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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작 기도
주님...
이 새벽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거하여 영혼의 안식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하나이다.
세상은 나를 좀 알아 달라고, 또는 내가 하지 않았다고 자기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서로가 서로를 물고 뜯고 아귀다툼으로 전쟁 중이지만 주의 품에서 참 평강을 누리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세상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시되, 그들의 아우성이 무엇인지 듣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주님이 원하시는 복음을 전하여 영생을 누리게 하옵소서.
나의 엣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죄의 몸은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말씀 앞에 나아가는데 빠르게 하시고 죄에 대하여는 둔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를 사는데 주의 보혈로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하시는 은혜가 필요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시 34:11-22
제목 : 마음이 상한 자가 거할 아이예카(피난처)는 주의 품입니다.
11. 너희 자녀들아 와서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12.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13.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할지어다.
14.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16. 여호와의 얼굴은 악을 행하는 자를 향하사 그들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17. 의인이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들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 충심으로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의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20.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서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벌을 받으리로다.
22. 여호와께서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 나의 묵상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 하다가 쫓겨나서 이 시를 지었으며, 오늘 본문은 자녀들 곧 그가 선생이 되어 나이가 많든 적든 상관없이 그의 가르침을 받는 모든 이들에게 주를 경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다(11절).
그는 생명을 사모하고 연수를 사랑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관심을 집중시킨다.
생명을 사모하며 연수를 사랑하여 복을 받는 것은 단순히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적 생명(프쉬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들 안에 있는 생명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조에)으로써 이는 거듭난 생명 또는 위로부터 태어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생명을 얻은 자가 연수를 사랑하여 복을 구하는데 이는 장수의 복이다.
진정한 장수는 이 땅에서 오래 사는 것도 감사한 일이지만, 완전한 평강과 안식으로 영생을 누리는 그 나라를 사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생을 누리는 그 나라는 죽어서 가는 천국 이전에 먼저 이 땅에서부터 주의 품에서 누리는 영생이며 그 안에만 진정한 평강과 안식이 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3:8절 이하에서 주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복을 받기 위하여 행해야 할 원리를 설명하는데 오늘 본문을 인용하고 있다.
(벧전 3:8-12)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거짓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며 그것을 따르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얼굴은 악행하는 자들을 대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리는 자는 그래서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여야 할 것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는 데는 반드시 고난과 핍박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이유는 주의 눈과 귀가 그 의인을 향하면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의 얼굴은 악인을 향하셔서 그들이 행한 모든 자기 의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지워버리며 끊으신다.
(대하 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유다 왕 아사가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합당하게 행하였으나 그의 말년에는 주를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여 결국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다.
북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남 유다를 공격할 때 유다 왕 아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람 왕 벤하닷에게 성전 곳간와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바치면서 북 이스라엘과 관계를 끊고 자기를 도와달라고 부탁하자 벤하닷이 그의 말을 듣는다.
그런데 사람은 은금에 유혹을 받아 아사의 말을 들을지라도 왕중의 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그를 벌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눈이 온 땅을 두루 지켜보시며 전심으로 주를 향하는 자에게 은혜와 능력을 주시는데 아사 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람을 의지하였으므로 하나님께서 전쟁이라는 벌을 내리실 것이라고 선견자 하나니가 말하자 아사 왕은 그를 옥에 가두어 버린다.
결국 아사 왕은 용두사미가 되어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따라 그의 발에 병이 들어 죽게 된다.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의인은 결코 주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며 그를 구원하신다(19).
심지어 이런 의인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을지라도 그의 모든 뼈를 보호하시고 하나도 꺾이지 않도록 주께서 지켜주신다.
이는 요한복음 19:30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좌우에 있던 강도와는 달리 그의 뼈는 상하지 않음으로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
곧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 성도들을 주께서 그렇게 지키시고 보호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자가 받을 복에 대해서 설명한다.
(벧전 3: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그래서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이는 악을 행하면서 받는 고난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은혜가 임한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에서 주님은 의를 위하여 고난 받는 자의 복이 곧 하나님 나라임을 천명하신다.
(마 5: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이 천국은 하나님 나라로써 아들의 생명을 얻어 누리는 영생을 의미한다.
이 영생은 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써 하나님 앞으로 인도함을 받아 그 분의 품에서 누리는 안식이다.
(벧전 3:18)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써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참된 복은 의인이 받는 영생이다.
그것은 마음이 상한 자가 받는 복이다.
일반적으로 마음이 상한 자라고 함은 누구로 인하여 받은 상처나 아픔 등 잘 치유되지 않은 내적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이런 상한 마음을 치유하는 것을 내적 치유라고 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마음이 상한 자는 그런 옛 사람이 받은 상처나 아픔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옛 사람은 죄의 세력에 지배를 받기 때문에 상처 받은 옛 사람을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야 하는 대상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상한 마음이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깊이 깨닫고 그것이 도무지 용서받지 못할 너무나 큰 죄임을 인정하며 그 죄로 인하여 고통 받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이처럼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그 죄를 주님께 통회 자복하는 자를 주님은 가까이 부르시고 사랑과 은혜로 구원해 주신다.
그래서 주님이 원하시는 참된 제사는 그 무엇보다도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시 51:17)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그런데 이사야 1장에 보면 상한 심령이 아닌 그저 제물만 가지고 와서 습관적으로 제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1:11-15)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너희가 손을 평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주님은 제사 즉 예배를 기뻐하시지만 마음 곧 상한 심령으로 통회와 자복이 없는 예배는 결코 받지 않으신다.
