 오호, 통재라!
- “제삼일에 살아나리라” => 주님은 희망을 주셨습니다. 다시 살아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사람의 부활, 죽은 자의 부활, 진정한 부활체가 되는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부활에 대해서는 경험하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이기에 예수님의 이러한 가르치심에도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매우 근심하는 것으로 반응을 했습니다. 근심은 했으되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고, 그 상황에서 예수님의 근심을 덜어드리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저 자신들이 얻어야 할 예수님의 오른편, 왼편의 자리에 대한 염려가 앞서게 됩니다. 주님의 이러한 가르침이 있었음에도 그것을 망각하는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2) 예수님의 일하시는 방식
- 24절. “가버나움에 이르니 반 세겔 받는 자들이 베드로에게 나아와 이르되 너의 선생은 반 세겔을 내지 아니하느냐”
- 가버나움에 이르셨습니다. 베이스 캠프에 도달하신 것입니다. 쉼과 재정비를 위함이셨습니다. 여행 중에 주님은 쉼이 없이 무리하시는 것이 아니셨습니다. 피곤하게 일하시지만 지나치게 하시지는 않으신 것입니다. 사역과 쉼의 조화를 주님은 적절히 이루셨습니다. 인류 구원의 중차대한 사명을 가지고 계심에도 주님은 여유를 가지신 것입니다. 사역을 하면서 조급하게 무리하게 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 “반 세겔 받는 자들” => 성전세를 받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셔서 성전에 가시는 것이 아니라 가버나움에 있는데 왜 성전세를 받겠다고 이러는 것인가요? 원래 이스라엘의 성인들은 일 년에 한 번 성전세를 내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절기에 성전에 올라가서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곳 가버나움에서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나아와서 성전세를 내야 하는 것을 주장하는 이들은 성전세를 거두는 자들로서 대제사장에게 고용되어 지방에까지 와서 절기에 예루살렘에 오지 못하는 이들에게서도 성전세를 거두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존재는 당시에 얼마나 대제사장 그룹이 자신들의 재물욕에 눈이 어두워 있었는지를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주님은 이들의 요구를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실수로 성전세를 내지 못하시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 게다가 반 세겔에는 두로에서 만든 말까르트(그리이스 로마 신화에서는 헤라클레스)가 그려진 우상이 새겨진 동전이었습니다. 성인 이틀의 품삯 정도의 가치를 지닌 동전으로 출 30:13에 나오는 성소의 세겔로 10게라의 은과 같은 무게가 바로 반 세겔 은화였습니다. 그러나 은의 무게는 같았지만 우상이 새겨진 것을 성전세로 내도록 하는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에 대해 주님은 무시하고 뒤짚어 버리는 식으로 반응하실 수 있었습니다. 바른 가르침을 위해 철퇴를 내리심도 맞는 행위가 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게 반응하고 계십니다.
- 25절. “이르되 내신다 하고 집에 들어가니 예수께서 먼저 이르시되 시몬아 네 생각은 어떠하냐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느냐 자기 아들에게냐 타인에게냐”
- 반세겔 받는 자들에게 베드로는 주님이 내신다고 하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주님의 의중을 물어보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 주님은 베드로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먼저 물으셨습니다.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관세와 국세를 받는가? 자기 아들에게인가 타인에게인가? 그 정답이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 26절. “베드로가 이르되 타인에게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그렇다면 아들들은 세를 면하리라” => 베드로는 자기 아들이 아닌 타인에게 받는 것이라 대답합니다. 주님은 그렇기에 아들들은 세금을 면한다고 선포하십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이들을 아들들로 포함해서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들이기에 하나님의 성전세를 낼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것을 주장하시지 않으셨습니다.
