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1941년 고(故) 이연호 선생이 독립운동 중 투옥된 후 가족과 주고받은 옥중 서신들. 검열을 통과했다는 의미의 붉은색 '검(檢)' 자가 적혀 있다.
일제강점기 춘천의 항일 학생비밀결사조직에서 활동하던 독립투사의 옥중편지 원본이 80여년 만에 공개돼 주목을 받고 있다.
소장가 임성섭씨는 춘천고등보통학교(현 춘천고) 항일 학생비밀결사조직인 '상록회' 2기 회장으로 활동하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던 고(故) 이연호(11회) 선생의 옥중 서신 8통을 공개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던 10만여명의 독립운동가 가운데 편지의 원본이 공개된 경우는 지금까지 단 5통에 불과해 희귀한 자료다.
임씨가 4년 전 경매를 통해 확보했다는 이 편지에는 1939~1941년 수감 당시 옥바라지를 하는 어머니와 아버지, 남동생과 여동생 및 동료들이 이연호 선생과 주고받은 내용이 고스란히 담겼다.
가로 10㎝, 세로 15㎝ 정도의 엽서 크기의 편지에서 이 선생은 “그새 학교 잘 다니냐. 아버지 어머니 말씀 잘 듯고(듣고) 공부 잘하라. 종호도 유치원을 다닌다니. 잘 가르켜(가르쳐)주며 잘 데리고 놀아라. 나는 잘 잇다(있다). 쉬 집으로 갈 것이다”라고 적는 등 가족을 안심시키려는 마음을 절절하게 써내려 갔다.
봉투엔 경성(京城) 서대문(西大門)형무소(形務所內), 춘천읍 소양통(通) 2정목(丁目) 99(九九) 등의 송·수신처 주소가 일본식으로 선명히 적혀 있다. 봉투마다 검열 과정을 거쳤다는 의미의 '검(檢)' 자가 붉은색으로 찍혀 있다.
근현대사 사료수집가인 김영준 '시간여행' 대표는 “이번 옥중서신은 현재의 우리나라를 있게 한 선조의 희생을 일깨워 줄 살아있는 자료로 교과서에 실릴 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이연호 선생은 1919년 황해도 안악면에서 태어났다. 춘천고등보통학교 5학년이던 1938년부터 '상록회' 회원으로 활동 중 1939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붙잡혀 2년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엔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하며 '빈민의 아버지'로 불렸다. 1990년 독립운동 유공으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1999년 소천한 이 선생의 묘소는 국립대전현충원 애국지사 제2묘역에 있다.
이 편지와 관련된 내용은 7일 KBS1에서 방영되는 TV쇼 진품명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무헌기자
<고 이연호 선생 옥중서신 내용 원문>
연호즉견(연호는 즉시 보아라)
금일 재판 맛치난 것을 보고 나는 집으로 곳 나려왔다. 그런데 네가 평소에 맘이 양과 가치 찾한 놈이 세상에서 조치못한 일은 아니할주로 낟?한 바 이번 일을 본즉 네 자심이 아니고 조치못한 동모에 끌려 그가치 조치못한 일을 행하얏다가 결국 착한 마음에 네의 발을 빼지 못하고 한가지로 어굴히너머가난 줄은 내가 자신한다. 그런즉 누구나 죄가 이스면 벌을 밧난 일인데 이가치 되낭거슨 이실 네에 운수요 부형된 우리의 팔자인즉 조금도 상심말고 잇난날까지 활기를 가지고 아모조록 조치못한 마음은 잘 닥가 조흔 말을 가지고 고국신민에 일분자가 되기를 바라며 아무조록 신체나 건강히 잇다가 도라오기만 바란다. 그리고 내 이십칠일판결이 라호니 하날 갓흐신 관대하신 처분만 바라고 그날 올라갈 터이니 그리 아라라 집안 염녀난 언제던지 하지말고 네 몸만 건강하여라. 일간 또다시 편지하겟다.
