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모비스사랑&모비스영원 원문보기 글쓴이: 지은이-*
우승의 주역 양동근이 시상식이 끝난 뒤 림의 그물을 잘라 목에 걸고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사진 김수홍) |
양동근은 시상식을 마친 뒤 취재진과 인터뷰에서 "여자친구가 먼 곳까지 와 응원해 정말 고마웠다. 오늘(5월 1일)이 근로자의 날이라 휴일이어서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양동근은 "함께 뛴 동료들과 유재학 감독님께도 감사 드린다"고 말했다. 양동근은 1999-2000시즌 당시 청주 SK소속이던 서장훈에 이어 정규시즌과 챔피언결정전에서 모두 최우수선수로 뽑힌 두 번째 선수가 됐다. 정규시즌 MVP는 2년 연속이다. 양동근은 지난해 정규시즌에서 서장훈과 함께 공동 MVP가 됐다. 그러나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서장훈, 강혁, 이규섭이 이끈 서울 삼성에게 4경기를 내리 져 힘없이 우승 트로피를 내줬다. 올시즌은 달랐다. 지난 시즌 저질렀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듯 모비스 선수들과 양동근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7차전까지 가는 긴 승부 끝에 승자가 됐다.
챔피언결정전에서 우승했다. 소감은.
아직 실감이 안 난다. 어제 경기가 끝나고 가진 인터뷰에서도 그렇게 말했는데 아직도 얼떨떨하다. 오늘(5월 2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김)동우형을 봤다. 동우형이 그랬다. "어제 졌으면 앞으로 2년 동안 계속 술 생각이 났을 거다"라고. 지난 시즌에 우승할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잡지 못했다. 정말 아쉬웠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꼭 우승하고 싶었다. 지난해 챔피언결정전에서 삼성에게 4경기를 내리 진 게 국내프로농구 사상 최초 기록이라고 하던데 어제 경기에서 우리가 졌으면 3승으로 앞서다가 우승을 내준 최초의 팀이 될 뻔했다.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김동우와 같이 입대한다.
사실 지난해 챔피언결정전이 끝난 뒤 동우형은 상무 입단을 결정했다. 하지만 그때 나도 그랬고 팀 동료들이 모두 말렸다. 한 시즌만 더 같이 해보자고. 결국 동우형이 이번에 우승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다.
입대 날짜는 언제인가
5월 14일이다. 논산훈련소로 입소한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바로 입대한다(양동근은 여자친구 김정미 씨와 5월 6일 결혼식을 치렀다) 여자친구는 내가 군대에 가는 걸 좋아한다. 국군체육부대(상무)에 있는 게 만나기 더 편하다고 한다. 프로에서는 지방 원정경기도 치러야 하기 때문에 시즌 중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경기 일정도 빡빡하고. 그래서 그런지 입대를 무척 반긴다. 여자친구의 직장이 서울인데 국군체육부대가 있는 곳과 가깝다. 아직 두발을 깎지 않은 이유는 결혼식 때문이다. 동우형과 다른 형들 그리고 팀 동료들은 두발부터 깎으라고 성화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야 하는데(웃음). 신혼여행을 다녀오면 규정대로 두발을 잘 정돈하고 입소할 생각이다.
6개월에 걸친 시즌 일정이 모두 마무리됐다.
올시즌을 시작하면서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건 '다치지 말자'였다. 다른 선수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런데 시즌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 지났을 때 무릎을 다쳤다. 지난 시즌이 끝난 뒤 8월에 열린 월드바스켓볼챌린지(WBC) 대표로 소집됐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좀 부족했던 것 같다. 오프시즌 동안 계속해서 운동을 했던 게 결국 무리가 왔다. 그나마 큰 부상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팀이 좋은 경기를 하고 승리하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혼자만 잘하면 뭐하나. 농구는 한 명이 아닌 다섯 명이 코트에서 뛰는 경기다.
챔피언결정전에서 3승1패로 앞서나가다 2경기를 연속으로 져 3승3패가 됐다.