아무리 손을 들고 기도해도 주님께서는 당신의 눈을 가려버리실 것이다.
주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사 1:27)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이스라엘은 정의 곧 심판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에 이르며 구원에 이른 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회복하게 된다.
심판은 은혜의 선물이다.
선을 행함이란, 그래서 주의 심판을 인정하고 그 심판의 무덤 안에서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귐을 가지므로 주님이 계신 그곳을 자신의 성소로 삼아 피하는 자를 말한다.
선을 행함은 몸으로 착한 행실을 하기 전에 먼저 내 심령이 있어야 할 자리(아이예카)에 있는 것이다.
그곳을 나의 성전 삼고 날마다 그 자리로 내 영혼을 피하는 자가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누리는 영생의 복을 받는다.
이것이 새 언약 백성이 누릴 복이다.
(22) 여호와께서는 그의 종들의 영혼을 속량하시나니 그에게 피하는 자는 다 벌을 받지 아니하리로다.
새 언약 백성은 이제 누가 누구에게 여호와를 알라고 하면서 가르칠 필요도 없고 가르침을 받을 필요도 없다.
하와와 같이 간접 교제를 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알지도 못할 뿐 아니라 죄에 더 가까이 나아가므로 죄를 이길 능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러나 새 언약 백성이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는 한 가지다.
(렘 31:33-34)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르쳐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새 언약은 주님께서 성취하신 최종적이고도 완전한 언약이다.
더 이상 갱신할 필요도 없고 변개되지 않는 언약으로써 이 언약을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세우셨다.
(눅 22:20)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래서 주님께서 세우신 새 언약 안에서 주님과 연합된 자는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직접 말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누구에게 들어서 간접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존재이신 말씀 앞으로 나아갈 때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고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요 영생 얻은 자에게 주님께서 악행을 사하시고 죄를 기억하지 않으시는 복을 주시는 것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이 영생을 얻은 자가 날마다 말씀 앞으로 나아가 주님과 교제로 연합될 때 그 자리가 바로 주님의 품이요 내가 거할 곳이며 진정한 피난처인 ‘아이예카’인 것이다.
나는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진정으로 주님을 알지 못하던 자였다.
목사가 되어서 성도들을 가르치는 위치에 있으면서도 주님을 알지 못했기에 내가 가르치는 것이 죄요, 그 죄로 인하여 성도들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눈 먼 소경이었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는데, 내가 바로 그런 자였던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지만, 주님을 모르니 영생을 알리 만무하고, 영생을 모르니 교회에 나가는 것이 천국 가는 보증수표인 줄로 착각했던 것이다.
교회에 나간다고 다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 함은, 존재로써의 복음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가죽 옷으로 예표되는 메시야적 행위로써의 복음인 십자가에 죽음과 무덤에 장사되심 그리고 주님의 부활에 나도 함께 새 생명으로 일으킴을 받아 주님과 연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나는 그저 단순히 마음으로 믿는다는 미명하에 내 맘대로 내 뜻과 생각대로 예수를 믿었고 그것은 예수를 우상 삼아 점점 요상한 괴물로 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나를 주님은 아주 버리지 않으시고 복음을 듣게 하셔서 복음을 깨닫게 하셨고 복음을 통하여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 곧 영생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되었다.
그래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으며 그런 자가 얻을 하나님의 약속인 유업 즉 하나님의 나라를 받았다.
이런 자가 누리는 기쁨이야 말로 세상이 주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기쁨이며 하늘의 기쁨이다.
어제는 이번에 안성캠프에 함께 참석했던 김영선목사님이 동료 목사님 두 분과 함께 찾아왔다.
복음을 듣고 싶어서였단다.
그것도 들어보지도 않았고 너무나 생소한 장사복음을 듣기 위해서였다.
나는 두 시간 여에 걸쳐서 복음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나아가야 할 그 자리, 영생의 자리이며 주님이 거하시는 창세전의 그 자리, 주님의 품이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는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가는 것임을 말씀드렸다.
김영선목사님을 비롯하여 그 분들의 마음은 많이 가난한 듯 보였다.
수가성 여인과 같이 메시야를 기다리며 간절함으로 야곱의 우물을 찾았듯이 그들은 간절함과 사모함으로 온 것이 보였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나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하늘의 기쁨을 느꼈다.
내 안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쁨이 있었으며, 비록 잠을 자야하는 시간을 놓치면서 늦게까지 교제를 했지만 새벽에 일어날 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이는 주의 영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임을 안다.
나는 이 새벽에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통해 주의 영광을 본다.
이것이 내가 나아가야 할 자리임을 알기에 오늘도 기꺼이 주님을 환영하며 만나기를 고대하는 것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 영혼이 주를 만남으로 기뻐 춤을 추나이다.
비록 육신의 연약함으로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질 때도 있지만 다시 일어나 아버지께로 담대히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오직 주의 보혈을 힘입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과 더욱 깊이 교제하게 하시고 주님께서 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그 영생을 오늘 현재로 누릴 수 있게 하심이 얼마나 크고 기쁜지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인 나를 주님의 피로 새 언약 백성 삼으시고 이제 새 언약 백성으로써 날마다 주의 말씀 앞에 나아가게 하신 것은 오직 주의 은혜입니다.
때론 이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지만 그 고난은 의를 위하여 받는 것임을 알기에 육신은 곤할지라도 내 영혼은 기뻐 춤을 추나이다.
온전히 주의 품에 피하여 그곳에서만 안식을 누리게 하소서.
그곳만이 나의 온전한 아이예카, 주님의 품이 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