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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108 힐링 원문보기 글쓴이: 중파 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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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을 넘긴 아버지를 지게에 태워
금강산 유람을 다녀온 아들
혼자서 오르기도 힘들다는 금강산을 아버지를 모시고,
그것도 지게에 태워 관광을 다녀온 이군익(42)씨
이씨는 아버지를 지게에 모시고 금강산에 오르는
사진이 한 언론사의 독자투고란에 나면서
인터넷상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를 둔 평범한 가장
이라고 본인을 소개한 이씨를 인천에서 23일 만났다.
금강산 가문, 1만2000봉 8만여 남으개 암자가 있다던 디…......."
지난 봄, 아버지 이선주(92) 씨가 독립기념관
나들이 길에 언뜻 금강산 얘기를 꺼내셨다.
한 해 전 어머니를 먼저 떠나보내신 아버지가
적적해하실까 싶어 한창 산으로 들로
모시고 다니던 때다"중학교 다닐 적에
집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지요
충남 서산 빈농에서 자랐습니다.
7남매의 막내인 저까지 대학 공부를 시키시
느라고 평생 허리 한 번 못 피신 아버지 십니다
듣자마자 마음속으로 '예 아버지, 금강산 아니라
그 할아버지라도 모시고 가겠습니다. 다짐했지요.
6월 아버님 생신즈음 해 금강산 여행을
보내드리자고 형제들과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노환으로 거동이 불편하신
아버지가 산에 오르시는 건 불가능한 일,
산길이니 휠체어도 무용지물일 터였다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서 금강산 절경을 마음껏
눈에 담으실 수 있을까, 며칠 밤을 고민했습니다.
아버지를 등에 업고 가면 될 것 같은데,
기력이 쇠진하시니 아들을 단단히
붙드시지 못할 일이걱정이고…그런데 번뜩
산에서 나무하던 생각이 나는 겁니다.
" 불현듯 어릴 적 지게지고 산에 올라
나무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지게에 아버지 의자를 만들면 되겠구나.
나무 지게는 무게 때문에 여행 내내 지기 어려울
듯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가볍고 강한 알루미늄
지게- 그 때부터 아버지를 모실 수 있는 지게를
만들기 위해 설계도를 그려 지게를 만들어
줄 기술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모두들 '못 만든다며 손사래를 치거나
터무니없는 공임을 요구했다.
집과 직장이 있는 인천을 비롯해 서울 곳곳을
뒤져가며 한 달여 동안 임자를 찾아다녔지만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지게'를 만들어주겠다는
기술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수일을 헤맨 끝에 지인의 도움으로 간신히
등산용 지게에 특수용접을 해 금강산 유람을
위한 '아버지 전용 지게'가 탄생했다
지게 지느라 온 몸 피멍이 들고…......
아버지께서 좋아하시니 기쁘기 만 하였습니다..
그런데 "북측 안내원이 지게를 보고
정색을 하며 뭐냐고 묻는 겁니다.
아버님 모실 지게라고 했더니 연세를 묻더군요.
아흔 둘에 아들 등에 업혀 금강산 가신다고
했더니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럽디다.
"하하하" 통과하시라요.
지게와 그 위에 앉으신 아버지 덕분에 여행
내내 이씨 일행은 단연 스타였다.
초여름 날씨에 혼자 걷기도 험한 산길을
아버지와 한 몸이 되어 오르는 이씨를 보며,
연배 높은 관광객들은 이씨 일행을 만날 때마다
다가와 어깨를 두드려주며 격려했다.
젊은이들은 차마 다가오지 못하고
이씨가 아버지를 업고 한 발 한 발 떼는 모습에
시선을 모았다 함께 금강산에 오른 큰 누나
이춘익(62)씨와 형 이관익(55)씨도 흐르는 땀을
닦아주며 막내 동생의 효행에 힘을 보탰다.
그렇게 아버지를 업고 천선대로 귀면 암으로,
구룡폭포로… 이 씨는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들에게 짐이 될까 한사코 업히기를
거부하시던 아버지도 "저기가면 뭐가 있더냐?"
아이고, 저게 그림이여 경치여." 질문에 감탄사를
연발하시며 어느덧 금강산 구경에 흠뻑 취하셨다.
지게 무게는 줄잡아 15kg이상.
아버지가 올라앉으시면 60kg이 넘는다.
이씨는 "산행이 이어지면서 무게를 이기지
못한 어깨와 팔이 뻗뻗하게 굳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어린애 모양
좋아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고 말했다.
"금강산 온천에 갔더니 동행한 우리 형님이
깜짝 놀라시는 겁니다.
지게 지는 동안 실핏줄이 터졌는지 상반신
전체가 거의 피멍이더라고요.
형님이 울컥하시는데, 제가 웃자고 했습니다.
아흔 넘으신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금강산 구경을 마음껏 하셨는데,
얼마나 좋냐구요."
이씨 집 마당 한편의 작은 정자에서 가슴
따뜻한 금강산 유람기를 듣는 동안 말귀
어두운 그의 노부는 묵직한 감동이 담긴 아들의
얘길 거의 알아듣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사이사이 불혹을 넘긴
아들을 두고 "우리 막내가 일곱 놈 중에
제일 예뻐. 제일구엽고 아버지라면 아주…
"충남 서산서 평생 농사일만 하셨던 아바지.......
내가 남한 땅 안 밟어본 디가 없고
금강산까지 구경했으니 갈 데도 없는 겨 인제.
효심 깊은 아들 자랑에 입이 말랐다.
이 모습을 이씨의 아내 이연희(39)씨도
시종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부모가 귀찮다고 지게에 저다 버리는 가 하면...
지게에 아버님을 업고 금강산 유람이 왠 말............
이런 효자가 어디에 몇이나 있을까?
다시금 부모님께 못다한 불효을 빌면서..............
가슴 찡한 마음으로.......이 글을.... ㅠㅠㅠㅠ
아버지...! 우리 아버지
비가 내린 7일 오전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 3번 국도(國道). 서울 로 향하는 도로에서 우산을 든 두 남자가 손을 잡고 걷고 있었다. 그들 옆으로 화물트럭과 대형버스가 쌩쌩 달렸다.
"아빠, 먹고 싶어요. 산도, 초코맛…." 키 182㎝에 몸무게 104㎏. 덩치가 큰 열아홉 살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마치 아가를 보는 표정으로 활짝 웃고는 아들 입술에 뽀뽀를 했다.
↑ [조선일보]이진섭씨와 아들 균도군이 7일 밤 경기도 광주의 여관에서 물집이 생긴 발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 [조선일보]
↑ [조선일보]손 꼭 잡고 - 7일 경기도 이천의 국도(國道)에서 아버지 이진섭씨와 자폐장애 1급인 아들 균도군이 서울을 향해 걷고 있다. 이진섭씨는“외로운 길을 둘이 걸어오면서 균도가 내게 큰 의지가 됐다”며“힘들어도 이 길을 떠나기로 선택했던 것이 참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아버지와 아들은 지난달 12일 부산을 출발해 27일째 이렇게 걸어왔다. 아버지 이진섭(47·자영업)씨가 자폐성 장애 1급인 아들 균도군을 데리고 먼 길을 떠나온 것이다. 목적지는 서울. 지난 2월 특수학교를 졸업한 균도씨가 직장을 얻지 못하자, "넓은 세상을 보자"고 아버지가 아들 손을 잡고 행군에 나섰다. 부산을 떠날 때 아버지는 직장암에 걸린 상태였다. 출발 3일 전 암진단을 받았지만 아버지는 부인에게만 이 사실을 알리고 그냥 출발했다. "45일 후에 꼭 돌아와 수술을 받겠다"고 의사에게 약속했다. 의사는 "운동하는 게 더 좋을 수도 있으니 무사히 다녀오시라"고 했다. 균도군도 아버지의 암을 모르고 있었다. 자폐성 장애 때문에 암이 무슨 병인지 모른다.
새까맣게 탄 부자가 잠시 비를 피하러 버스정류장 처마 아래 들어섰다. 양말을 벗으니 균도군 발은 물집투성이였다. 아빠가 연고를 발라주며 물었다.
"균도야, 우리 지금 어디 가지?"
"우리 서울 가요!"
◆ 부자(父子)의 도전
아버지와 아들은 부산 에서 서울까지 총 600㎞를 걷기로 하고 길을 나섰다. 최단거리로 이으면 390㎞ 거리지만 지방국도를 타고 올라가는 데다 중간 중간 덜 위험한 길로 돌아가다 보니 거리가 늘었다. 이 중 벌써 500㎞쯤 왔으니 고지가 눈앞이다. 12일 서울에 도착해 국회와 청와대 를 들른 뒤 서울을 한 바퀴 돌아 20일 장애인의 날 기념식에 참석하고 부산 집으로 돌아갈 계획이다.
멀고 험난한 길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지난 2월. 학교를 졸업한 균도군이 당장 갈 곳이 없자 부모는 절망에 빠졌다. 성인 발달장애인들을 낮 동안 맡아주는 보호시설도, 이들을 취직시켜주는 이른바 '사회적 기업'도 "꽉 차서 자리가 없으니 무한정 기다려보라"는 말뿐이었다. "이런 현실을 정치인과 공무원들이 모르고 있다면 알려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날마다 좁은 공간에만 갇혀 있는 아들에게 '네가 살아갈 땅 대한민국이 이렇게 넓은 곳'이라는 것을 몸에 입력시켜주고 싶었습니다."
아버지는 준비운동도 하고 코스 답사도 다녀오면서 모든 준비를 마쳤다. 이제 출발만 하면 되는데, 병원에서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다. 직장암이었다.
초기니까 수술하면 낫는다고 의사는 말했지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느낌을 어쩔 수 없었다. "이 손을 놓아 버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잠든 아들의 손을 잡고 아버지는 밤새 울었다.
모든 일정을 취소했던 아버지는 출발 하루 전, 마음을 바꿔 먹었다. "초기가 아니라 말기라도 나는 간다고 큰소리쳤어요. 내가 아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으니까. 장애를 갖고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바꿔주는 것밖엔 해줄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 좌절
서울로 향하는 길에 둘은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정치인과 공무원들을 만나려고 애썼다. 경북 구미시청 , 상주시청 , 경남 밀양시청 , 대구광역시의회 등을 찾아가 부시장, 복지담당 공무원, 시의원들을 만났다.
