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66
■ 3부 일통 천하 (189)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1장 조정(趙政), 진왕에 오르다 (3)
자초(子楚), 즉 진장양왕(秦莊襄王)이 왕위에 오른 지 3년이 지났다.
그런데 이 무슨 불운인가.진장양왕(秦莊襄王)은 별다른 증세없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승상 여불위(呂不韋)는 근심과 걱정을 이기지 못해 하루에 한 번씩 궁으로 들어가 병세를 살폈다.
기껏 키워온 기화(奇貨)가 3년 만에 죽으면 너무 아깝질 않은가.
전국에 명을 내려 명의란 명의(名醫)는 다 불렀다.
하지만 진장양왕(秦莊襄王)의 병세는 전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불위(呂不韋)는 진장양왕의 병실로 들었다가 왕후 조희(趙姬)를 보았다.
지난날 자신의 애인이자 아내였던 여인이다. 새삼스레 한단성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은근한 눈빛을 보내 왕후 조희(趙姬)를 옆방으로 불러냈다."지낼 만하오?"
"승상께서는 어떠하십니까?""나는 그간 그대를 잊은 적이 한 번도 없소."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두 사람은 어느새 입술을 포개고 있었다.
그동안 진장양왕(秦莊襄王)은 오랜 볼모 생활에 몸이 허약해진 탓인지 기운을 잘 쓰지 못했다.
솟구치는 욕정을 억지로 참아 눌러온 조희(趙姬)였다.
그녀는 오래간만에 옛 남편의 손길을 받자 단번에 불이 붙었다.이성으로는 그 불을 끌 수가 없었다.
사막을 헤매다가 물을 만난 듯 허겁지겁 여불위(呂不韋)가 뿜어내는 감로수를 빨아 마셨다.
이제 두 사람은 왕후도 아니었고, 승상도 아니었다.정염(情炎)에 불타는 한 여자와 한 남자였다.
그 날 이후 여불위(呂不韋)는 하루에도 서너 번씩 내궁을 출입했다. 때로는 한밤중에도
조희 생각이 나면 궁으로 달려갔다.어찌 이 소문이 퍼지지 않았겠는가.
모르는 것은 병석에 누운 진장양왕(秦莊襄王)과 그의 아들 세자 정(政) 뿐이었다.
하지만 천하 제일의 권세를 자랑하는 여불위(呂不韋)였다.어느 누구도 감히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한 달 후.결국 진장양왕(秦莊襄王)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천하 통일의 기반을 닦아놓았는가 싶더니 5년 동안 무려 세 명의 왕이 연이어 죽은 것이다.
진(秦)나라의 6국 통합이 늦어진 이유가 될 수도 있다.
이제 진나라 왕의 자리는 당연히 세자인 정에게로 돌아갔다.- 진왕 정(政).
실제로는 여불위의 아들. 여불위의 교묘하면서도 치밀한 투자가 이런 이상한 결과를 낳았다.
그가 바로 통일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다.그러나 진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의 호칭이므로
여기서는 통일을 이루기까지는 그냥 진왕 정(政)이라고 하겠다.BC 247년의 일이었다.
이로써 진장양왕의 부인이자 진왕 정(政)의 생모인 조희(趙姬)는 태후가 되었다.
사가들은 그녀를 조태후(趙太后)라 부르고 있다.그녀가 낳은 또 한명의 아들,
즉 진장양왕의 진짜 아들인 제 2 왕자 성교(成嶠)는 장안군(長安君)에 봉해졌다.
이때 진왕(秦王) 정(政)의 나이 13세.나이가 많이 어려서 당연하다는 듯 친부이자 승상인 여불위
(呂不韋)가 모든 국정을 도맡아 처리했다.물론 진왕 정(政)은 여불위가 자신의 친부인 줄 알지 못했다.
부왕 진장양왕의 은인으로만 여기고 그를 존경하며 따랐다.
심지어는 여불위(呂不韋)의 공로가 옛날 강태공에 비할 만하다고 해서 상보(尙父)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제 천하는 여불위(呂不韋)의 손 안에 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최고의 권력과 부귀를 누렸다.