- 27절.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네가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고기를 가져 입을 열면 돈 한 세겔을 얻을 것이니 가져다가 나와 너를 위하여 주라 하시니라”
- “그러나 우리가” => 주님은 자신과 제자들을 우리라는 하나의 테두리로 묶어서 교훈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들이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 성전세를 받는 이들과 대제사장 그룹으로 하여금 쓸데없는 논쟁으로 예수님께 달려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선한 모범을 보여주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주님은 또 다른 이적을 베푸셨습니다. 즉 베드로로 하여금 낚시를 해서 물고기의 입에서 한 세겔을 얻어서 그것으로 베드로와 예수님을 위한 성전세를 내도록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관심은 무엇이 옳으냐 그르냐 보다는 어떻게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느냐 하는 것에 더 관심이 있으심을 보게 됩니다.
가르침 :
1)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이렇게 미리 걸어가고 계셨습니다.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뚜벅뚜벅 걸어가시는 것입니다. 제자들마저 이해하지 못했지만 주님은 그 길만이 구원의 길이고, 예수님만이 가실 수 있는 길이시기에 그 험악한 길을 미리 아셨음에도 그렇게 가신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2) 제자들이 근심했다고 했으나 이것이 나중에 보이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 예수님이 가고자 하시는 것에 대해 같은 마음이 아닌 다른 의도와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근심하는 것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마태는 이러한 상황을 의도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3) 성전세를 내는 것은 성전에 올라가서 내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주님은 성전세를 내는 입장이 아니라 받으셔야 하는 입장이셨습니다. 성전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성전 그 본체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과 제자들 모두가 그렇다고 하시면서도 성전세를 받는 이들과 그 몸통이 되는 이들과 잘못된 논쟁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또 성전세를 받는 이들과 그 몸통이 되는 이들이 그릇되이 주님과 제자들을 고소하지 못하도록 하시기 위해 자신이 손해보는 쪽을 택하셨습니다. 그래서 성전세를 다 내십니다. 주님은 이것을 위해 남에게 손을 벌리거나 하시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시는 신적인 방식을 통하여 해결하셨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규율에 대해 잘못된 것일지라도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는 것이거나, 실제로 그것이 잘못되었기에 반대를 한다 하더라도 우리가 손해보는 쪽을 택하여서 해결하는 것임을 주님은 그 본을 이렇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일하시는 것을 즐거워하신 것 같습니다.
적용 :
1) 주님은 나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고 가는 자신의 삶을 따르라고 명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도 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합니다. 주님을 본받아서 따라야 합니다. 그 길은 필연적으로 나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이어야 합니다. 내가 살고 남이 죽거나, 내가 잘 되고 남이 못되는 형식이 되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내가 죽고 이웃이 사는 길, 내가 죽고 교회가 사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나도 살고 이웃도 사는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살고 교회가 사는 길은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죽어야 이웃이 살고, 그래서 나도 사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교회가 살고, 교회가 살아야 나도 사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을 나는 어떻게 삶에 적용할 것인가? 끊임없이 내가 희생되고 손해보는 길을 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길이라면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주님이 주님의 방식으로 좌로나 우로나 어디로 가든지 주님과 동행함으로 형통함이 따르는 길이 열려지게 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다만 아직 내 수준이 주님을 온전히 따르지 못하는 부족한 종인 것이 문제일 따름입니다. 그렇게 하는 과정에서 하늘의 복이 넘치도록 채워지게 될 것임을 믿습니다.
2) 성전세를 터무니없이 요구하는 이들의 요구에도 응해주시는 주님. 세상의 불의한 일들에 대해서도 내가 손해보는 것으로 해결이 될 수 있다면 그 길을 가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내가 손해 보는 것을 악으로 규정하고 어찌하던지 손해 보지 않고자 애쓰는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악취가 나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손해를 무릅쓰고, 그 손해를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기적이 상식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상에 속해있으나 하나님 나라를 소유하는 방식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려운 것이고 계속해서 싸워나가야 하는 일입니다.
3) 로잔대회에 참석하게 됩니다. 합신 18기 동기들이 이재훈 목사님을 지지하고 격려하는 차원에서 모임을 갖게 됩니다. 로잔대회를 섬기는 이재훈 목사님을 주님께서 축복하시고 힘 주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