부산에서 열린 5차전에서 시리즈가 끝날 줄 알았다. 연장 승부 끝에 결국 졌다. 아쉬움이 남았지만 6차전을 홈에서 치르기 때문에 큰 부담은 없었다. 그런데 6차전을 너무 쉽게 내줬다. 경기가 끝난 뒤 팀 분위기가 정말 안 좋았다.
6차전(4월 29일)에서 진 뒤 선수단이 맥주집에 모였다는데.
그날 숙소에 있는데 뭔가를 해야 기분이 풀릴 것 같았다. 마침 출출하기도 해서(웃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간식거리가 오뎅이다. 숙소 근처에 있는 포장마차에서 파는 오뎅을 사러 구본근 매니저의 허락을 받고 동우형하고 나왔다. 그런데 마침 그날이 일요일이라 포장마차가 문을 열지 않았다. 그래서 근처에 있는 막걸리집에서 야식거리를 사려고 가는 길에 치킨집 사장님과 마주쳤다. 평소 알고 지내던 사장님은 내게 "유재학 감독님, 지금 우리 가게에서 맥주 마시고 있는데"라고 하신다. 그냥 숙소로 들어갈까 하다가 감독님께 전화를 드렸다. 사장님이 가게로 가셔서 유감독님께 밖에서 나를 봤다고 하면 괜한 오해가 생길 것 같았다. 팀 분위기도 좋지 않은 마당에. 솔직히 그날 '맥주 딱 한 잔 마셨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있었다(웃음). 감독님께 그렇게 말씀 드리자 흔쾌히 허락하셨다. "(선수들)다 나와서 맥주 한 잔씩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임근배 코치와 선수단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 모임이 7차전을 이길 수 있는 원동력이 된 것 같다. 가라앉았던 팀 분위기가 살아났다.
크리스 윌리엄스와 두 시즌 동안 호흡을 맞췄다. 2007-08시즌에는 윌리엄스가 모비스와 재계약을 해도 같이 뛸 수 없다.
윌리엄스는 뛰어난 선수다. 팀을 이끌어가는 능력도 있기 때문에 같이 뛰기가 편했다. 경기를 풀어나가는데 무척 많은 도움을 주는 선수다. 늘 고마움을 느낀다. (윌리엄스는 팀 동료인 양동근과 정상헌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출국날짜를 늦췄다). 윌리엄스 없이 경기를 하면 무척 답답할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없이 경기를 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그 상황에 또 맞춰야 한다. 윌리엄스는 많은 장점이 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패스를 잘 받는 특별한 장점이 있다. 한 번은 내가 패스를 하면서 '아, 이거 잘못 줬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그 패스도 잘 잡아냈다. 발로도 공을 잡을 선수다. 그렇지만 나도 가끔씩은 좋은 패스를 넣어준다(웃음).
오늘의 양동근을 만든 두 사나이
양동근은 농구 명문 용산고에서 주전 가드로 뛰었다. 슈팅가드로도 활약했지만 팀 공격을 지휘하는 포인트가드가 그가 주로 뛴 자리였다. 용산고를 졸업한 양동근은 한양대 유니폼을 입었다. 양동근에 대한 당시 평가는 '돌파력이 뛰어난 선수'였다. 그러나 약점도 있었다. 현대농구에서 가드로서 당연히 갖춰야 할 슛 능력이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모비스 양동근은 자신의 단점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양동근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입대한다.(사진 김수홍) |
그런 이유 때문이어서인지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 기존 강호는 물론 양동근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 주가를 올리던 성균관대에서도 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았다. 어느 대학으로 진학할지 관심의 초점이 되는 유망주들과 달리 양동근은 조용히 한양대로 갔다. 그러나 한양대 진학은 기회가 됐다. 양동근은 1학년 때부터 선발멤버로 코트에 나설 수 있었다. 포인트가드가 필요했던 팀 사정과 양동근의 입학이 맞아 떨어졌다.
