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행(上行)
김광규
가을 연기 자욱한 저녁 들판으로
상행 열차를 타고 평택을 지나갈 때
흔들리는 차창에서 너는
문득 낯선 얼굴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는
낯익은 얼굴들이 네 곁에 있지 않으냐,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과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 안테나들
흥미 있는 주간지를 보며
고개를 끄덕여 다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같은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확성기마다 울려나오는 힘찬 노래와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는 얼마나 경쾌하냐
예부터 인생은 여행에 비유되었으니
맥주나 콜라를 마시며
즐거운 여행을 해 다오.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침묵이 어색할 때는
오랫동안 가문 날씨에 관하여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에 관하여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에 관하여
이야기해 다오.
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반달곰에게>(1981)-
해 설
[개관 정리]
◆ 성격 : 반어적, 현실비판적, 참여적, 풍자적, 자기반성적
◆ 표현 : 현실에 대한 비판과 냉소가 담긴 반어적 어조
근대화를 상징하는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여 주제를 형상화함.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상행 → 중앙 집권적인 전근대적인 사고방식이 반영된 말
* 낯선 얼굴 → 바람직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는 정신적(반성적) 자아, 현실비판의식을
지닌 자아.
* 그것이 너의 모습이라고 생각지 말아 다오. → 반어적 어조
* 낯익은 얼굴들 → 일상적 삶에 묻혀 참된 자아를 잊고 안일하게 살아가는 현실적
자아의 모습
* 황혼 속에 고함치는 원색의 지붕들, 잠자리처럼 파들거리는 TV안테나들
→ 외형적 성장 위주의 획일적인 근대화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음.
1970년대 정부가 시행한 '주택 개량 사업'과 관련되며, 겉모습만 근대화한 당시의
현실을 풍자함.
* 흥미있는 주간지를 보며 / 고개를 끄덕여 다오.
→ 현실문제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갖지 말고 부정적 현실을 수긍하라고 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우민화 정책에 대한 비판이 담김.
*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 → 왜곡된 근대화로 인한 농촌의 환경 파괴 문제를
환기시킴. 농민들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환기시킴.
*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 듣기 힘든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의 소리 · 진실의 소리'에 귀
기울이지 말아 다오.
모든 언론이 정권에 의해 장악되어 통제되고 있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 확성기마다 울려 나오는 힘찬 노래와 / 고속도로를 달려가는 자동차 소리
→ 표면적인 풍요로움, 위장되고 포장된 현실
* 되도록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 문제의식을 갖지 말라. 사고와 사상의 자유가
제한된 현실 비판
* 놀라울 때는 다만 '아!'라고 말해 다오. → 표현의 자유가 제한된 현실
* 보다 긴 말을 하고 싶으면 침묵해 다오.
→ '보다 긴 말'이란 현실에 대한 비판으로, 이것이 허용되지 않는 시대상을
암시하면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 없이 살아가는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 ('침묵'은 시대상을 드러내는
시어임)
* 오랫동안 가문 날씨 → 눈 앞에 당면한 천재지변으로 인한 시련
* 아르헨티나의 축구 경기 → 우리와 상관 없는 일
* 성장하는 GNP와 증권 시세 → 외형적 성장과 개인적 관심사
* 너를 위하여 / 나를 위하여
→ 소시민적 삶에 대한 비판과 동시에 반성을 하고 있다.
'나를 위하여'라는 부분에서 지금까지의 비판이 시인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반어적 어조
→ 생각지 말아 다오, 고개를 끄덕여 다오, 귀기울이지 말아 다오, 생각을 하지 말아
다오, 침묵해 다오.
◆ 청자 : 소외계층에 무관심하고 잘못된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혀 갖지 못한 채
속물적으로 살아가는 중산층 소시민들
◆ 화자 : 소시민적 의식을 반어적으로 표현하여, 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근대화의
문제점을 직시할 것을 말하고 있다.
◆ 주제 : 독재 권력 하에서 이루어진 잘못된 근대화에 대한 비판
잘못된 현실에 무관심한 소시민의 속물적· 이기적 태도에 대한 비판
[시상의 흐름(짜임)]
◆ 1~5행 : 상행선 기차에서 발견한 자아 - 작품의 배경과 상황 제시
◆ 6~11행 : 진실된 모습을 보지 말라. - 일상적이고 부정적인 현실의 수용
◆ 12~19행 : 진실의 소리를 듣지도, 진실에 대해 생각하지도 말라. - 부정적 현실을
외면하는 삶
◆ 20~29행 : 삶의 진실에 대해 말하지도 말라. - 부정적 현실에 침묵하는 삶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행태와 기차 밖에 존재하는 풍경을 대비시키고 있다. 기차의 바깥에 존재하는 것은, 근대화가 가져온 풍요에서 소외된 농민과 서민의 고통스런 현실이다. ‘농약으로 질식한 풀벌레의 울음’과 ‘오랫동안 가문 날씨’는 농민과 서민이 처한 고통스런 삶의 현실을 비유적이고 함축적으로 나타내는 시구인 것이다. 반면 기차 안에 존재하는 것은 소시민 혹은 중산층의 삶이다. 이들은 근대화의 혜택을 누리며 풍요롭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화자는 이들이 근대화의 풍요롭고 힘찬 겉모습만을 보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농민과 서민의 소외되고 궁핍한 삶은 그들에게 ’심야 방송이 잠든 뒤의 전파 소리 같은 듣기 힘든 소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이 작품의 화자는, 작중 청자(聽者)로 설정된 소시민 또는 중산층의 인물을 향하여 농민과 서민의 삶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편안하게 살라고 말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런 현실에 눈 감고 속물적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태도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너를 위하여 / 나를 위하여.‘라는 마지막 부분의 표현은, 이와 같은 비판이 시인 자신에게도 향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즉, 시인은 자신의 소시민적인 삶을 비판하며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두 개의 표정을 갖고 있다. 낯선 얼굴이 그의 원래 표정(진정한 자아)이지만, 낯익은 얼굴은 오징어를 씹으며 화투판을 벌이고, 흥미 있는 주간지를 탐독하고 TV를 즐기는 타인들의 표정이다. 그러나 화자는 낯선 표정을 감추고 낯익은 얼굴을 자신의 얼굴로 뒤집어쓰려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의 삶의 방법이고 삶을 안전하게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낯선 얼굴이 그의 주체아라면 낯익은 얼굴은 그의 객체아이다. 객체아는 주체아와 더불어 전체 자아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이런 객체아에 대한 화자의 반성과 비판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분석으로서의 자기 풍자이다.
[작가소개]
김광규 : Kim Kwang-Kyu대학교수, 시인
출생 : 1941. 서울특별시
소속 : 한양대학교(명예교수)
학력 :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 학사
데뷔 : 1975년 문학과 지성 등단
수상 : 2018년 제30회 정지용 문학상
2007년 제19회 이산문학상
경력 : 한양대학교 인문과학대학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작품 : 도서 38건
1941년 1월 7일 생(80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인동에서 출생했다. 서울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75년 '문학과 지성'에 등단했고 2007년 제19회 이산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한양대학교 명예교수이다.
김광규의 시는 그 생각에 비뚤음이 없으며 그 어조에 격렬한 부르짖음이 없으며 그 은유에 현란한 모호성이 없고 그 관심이 소박한 일상을 넘어서지 아니한다. 그래서 그의 시는 뜻이 분명하고 건강하며 읽는 이들에게 쉽고 친밀한 느낌을 준다.
주요 작품으로는 「묘비명」[2],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어린 게의 죽음」, 「아니리」, 「도다리를 먹으며」, 「상행」, 「서울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