아버지는 호소했다. "주간보호시설에 자리가 없어서 이 아이들이 갈 데가 없습니다. 예산을 늘려서 턱없이 모자라는 자리를 늘려주십시오." "이 아이들 취업문제를 생각해주십시오. 대기업에서 이 아이들 고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장애가족들의 고통을 아십니까. 이혼율이 30%를 넘습니다. 국가에서 최소한의 시간만이라도 맡아주십시오." "발달장애인법이나 장애아동지원법이 만들어지려면 시간이 걸립니다. 지자체에서 조례로라도 지원을 좀 서둘러 주십시오."
그러나 돌아오는 말들은 한결같았다. "알긴 아는데 시 재정이 너무 없다" "상위법이 없어서 힘들다" "이해는 한다. 노력은 하겠다" "신경을 쓰겠다"…. 심지어 어느 시청의 복지담당 국장은 "자폐아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라며 신기해하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 희망
관청에서 맞닥뜨린 현실은 차가웠지만, 길에서 만난 사회는 그래도 따뜻했다. 아버지는 밥을 먹을 때마다 일부러 사람이 가장 많은 식당을 골라 들어갔다. 균도군이 소리를 지르거나 돌아다니면 다른 손님들이 싫은 내색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런 아이도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 사회는 잘난 사람들끼리만 사는 곳이 아니라 못난 사람도 함께 가는 곳이라는 걸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음료수와 과자를 사주고 물수건을 넉넉히 챙겨주는 식당 아주머니들, 길 가다 차를 세우고 "우리 애도 장애인이다. 미안하고 고맙다"며 돈 몇만원을 쥐어주고 황급히 사라지는 아저씨들도 수십 명이 됐다. 아버지는 "먼 길을 가면서 그래도 이 사회가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폐를 갖고 있는 아들을 위해 직장암을 딛고 아버지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여행을 떠났다. 아들 균도군과 함께 지난달 12일 부산을 출발해 국도를 따라 서울까지 600리 길을 가는 이진섭씨는 "자폐의 현실을 알리고 아들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 아들과 길을 떠났다"고 말했다
인연은 받아들이고 집착은 놓아라
미워한다고 소중한 생명에 대하여 폭력을 쓰거나 괴롭히지 말며,
좋아한다고 너무 집착하여 곁에두고자 애쓰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사랑과 그리움이 생기고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증오와 원망이 생기나니
사랑과 미움을 다 놓아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너무 좋아할 것도 너무 싫어할 것도 없다.
너무 좋아해도 괴롭고,너무 미워해도 괴롭다.
사실 우리가 알고 있고, 겪고 있는 모든 괴로움은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 두 가지 분별에서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늙는 괴로움도 젊음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병의 괴로움도 건강을 좋아하는데서 오며,
죽음 또한 삶을 좋아함, 즉 살고자 하는 집착에서 오고,
사랑의 아픔도사람을 좋아하는 데서 오고,
가난의 괴로움도 부유함을 좋아하는데서 오고,
이렇듯 모든 괴로움은 좋고 싫은 두 가지 분별로 인해 온다.
좋고 싫은 것만 없다면 괴로울 것도 없고 마음은 고요한 평화에 이른다.
그렇다고 사랑하지도 말고, 미워하지도 말고
그냥 돌처럼 무감각하게 살라는 말이 아니다.
사랑을 하되 집착이 없어야 하고,
미워하더라도 거기에 오래 머물러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사랑이든 미움이든 마음이 그 곳에 딱 머물러 집착하게 되면
그 때부터 분별의 괴로움은 시작된다.
사랑이 오면 사랑을 하고, 미움이 오면 미워하되
머무는 바 없이 해야 한다.
인연따라 마음을 일으키고, 인연따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집착만은 놓아야 한다.
이것이 인연은 받아들이고 집착은 놓는’ 수행자의 걸림없는 삶이다.
사랑도 미움도 놓아버리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는 수행자의 길이다.
파지줍는 여중생
윤미曰
제가하는일이 창피하다고 생각한적 없어요
부끄럽거나 힘들지도 않아요
제곁엔 할머니와 언니가 있으니까요..
그녀가 힘들지 않는 이유는
등 뒤에 날개가 있음에 그럴테고요.
제가 이런 글을 보고 따뜻해지는 이유는,
아직 심장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수닷타장자가 세운 최초의 승원터인 코삼비쿠티와 경행터
● 아난존자가 보드가야에서 묘목을 옮겨 심었다는 아난다 보리수나무
● 간디쿠디(향전):기원정사의 중심유적인 향전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경전을 설했던 현장으로 대승불교의 핵심 경전인 "금강경“도 여기서 탄행했다.
기원정사(사헤트)는 중인도 교살라국의 도성이었던 사위성(스라바스티)의 남서쪽에서 약800m지점에 있으며 당시 교살라국의 상인 스닷타장자가 부처님께 귀의하고 도시 남쪽에 정사를 세우기에
적당한 땅을 발견하고는 국왕의 태자인 기타 왕자의 요구대로 그 토지에 황금을 깔기도 하는 열의를 보여 건립하였고 여기서 부처님은 24회의 우안거를 지내시며 설법하셨다. 이곳은 부처님께서
제자 스부우티에게 최고의 대승경전 금강경을 설하신것과 여러 기적을 행하신 것으로 유명하다. 부처님께서 설법하신 대좌가 남아있고 후대에 생긴 많은 절터가 있다.
● 아쇼카석주: 이기둥에 인도 아쇼카왕자가 부처님이 탄생한곳이라는 인증을 합니다.
B.C249년 당시 인도를 통일했던 아쇼카왕이 룸비니에 세원 돌기둥.
2천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불교의 역사와 부처님의 탄생의 역사를 증명하듯이 당당하게 서 있다.
돌기둥에 세겨졌던 마상은 사라졌지만 당시의 아쇼카왕이 참배하고 세운 돌기둥에는 『 카로슈티 』문자로 기록된 4줄이 세겨져 있다. 이로 인해 전설속의 탄생지가 아닌 실제 역사적 사실임을 아쇼카 석주가 증명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동기둥의 부러진 상이 발굴됨에 따라 2천 5백년 이전의 싯타르타 탄생지임이 확인된것이다. 만일 룸비니 동산의 아쇼카 석주가 발굴되지 못했더라면 부처님의 탄생지 룸비니의 어디쯤인지 알수가 없어 전설속에 남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 쿠시나가르<니르와나 템플(열반사)>
●부처님이 입적하신 땅임을 기리는 니르바나 사원(열반사)
부처님이 열반에 든땅으로 경내의 열반당은 1876년에 발굴되어 복구되었고 1956년에 부처님 열반 2,500년을 기념하여 새롭게 단장되었다. 흰벽 열반당 안에는 두그루의 사라나무를 비롯하여
1876년에 발굴된 길이 6m가량의 대열반상이 있다. 유적지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가면 라무바루라는 곳에 커다란 탑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다비식이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안거를 바이샬리 근처 마을에서 지내고 고향인 카필라성을 향해 가던중 쿠시나가르 교외에 이르러 사라나무숲 두그루의 사라나무 사이에서 최후의 법언을 남기시고 입적하셨다.
● 람바르 스투파:부처님의 유해가 다비된 다비터
▷▶ 케사리아의 만다라 발우탑
● 부처님은 이곳까지 따라와서 헤어지기 아쉬워하는 릿차위족 사람들에게 발우를 건네주었고 사람들이 나중에 이를 기념하여 쌓은 거대한 탑이다. 둘레가 무려 427m, 높이는 15.5m, 상단부의 반구형 탑은 무너져 일부만 남았다.
현재 절반 쯤 발굴되었는데, 6층으로 된 테라스 형태의 기단이 있고, 상단부에는 원형의 단이 있다.
사진에 보이는 감실은 예전에 수행자의 수행공간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는데 감실 안에 불상도 안치되어 있으나, 많이 훼손되어 있다.
▷▶ 바이샬리-부처님 근본8탑의 하나인 진신사리탑 유적지
●진신사리는 박물관에 모셔져 있고 지금은 기단부만 이렇게 쓸쓸하게 남았다.
그래도 여긴 부처님의 진짜, 정말, 원조, 진신사리의 기운이 뭉친 곳, 그래서 8대 성지에 포함된 곳이다.
▷▶ 바이샬리: 아난존자 사리탑
● 유마거사에 의한 초기 대승경전인 유마경의 무대이기도 하며 제 2결집을 행한 장소이다. 기녀 암라팔리여인이 보시한 망고원과 원숭이떼가 부처님 발우에다 꿀을 공양한 곳이며 열반에 이를것을 예언한곳
마하가섭존자에게 다자탑전분반좌이 전법을 행한곳이며 특히 비구니 승단이 출범한 장소로 유명하다.
▷▶ 죽림정사와 영축산이 있는 라지기르
●왕사성으로 잘 알려진 라즈기르는 마다가국 빔비사라왕의 초청을 받은 부처님께서 1,000여 명의 제자를 거느리고 가셨던 곳이다. 빔비사라왕의 정성어린 지원과 신심에 힘입어 불교교단은 왕사성에서 쉽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불교 최초의 사원이었던 죽림정사와 『 법화경 』의 배경이 되는 영취산 역시 이곳에 있었다.
●영취산 정상에는 부처님께서 계시던 수행처인 향실을 중심으로 다섯 개의 대(臺)가 있다. 중국에 불교를 전한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오늘날 중국의 오대산이 인도의 영취산과 닮았다고 해서 오대산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라즈기르에는 왕실과 부처님의 추지의셨던 지바카의 병원터, 아들인 아자타사트루에게 감금된 빔비사라왕이 최후를 맞이했던 감옥 터가 있다.
●영취산은 법화경의 서품에 나오는 수 많은 불보살님들의 수행처이며 배경이다. 빔비사라왕길을 따라 걸으며 부처님께서 주석하신 향실이 나온다. 향실 밑으론 아난존자 사리불존자 마하가섭존자의 동굴이 지금도 남아 있다.
