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쥬얼리(jewelry)※ -part 5-
“누구길래 나의 이름을 알고 있는 가.”
“저희 지옥에서 세민님의 이름을 모르면, 그게 어디 영혼이라 할 수 있나요.”
노파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노파의 농에 세민의 기분이 살짝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에게서 거부당한 치욕감과 죄책감에 비하면 이 정도론 어림 택도 없었다.
그는 또다시 시무룩해졌고, 노파는 표정변화가 빠른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엷은 미소를 띄웠다.
세민은 자신을 노골적으로 바라보며 웃는 노파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지옥을 이리저리 둘러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정화시키려는 영혼이 대부분이었지만-
간혹 자신의 몸을 더욱 더 사악하게 만드는 영혼들도 있었다.
지옥을 거닐며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그런 어리석은 영혼들을
마력으로서 다스리는 일 이었다.
비록 수현, 그녀의 마력실력에 비해선 턱없이 부족했지만 세민 그는 천상계(天上界)에서
옥황상제와 그의 오른팔 수현 다음으로 마력이 강한 영혼이었다.
즉- 소지하고 있는 마력의 기운은 천상계(天上界)에서 세번째였으나
그 마력을 활용하는 능력은 아직 턱없이 뒤쳐진 터 였다.
자신이 가진 모든 마력을 자유롭게 활용하려면
자신의 몸을 깨끗히 정화시켜야만 했다.
하지만 세민, 그는 정화 란 단어를 몰랐다.
온갖 중립지역 여자들을 겁탈하고 다닌 그에게 정화란 무의미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보면 정화에 정자의 의미도 모르는 그가
자신의 몸을 사악하게 만들려는 악마를 마력으로 제압한다는 사실은
조금은 우스운 일 이었다.
지옥을 거니는 그에게 조금 전 노파가 세민에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세민은 의아한 듯 뒤돌아 그 노파를 응시했다.
세민이 난생 처음 보는 옷을 입고있는 노파.
그 노파가 입고있는 옷의 정체는 다름아닌 한복이었다.
한국의 전통의상, 그가 살았던 곳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그는 잊고 있었다.
세민이 궁금함을 억누르지 못하고 노파에게 물었다.
“당신이 입고있는 옷은 무엇인가?”
“제가 살던 곳의 전통의상이라고 들었습니다. 아주 곱지요.”
세민은 다시금 노파가 입고있는 한복이란 이름을 가진 옷을 응시했다.
그가 그리 좋아하는 옷 종류는 아니었다.
그가 좋아하는 옷은 화끈하게 가슴언저리가 파여 보일듯 말 듯 하는 그런 아슬아슬한
옷 이었다. 하지만 노파가 입고있는 옷은 오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노파가 그리 옷맵시가 나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입고있는 이가 누구란게 중요한 옷이 아니었다.
단지 옷 자체가 아름다웠다.
순간 세민의 뇌리에 수현이 스쳤다.
그녀가 입으면 노파보다 천배는 아름다웠을 터….
“그 옷을 어디서 구했느냐?”
“지상에서 제가 입고왔던 옷 입니다.”
노파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세민은 안타까운 신음을 토해냈다.
노파의 체격은 수현의 체격에 비해 턱없이 뒤떨어졌다.
노파가 입고있는 옷을 수현에게 입혀도 소용없을 것 이었다.
순간… 그의 뇌리를 스친 마력.
마력이다. 마력이라면 가능하다.
노파의 한복을 수현의 체격에 맞추는 것 이….
세민은 기쁨의 눈을 빛내며 노파를 응시했다.
하지만 이내 기쁨을 감추며 근엄한 어투로 노파에게 말했다.
“그 옷을 나에게 주지 않겠느냐?”
“안됩니다.”
노파의 대답은 단호했다. 세민의 미간이 일그러졌지만 노파는 한치의 구김 없이
여전히 인자한 자태를 뽐내며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세민은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대로 가다간 평생 수현의 기분을 못 풀어줄지도 모를 일
이었다.
적어도 지금 세민은 노파의 몸을 감싸주고 있는 저 한복이 수현의 얼음장같은 마음을
스르르 녹여주리라고 믿고 있었다.
침착해야 했다. 노파라고 허튼수작을 부렸다간 되려 무슨일이 생길지도 모를 일이었다.
천상계(天上界)에서 가장 안좋은 소문이 파다한 영혼이 노파였다.
그 것이 설령 천사이건 악마이건간에 노파는 노파였다.
