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신명기 26,16-19 마태오 5,43-48
나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외줄타기를 하는 한 서커스 단원이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미국과 캐나다 사이에다 강철 줄을 걸어 놓고 거기서 줄타기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 손에 땀을 쥐면서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열심히 이리 건너오고 저리 건너가고 하면서 시종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사람들 앞으로 와서 말했습니다.
“누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타겠습니까? 내가 한 사람을 어깨에 메고 건너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쳐다볼 뿐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꼬마 소년이 “저요!”하고 손을 들면서 앞으로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소년을 어깨에 태우고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습니다.
사람들이 더 많은 박수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사람들은 그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 겁나지 않든?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지?”
그 소년이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저분이 제 아버지거든요!”
자녀는 부모를 믿습니다.
그러니 부모님과 함께라면 불가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시키는 것이라면 분명 가능하니까 시키는 것이고 불가능하더라도 도와주실 것이니까 시키는 것임을 압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완전해지는 길은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입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원수가 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분명 나는 그를 원수로 여기기 때문에 나는 원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서 그것을 하실 수 있으십니다.
나는 못 해도 예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 등에 타기만 하면 됩니다.
이를 위해 그분은 성체성혈의 모습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분께 맡기지 않으면 내 안에 그분이 살아계심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한 여행자가 관광 중에 몸의 균형을 잃고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수영을 전혀 할 줄 몰랐던 그는 물속에 빠져 죽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팔을 흔들어댔습니다.
그러나 곧 지쳐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그는 ‘이제 난 죽었구나!’ 하며 자포자기했습니다.
그러자 물이 그를 세게 받쳐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몸이 물에 둥둥 떴습니다.
그가 빠진 바다는 사해였던 것입니다.
사해는 다른 물과 달리 염분과 다른 광물들이 많이 섞여 있어 물에 가만히 몸을 맡기고 누워 있기만 하면 둥둥 뜨게 됩니다.
우리 안의 예수님은 마치 사해와 같습니다.
사해에 있으면서도 빠져 죽을 걱정을 한다면 자신이 사해에 있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내가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절망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안에 예수님이 계시는데 무엇이 불가능하겠습니까?
그냥 맡기면 됩니다. 이것이 성체성혈을 먹고 마시는 신자의 자세입니다.
우리는 마치 성모 마리아처럼 예수님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의 기분을 상상해봅시다.
하느님을 잉태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 데 못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나는 못 해도 우리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할 수 있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런 믿음으로 우리는 진정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우리도 완전하게 될 수 있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24일 [사순 제1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5,43-48
원수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원수(怨讐)란 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원수란 한 마디로 적(敵)을 의미합니다.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쳐 사무치는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니 이런 사람들도 원수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준 사람, 그래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 같은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싫은 사람, 자다가도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그 사람,
내 인생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틈만 나면 내 인생길을 가로막는 사람...
결국 원수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들이군요.
원수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내 가정 안에, 내 직장 안에, 내 공동체 안에,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안면 몰수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예수님의 당부 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사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늘 우리 곁은 졸졸 따라다니는 평생 웬수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열심히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그 ‘웬수’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더군요.
그 순간은 그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깊은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에서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그의 쓸쓸하고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의 말못할 사정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뒤돌아서서 흘리는 그의 눈물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도 나약한 한 인간이지만 그도 나약한 한 인간이로구나, 그때 내게 준 괴로움이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현이었구나, 좀 더 사랑해달라는 손짓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원수에 대한 사랑, 참으로 어려워 보이는 일이지만 그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순 제1주간 토요일 강론>
(2024. 2. 24. 토)(마태 5,43-48)
<사랑>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3-48).”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은 ‘나의 이웃’입니다.
따라서 원수는 없습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원수라고 생각하는 이웃이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저자가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도저히 저자를 이웃으로 생각할 수가 없다. 저자는 나의 원수일 뿐이다.” 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살다보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원수 같은 사람에게도
이웃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저자를 용서할 수가 없다.
용서를 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려고 노력해도 용서가 안 된다.
사랑은 더욱더 할 수가 없다.” 라고 하소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피해자 입장에서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용서가 안 되고, 사랑 실천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도 ‘하느님의 힘’으로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는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을 달라고.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로마 12,17-21).”
이 말을 조금 쉽게 풀이하면, “그 나쁜 놈을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여러분은 자비만 실천하십시오.”입니다.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직접 복수하려고 나섰다가는, 나도 그 나쁜 놈과 똑같은 나쁜 사람이 될 것이고, 그러면 그 나쁜 놈과 내가 함께 심판을 받는 일이 생길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은 하느님께 맡겨드리고 나는 자비만
실천하는 것은, 사실 나 자신을 위한 일, 즉 나 자신의 구원을 위한 일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비유는 이웃 사랑 실천에 관한 비유이기도 하고,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일에 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루카 10,30.33-35).”
그 당시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서로 상대방을 원수로 생각하는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강도당한 사람을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서, 그 사람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상대방이 원수 같은 유대인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고, 강도를 당해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착한 사마리아인’ 같은 사람이 되라는 계명입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 사랑 외에 다른 것은 일체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주는 일만 생각하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여기서 ‘악인’과 ‘불의한 이’는 ‘그들’만이 아니라
‘나’도 포함될 수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는 악인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악인들을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원수’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원수’만 생각하고, 내가 누군가의 원수일 수도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는 것도, 또는 부정하는 것도, 교만이고 위선입니다.
왜 항상 의인 입장에서만, 또 피해자 입장에서만 생각하는가?
자기는 한 번도 악인이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악인이 될 가능성도 없다고, 하느님 앞에서 감히 주장할 수 있는가?
“원수를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은 정말로 실천하기 어려운 계명이라고 내가 생각하고 있을 때, 그 누군가는 원수 같은 나에게 그 어려운 사랑을 이미 실천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