한양대 김춘수 감독은 양동근의 플레이에 대해 "외곽에서 골 밑으로 치고 들어가는 돌파력 만큼은 나무랄 데가 없다. 하지만 프로에서도 경기를 보는 눈이 좁은 단점이 종종 드러난다. 대학 때도 (시야가 좁은 게)가장 큰 단점이었다"고 지적했다. 양동근도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양동근은 인터뷰할 때마다 "아직 부족합니다. 아직 멀었죠"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슛 능력을 키우지 않으면 프로에서 적응하기 힘들다는 주위의 지적에 따라 양동근은 농구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 양동근은 김감독의 전폭적인 지원과 함께 현재 모비스에서 한솥밥을 먹고 있는 김학섭(25,182cm)이 1년 후배로 한양대에 입학해 슈팅가드로 뛸 수 있었다. 전주고 시절 특급 가드로 이름을 날리며 유망주로 꼽힌 김학섭이 포인트가드에서 자리를 잡자 양동근은 슈팅가드로 자리를 옮겨 슈팅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양동근은 2004년 신인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 지명을 받고 모비스에 입단했다. 그러나 양동근은 유재학 감독과 만나지 못할 뻔했다. 원래 양동근의 지명권을 가진 팀은 전주 KCC였다. KCC는 모비스와 사전 트레이드협상에 따라 양동근에 대한 권리를 모비스에 넘겼다. 양동근이 KCC 유니폼을 입었다면 지금과 같은 위치에 서 있을 수 있었을까.
유감독은 이때 인천 전자랜드를 떠나 자리가 비어있던 모비스 사령탑에 앉았다. 명가드 출신 감독과 유망주 가드의 만남이 이뤄졌다. 유감독의 믿음 가운데 하나는 '좋은 포인트가드가 되려면 슛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팀 공격의 출발점으로 동료 선수에게 공격 기회를 주기 위해서 포인트가드는 상대 수비를 끌고 다닐 수 있어야 한다. 유감독은 양동근에게 슛을 많이 던질 것을 주문했다.
한양대 시절 주로 슈팅가드로 뛰었고 프로에서는 포인트가드로 뛰는데.
오래 전부터 포인트가드와 슈팅가드를 오가며 뛰었기 때문에 큰 어려움은 없다. 고등학교 때부터 공격지향적인 농구를 해왔기 때문에 포지션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경기에 뛸 때 마다 항상 자신감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슛 성공률이 높아지면 자신감도 따라 오른다. 프로 첫 시즌에는 3점슛에 애를 먹었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안 들어가도 좋으니 부담 갖지 말고 편하게 시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게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다른 선수들은 일반적으로 정지된 상태에서 슛을 던진다. 하지만 양동근 선수는 움직이면서도 슛을 잘 던진다. 특별한 비결이 있나.
비결은 없다. 슛을 던진 뒤 그 다음 움직임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슛을 던질 때 '아, 짧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공격 리바운드를 잡으러 들어가는 경우에는 공이 림을 통과하는 일이 많았다. 이번 챔피언결정전 때도 그랬다. 그러나 반대로 슛을 던질 때 '이건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공이 림 뒷부분을 맞고 튀어 나오는 일이 종종 있다.
모비스에서 3시즌을 보냈다. 신인 시절에는 유재학 감독에게 혼도 많이 났다고 하던데.
처음 입단했을 때와 요즘은 팀 분위기가 많이 변한 것 같다. 신인시절에는 솔직히 정신이 없었다. 그 당시 인터뷰한 걸 다시 보면 웃음이 나온다. 물론 그때도 그랬지만 난 늘 운이 따르는 선수라고 생각한다. 내가 갖고 있는 실력보다는 주변 상황이 많은 도움이 된 것 같다. 신인왕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팀 동료들과 우승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도. 최근에 감독님께 크게 혼이 난 적은 별로 없다. 기억이 잘 안 난다(웃음). 선수들은 팀 훈련 외에 각자 알아서 개인훈련을 한다. 신인 때였는데 2004-05시즌 중반쯤으로 기억한다. 몸도 좀 좋지 않았고 약간 자만한 것도 있었다. 그래서 팀 훈련이 끝난 뒤 개인운동을 4일 정도 걸렀다. 며칠 후 감독님이 조용히 나를 부르셨다. "요새 훈련장에서 얼굴 보기가 힘들다. 그렇게 해서 되겠냐."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차 싶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감독님은 임코치님과 같이 매일 선수들이 개인 훈련을 하는 걸 지켜보고 계셨다. 두 분도 운동을 매일 거르지 않고 하고 계셨고. 그때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래서는 안되겠구나." 그 뒤부터 개인훈련은 매일 하고 있다. 슛이 부족하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 개인훈련을 하면서 슈팅연습을 많이 했고 지금도 슛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많은 이들이 양동근 선수의 장점으로 돌파력과 과감한 슛을 꼽는다. 그렇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장점과 단점은.
