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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1: 1-5
태초에 하나님이
창세기의 첫 글자에서부터 삼위일체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과 자신의 일을 모세를 통하여 선인적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이런 말씀을 보고 듣고 믿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1. 본문 1절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입니다.
1) ‘태초’라는 말을 설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1) 모세는 여기에서 세상이 지금과 같이 완전한 모습을 갖춘 것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혼돈 가운데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주장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말은 ‘하나님께서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은 텅 비어 있었고 황폐했다’ 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더욱이 모세는 ‘창조하시니라’ 는 말로써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던 것이 지금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짜맞추다’ 혹은 ‘모양을 만들다’ 라는 뜻의 (야차르)를 쓰지 않고, ‘창조하다’ ‘지어내다’ 라는 의미의 (바라)를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이 단어는 이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무에서 창조되었다’는 것으로 ‘태초에’라는 말에서 입증된 것처럼 그 이전에는 아무것도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선재한 물질 중에서 우수한 어떤 것을 생산한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언급되어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고래와 사람을 만드셨습니다. 따라서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이 무에서부터 만들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로써 무형 물체가 영원 전부터 존재했다고 상상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배격됩니다.
(3) 또 모세의 이 말은 세상이 새롭게 장식되었고 이전의 형태와는 다른 모습을 갖게된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도 일축됩니다. 실제로 이러한 견해는 전에 이방 신을 숭배했던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우화입니다. 그들은 단지 창조 기사를 잘못 받아들여 하나님의 진리를 전승에 따라 와전시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이와 같이 큰 오류를 옹호하려고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입니다.
(4)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모세는 하늘과 땅을 ‘혼돈의 덩어리’라고 불렀습니다. 모세는 2절에서 이것을 ‘수면’이라고 언급했습니다. 모세가 이처럼 묘사한 이유는 이 물질이 모든 세계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우주의 구분이기도 합니다.
2) “하나님”이라는 말에서 모세는 이 단어를 복수 명사인 (엘로힘)으로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이 단어로부터 삼위의 하나님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확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에 대해서 강조할 생각이 없습니다. 다만 이 같은 억지 해석에 주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아리우스파에 대항해서 성자와 성령의 신성을 이 단어 속에서 입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사벨리우스의 오류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나중에 ‘엘로힘 이 말씀하셨으며 엘로힘의 신이 수면에 운행했다’ 고 덧붙였기 때문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말속에 삼위가 암시되어 있다고 가정한다면 삼위 사이에는 어떠한 구별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자가 스스로 났으며 성령도 성부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한다고 결론짓게 됩니다. 우리는 모세가 복수 명사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행사하신 권능을 나타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성경에 열거된 수많은 하나님의 권능을 통해서 언제나 성부와 말씀과 성령을 상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어쨌든 우리는 모세가 하나님에 대해서 단순하게 표현한 말을 곡해해서 하나님의 각 위에 적용시키는 불합리한 해석을 하지 말아야 됩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 분명히 ‘엘로힘’이 하나님을 의미하며, 하나님의 권능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주장할 수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이 하나님의 권능은 이미 그분의 영원한 본질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입니다.
1) 여기에서 (보후)라는 두 형용사의 해석에 대해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히브리인들은 텅 비고 혼돈된 어떤 것이나 헛되고 전혀 무가치한 것을 나타내고자 할 때 이러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모세는 의심할 여지없이 이와 같은 형용사를 세상의 형태와 장식과 완전성을 갖춘 창조물에 반대 개념으로 사용했습니다. 만약에 우리가 이 구절에 기록된 창조의 시간 이후에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을 이 세상에서 제거해 버리면 온 세상은 거칠고 모양도 갖추지 않은 혼돈 속에 놓여질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라고 덧붙인 말을 일종의 혼돈과 공허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세상에 빛이 있음으로써 만물의 모양이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모세는 ‘깊음’과 ‘물’을 언급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견고하고 안정되고 뚜렷한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2)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이라는 말씀을 여러 가지로 곡해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바람’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러한 견해는 너무나 무의미합니다.또한 이것을 ‘하나님의 영원한 영’ 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해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가 이 말에서 나타내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모세가 (메라헤페트) 라는 분사의 다양한 해석 중에 나타내고자 했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완전하게 만드시기 전에는 모든 것이 혼돈 덩어리였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모세는 이 세상이 유지되기 위해서 성령의 권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여기서 그처럼 무질서한 덩어리가 어떻게 지탱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이 질서나 통치에 의해 보존됨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 덩어리가 아무리 혼돈 가운데 있었다 해도 성령의 은밀하신 권능에 의해 얼마동안 지탱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히브리어는 ‘성령께서 수면 위를 운행하여 활기를 불어넣으셨다’ 라는 의미와 ‘성령께서 수면을 조용히 덮고 계심으로써 수면을 소중히 간직하셨다’ 라는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합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뜻은 궁극적으로 차이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해석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신자들에게 맡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밀하신 영감 덕분에 이러한 혼돈은 와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다른 어떤 곳으로부터 힘이 작용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러한 혼돈이 질서정연하게 유지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이것은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 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시104:30)라는 구절을 볼 때 더욱 분명해집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영을 거두신다면 모든 것은 즉각 본래의 모습인 흙으로 돌아가 버릴 것입니다(시104:29절).