영축산 향실의 위치는 왕상성을 굽어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 오대산 적멸보궁자리와 같은 지형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서 부처님 말년을 법화경을 설하셨는데 법화경의 주 내용은 부처님께서 수 많은 제자들에게 내세에 부처가 될거라 수기를 주시는 것이다.
향실에 앉아 법화경 사구게를 간파한다면 이는 곳 부처님의 수기를 받는거라 하 수 있을 것이다. 옛 왕사성터를 바라보며 사구게를 온몸으로 받아들여 보는 기쁨은 이 자리에 와서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 죽림정사
● 불교계 최초의 절이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기에 죽림정사라고 한다.
다른 유적지에 비해 발굴이 거의 되지 않은 상태다. 입구의 작은 법당과 스님들 목욕터가 다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정사는 이곳 저곳을 거닐다보면 부처님과 1250제자들의 여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으니 30분이상 머물기를 추천한다. 현재 태국스님 한분이 머물변서 복원에 큰 뜻을 두고 계신다고 한다.
▷▶ 나란다대학
● 세계 최초의 불교종합대학인 나란다 대학
나란다 대학은 탁실라, 비끄라마실라와 함께 3대 불교대학이었다. 굽타왕조가 다스리던 5세기경에 조성되기 시작한 나란다대학은 입학이 무척 어려웠지만 일단 들어오기만 하면 나라와 백성들의 보시로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11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인해 불타고 말았는데. 그 불길이 6개월 동안 보였다고 한다.
▷▶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룬 곳 부다가야
● 마하보디 대탑은 사실 탑이라기 보다는 불당이다. 그래서 대보리사로 불리기도 하고, 금강좌 사원이라고도 한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자리에 세운 높이 52m에 달하는 피라미드형 사원이다. 부처 성도 후 약 250년이 지난 기원전 250년경 아쇼카왕이 보리수나무 옆에 마하보디 대탑을 세우고 부처가 않았던 그 자리에 금강좌를 조성했다
.
●이곳은 성지 중에서 최고의 성지이다. 부처님처럼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본래 불성을 찾아 명상을 감겨보는 귀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
● 불당 안 정면에 있는 2m 크기의 부처님 불상, 불상은 10세기 경에 조성된 것이지만, 불상의 좌대는 보리수 아래에 있던 금강좌를 옮겨 놓은 것이다.
불상은 경전에 따라 (깨달음을 이루었을때 부처님이 취했다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앉은 모습은 참에 가까운 자세이다(불당안 가까이에서는 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티베트 승려들의 오체투지,
부처님의 경행처 뒤쪽, 지금 이곳에는 수많은 절판을 고정시설물로 설치해놓고, 주로 티베트 승려들이 오체투지 수행을 하고 있었다.
티베트 불교는 세상에서 절을 가장 많이 하는 종교다.스님이 되려면 반드시 10만 배의 절을 해야 한다고 들었다.
두 손바닥에는 앞으로 밀기 좋도록 깔개를 깔고, 앞으로 쭉 밀며 이마가 닿도록 절을 한다.
절판은 특별한 절차 없이 누구나 빈 절판을 차지할 수 있으며, 누가 특별히 간섭하지는 않는다고 들었다.
대부분 몇 달씩 머물며 이곳에서 오체투지 수행을 한다고 한다.
마하보디 대탑을 향한, 부처님을 향한 티베트 승려들의 지극한 정성, 그들 자신을 깨우고, 바라보는 우리들까지 깨우려는 지극한 원(願)!
이들의 오체투지에는 자기를 초월하려는 팽팽한 긴장이 있다
▷▶ 마하보디 대탑:삼보일배 새벽예불
▷▶ 수자따탑
●수자타는 네란자라 강변마을 촌장의 딸이다.
부처님께서 성도 직전에 고행을 버리고, 새로운 수행을 시작할 때, 유미죽 공양을 올렸다.
후대에 부처님께 최초로 공양을 올린 공덕을 기리기 위해, 수자타의 집터에 탑을 세웠다.
▷▶ 부다가야에 있는 일본사찰의 대불
▷▶ 부다가야에 있는 티벳사원
● 티벳사원의 동자승과의 만남의 시간
▷▶ 초전설법성지 사르나트"녹야원"
사르나트는 우타르프라데쉬 Uttar Pradesh주의 바라나시에서 12km 떨어져 있다. 힌두교의 최대 성지 중의 하나인 바라나시 지척이지만 바라나시의 혼잡과는 거리가 멀게 조용하고 한가한 곳이어서,
사뭇 색다른 맛을 가진 곳이다.
부처님께서 정각을 얻으신 후 '사슴이 뛰어놀던 아름다운 동산' 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수행중인 교진여 등 5비구를 만나 처음 설법을 행하신 곳.
7세기까지 1,500여명의 스님들이 수도할 만큼 번성했다고 한다. 대부분 이슬람교도들에게 파괴되어 현재의 모습으로 최근 발굴되고 있다.
일설에는 브라흐닷타 왕이 이곳에 사슴들이 살도록 풀어놓았기 때문에 사슴의 동산 (鹿野苑)'이 되었다고 전해지며,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는 한쪽에는 아직도 사슴 몇 마리가 무리 지어 살고 있어 녹야원이라는
이름을 실감케 한다.
또한 성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뜻의 리쉬파타나라고도 불리었던 이곳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이루신 내용을 처음으로 세상에 펼친 곳이었다.
● 부처님이 다섯 도반에게 처음 법을 설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아소카 왕이 세운 다메크 탑
초전법륜(初轉法輪)을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탑이므로, 다르마 차크라 (Dharma Chakra)라고도 부른다.
기단부는 직경 28.5m, 높이 34m(원형 추정 43.6m)의 거대한 탑이다.
녹야원에서는 어디에서나 보이는 녹야원의 상징과 같은 탑이다.
부처님의 메시지가 매우 설득력 있고 논리적이었기 때문에 경청한 다섯 도반들은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 힌두문명의 발상지 갠지스강의 일출
● 힌두교 신자인 인도인들에게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강으로 히말라야에서 발원한다.
●힌디어로 '강가(Ganga)'로 불리는 갠지스강은 인도 힌두교도에게는 가장 성스러운 강이다.
●히말라야의 만년설에서 발원한 갠지스강은 인구밀도가 높은 유피주와 비하르주를 거쳐 뱅골만으로 흘러든다. 6월에서 9월까지 진행되는 우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비가 내리지 않는 이 지역에서 갠지스강은 유일하게 마르지 않는 강이다.
갠지스강 유역에 펼쳐진 광활한 힌두스탄의 충적평야는 인도 북부의 곡창지대일 뿐만 아니라 힌두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힌두교의 삶은, 태어나 갠지스강에서 세례를 받는데서 시작해 숨을 거둔 뒤에 화장돼 이 강에 뿌려지는 것으로 끝난다. 화장한 재를 갠지스강에 뿌리는 것은 성스로운 강물로 영혼이 속죄를 받아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하는 의식이다.
●신성한 갠지스 강에 몸을 담그고 기도를 하는 인도인들.
강물에 목욕을 하면 죄를 면할수 있으며 죽은뒤에 강물에 뼛가루를 흘려보내면 극락에 갈수 있다고 힌두교 사이에서는 믿고있다.
● 갠지스강의 화장터
☞ 하루도 빠짐없이 장례행렬이 이어진다.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화려하게 치장을 한 고인을 신성한 갠지스강물에 목욕을 시키고 향나무위에 올려놓고 쇠기름을 부어 불을 붙인다.
화장하는 곳도 계급에 따라 나뉘어 지는데 상류층의 경우 강과 가까운곳에서 화장을 하고 냄새를 잡아주는 고급나무를 사용하고 별도의 화장터를 가진 반면 하류층인경우 공용화장터를 이용한다.
☞인도인들의 최대소원은 갠지스강을 순례하다가 그곳에서 죽어 화장되어 갠지스강에 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인도인들에게 신성한 어머니와 같은 강 "갠지스강"
▷▶ 바라나시 갠지스강으로 가는길
● 릭샤체험: 늦은오후 릭샤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향한다. 먼지가 많아 마스크는 필수!!
▷▶ 힌두교의식 [아르띠푸자]
●7명의 사제들이 제단위에서 신들에게 정결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종교의식을 치루고 있다.
갠지스강의 여신에게 바치는 매우 화려하고 성대한 제사의식은 매일밤 행하여 지는데 "아르띠푸자"라고 한다.
▷▶ 도리천에서 내려온 땅- 상카시아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지 7일째 돌아신 어머니 마야부인이 계시는 도리천에 올라와 설법을 하고 내려오신 곳이다 .
부처님이 스라바스티의 기원정사에 있을 때, 천불화현(千佛化現)탑 언덕에서 3가지 기적을 행한 다음,
3걸음만에 도리천으로 올라가서, 어머니를 위해 3개월 동안 설법을 하고, 내려오실 때는, 이곳 상카샤의 바로 이 언덕으로 내려오셨다는 것이다
●스투파로 추정되는 작은 언덕
부처님이 도리천에서 내려오실 때 하늘길이 열렸다는 바로 그 '기적의 언덕'
●법당에는 이 장면을 묘사한 상이 모셔져 있고 법당은 허물어진 사원위에 작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아쇼카왕이 세운 아쇼카석주가 있는데 파손되어 몸체일부와 상륜부 코끼리가 손상 된 채로 보존하고 있다.
●삼계보도(三階寶道) , 꿈의 계단, 하늘길의 기적.
부처님이 천상에서 내려오시는 모습이다.
부처님 좌우로는 제석천과 범천상이 조각되어 있고 그 뒤에는 지상에 남았다는 7개의 하늘 계단이 표현되어 있다.
▷▶ 타지마할:영원의 얼굴위에 흘러내리는 눈물
● 사랑으로 빚어낸 ‘찬란한 무덤’이라 불리는 타지마할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인도의 무굴제국 샤자한이란 황제가 아내를 너무나 사랑하여 아내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지은 궁전으로 여왕의 무덤이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타지마할은 사방 57m이고, 높이는 67m의 큰 건물이지만 그 뒤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설계되었다.
타지마할은 높이 5.5m, 가로 세로 94m의 정사각형의 기단 위에 세워졌다.
타지마할은 세계7대 불가사의로 인류가 이 지상에 남긴 가장 아름다운 건물이고, 무덤이며, 예술작품이다.