장점이라. 조금 전에 말했지만 나는 아직 배울 게 많다. 슛은 프로 첫 시즌 보다는 올시즌이 나아졌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경기를 할 때 좀 더 여유를 가져야 할 것 같다. 경기가 끝난 뒤 특히 지난 5, 6차전처럼 경기에 졌을 때 동우형을 비롯해 동료선수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6차전이 끝난 뒤 숙소에서 동우형이 나에게 "제발 흥분 좀 하지 마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형, 제발 난사 좀 하지 마세요"라고 했다. 그러자 형은 "진작 그 이야기를 하지 왜 경기 중에는 아무 말 안 하고 있다가 경기가 끝난 뒤 하냐"며 구박했다(웃음). 경기가 잘 안 풀릴 때면 나도 모르게 시야가 좁아진다. 나도 잘 알고 있다. 상무에서 이런 단점을 고치도록 노력하겠다. 3년 만에 아마추어 무대로 돌아가는데 경기를 조율하고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을 더 키우도록 하겠다.
정규시즌 때나 플레이오프, 챔피언전에서 인터뷰할 때 '아직 멀었다'는 말을 자주했다. 지나치게 겸손하다는 평가도 있다. 낙천적인 성격이라는 말도 듣지 않나.
아니다. 나도 욕심이 많다. 너무 많은 게 탈이다(웃음). 특히 경기에 질 때는 화가 나서 견딜 수 없다. 남에게 화를 풀지 않지만 속으로는 정말 부글부글 끓는다. 이번 챔피언결정전 때도 그랬다. 부산에서 치른 5차전 때는 4쿼터 후반까지 이겼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결국 연장까지 가서 패했다. 내 자신에게 너무나 화가 났다. 울산으로 와서 이틀 뒤에 치른 6차전 때는 힘 한 번 써보지 못하고 졌다. 무척 화가 났다.
6차전 이야기를 해보자. 그때는 정말 힘들어 보였다.
모비스 양동근은 상대팀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사진 김수홍) |
태극마크
양동근은 대학교 2학년 때인 2000년 영맨세계선수권대회 대표팀에 뽑혀 처음 태극마크를 달았다. 이어 2001년 동아시아대회 대표팀에 선발됐지만 2002년 부산에서 열린 제14회 아시아경기대회 대표팀에 그의 자리는 없었다. 그러나 지난해 세대교체를 선언한 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렸다. 월드바스켓볼챌린지 2006과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15회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다. 도하에서 대표팀은 메달 획득에 실패했고 무기력한 경기를 치렀다는 비난에 시달렸지만 양동근은 자신의 주가를 다시 한 번 높였다.
양동근은 7월 28일부터 8월 5일까지 일본 도쿠시마에서 열리는 제24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 나설 23명의 대표팀 예비 명단에 포함됐다. 이번 대회는 한국에게 무척 중요하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출전권이 걸려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도하 아시아경기에서 대표팀의 성적이 좋지 못했다.
WBC와 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던 대표팀 선수들은 모두 고생이 많았다.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해 아쉽다. 48년 만에 첫 노메달이라는 성적에 더 마음이 아팠다. 병역혜택을 못 받았다고 그런 마음이 든 건 아니다. 군대는 반드시 가야 하니까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귀국 비행기에서 선수들끼리 걱정을 많이 했다. 다른 종목선수들은 메달을 목에 걸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에 웃고 즐거워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단복을 벗고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모자를 눌러쓰고 선수단 본진이 나가는 쪽과 다른 게이트로 빠져 나왔다. 누가 알아볼까 솔직히 겁도 났다. 농구팬들이나 관계자분들에게 정말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표팀에서 다른 선수들과 뛰는 건 어떤가.