- 어머니가 보낸 편지
연호야 녜 아버지편으로 네의 몸건강하다는 소식은 드덧다 그리고 너 엇진일로 사식 안먹은야 사식 안멱을나면 우유 앗침 한병 아모쪼록 먹도록 하야라 그리고 여름옷슨 하오리를 사서 드리보낼 떠이니 그리알고. 지안에는 다 잘잇따. 너 심으고간 화초는 벌서 다 피엿따 녜 몸만 튼튼하도록 하야라 돈은 모자라면 곳 통기하야라 국화는 네 형이 뿌리붓쳐 욍겨 싱긍다 하오리 하나 보낵기 익기가 불편그든 조선옷슬 또 한 벌해 보넨다. 펀지할대 말하야라 네 몸 튼튼하도록 무엇시던지 먹고시픈대로 간수 先生님께 말슴드려 사먹도록 하야라
六月二十二日 어머니
- 남동생의 편지
형님 전
형님 그간 몸이나 안녕히 계신지요. 우리더른 학교에 잘 다님니다. 그리고 형님 사랑하시던 화초난 만이 피엿습니다. 흔월게난 다섯 봉이 피고 불근 월게난 여들봉이 피고 후원에 해당화는 수업시 피엿난대 보난 사람마다 안목을 놀랄맑흠 아름닭게 피엿습니다. 다시 드릴 말삼은 내내 기체 안령하심을 바라나이다. 집안은 다 태평하오니 안심하시오 드릴 말삼은 태산 갓싸오나 그만 근치나이다. 五月三十一日
- 여동생의 편지
옵빠 안녕하심니가. 저도 잘 잇습니다. 집에서는 지금 아버지와 어머니와 옵빠와 성 동생들이 다 잘 잇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근심을 하시지만 옵빠는 앗씨 근심을 하시지 마십씨요. 저는 옵빠가 심꼬 화초는 벌서 커습니다. 또 월게꽃슨 아름닷게 삐여습니다. 저는 옵빠가 게시면 얼마나 깁브실가 하고 생각합니다. 五月三十日
- 이연호가 동생에게
그새 학교 잘다니냐. 아버지 어머니 말씀 잘듯고 공부 잘하라.
종호도 유치원을 다닌다다니 잘가르쳐주며 잘 데리고 놀아라.
나는 잘잇다. 쉬 집으로 갈 것이다.
十一月八日
- 이연호가 확정판결이 나기 전에 집으로 보낸 편지
安寧들 하심니까. 저도 잘잇음니다.
그런데 電報핸바와같이 19일 재판이 있으나 이날 結末은 勿論 나지 않을 것이오니 絶對로 올러오시지 마시기를 願望하나이다. 잘되여야 이날은 判事의 論告나 잇고 수일 후에 檢事의 求刑이 있어가지고 일주일간 후에야 또 判事의 언도가 有할 것이오니 그리아십시오. 짐작에 어쩌면 금년 안으로 결말을 내줄 모양 같으나 아지못하겟나이다. 작년은 27일까지 사무를 보왔다 하니.
- 친구(후배) 성낙현이 보낸 편지 (‘불허가’된 편지)
그동안은 잘게섯슴니가. 저는 별고 업시 지내고 잇슴니다.
지난지 여러달동안 만이 예를 일엇슴니다.
을만아 궁금하엿스며 원망이 게셧겟슴니가.
저는 형님께서 終結判斷後 주신 혜서를 배견하고 암암류 누하엿슴니다.
그때에 감정이 만어서인지 항상 제 머리에 못이 되면서도 상서치 못하엿슴니다. 춘천 나갈 적마다 큰형님이나 아저씨 아주머니께 보오나 마음에 뉘우치이 만슴니다. 아즈머니는 그후 참 못뵈엿서요. 심통하실 생각을 하니 하? 이후는 나갈 적마다 꼭 뵈옵겟슴니다. 요사히 저는 농번기(모시무고 뽕땀)래서 부락에 도라다이고잇슴니다.
식양에 걱정이 만은데 금년은 풍년일듯십습니다.
항상 생각하나 농촌은 순결하고 양심적이고 온화한곳일줄 생각합니다.
허영과 명이 모든 악추를 떠난 태평연월에 볕·세게 하고 생각합니다.
후일 형님을 반겨 뵈올 때는 우리네 농촌으로 인도할 작정입니다.
형님 갱생에 일어난 형님 아즉 우리는 未熟합니다.
더 수학하고 더 사색하여야겟지요.
내내 안녕하심을 빌며
1939.12.20.
兄任 前
◇1939~1941년 고(故) 이연호 선생이 독립운동 중 투옥된 후 가족과 주고받은 옥중 서신들. 검열을 통과했다는 의미의 붉은색 '검(檢)' 자가 적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