그래서 수백 년 동안 사람들은 한 여자에 대한 한 남자의 사랑 위에 이 완벽한 대칭과 무한반복의 아름다움이다.
반면, 샤자한은 타지마할이 완성된 직후 공사에 참여한 인원들의 손목을 자른것으로도 유명한데 타지마할보다 더 아름다운 궁전을 만들려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하여 비극의 성이라고도 한다.
▷▶ 아그라성
● 샤자한 왕의 아들 아우랑제브가 델리로 수도를 옮겨 대 무굴 제국을 세우기전인 1658년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를 가둔곳이다.
타지마할을 호화롭게 지은 샤자한 왕이 자기 무덤도 초호화 건물로 지으려 하면서 엄청난 국가 재정을 낭비하자 아들 아우랑제브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나 폐위 되었는데 아들 아우랑제브는 부왕의 부탁으로 타지마할이
내려다 보이는 강북쪽에 아그라성을 세워 샤자한왕은 그곳 궁성 감옥에서 죽을때까지 죽은 아내를 그리며 타지마할 궁을 바라보면서 살다가 죽었다.
▷▶ 유네스코 문화유산 쿠뚭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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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목들고, 이권싸움하는 쓰레기같은 중들은 정신차리기를....
가정에서 삼존불탱화족자와 108배 절수행과 걷기수행을
통해서 욕심없는 마음이 생기고
미움, 집착, 증오, 원망, 질투, 분노의 마음이 사라집니다.
기존 절방법과는 완전히 틀리는
천지인108배와 바르게 걷는 방법을
강의 합니다. 108힐링 사랑방에 많이 오셔서
건강도 챙기시고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는중인지
알아차림도 하시고
맛있는것도 드시고, 노래도 부르시고
같이 앞산, 뒷산 소풍도 다닙시다 .
오로지 천지인 108배와 걷기만이 살길입니다..!
천원사랑방
국수 (김치, 짜장, 카레, 얼큰, 맑은)
너무엄청진짜억수로데끼리맛있는 버터과자(직접만듦)
스스로 내려마시는 셀프원두커피
인생상담 (최근전신사진, 혈액형, 생년월일,얼굴사진)
월 1회 모임 = 소풍, 장기자랑 , 사찰순례 등
스님 안될바에야 너무 깊이 공부할 필요있나요...?
건강하게 즐겁게 자기생활에 충실하신 평생도반님 모십니다!
저는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을 쓰면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되었고
1인 10역을 해내는 엄지 손가락으로 생활하고 글을 쓰면서는
엄지손가락을 온전히 남겨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눈썹이 없어 무엇이든 여과 없이 눈으로 들어가는 것을 경험하며
사람에게 이 작은 눈썹마저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알았고
막대기 같아져 버린 오른팔을 쓰면서
왜 하나님이 관절이 모두 구부러지도록 만드셨는지,
손이 귀까지 닿는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달았습니다.
온전치 못한 오른쪽 귓바퀴 덕분에 귓바퀴라는게
귀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하나님이 정교하게 만들어주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잠시지만 다리에서 피부를 많이 떼어내 절뚝절뚝 걸으면서는
다리가 불편한 이들에게 걷는다는 일 자체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건강한 피부가 얼마나 많은 기능을 하는지,
껍데기일 뿐 별것 아니라고 생각했던 피부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남겨주신 피부들이 건강하게 움직이는 것에 감사했으며
하나님이 우리의 몸을
얼마나 정교하고 세심한 계획아래 만드셨는지 온몸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감히 내 작은 고통 중에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백만분의 일이나마 공감할 수 있었고,
너무나 비천한 사람으로, 때로는 죄인으로,
얼굴도 이름도 없는 초라한 사람으로 대접받는
그 기분 또한 알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지난 고통마저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그 고통이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남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할 가슴이 없었을 테니까요.
그 누구도, 그 어떤 삶에도 죽는게 낫다라는 판단은 옳지 않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 장애인들의 인생을 뿌리째 흔들어놓는
그런 생각은, 그런 말은, 옳지 않습니다.
분명히 틀렸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추운 겨울날 아무런 희망 없이 길 위에 고꾸라져 잠을 청하는 노숙자도,
평생을 코와 입이 아닌
목에 인공적으로 뚫어놓은 구멍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 사람도
아무도 보는 이 없는 곳에 자라나는 이름 모를 들풀도,
하나님이 생명을 허락하신 이상
그의 생명은 충분히 귀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삶입니다.
"저러고도 살 수 있을까...?"
네...이러고도 삽니다.
몸은 이렇지만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임을 자부하며,
이런 몸이라도 전혀 부끄러운 마음을 품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이런 몸이라도 사랑하고 써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감사드리며...
저는 이렇게 삽니다.
누구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 지선아 사랑해 中에서...
설악산 입구로 가는 길목이었다. 한 장애인 아저씨가 지나가는 나의 다리를 붙잡았다.
돈을 달라고 하는 줄 알고 돈이 없다고 말하고는 그냥 지나치려했다. 아저씨는 그래도 내 다리를 계속 잡았다.
잠시 후, 그 아저씨는 깔고 앉은 돈 수레 밑에서 핸드폰 하나를 꺼냈다.
나는 아저씨의 행동이 이상해서 그냥 내려다보았다. 아저씨는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나는 아저씨의 얘기를 듣기 위해 쪼그리고 앉았다.
아저씨는 '문...자...한...번...'이라고 더듬으며 말했다. 그리고는 철자법이 하나도 맞지 않는 글씨가 적힌 종이쪽지를 내게 보여주었다.
"나 혼자 설악산에서 좋은 구경하니 미안하오. 집에만 있으려니 답답하지? 집에 가면 우리 같이 놀러가오. 사랑하오."
아저씨는 종이를 보여주면서 열쇠고리에 붙여 있는 사진을 마구 흔들었다. 아저씨의 아내인 것 같았다. 아저씨는 걸을 수 없었기때문에 구경을 잘 하지도 못했을텐데. 엎드려서 먼지만 삼키면서도 아내가 생각나서 미안했던 모양이다. 나는 잠시 아저씨 옆에 쪼그리고 않아서 쪽지에 적힌 글자를 문자로 열심히 옮겼다.
그렇게 설악산을 다녀온 후 문득문득 그 아저씨가 생각났다. 비록 몸이 불편한 아저씨지만 그 사랑만큼은 어떤 누구의 것보다 크고 따뜻했다.
건강한 불교, 신나는 불교, 참회하고, 반성하고, 사랑하는불교
꼭 ! 이루겠습니다.
몸과 마음이 좋아지는 카페 108 힐링
옛날에 두 스님이 오랜 토굴수행을 마치고
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수행으로 충만한 마음을 가지고 길을
떠난 두 스님은
홍수로 불어난 시냇물을 만났습니다.
마침 한 처녀가 시냇물을 건너지 못하고 애를 태우고 있었습니다.
한 스님은 처녀의 딱함을 보고, 이해는 되었지만 본인은 출가한
입장이라 난감한 지경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동행하던 스님이
그 처녀를 등에 업고 물을 건너기 시작하는 것 아닙니까?
이젠 이를 본 스님은 물을 건너는 내내 회의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아, 내가 이런 사람과 같이 수행을 했다니."
물을 건너 처녀와 헤어진 후에도 이 스님은 길을 가면서도
자꾸 회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이래선 아니 되겠다고 생각한 스님은 동행한 스님께 따졌습니다.
"스님 그럴 수 있습니까."
"아니 왜 그러십니까."
"아니 지켜야할 계율이 있는데, 처녀를 등에 업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자 처녀를 등에 업고 시냇물을 건넜던 스님이 말했습니다.
"난 벌써 내려놓고 왔는데 스님은 아직도 업고 계십니까?"
이야기 "우동 한 그릇"
- 구리 료헤이 / 우동 한 그릇(一杯のかけそば) -
일본의 우동집들은 일년중 가장 바쁩니다.
삿포로에 있는 우동집 <북해정>도
이 날은 아침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이 날은 일 년중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지 밤이 깊어지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발걸음도 빨라졌습니다.
그러더니 10시가 지나자 손님도 뜸해졌습니다.
주방의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편과는 달리 상냥해서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은 주인여자는,
임시로 고용한 여종업원에게 특별 보너스와 국수가 담긴 상자를
선물로 주어 보내는 중이었습니다.
"요오코 양, 오늘 정말 수고 많이 했어요. 새해 복 많이 받아요."
"네, 아주머니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요오코 양이 돌아간 뒤 주인 여자는 한껏 기지개를 펴면서,
"이제 두 시간도 안되어 새해가 시작되겠구나. 정말 바쁜 한 해였어."
하고 혼잣말을 하며 밖에 세워둔 간판을 거두기 위해 문쪽으로 걸어갔습니다.
하고 열리더니 두 명의 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섰습니다.
여섯 살과 열 살 정도로 보이는 사내애들은 새로 산 듯한 옷을 입고 있었고,
여자는 낡고 오래 된 체크 무늬 반코트를 입고 있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주인 여자는 늘 그런 것처럼 반갑게 손님을 맞이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는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머뭇 머뭇 말했습니다.
"저…… 우동…… 일인분만 시켜도 괜찮을까요?……"
뒤에서는 두 아이들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은, 다 늦은 저녁에 우동 한 그릇 때문에
주인 내외를 귀찮게 하는 것은 아닌가 해서 조심스러웠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주인 아주머니는
얼굴을 찡그리기는커녕 환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네. 자, 이쪽으로."
주인 여자는 주방 안을 향해 소리쳤습니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갑작스런 주문을 받은 주인 아저씨는 그릇을 정리하다 말고
놀라서 잠깐 일행 세 사람에게 눈길을 보내다가 곧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우동 1인분!"
그는 아내 모르게 1인분의 우동 한 덩어리와 거기에
반 덩어리를 더 넣어서 삶았습니다.
그는 세 사람의 행색을 보고 우동을 한 그릇밖에 시킬 수 없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 여기 우동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가득 담긴 우동을 식탁 가운데 두고, 이마를 맞대며
오순도순 먹고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계산대 있는 곳까지 들려왔습니다.
"국물이 따뜻하고 맛있네요."