소속팀을 떠나 다른 팀에서 뛰고 있는 선수들과 손발을 맞추는 게 흥미롭고 무척 재미있다. WBC와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김)승현이 형, (김)태술이와 호홉을 맞췄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각자 다른 스타일로 농구를 하기 때문에 운동을 같이하면서 서로 좋은 점을 배울 수 있어서 좋다. 농구는 습관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기술적인 면은 선천적으로 얻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연습이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연습만이 내가 모자란 면을 채워줄 수 있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
양동근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부모님을 꼽는다. 양동근이 농구팬들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때는 2000년이다. 당시에 양동근은 프로농구선수로 활동하고 있는 양경민(35,193cm,원주 동부)의 친동생으로 먼저 알려졌다. 용산고 선배이기도 한 양경민은 양동근이 농구를 시작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제는 더이상 '양경민의 동생'이라는 수식어가 양동근의 이름 앞에 붙지 않는다. 그는 올시즌 프로데뷔 이후 최고의 시간을 보냈다. 정규시즌과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로 뽑힌 명예보다 더 의미 있고 중요한 챔피언 트로피와 반지를 얻었다. 그리고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농구는 언제 시작했나.
서울 대방초등학교 5학년 때 시작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내 걱정을 많이 하셨다. 내가 다른 아이들보다 말을 좀 늦게 시작했다. 6살이 넘어서 말을 했다. 7살 때부터는 다른 아이들처럼 속셈학원도 다니고 그랬다. 그런데 어머니랑 떨어지는 게 너무 싫었다. 학원에 가기 위해 집에서 나가는 게 싫어서 엄청나게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난다. 그래서 부모님께서 내가 약하게 크면 안 된다고 태권도를 시켰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시작해 농구를 하기 전까지 3년 동안 했다. 이래봬도 3단이다(웃음). 농구는 큰 형(양동근은 인터뷰 도중 양경민을 큰 형이라고 불렀다)이 이미 선수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낯설지 않은 종목이었다. 그리고 누나(양유정)는 서울체고에서 양궁선수로 활동했다. 그래서인지 운동선수가 된다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양경민이 사촌 형이라고 들었다.
맞다. 지난 일이지만 나와 큰 형이 친형제지간이라는 보도는 잘못 된 것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3년 정도 집안사정 때문에 부모님과 떨어져 살았다. 그때 큰 형은 우리 집에 있었다. 당시 나는 이모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그리고 그때는 큰 형이 친형인줄 알고 지냈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큰 형하고는 친형제가 아닌 사촌형제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걸 알게 됐을 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여자친구와 무척 오래 사귀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만났다. 그때 체육학과 신입생이 80명이었다. 5명이 여학생이었고 그 가운데 한 명이 (김)정미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처음 얼굴을 봤다. 그 후 가까워져서 사귀게 됐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정말 친구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리고 정미 친구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농구선수로 보지 않는다. 같이 만나면 "쟤가 그 농구선수야? 맞아?"라고 물어본다(웃음). 지난해 아시아경기대회에 대비하기 위해 태릉선수촌에 입촌했을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유도대표팀과 같이 운동을 했는데 유도 코치님이 훈련용 밧줄을 타보라고 했다. 못 올라가겠다고 말씀 드리자 "너, 운동 선수 맞냐"고 말씀하셔서 다들 웃었다. 최부영 감독님께서도 "우리 선수 가운데 한 명이라도 밧줄을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외출을 허락한다"고 하셨는데 아무도 올라가지 못했다(웃음).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안 났다. 무섭기도 하고. 다치면 큰 일 아닌가. 그런데 유도선수들은 대단했다. 모두들 밧줄 끝까지 올라갔다. 친구인 이원희, 권영호 선수가 나를 엄청 놀려댔다.
신혼여행은 몰디브로 간다고 들었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대표팀에 있을 때 (김)성철이 형이 몰디브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성철이형은 신혼여행을 발리로 다녀왔다고 했다. 성철이형이 "몰디브는 곧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다고 그러던데 꼭 가보라"고 말했다. 사실은 자기가 못 가본 곳이라 다녀와서 어떤 곳인지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했다(웃음).
시즌이 진행될 때 그리고 오프시즌 동안 체력보강을 위해 특별히 신경 쓰는 게 있나.