그 무렵 여불위의 아버지가 죽었다.그러자 중원의 여러 나라 왕들이 앞다투어 조문 사절을 보냈는데,
그 규모와 인원이 가히 한 도시를 이룰 만했다.
진나라 도읍인 함양(咸陽)은 삽시간에 수레와 말로 넘쳐날 지경이었다.
이는 진장양왕의 장례보다 몇 갑절 성대한 규모였다.여불위(呂不韋)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나를
말해주는 일화다.승상 여불위(呂不韋)는 전임 승상 채택이 입안한 '6국 통합론'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늘 나이 어린 진왕 정(政)에게 가르쳤다.
- 선왕(진소양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천하를 하나로 통합하십시오!
여불위(呂不韋)의 진언에 따라 진왕 정(政)은 매년 군사를 내었다.
이 무렵의 군사 출병에 대한 기록을 <사기(史記)> 에서 살펴보자.
원년, 장군 몽오(蒙鰲)로 하여금 진양(晉陽)의 반란을 평정했다.
2년, 장군 표공(儦公)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권(卷, 하남성 원양현)을 공격하여 3만 명의
목을 베었다.3년, 몽오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13개 성을 점령하였다.
4년, 몽오가 위나라 창(暢)과 유궤(有詭) 땅을 함락시켰다.
5년, 장군 몽오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산조(酸棗, 하남성 연진현) 등 20개성을 빼앗았다.
처음으로 동군(東郡)을 설치하였다.
이같은 진(秦)나라의 본격적인 통합 정책에 나머지 6개 나라들은 초비상이 걸렸다.
- 이대로 가다간 모두 주(周)나라처럼 멸망하고 만다.이런 위기 의식이 일었다.
그리하여 조(趙)나라의 발의로 6개국 합종론이 다시 제기되었고, 마침내는 연합군을 결성하여
진(秦)나라를 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동방의 대국 제(齊)나라가 진나라 눈치를 보면서 군대를 내지 않았다.
이에 조,한,위,연,초 등 5개국만이 군대를 내어 진(秦)나라를 향해 쳐들어갔다.
867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67
■ 3부 일통 천하 (190)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1장 조정(趙政), 진왕에 오르다 (4)
진(秦)나라를 향해 쳐들어간 연합군 총사령관은 초나라 춘신군(春申君) 황헐(黃歇). 처음에는 잘 나갔다.
옛 조나라 땅인 수릉(壽陵)을 수복하고 다섯 길로 나누어 위남(渭南) 땅을 바라보고 서진(西進)했다.
그러나 진나라 승상 여불위(呂不韋)도 만만치 않았다.
- 장군 몽오(蒙鰲)는 조군을 격파하라.
- 장군 왕전(王翦)은 초군을 막아라.
- 장수 환의(桓齮)는 한군을 맡아라.
- 장수 이신(李信)은 위군을 격파하라.
- 장수 내사등(內史騰)은 연군을 막아라.
여불위 자신은 총대장이 되어 각 군을 지휘하기로 했다.각 군의 군사는 5만 명씩으로 총 30만 명이었다.
여불위(呂不韋)가 연합군 5로군에 맞서 대채를 세웠을 때였다.초군을 맡은 장군 왕전(王翦)이 하나의
계책을 내었다."5개국 연합군과 한꺼번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우리 나라에 이롭지 못합니다.
이대로 진격하여 싸울 것이 아니라, 우리 나라 다섯 영채마다에서 정예병 1만 명씩을 뽑아 따로이
특공대를 편성하여 연합군을 이끌고 있는 춘신군(春申君)만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십시오."
"초군(楚軍)은 먼데서 왔기 때문에 우리 특공대의 공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초나라만 패하면 나머지 네 나라 군사는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좋소."그 날 밤, 왕전(王翦)은
각 영채로부터 뽑은 5만 정병(精兵)을 거느리고 초나라 군이 숙영하고 있는 영채를 습격하러 떠났다.
그런데 춘신군(春申君)으로서는 운이 좋았음인가.