형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며 말했습니다.
"엄마도 잡수세요."
동생은 젓가락으로 국수를 한 가닥 집어서 어머니의 입으로 가져갔습니다.
비록 한 그릇의 우동이지만 세 식구는 맛있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이윽고 다 먹고 난 뒤 150엔(한화 약 1,500원)의 값을 지불하며,
"맛있게 먹었습니다."라고 공손히 머리를 숙이고
나가는 세 사람에게 주인내외는 목청을 돋워 인사를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후, 새해를 맞이했던 <북해정>은 변함없이 바쁜 날들 속에서
한 해를 보내고 다시 12월 31일을 맞이했습니다.
지난해 이상으로 몹시 바쁜 하루를 보내고 10시가 지나
가게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드르륵 하고 문이 열리더니
두 명의 사내아이를 데리고 한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주인 여자는 그 여자가 입고 있는 체크 무늬의 반코트를 본 순간,
일년 전 섣달 그믐날 문 닫기 직전에 와서 우동 한 그릇을 먹고 갔던
그 손님들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여자는 그 날처럼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말했습니다.
"저…… 우동…… 1인분입니다만…… 괜찮을까요?"
주인 여자는 작년과 같이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여기 우동 1인분이요!" 주방 안에서, 역시 세 사람을 알아 본 주인 아저씨는
밖을 향하여 크게 외쳤습니다.
"네엣! 우동 1인분!"
그러고 나서 막 꺼버린 가스레인지에 불을 붙였습니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주인 여자가 주방으로 들어와 남편에게 속삭였습니다.
"저 여보, 그냥 공짜로 3인분의 우동을 만들어 줍시다."
그 말에 남편이 고개를 저었습니다.
"안돼요. 그렇게 하면 도리어 부담스러워서 다신 우리 집에 오지 못할 거요."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아내는
미소를 지으면서 다시 작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여보, 매일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인정도 없으려니 했는데
이렇게 좋은 면이 있었구려."
남편은 들은 척도 않고 입을 다문 채 삶아진 우동을 그릇에 담아
세 사람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식탁 위에 놓인 한 그릇의 우동을 둘러싸고 도란도란하는
세 사람의 이야기 소리가 주방 안의 두 부부에게 들려왔습니다.
"아…… 맛있어요……"
동생이 우동 가락을 우물거리고 씹으며 말했습니다.
"올해에도 이 가게의 우동을 먹게 되네요."
동생의 먹는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던 형이 말했습니다.
"내년에도 먹을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머니는 순식간에 비워진 우동 그릇과 대견스러운
두 아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입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번에도, 우동값을 내고 나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향해
주인 내외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말은, 그날 내내 되풀이한 인사였지만
주인 내외의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크고 따뜻함을 담고 있었습니다.
다음 해의 섣달 그믐날 밤은 어느 해보다 더욱 장사가 잘 되는 중에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북해정>의 주인 내외는 누가 먼저 입을 열지는 않았지만
밤 9시 반이 지날 무렵부터 안절부절 못하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10시가 지나자 종업원을 귀가시킨 주인 아저씨는,
벽에 붙어 있던 메뉴를 차례차례 뒤집었습니다.
금년 여름부터 값을 올려 <우동 200엔>이라고 씌어져 있던 메뉴가
150엔으로 바뀌고 있었습니다.
2번 식탁 위에는 이미 30분 전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이 놓여졌습니다.
이윽고 10시 반이 되자, 손님의 발길이 끊어지는 것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와 두 아들, 그 세사람이 들어왔습니다.
형은 중학생 교복, 동생은 작년에 형이 입고 있던
점퍼를 헐렁하게 입고 있었습니다.
두 형제 다 몰라볼 정도로 성장해 있었는데,
아이들의 엄마는 여전히 색이 바랜
체크 무늬 반코트 차림 그대로 였습니다.
"어서 오세요!"
역시 웃는 얼굴로 맞이하는 주인 여자에게 어머니는
조심스럽고 예의바르게 물었습니다.
"저…… 우동…… 2인분인데도…… 괜찮겠죠?"
"넷!…… 어서 어서 자, 이쪽으로……"
세 사람을 2번 식탁으로 안내하면서,
주인 여자는 거기 있던 <예약석>이란 팻말을 슬그머니 감추고
주방을 향해서 소리쳤습니다.
"여기 우동 2인분이요!"
그 말을 받아 주방 안에서 이미 국물을 끓이며 기다리고 있던
주인 아저씨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네! 우동 2인분, 금방 나갑니다!".
그는 끓는 국물에 이번에는 우동 세 덩어리를 던져 넣었습니다.
두 그릇의 우동을 함께 먹는 세 모자의 밝은 목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은 어느 해보다도 활기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들에게 방해될까봐 조용히 주방 안에서 지켜보고 있던
주인 내외는 우연히 눈이 마주치자 서로에게 미소를 지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어 보였습니다.
평소에는 무뚝뚝하던 주인 아저씨도
이 순간만큼은 기분좋게 웃고 있었습니다.
세 사람의 대화는 계속되었습니다.
"시로도야, 그리고 쥰아
오늘은 너희 들에게 엄마가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구나."
"……고맙다니요?…… 무슨 말씀이세요?" 형인 시로도가 물었습니다.
어머니의 말이 이어졌습니다.
"너희들도 알다시피 돌아가신 아빠가 일으킨 사고로
여덟명이나 되는 사람이 부상을 입었잖니?.
일부는 보험금으로 보상해 줄 수 있었지만 보상비가 모자라
그만큼 빚을 얻어 지불하고 매월 그 빚을 나누어 갚아왔단다."
"네…… 알고 있어요."
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습니다.
주인 내외는 주방 안에서 꼼짝않고 선 채로 계속해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빚은 내년 3월이 되어야 다 갚을 수 있는데, 실은 오늘 전부 갚았단다".
"네? 정말이에요 엄마?"
두 형제의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그래, 그 동안 시로도는 아침 저녁으로 신문 배달을 열심히 해 주었고,
쥰이는 장보기와 저녁 준비를 매일 해 준 덕분에 엄마는 안심하고
회사에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단다.
그것으로 나머지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던 거야."
"엄마, 형! 잘됐어요!
하지만 앞으로도 저녁 식사 준비는 제가 계속할 거예요."
"저도 신문 배달을 계속할래요! 쥰아, 우리 힘을 내자!"
형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습니다.
"고맙다. 정말 고마워!"
어머니는 아이들의 손을 움켜쥐며 눈물을 글썽거렸습니다.
그걸 보며 형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습니다.
"엄마, 지금 비로소 얘긴데요, 쥰이하고 제가 엄마한테 숨긴 게 있어요.
그것은요…… 지난 11월에, 학교에서 쥰이의 수업을 참관하러 오라는
편지가 왔었어요.
그리고 쥰이 쓴 작문이 북해도의 대표로 뽑혀 전국 작문 대회에,
출품하게 되어서 수업 참관일에 그 작문을 쥰이 읽기로 했다고요,
하지만 선생님이 주신 편지를 엄마께 보여드리면…무리해서 회사를 쉬고
학교에 가실 것 같아서 쥰이 일부러 엄마한테 말을 하지 않고 있었대요.
그 사실을 쥰의 친구들한테서 듣고…제가 대신 참관일에 학교에 가게 됐어요".
어머니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조금 놀랐지만 금방 침착하게 말했습니다.
"그래…… 그랬었구나…… 그래서?……"
"선생님께서 작문 시간에, 나는 장래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쓰게 했는데 쥰은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써서 냈대요.
지금 그 작문을 읽어 드리려고 해요.
사실 전 처음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만 듣고는,
여기 '북해정'에서의 일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쥰 녀석,
무슨 그런 부끄러운 얘기를 썼지?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쥰이의 작문을 보고 생각이 바뀌었어요
자, 지금부터 읽어드릴게요."
시로도는 그러면서 교복 상의 주머니에 접어서 넣어 두었던
종이 두 장을 꺼내어 펼쳤습니다.
쥰의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시로도의 목소리는 작지만
낭랑하게 우동 가게에 울려 퍼졌습니다.
"우리 아빠는 운전을 하다 교통 사고를 내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그런데 피해자들 모두에게 보상을 해주기 위해선 보험금으로도 부족해서
많은 빚을 지게 되었다.
그 때부터 우리 가족의 고생은 시작되었다.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셨고,
형은 날마다 조간과 석간 신문을 배달해서 돈을 벌었다.
아직 어린 나는 돈을 벌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었고,
엄마와 형은 나에게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했다.
대신 나는 저녁이면 시장을 봐서 밥을 해놓는 일을 했다.
내가 해 놓은 밥을 엄마와 형이 맛있게 먹는 걸 볼 때 나는 행복하다.
나도 우리 식구를 위해 작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빚을 하루라도 빨리 갚기 위해서 우리는 모든 것을 절약하는 생활을 했다.
엄마의 겨울 코트는 아주 오래 되어 낡고 해어졌지만
해마다 꿰매어 입으셔야 했다.
그러던 중에 재작년 12월 31일 밤에 우리 가족은
우연히 한 우동 가게를 지나치게 되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우동 국물의 냄새가 그렇게 맛있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우리 형제의 마음을 알았는지 엄마는 우리에게 우동을 사 주시겠다고 했다.
우리는 그 말이 반갑고 고마웠지만 우리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선뜻 가게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형과 나는 망설이다가
딱 한 그릇만 시켜서 셋이서 같이 먹자고 엄마한테 말했다.
한 그릇이라도 우리에게 우동을 먹이고 싶었던 엄마와,
우동 국물 냄새에 마음이 끌린 우리 형제는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문 닫을 시간에 들어와 우동 한 그릇밖에 시키지 않는
우리가 귀찮을 텐데도 주인 내외는 친절하고 반갑게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주인 내외는 양도 많고 따뜻한 우동을 우리에게 내놓았다.
그러고나서는 문을 나서는 우리에게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하며 큰소리로 말해 주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우리에게, '지지 말아라! 힘내! 살아갈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 가족은 그 후 일 년이 지난 작년 섣달 그믐날에도 그 우동 가게를 찾아갔다.