보약을 지어먹거나 따로 (체력보강을 위해)운동을 하지는 않는다. 굳이 예를 들자면 경기 전 즐겨먹는 자장면이 내게는 보약이다(웃음). 보통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먹는다. 이번 챔피언결정전 기간에도 자주 시켜 먹었다. 시즌 도중 원정경기를 치를 때는 자장면을 잘 먹지 못한다. 호텔에 있을 때가 많아 자장면 먹기가 좀 불편하다. (김)효범이가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내가 "자장면 먹을까?"라고 물어보면 효범이가 배달을 시킨다. 일회용 그릇이나 다른 용기에 면을 넣어달라고 꼭 부탁하는 게 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호텔에는 배달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효범이가 1층에서 음식을 받아서 방으로 올라온다. 그러면 다같이 젓가락을 든다. 호텔에서 먹지 못할 경우에는 경기장으로 배달을 시켰다(웃음). 그리고 운동을 안하고 쉴 때는 확실하게 쉰다. 농구 생각을 전혀 안 한다. 많은 선수들이 나와 같은 방식으로 쉬는 시간을 보내는 걸로 알고 있다.
운동하기 힘들거나 싫을 때도 있지 않나.
(단호하게)지금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대학 때는 종종 그런 생각이 들었다. 특히 1학기 초•중반이 힘들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지만. 새 학기가 되면 학교 분위기가 좀 다르게 느껴졌다. 그럴 때는 운동하기가 조금 힘들다. 다른 학생들은 친구들하고 놀러 가기도 하는데 운동을 해야 했으니까 그런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중•고교시절 미국프로농구 NBA를 많이 봤나
중•고등학교 때는 NBA 경기를 많이 봤다. 밤 11시가 넘어 농구 중계 방송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훈련 중간중간 마이클 조던의 슛 동작도 따라 했다. 또 당시 선수로 맹활약하던 KCC 허재 감독님의 슛 자세도 따라 해봤다. 나는 오른손잡이지만 왼손으로 허감독님 슛자세도 따라 해보고 그랬다. 물론 코치선생님께 걸리면 혼이 났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똑바로 운동해!"라고 불호령을 내리셨다.
특별한 내용의 훈련이 도움이 된 경우도 있지 않을까.
하프라인에서 던지는 슛은 운동이 끝나고 휴식시간에 여러 번 해봤다. 도하 아시아경기대회에서 그 덕을 봤다. 일본과의 5위결정전이었는데 4쿼터 종료와 함께 우리 쪽 자유투 라인 근처에서 던진 장거리 슛이 그대로 들어갔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벤치에서 더 좋아했다. 아시아경기대회 사상 가장 먼 거리에서 시도해 성공한 슛이라고 들었는데 정확한 거리는 모른다.
경기할 때나 훈련할 때 덩크슛을 한 적이 있나.
대학교 4학년 때 경기에서 딱 한 번 시도해 성공한 적이 있다. 측정해 본 적이 없어서 제자리 점프가 얼마인지는 모르겠다. 70cm정도 뛸까. 그 뒤로는 덩크슛을 시도하지 않았다. 대학 때는 지금보다 훨씬 운동능력에 자신감이 있었다. 웨이트트레이닝도 꾸준히 해서 몸에 근육도 많이 생겼다. 한 대회가 끝나면 두 달 정도는 연습경기를 제외하고는 코트에서 설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날아다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런데 문제는 나 혼자만 "정말 농구가 잘된다"라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웃음).
팬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항상 지켜보고 계시다는 걸 안다. 아직 부족한 게 많지만 계속 격려해 주시고 성원해주시길 바란다. 당분간 프로무대에서 뛰지 못하지만 2년 뒤 더 발전된 기량을 보여드리겠다. 그리고 2007-08시즌에서도 모비스와 프로농구를 더 많이 응원해주시기 바란다.
울산=류한준 기자
ⓒmedia2.0 Inc. All rights reserved.
무단전재 및 재배포시 법적 제재를 받습니다.
양동근은 상무에서 경기를 조율하고 경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능력을 키우겠다고 말했다.(사진 김수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