왕전의 부하 중 초(楚)나라 태생의 편장이 하나 있었다. 그는 평소 춘신군을 몹시 흠모했다.
그 편장은 춘신군(春申君)에게 위기가 닥쳤음을 알고는 재빨리 탈영하여 초군 영채로 달려가 진군이
기습해올 거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춘신군(春申君)은 기겁을 했다.
다른 나라 장수에게 알릴 겨를도 없이 영채를 뜯어 본국으로 돌아갔다.
한편, 왕전(王翦)은 다음날 새벽 무렵 초군의 영채를 습격했다.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초(楚)나라 군사는 간 곳 없이 사라지고 영채를 세웠던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었다.
그는 대뜸 직감했다.'누군가가 나의 계책을 춘신군에게 알려준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춘신군(春申君)이 감쪽같이 피할 수 있을 것인가.'
왕전(王翦)은 적의 기습이 있을까 두려워 재빨리 그 곳을 떠나 여불위가 있는 본채로 돌아갔다.
초(楚)나라의 갑작스런 회군으로 가장 당황한 것은 조ㆍ위ㆍ한ㆍ연 등 나머지 네 나라 연합군
장수들이었다.이번 연합을 주도한 조(趙)나라 장군 방난(龐煖)은 한숨을 몰아쉬며 탄식했다.
"춘신군은 허명(虛名)만 높았구나. 이것으로 열국의 합종은 완전히 깨졌다. 이제 어느 나라가
감히 진나라의 강맹함을 누를 것인가."
가장 먼저 한(韓)나라가 철수했고, 그 뒤를 이어 위나라, 연나라 군사도 본국으로 돌아갔다.
조나라 장수 방난(龐煖)은 처량하게 귀환길에 올랐다.
모처럼 재결합한 반진(反秦) 5개국 연합군은 이렇듯 허무하게 깨지고 말았다.
한편, 본국으로 돌아간 춘신군(春申君)은 생각했다.'진나라는 필시 이번 연합을 주도한 조(趙)나라와
우리 나라에 대해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낼 것이다. 이 일을 어찌 막을 것인가.'
고민 끝에 그는 한 가지 계책을 떠올렸다.초고열왕(楚考烈王)을 찾아가 아뢰었다.
"지금 중원에 진(秦)나라를 이겨낼 나라는 아무도 없습니다. 만일 진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우리 나라로 쳐들어오면 우리는 큰 위기에 봉착합니다."
"지난날 우리 초(楚)나라가 크게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도읍이 중원과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진(秦)나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입니다.""그게 무엇이오?"
"도읍을 수춘(壽春)으로 옮기십시오. 지금의 도읍인 진현(陳縣)은 진나라와 너무 가깝습니다.
이에 반해 수춘은 긴 회수(澮水)가 앞을 막아 주고 있기 때문에 진나라가 쉽게 쳐들어올 수 없습니다."
"일단 진(秦)나라의 예봉을 피하고 저들이 다른 나라를 치는 동안 힘을 길러 지난날의 패권을
되찾으십시오."어찌보면 매우 겁쟁이 같은 소리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춘신군(春申君)의 이 제안은
매우 현실적이면서 정확한 판단이라고 할 수 있다.
진나라는 범수의 원교근공(遠交近攻) 정책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질 않은가.
이번에 동방의 제(齊)나라가 합종에서 빠진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 우리 초(楚)나라가 살기 위해서는 진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것이 상책이다.
이런 면에서 동남쪽 회수가에 있는 수춘(壽春)은 매우 적합한 도시였다.수춘은 지금의 안휘성 수현.
초고열왕(楚考烈王)은 춘신군의 말뜻을 알아들었다.곧 천도를 단행했다.
이렇게 해서 초(楚)나라는 춘추시대 때의 도읍인 영성(郢城)에서 부터 시작해 언영, 진현을 거쳐
네 번째로 수춘에 도읍을 마련했다.하지만 어찌 알았으랴.이것이 마지막 도읍일 줄이야.
BC 241년(진왕 정 6년, 초고열왕 22년)의 일이었다.
86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