여전히 우리는 형편이 나아지지 않아 우동은 한 그릇밖에 시킬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날도 마찬가지로 주인 내외는 친절하고 따뜻하게
우리에게 우동을 대접해 주었다.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 하는 인사도 여전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중에 내가 어른이 되면 힘들어 보이는 손님에게
'힘내세요! 행복하세요!' 하는 말 대신 그 마음을 진심으로 담고 있는 '
고맙습니다!' 하고 말해줄 수 있는 일본 최고의 우동 가게 주인이 되겠다고."
주방안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인내외의 모습이 어느새 보이지 않았습니다.
형이 동생의 작문을 읽어 내려가는 사이 두 사람은
그대로 주저앉아 한 장의 수건을 서로 잡아당기며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고 있었습니다.
시로도는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쥰이 사람들 앞에서 이 작문 읽기를 마치자 선생님이 저한테,
어머니를 대신해서 인사를 해 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너는 어떻게 했니?"
어머니가 호기심 어린 얼굴로 형에게 물었습니다.
"갑자기 요청 받은 일이라서 처음에는 말이 안 나왔어요……
그렇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말했어요.
여러분, 항상 쥰과 사이좋게 지내줘서 고맙습니다……
작문에도 씌어 있지만
동생은 매일 저녁 우리 집의 식사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과 후 여러분들과도 어울리지 못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리고 동아리 활동을 하다가도 도중에 돌아와야 하니까
동생은 여러분들한테 몹시 미안해 했습니다.
솔직히 저는 동생이 <우동 한 그릇>이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읽기 시작했을 때
부끄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가슴을 펴고 커다란 목소리로 읽고 있는 동생을 보는 사이에,
한 그릇의 우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그 마음이
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
한 그릇의 우동을 시켜주신 어머니의 용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형제는 앞으로도 힘을 합쳐 어머니를 보살펴 드릴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쥰과 사이좋게 지내 주세요."
시로도의 말이 끝나자 어머니는 두 형제를 대견한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세 사람은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다정하게 서로 손을 잡기도 하고,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며
웃다가 서로의 어깨를 다독여 주기도 하고,
작년까지와는 아주 달라진 즐거운 그믐밤의 광경이었습니다.
올해에도, 우동을 맛있게 먹고 나서 우동 값을 내며
"잘 먹었습니다."라고 머리를 숙이며 나가는 세 사람에게
주인 내외는 일 년을 마무리하는 커다란 목소리로,
"고맙습니다! 새해엔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큰소리로 인사하며 배웅했습니다.
다시 일 년이 지나 섣달 그믐날이 되자
<북해정>의 주인 내외는 밤 9시가 지나고부터 <예약석>이란 팻말을
2번 식탁에 올려놓고 세 사람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다음해에도, 그 다음해에도 2번 식탁을 비워 놓고 기다렸지만
세 사람은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북해정>은 장사가 잘 되어,
가게 내부 장식도 멋지게 꾸미고 식탁과 의자도 새로 바꿨지만
2번 식탁만은 그대로 남겨 두었습니다.
단정하고 깨끗하게 놓여져 있는 식탁들 가운데에서
단 하나 낡은 식탁이 중앙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게 여기에 있지?"
"낡은 이 식탁은 이 가게에 어울리지 않아."
이렇게 의아스러워하는 손님들에게 주인 내외는
'우동 한 그릇'의 사연을 이야기해 준 뒤 이렇게 덧붙이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식탁을 보면서 그 때 그 사람들에게 받았던 감동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식탁은 간혹 손님들에 대한 배려와 따뜻함을 잃어가는
우리 내외에게 자극제가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날인가 그 세 사람의 손님이 와 주었을 때,
이 식탁으로 맞이하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는 '행복의 식탁'으로서, 손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습니다.
일부러 멀리에서 찾아와 우동을 먹고 가는 여학생이 있는가 하면,
그 식탁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우동을 먹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가족들이 찾아와 새롭게 결심을 다지고
돌아가기도 하는 등 그 식탁은 상당한 인기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후 몇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섣달 그믐날이 되자 <북해정>에는,
이웃에서 장사를 하고 있는 이웃 사람들이
가게문을 닫고 모두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5, 6년 전부터 <북해정>에 모여서 섣달 그믐의 풍습인
<해 넘기기 우동>을 먹은 후 제야의 종소리를 함께 들으면서,
새해를 맞이하는 게 하나의 행사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날 밤도 9시 반이 지나자 생선 가게를 하는 부부가
생선회를 접시에 가득 담아서 들고 오는 것을 시작으로,
주위에서 가게를 하는 30여 명이 술이나 안주를 손에 들고
차례차례 모여들었습니다.
가게 안은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졌습니다.
그들 중 몇 명의 사람들이 2번 식탁을 보며 말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2번 식탁은 비워 두었구먼!".
"이 삭탁의 주인공들이 정말 궁금하다고".
2번 식탁의 유래를 그들고 알고 있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어쩌면 금년에도 빈 채로 ,
신년을 맞이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인 내외는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은 비워 둔 채,
다른 식탁에만 사람들을 앉게 했습니다.
2번 식탁에도 앉으면 좀 더 여유가 있으련만 비좁게 다른 자리에,
모여 앉아 있으련만 비좁게 다른 자리에 모여 앉아 있으면서도,
사람들은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가게 안은 우동을 먹는 사람, 술을 마시는 사람,
각자 가져온 요리에 손을 뻗치는 사람,
주방 안에 들어가 음식 만드는 걸 돕고 있는 사람,
냉장고를 열어 뭔가를 꺼내고 있는 사람 등등으로 떠들썩했습니다.
이야기의 내용도 다양했습니다. 바겐세일 이야기 금년 해수욕장에서 겪은 일,
돈 안내고 달아난 손님 이야기 며칠 전에 손자가 태어났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등으로 가게는 왁자지껄했습니다.
그런데 10시 30분쯤 되었을 때 문이 드르륵 하고 열렸습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쏠리며 조용해졌습니다.
코트를 손에 든 신사복 차림의 청년 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과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자,
다시 자신들이 나누던 이야기를 마저 하기 지작했습니다.
가게 안은 다시 시끄러워졌습니다.
"미안해서 어쩌죠? 이렇게 가게가 꽉 차서…… 더 손님을 받기가……".
주인 여자는 난처한 얼굴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기모노를 입은 부인이 고개를 숙인 채,
앞으로 나오며 두 청년 사이에 섰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쏠렸고 부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습니다.
"저…… 우동…… 3인분입니다만…… 괜찮겠죠?".
그 말을 들은 주인 여자의 얼굴이 놀라움으로 변했습니다.
그 순간 10여 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밀어젖히고 오래 전 그 날의
젊은 엄마와 어린 두 아들의 모습이 눈앞의 세 사람과 겹쳐졌습니다.
여주인은 주방 안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고 있는 남편에게
방금 들어온 세 사람을 가리키면서 말을 더듬었습니다.
"저…… 저…… 여보!……".
반가움과 놀라움으로 허둥대는 여주인에게 청년 중 한 명이 말했습니다.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 가 있었습니다.
그 후 우리는 이곳을 떠나 외가가 있는 시가현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저는 금년에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하여 대학병원의 소아과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년부터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 병원에 인사도 하고 아버님 묘에도 들를 겸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은행원이 된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저희 가족의 인생 중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섣달 그믐날 어머니를 모시고 셋이서
이곳 <북해정>을 다시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주인 내외의 눈에서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10여 년간 이 날을 위해 준비해 놓고 기다리고 기다린,
섣달 그믐날 10시 예약석이잖아요, 어서 안내해요 안내를!"
이 자료는 69년도 아이들의 생활상을 담은 사진들입니다.
당시는 가난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힘겹게 살아오신 이 분들은,
현재 50을 전 후 한 연세들이 되셨을 겁니다..
고무신에 양말도 신지않고 지게로 나무를 지고 있는 모습이 가슴 찡합니다
바람이 불면 힘에 부쳐서 지게와 함께 넘어지고 굴러서 다치기도하고....
지게가 조그마한 것이 앙증맞네요
갯벌에 앉아서 무엇인가 캐고있는 모습입니다
겨울철 따사로운 양지쪽에 앉아서 책들을 많이 읽곤했지요
학교 다녀오면 부모님 일을 돕는게 당연 지사로 알고 살았습니다
돼지에게 죽을 먹이고 있네요.
동생은 아버지 장화 신고 너무 커서 질질 끌고 다녔지요 ㅎㅎ
등교길 모습입니다, 판자집/토담집에 초가지붕 ....
쉬는 시간 종이 울리면 한 걸음에 운동장으로 달음박질.....
당시 잡지에 실렸던 삼남매 연탄배달 기사입니다
무척이나 가슴아픈 기사였습니다 만,
당시는 다들 이렇게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답니다.
동생은 연탄 내리고 누나는 나르는 모습이네요
순창의 초등학교 모습입니다(사진에 소개 글)
책 보자기= 모든 학생들이 책 보자기에 책과 도시락을
둘둘 말아서 허리나
어깨에 매고 학교를 다녔으며 책가방 들고 다니는 학생들은
보기 힘들었지요
도시락에 김치국 물이 흘러서
책장이 빨갛게 물들곤 했답니다
햑교다녀 오면 부모님 일부터 거들고 주로 밤에 호롱불 밑에서
웅크리고 앉아 꾸벅 꾸벅 졸면서 숙제를 하였지요,
숙제하다 그냥 책상에 엎드려 잠이들고.....
학교 다녀오면 들로 산으로 소먹이로 다니곤 했지요
돌아올 땐 소먹이풀을 지게에 가득지고
한 손엔 소 고삐를 잡고..
등교길 징검다리를 건너는 모습입니다
친구들 집 앞을 지나칠때면 지나는 아이마다 " ㅇㅇ야 학교가자!
라고 크게 소리쳐 부르곤 했지요
하나같이 빡빡머리에 이발비도 아끼고 머리에 이 생기는것도
방지하고.. 나무 책상에는 가운데 줄을 그어놓고
사물이 서로 못넘어오게 다투기도 했지요
선생님과 찍은 추억의 모습들입니다
길 거리에서 순경 아저씨로 부터 교통지도를 받는 모습입니다
아! 저기 여고생의 모습입니다
아스라히 멀어져간 추억 속의 교복....