3. 본문 3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입니다.
1) 모세는 이제 처음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고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마치 하나님께서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천지를 창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말씀’ 의 권능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동일한 ‘말씀’ 의 권능으로 완성되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빛을 만드시기까지는 말씀을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구별의 행위로 하나님의 지혜가 분명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세르베투스의 모독적인 견해를 반박하기에 충분합니다. 이 불손한 트집장이 학자는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고 명령하셨을 때, 말씀이 처음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그 원인이 결과가 있기 이전에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없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갑자기 존재하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오히려 하나님의 본질이 영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말씀이시다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인해 창조되었다고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정확히 입증했습니다. 세르베투스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 안에 새로운 속성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견해와 전혀 다른 각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안에 거하는 ‘지혜’ 이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이 지혜가 없이는 결코 존재하실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빛이 창조되었을 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2) “빛이 있으라”는 말씀에서 사실 빛은 제일 먼저 창조되어야 옳았습니다.
세상은 빛을 통해서 그 놀라운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장식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빛은 모든 피조물 가운데 구별하게 하는 것의 시초였습니다. 그러나 빛이 해와 달보다 먼저 창조된 것도 우연한 것이거나 무분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기 쉬운 과오는 하나님의 권능을 이러한 도구에 제한시키는 일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의 기능에 제한시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해와 달은 우리에게 빛을 비춰줍니다. 우리는 해와 달이 빛을 비추는 힘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해와 달이 없으면 이 세상에 더 이상 빛이 존재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창조의 질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빛을 장악하신다는 것과 하나님께서는 해와 달이 없이도 빛을 비추어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증거 하십니다. 더욱이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빛과 어둠이 교차되도록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과 어둠이 세상의 모든 구역을 교대로 교차하는 것인지, 아니면 어둠이 세상의 절반을 점유하고 빛이 그 나머지 절반을 점유하여 비추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이 계속적으로 질서 있게 교차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낮이었다가 밤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미결로 남겨두겠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꼭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4. 본문 4절은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행한 일을 보시고 기뻐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적이나 이유 없이 만든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이같이 말씀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세의 말을 마치 하나님께서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그것이 잘 되었는지를 모르셨던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우리가 알다시피 하나님께서 그 일을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으며 다만 하나님의 이러한 판단에 묵묵히 순종하기만 하면 됩니다. 사실 이와 같은 훈계는 아주 가치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감정을 기울여 하나님의 역사를 묵상해야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을 범하는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5. 본문 5절은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낮과 밤으로 규칙적인 순환이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은 첫째 날이 끝났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밤이 새로운 날의 시작이 되도록 빛을 거두신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말은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것이 첫째 날에 속한 저녁과 아침이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첫째 날이 저녁과 아침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든지 의미상으로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모세는 단순히 하루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히브리 민족의 관습에 따라 하루가 저녁부터 시작하는 것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것이 가장 정확하고 합리적인 순서인지를 논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어둠이 이 시간보다 먼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을 거두시자 하루가 끝났습니다. 대부분의 선조들이 밤이 되면 하루가 끝나고 아침이면 새날이 시작되는 것으로 계산했습니다. 모세는 이 본문에서 위의 방법대로 하루를 계산하지 않으면 잘못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 우리가 언급한 것처럼 자신은 전통적인 관습에 따라 하루를 계산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러한 계산 방법만을 인정하셨다고 고집하여 어리석게도 다른 민족의 일력 계산 방법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인정한 이 같은 일력 계산 방법에 대해서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인정한 이 같은 일력 계산 방법이 전혀 불합리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어리석습니다.
2) “첫째날”이라는 이 말씀으로 미루어 볼 때 세상이 일순간에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일순간에 창조 사역을 이루셨는데 모세가 후대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 천지를 6일 동안 나누어 창조하셨다고 주장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사역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도록 6일이라는 기간을 정하셨다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무한한지를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은 이 말씀에서 빛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우리의 무딘 감각을 가지고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허영심 때문에 잘못된 곳으로 가기 쉽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마음을 고쳐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좋은 치유책을 사용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잠시 조용히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세상의 창조를 몇 부분으로 나누신 것입니다. 이러한 주해를 확증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외경이지만 집회서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려 합니다 거기에는 “영원히 살아 계신 분이 단번에 만물을 창조하셨다” 라고 되어 있습니다(집회서 18:1). 그리고 이 책의 기자가 사용한 κοινη(코이네) 라는 말은 어떤 특정한 사물이나 시간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일반적으로 가리키는 것입니다.
3) 성경의 첫 번째 선언이 믿어진다면 계시록 마지막 절까지 믿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 사람은 구속주로도 믿습니다. 하나님을 창조주라고 믿는다는 사실은 굉장히 부요한 내용을 믿는 일입니다. 그리고 굉장히 구체적이고 자세한 내용까지를 하나님과 관련시켜서 믿는 사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이 풍성한 감사와 찬송을 드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