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도안 “이스라엘이 전쟁범죄”… 보수 이슬람세력 선동
건국 100년 하루전 군중집회 연설
“하마스, 자기땅 지키려는 자유투사”
이스라엘 “양국관계 재평가할 것”
튀르키예(터키) 공화국이 29일 건국 100주년을 맞았다. 초대 대통령 케말 아타튀르크가 정교분리, 여성 참정권 등 세속주의 서구화 정책을 통해 근대국가의 기반을 닦은 것과 달리 100년이 흐른 지금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사진)은 정반대 행보를 보인다는 비판이 상당하다. ‘이슬람 국가 부활’을 외치며 사실상의 종신 집권을 시도 중인 그는 건국 하루 전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열린 반(反)이스라엘-친(親)팔레스타인 집회에 참가해 핵심 지지층인 보수 이슬람 세력을 선동했다.
AFP통신 등에 따르면 에르도안 대통령은 28일 약 150만 명의 군중 앞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를 두고 “이스라엘은 점령자이며 하마스는 테러조직이 아니다. 하마스는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무자헤딘(자유투사)”이라고 외쳤다.
그는 이스라엘은 물론 이스라엘을 지원하는 서방 주요국 또한 전쟁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운집한 군중은 열광적 환호를 보냈다. 이를 두고 로이터통신 등은 그가 전통적인 반유대 정서를 이용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지지를 얻으려 한다고 분석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최근 예정됐던 이스라엘 방문 계획도 취소했다.
튀르키예 군중 “가자지구 공격 멈춰라” 28일 튀르키예(터키) 최대 도시 이스탄불에서 열린 이스라엘 규탄 집회에서 군중이 자국기와 팔레스타인기를 함께 흔들며 팔레스타인 지지 의사를 표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을 향해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대한 공격과 탄압을 멈추라”고 촉구했다. 이 집회에 참석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이스라엘과 서방을 모두 비판했다. 이스탄불=AP 뉴시스
튀르키예는 7일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이 발발한 후 자국 내 이스라엘 외교관 보호에 소홀하다는 평을 얻고 있다. 주튀르키예 이스라엘대사관 앞에서 거센 시위가 벌어져도 강하게 제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최근 튀르키예에서 외교관들을 철수시켰다. 엘리 코헨 이스라엘 외교장관은 28일 소셜미디어를 통해 “양국 관계를 재평가하겠다”며 추가 조치를 시사했다.
독실한 수니파 신자인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3년 총리로 집권했다. 이후 여성의 히잡 착용, 공공장소에서의 애정 표현 금지, 주류 판매 규제, 언론 통제, 소수민족 쿠르드족 탄압 등 강력한 이슬람 원리주의 정책을 폈다. 동로마 제국의 문화유산이며 자신의 집권 전 박물관으로 쓰이던 ‘아야 소피아’도 이슬람 사원으로 바꿨다.
3선 총리에 오른 뒤 4선을 금지하는 집권 정의개발당 당규로 추가 집권이 어려워지자 2014년 튀르키예 역사상 최초로 치러진 의원내각제하 대통령 직접선거에 출마해 대통령이 됐다. 이후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로 바꿔 집권을 연장했다. 이로 인해 세속화 정책을 주도해온 군부 등과와의 갈등이 커졌지만 2016년 쿠데타를 진압하며 무소불위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올 5월 대선에서 또 승리해 사실상 종신 집권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을 얻고 있다.
카이로=김기윤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