우습게 볼 인물이 아니었다.
“원하는 게 무엇이냐.”
“설령- 제가 간절히 원하는 것을 세민님께서 들어주신다 한들,
전 이 옷을 제 영혼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것 입니다.
지상에서도, 천상계(天上界)에서도.”
노파의 눈이 일순간 반짝였다.
그리고 단호하게 굳어있던 노파의 눈이 평정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노파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시작했다.
“원망스러웠던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습니다.
한복이 무엇이냐고 묻는 제게 제가 기억도 안나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추억이 담겨있는 옷이라고 하는 옥황상제 님이 말입니다.”
“가여웠던 게야. 옥황상제 님께선, 그게 최선의 방도 였을 것이라고.
기억하지 못하는 영혼들에게 자그마한 힌트를 선물하는 것 이.”
노파는 끝내 자그마한 눈물을 떨구었다.
벌써 수십년이 흘렀다. 노파, 그녀가 얼굴도 모르는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을 한 것은.
지옥에 와 있는지도, 천국에 와 있는지도,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자신이 입고있는 한복에
그와의 추억이 담겨있다는 사실 뿐. 그 추억이 어떤 추억인지조차 모른 채
여짓 것 무엇인지도 모르는 추억 하나에 집착하며 견뎌왔다.
노파는 다시 흘러내리려 하는 눈물을 애써 삼키며 세민의 말을 받아냈다.
“제게 준 건 힌트 뿐만이 아니었지요. 쥬얼리의 씨앗. 씨앗 두 개.”
노파의 말에 세민의 동공이 정확히 두배로 부풀었다.
천상계(天上界)에서 옥황상제를 제외한 모든 영혼들에게 소지가 불가능한
쥬얼리의 씨앗을 바로 눈앞에 있는 이 노파가 가지고 있다니.
그로선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옥황상제가 노파에게 쥬얼리의 씨앗을 건냈을리 없었다.
자신이 수없이 달라고 애원했던 쥬얼리의 씨앗이었다.
그것만 없으면, 더이상 기억때문에 아파할 영혼들이 사라질 것이라고 믿었기에,
세민, 그는 하루에도 골백번을 옥황상제에게 쥬얼리의 씨앗을 간청했다.
하지만 매번 옥황상제는 그를 외면했다.
그런 그가 몇십년전에 바로 이 노파에게 쥬얼리의 씨앗을 넘겼다니….
“정말이냐? 거짓이 아니고 정말 사실이냐?”
“네. 사실입니다.”
한동안 그들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의 시간동안 세민은 차분히 침착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는 정적을 깨트렸다.
“내게 줄 수 있겠느냐? 쥬얼리의 씨앗을 내가 뜻깊게 쓰겠다.”
“……그러지요.”
“뭐라 했느냐?”
“드리겠습니다.”
조금의 기대조차 실지 않은 부탁이었다.
간절했지만, 자포자기 수준으로 안 물으면 나중에 아쉬울 것 같아서 물어본 것 이었다.
그런데 노파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승낙했다.
옥황상제에게 그리 울고불고 애써봐도 못 받아냈던 쥬얼리의 씨앗을
선뜻 주겠다고 한다. 조금의 의심이 들긴 했지만 밑져야 본전이었다.
영악하기로 소문이 파다한 노파에게서 이런 내면이 있는 지
세민은 천상계(天上界)에 온 후 처음 깨달았다.
그는 특유의 침착한 어투로 노파에게 다시금 물었다.
“정말이냐? 정말 그 것을 내게 주겠느냐?”
“물론입니다.”
노파는 말을 마치고 자신의 왼손 손목 언저리에 오른쪽의 중지와 검지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리곤 살며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조금은 강한 듯한 파동과 함께 노파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지만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되찾았다.
그리곤 어느새 자신의 손에 담긴 쥬얼리의 씨앗 두개를 세민에게 건냈다.
노파에게 건내받은 쥬얼리의 씨앗은 정말 보석처럼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세민은 노파에게 씨앗을 받으며 다짐했다.
기억을 지우길 원하는 영혼에게만-
쥬얼리의 씨앗을 건내주기로.
“한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쥬얼리의 씨앗을 비장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세민이 다시 노파에게 시선을 옮겼다.
노파는 여유로운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쥬얼리는 천상계(天上界)에선 빛을 발하지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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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전판타지]
※쥬얼리(jewelry)※ -part 5-
어벙한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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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9.25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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