피로회복제를 팔고 있는 모습입니다
우체국 홍보 사진과 지금은 볼 수 없는 삼륜 자동차입니다
나무 따게(삽)라고 생각이됩니다, 이름이 생각 안납니다
삽질하는 여학생입니다
학교 다녀오면 연탄불도 갈고......
용돈을 벌려고 껌이나 피로 회복제를 팔러 다니기도 했지요
요즘은 학교 다녀오면 학원이다
머다해서 가사일을 하는 학생들 모습은 볼 수 없지만 예전엔 공부
보다도 부모님을 도와 일하는게 우선 이었답니다,
물론 일 때문에 결석도 잦았지요
빙상대회 사진입니다
강원도 속초 모 초등학교에 장애를 가진 친구를 매일같이
학교까지 대려다주며 돌봐주는 모습입니다
(자전거를 개조한 휠체어)
때로는 업고 마실을 다니기도하고..
..
누이 동생이 오빠를 업고...
요즘 보기드문 장면에 눈시울이 뜨거워 집니다
학교 다녀와서 거름치기도 하고...
새끼도 꼬고....
읍내까지 학교 다니는 아이들은 학교 마치고
시장에 들러 장보기도 했지요
학교 다녀와서 물지게도 지고....
목욕을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멀리 물놀이하는 아이와 달려가는 아이하며 무척이나 정겹습니다
요즘처럼 계절별로 옷이없고 보통 겨울 옷과 여름 옷 두 종류여서인지
날씨는 여름인데 두 아이는 아직 겨울 옷같네요
우리 어머님들의 모습입니다
수십리 길을 걸어서 장보러 다니곤했지요
당신께선 굶주린 배를 끈으로 한번더 꼬옥 조여 매시고 끼니도 굶고
수십리먼길을 다녀 오시곤 했습니다
흔히 볼 수있었던 개천가의 움막들입니다
교실이 부족하여 노천에서 공부하는것은 예사였지요
이곳에도.......
이밝은 표정들이 조국 근대화에 견인차 역활을 했나봅니다
대도시의 어느 초등학교 졸업식 모습입니다
시골과는 많은 차이가 나지요
짚으로 지붕을 덮기위해 용마름을 짜는 모습입니다
가난하고 힘들어도 표정 만큼은 너무도 천진 난만하고 순수해 보입니다
운동회 모습입니다
수업 시간에 어린 동생을 학교에 데리고 나와서 공부 하는 모습입니다
부무님이 들에 가시면 어린 동생을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도시의 어느동네 한 모퉁이 같습니다
가난했던 시절 허리가 휘어지고 뼈골이 부서지도록
자식들위해 고생하신
우리 모두의 어머님이 십니다
"용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용기를 보여줄 수 없는 사람, 사랑이 필요한 상황에서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이 장애인입니다. 장애는 육체적인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내가 존귀한 사람이라고 믿고 절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팔다리가 없이 작은 왼발만 있던 아이, 절망 속에 어린 나이에 자살까지 시도한 아이가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 전도사로 성장했다.
▲ 그는 어릴 때 대학에 들어갈 수도 , 직장을 가질 수도, 결혼 할 수도,아이를 안을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몸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이란 걸 안다.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길이 있다는 것 또한 안다. 그는 지금 누구보다 행복하다.
숙소인 홍은동 그랜드힐튼호텔에서 만난 그는 "한국은 첫 방문이지만 오자마자 많은 분이 'TV에서 봤다.
희망을 줘서 고맙다'고 말했다"며 "희망을 품을 때까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이곳 사람들에게 전할 생각에 흥분된다"고 말했다.
부이치치는 1982년 호주 브리즈번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테트라-아멜리아 신드롬(Tetra-Amelia syndrom)으로
양팔과 양다리 없이 발가락 두 개가 달린 작은 왼발 하나만
있던 그는 남다른 자기 몸에 절망해 8살 어린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다.
"1990년 8살 때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내 몸이 남과 다른 줄 몰랐다"는 그는 "학교에 가 보니 친구들이 놀렸고,
다시 주변을 보니 형과 누나, 가족들 모두 팔다리가 있는 것을 보고 내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한번은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뛰어들었고, 그 뒤로도 두 번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발견해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그는 절망을 극복하는 데는 부모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소개했다. 그의 부모는 그를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 비장애인들과 함께 어울리도록 했고, 울면서 학교에서 돌아오는 그를 인내심을 갖고 지켜봤다.
"특별한 요구 사항이 있는 아이를 둔 데 대해 우리 부모님은
절대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장애 자녀를 둔 부모님은 아이 인생 전체를 책임질 수 없는 만큼 그날그날, 매 순간에 필요한 배려를 해주시면 됩니다."
그는 사춘기가 시작된 13살 때부터 장애를 차츰 받아들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어느 날 장애를 딛고 사는 사람들에 대한 신문기사를
어머니가 보여주셨죠. 성경에서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예수님 이야기를 읽으면서 내가 장애를 안고 태어난 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라는 것도 이해하게 됐습니다."
물론 부모와 갈등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나도 보통의
13살짜리가 할 수 있는 관심사와 상상력을 가졌기 때문에
생긴 갈등이었을 뿐 장애아였기 때문에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며 웃었다.
힘든 청소년기를 거친 그는 비장애인들과 똑같이 공부해 호주 그리피스대학에서 회계학과 재무학을 복수 전공했다.
이제는 수영과 골프, 농구를 즐기고, 줄넘기를 한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지없는 삶(Life without Limbs)'
이라는 장애인 비영리 단체를 만든 후부터는 4개 대륙 12개국 이상을 다니면서 절망에 빠진 세상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고 있다.
사회복지단체 사랑나눔재단(이사장 박종옥) 초청으로 방한한 그는 28일까지 전국 곳곳에서 강연과 퍼포먼스 등을 한다.
힘겨운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특히 청소년들에게 자존감과 희망을 북돋우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관심이 많다며
"더 많은 사람에게 꿈을 주고, 계속 노력하라는 메시지를 주는 것이 내 인생의 목표"라고 말했다.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 싱가포르를 방문했을 때 부유한 은행가가 자기 딸이 거울로 스스로의 얼굴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자기비하에 빠졌다며 하소연해 왔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자기 정체성과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하면 불행합니다."
내 남편은 건설현장 근로자다.
말로는 다들 직업에 귀천이 없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엄연히 직업에 귀천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세칭 노가다라는 직업을 가진 남자를
남편으로 둔 나는
그가 하는 일을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어쩌다 친정엘 가도 풀이 죽는데,
"남들은 내 남편을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마음에 가끔 길을 가다가도
"이거 얼마예요?"
하고 서투른 우리말로 물어 보는게 아닌가.
아줌마가 천원이라고 답하자
그 두사람은 자기네 말로 뭐라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게 보였다
아마 비싸다는 표정인 거 같았다.
그 순간 나는 선량한 두 사람을 보고
이국 땅에 와 천대 받으면서 일하는
외국 근로자의 입장을 생각했고
또한 힘들게 일하는 내 남편이
잠깐이나마 그립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늘은 햇빛이 따갑게 내리길래
널었던 이불을 걷으로
옥상에 올라 갔다가 무심코하늘을 보는데
"화인건설" 이라고 쓰여진 곤돌라가 눈에 띄었다.
언젠가 남편이 일하는 곳을 알려준 적이 있었다
가보지는 않았지만
남편이 일하고 있는 현장인거 같아
나는 열심히 그 곤돌라 밑으로
남편 옷 색깔을 찾아 보았다.
|
아!
조그맣게 남편이 보였다.
위험한 난간에서 나무 기둥을 붙들고
왔다갔다 하면서 망치로 못을 치고 있었다.
탕!탕! 못치는 소리도 들려왔다
그 순간 나? 울고 말았다.
왜 내 남편은 더운 날
저렇게 땡볕에서 일을 해야만
처 자식을 먹여 살릴 수 있을까.
꼭 저렇게 힘들게 일해야 하나
내려오는 계단에서
이불을 싸안고 오다가 그렁거리는
눈물 때문에 넘어 질 뻔 했다.
저녁을 먹고 남편에게
"다리 주물러 드릴께요 이쪽으로 누우세요"
했더니 눈이 동그래 졌다.
별일 다 보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다리를 주무르면서
"당신 오늘 6층에서 일했죠"
"어, 어떻게 알았어?" 했다.
"오늘 이불 걷다가 봤어요,
우리 옥상에서 바라보면 왼쪽 끝에서 일했죠?" 했더니
"응" 하고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마도 자기가 고생하는 걸
내가 본게 못마땅한 것 같았다.
"냉커피 한잔 드릴까요?" 했더니
"아 타주면 잘먹지" 한다
사실 남편이
저녁 늦게 커피를 부탁하면 거절 했었다.
그다지 커피를 즐기는 편이 아니어서
밤에 커피를마시면
카페인 때문에 잠을 못자는 편이기 때문이다.
언제인가 밤에 커피를 마신 뒤
새벽까지 뒤척이더니
일 나갔다가 어지럽다고
그냥 집에 온 적이 있은 뒤부터
나는 되도록 늦은 커피는 타주지 않는다.
내마음을 아는 남편은
"내일 일 못 나가면 어쩌려고 커피를 타주지"했다.
"아유 뭐 어때요 하루 쉬면 되지 뭐" 했더니
남편은 빙긋 웃으면서
"우리 블랙 커피 한번 마셔 볼까?"
하고 장난기 어린 표정을 지었다.
"테레비 같은 데서
블랙커피 마시는 사람들 보니까 유식해 보이더라"
나는 웃음을 참으면서
정말로 설탕과 프림을 빼고
남편에게블랙 커피를 내밀었더니
한모금 마신 남편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아우,무식한게 차라리 낫겠다.
못 마시겠다.우리 무식하고 말자"
하는게 아닌가.
하긴 블랙커피를 마신다고 모두 유식하면
무식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부부는 무식할 정도로 큰 소리로 웃었다.
잠자리에 누운 남편은
"당신 이번에 돈 나오면 바지 하나 사 입어.
거 왜 당신은 멋을 안부리는 거야?
옆집 진영이 엄마 같이
야들 야들한 바지 하나 사입어"했다.
"참 누군 못 사 입어서 안 입는줄 아세요?
당신 땡볕에서 땀 흘리며 번돈으로
어떻게 비싼 옷을 사 입어요?" 했더니
"다 당신하고 윤정이 위해일하는데 뭘 그래.
이번 달에 사입어 파마도 좀 하고"
나는 그만 목이 메었다.
그런걸 행복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지체 높으신 사모님 소릴 못들어도.
어떤 비싼 보석 같은게 아니 더라도
잠깐씩 이렇게 느껴 지는 걸
행복이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가끔 남편은
돈 많은 부모 못 만나 배우지 못해서
천대 받는 세상이 원망 스럽다고
울분을 토한 적이 있다.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나 또한
남편의 직업에 열등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렇게 오늘 같이 잠깐씩 느끼는 감사함으로
남편 직업에 대한 회의를 잊고
깊은 행복감에 젖어든다.
아, 내일 남편의 점심 반찬을
무엇으로 해 드릴까?
자칭 무식한 우리 부부의 초여름 밤은
시원하게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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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 이루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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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경 노스님께서
“스님 누가 찾아 왔습니다.”하셨다.
잠시 후 법당 문이 열리며 한 여성 불자님이 들어 오셨다.
삼보 전에 예를 드리고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추운 날 이 시골 산골까지 오시느라고 힘 많이 드셨습니다.
보살님은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네, 용인에서 왔습니다.”
“네, 그렇군요. 그런데 이곳을 어떻게 알고 왔습니까?”
“저는 스님의 블록 ‘새들의 쉼터’를 보고 이곳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블록에 올린 스님의 글들을 거의 다 보았습니다. 저에게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렇게 불쑥 예고도 없이
찾아뵙게 되어 죄송합니다. 한 가지 소원이 있어 왔습니다.”
“네, 그렇군요. 보살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스님, 전 돈 안 되는 그림 그리고 있어요.”
이 말을 듣고 잠시 그 보살님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어딘지 모르게 차가운 모습에 신비한 것을 찾는 나그네 같기도 했다.
“스님, 저는 제가 누군지 정말 알고 싶습니다. 간절히요.” 이렇게 말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 그녀는 올해 42세로 경기도 용인에 살고 있는데 두 아이를 가진 주부로
올 7월에 미국에서 돌아와 살고 있는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시절 동갑네기의 남자와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나 결혼을
전제로 사귄 것이 아니었다. 자신은 구속 받는 것이 너무 싫었다.
그냥 서로 사랑하고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는 결혼을 요구 했다.
그래서 반대를 계속했는데 그 남자가
‘그러면 우리 결혼식은 올리지 않더라도 혼인 신고라도 하고 계속 살면 좋겠다.
’라는 간절한 청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남자를 무척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그녀 자신을 지금까지 옭아 메게 한 시초가 되었다.
이후 아이를 가지자고 이야기 했고, 계속 거절하다가 결국 임신을 하게 되어
아이를 놓게 되었다. 결혼 전 혼인 신고도 하고,
임신을 하자 시가로부터 구박이 아주 심했다. 큰 아이(딸)가 자라자 아이 공부를 위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 곳에서 또 남편의 강요에 못 이기어 둘째 아들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했다. 이후 시부모님이 한국으로 다시 들어와
살기를 간청하자 남편도 가족 모두 한국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 그녀는 시부모의 구박이 싫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자 남편은 ‘나 혼자라도 들어가겠다. 지금 같이 가지 않으면 한국에 가서
새로운 여자 만나 아이까지 놓고 살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한국으로 들어갔다. 그 후 몇 년 동안 미국에 아이들을 키우고 살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는데, 이때 미국인을 만나 사랑을 나누게 되었는데 아이들이
그 미국남자를 너무 무서워하고 싫어하여 결국
금년 8월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과 합가하여 살게 되었다.
◇ 그런데 남편은 또 아이를 갖자고 했다. 시부모님이 손자 욕심이 많아
사내아이를 또 낳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이에 강력히 반해하여 남편과 각방을
쓴지가 오래 되었다. 여기서 그녀는 심한 정신적 갈등을 겪고
우울증까지 걸리게 되었다.
구속받기 싫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데 현실은 17여년의 세월동안 자신을 더욱 올가미로 씌우게 한 것이다. 결혼하기 싫었고,
아이를 놓기 싫었는데 또 아이를 가져야 한다니 정말 싫었다. 이제 자신도
남편에 의지 하지 않고 스스로 돈을 벌어 살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자신이 전공한 ‘컴퓨터 그래픽’으로도 돈을 벌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그녀는 심한 정신적 갈등으로 우울증에 빠져 정신과 치료를 받기까지
하였고 이렇게 먼 곳까지 상담을 받으러 온 것이다.
위 불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자신을 마치 누에고치처럼 꽁꽁 묶어 두고 있었다.
이미 지나간 과거에 대하여 얽매여 있는 것이다. 정말 결혼하기 싫고 아이를 가지기 싫으면 그 연결고리를 탁 끊고 나오면 된다. 그리고 혼자 살면 된다.
그런데 남편이 벌어주는 돈으로 생활을 하면서 ‘아이는 갖기 싫다.’고 하는 것은
남편과 시댁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자기 기분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생각일 뿐이다. 결혼을 하고 살면 권리도 있지만 의무도 있다.
위 불자는 자신의 권리만 찾고 자기 기분만을 찾는 것이 옳고 현명하다는
생각에 빠져있다.
위 여성 불자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뒤 이렇게 말하였다.
◇ “불자님 이 세상에서 철이 든다는 것은 내 생각과 남의 생각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자님은 항상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은 자유롭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자유롭고 싶으면 결혼하지 말고 혼자 살면 됩니다.
만일 결혼해서 살고 남편 돈으로 살아가려면 남편의 생각도 이해하고 알아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편 돈으로 살면서 자신의 생각만 하고 자유롭게 되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극단적인 이기주의로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불자님 우울증이 왜 왔습니까?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왔습니다.
자신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병입니다. 자신이 뭐 그렇게 잘났습니까? 불자님은 그냥 한포기의 풀, 한 조각의 구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면 곧 없어지고 말 무상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불자님은 자신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다른 사람은 결혼하여 아이 놓고 잘삽니다. 그리고 그것에 만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자님은 자유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남편의 돈으로 살아가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이미 한 남편의 아내요, 아이들의 어머니임을 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님 그러면 저는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저도 일하고 싶어요. 스스로 돈도 벌어서 남편에게도 보란 듯이 돈을 주고도 싶어요. 그런데 제가 하는 일은 돈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 “불자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마음을 내지 못합니다.
무엇이 어리석은가?
자신의 욕심에 눈이 어두우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는 것을 어리석다고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려면 돈이 되는 일을 해야 하는데 스스로 돈이 안 되는 그림
그리고 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마음이 바로 어리석은 마음입니다.
결혼생활도하고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 지나친 것입니다.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내로서,
아이들의 어머니로서 의무가 있지 않습니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컴퓨터 그래픽이라 했는데 그것이 돈이 안 된다고 하면서 동시에 스스로 돈을 벌기를 바란다면 이 또한 모순이요, 욕심인 것입니다.”
“서로 상반된 일을 하려면 한 쪽을 포기해야 합니다. 자유롭게 자신의 일을 하고 싶지만 현실이 그렇지 못할 때에는 자신의 욕망을 조금 내려놓아야 합니다. 자신의 욕망을 다 충족해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어리석은 망상인 것입니다.
자신의 일도하고 집안도 살리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일을 그냥 취미로 한다고 생각하시고 나머지는 가족에 봉사하세요. 남편의 일을 돕는데 힘을 쓰고 아이들의 뒷바라지에 힘쓰며 틈나는 대로 기도하세요.”
이렇게 열심히 성심을 다해 상담을 했다.
그러자 그 불자님의 굳었던 얼굴이 조금 펴지면서
“스님 저 매일 108배하고 있습니다. 저 그렇게 나쁜 사람 아닙니다. 아이 잘 키우고 있습니다. 오늘 스님의 호된 가르침 잘 새기겠습니다. 그런데 108배하면서 아무런 생각이나 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도 되나요?”
“지금은 기도할 때 무엇을 바라는 마음으로 하지 마세요. 오직 나의 어리석은 마음을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저 부처님 잘못했습니다.
어리석은 마음을 가진 죄 참회합니다. 어리석은 행동을 한 점 참회합니다.
나로 인해 상처받은 남편에게 참회합니다. 아이들에게 참회합니다.
시어머님께 참회합니다. 그 미국인 남자에게도 참회합니다. 부모님에게도 참회합니다.’이렇게 108배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참회하시기 바랍니다.”
“스님 잘 알겠습니다.
이제 저 생각을 내려놓고 먼저 가족을 위해서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남는 시간에 저를 위한 일도하고 사회를 위한 봉사활동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참 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저 모습을 알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불자님 기도시나 또는 생활하면서 매시 자신의 생각을 지켜보세요. 그 생각의 근저에 어떠한 욕망이 도사리고 있는지를. 그것을 깊이 궁구하다 보면 어느 때 자신의 참 모습이 확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렇게 상담을 마치고 그 불자님은 부처님께 공손히 절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어둠을 뚫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래서 스님은 손전등으로 내려가는 불자님을 한 동안 비추고 있었다.
잠시 후 자동차 소리가 나며 자동차 헤드라이트가 어두운 마을 골목길을 비추며 미끄러지듯 사라져 갔다.
◇ 부처님,
저 고통 받는 불자님이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받아 환한 미소를 가지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를 기원합니다.
그리하여 자신과 가족과 이웃을 다 살리는 행복한 불자님이 되시기를
축원하나이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놓아 버려라...옳다 그러다......길다.짧다......깨끗하다, 더럽다,,,,,,많다, 적다......
분별하면 차별이 생기고 , 차별하면 집착이 생긴다.
옳음도 놓아버리고, 틀림도 놓아버리고, 긴것도 놓아버리고, 짧은것도 놓어버리고,
하얀것도, 검은것도 놓아버려라
바다는 천개의 강, 만개의 하천을 다 받아 들이고도 푸른빛 그대로요, 짠맛 그대로이다
모든 회원님들 욕심없는 감사함으로 항상 건강하시기를 부처님전에 기도드립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