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870
■ 3부 일통 천하 (193)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1장 조정(趙政), 진왕에 오르다 (7)
과연 번어기(樊於期)는 용맹스러웠다.
번어기의 거침없는 돌진에 토벌군은 기가 질렸다. 감히 맞서 싸울 생각을 못하고 좌우로 몸을 피했다.
번어기(樊於期)는 하늘에서 내려온 신장(神將)처럼 좌충우돌하며 자유자재로 칼을 휘둘렀다.
때를 맞추어 진류성 위에 있던 장안군 성교(成嶠)가 힘껏 북을 두드렸다. 둥둥둥!
장안군의 군사들은 함성을 내지르며 번어기의 뒤를 따랐다.첫 전투가 시작되었다. 혼전(混戰)이었다.
양군의 전력은 비슷했다.사기는 반란군이 높았으나 군사 수는 토벌군이 많았다.
번어기의 용맹스러움에 밀려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왕전(王翦)은 날이 저물자 금(金)을 쳐
군사들을 거두어 산개산(傘蓋山) 영채로 돌아갔다.그 날 밤, 왕전(王翦)은 곰곰이 생각했다.
'번어기(樊於期)는 범처럼 사납고 용맹한 장수다. 정면으로 싸워서는 이기기가 쉽지 않다.
꾀로써 굴복시키는 것이 더 수월하겠다."
이내 한 계책을 생각해내고 모든 수하 장수를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였다.
"그대들 중에 장안군과 친한 사람이 있소?"편장급 중에 양단화(楊端和)라는 장수가 있었다.
그는 둔류 태생이었다.그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소장이 한때 장안군(長安君)의 문객 노릇을
한 적이 있습니다.""좋다. 내가 서신 한 통을 써줄터이니, 그대는 장안군에게 그것을 전하고
속히 귀순하라 타이르시오."
"서신을 전하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문제는 어떻게 둔류성 안으로 들어가느냐입니다."
"그것은 간단하오. 내일 내가 다시 한 번 번어기(樊於期)와 교전할 터이니, 그때 그대는 적군으로
가장하여 그들 속에 휩쓸렸다가 저들과 함께 둔류성 안으로 들어가시오."
그러고는 양단화(楊端和)를 가까이 불러 귓속말로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다음날 왕전과 번어기 사이에 또 한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왕전(王翦)은 적당히 싸우다가 밀리는 척 10리 밖으로 물러났다.
번어기(樊於期) 역시 복병을 염려하여 왕전의 뒤를 쫓지 않고 군사를 거두어 둔류성으로 돌아갔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양단화(楊端和)가 번어기의 군사로 가장하여 둔류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둔류성 태생이었기 때문에 쉽게 친척집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그 무렵, 함양의 진왕 정(政)은 뒤늦게 번어기(樊於期)가 작성하여 뿌린 격문을 읽고 있었다.
- 지금의 왕은 영씨가 아니고 여씨다......
이런 내용의 글을 본 순간 진왕 정(政)은 피가 머리 끝까지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자신으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었다."사실이오?"여불위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달리 섬뜩했다.
여불위(呂不韋)는 자신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왕께서는 번어기의 말을 믿으십니까?
왕의 모친이신 태후(太后)께서는 분명 선왕에게 시집간 지 열 달 만에 왕을 낳으셨습니다."
"번어기, 이놈.........!내가 이 자의 목을 직접 베리라. 승상(丞相)은 왕전에게 사람을 보내 번어기(樊於期)를
죽이지 말고 산 채로 잡아오라 이르시오. 내 그를 친히 문초한 후 목을 베겠소."
양단화(楊端和)가 둔류성 안으로 무사히 잠입한 것을 확인한 왕전(王翦)은 그 날부터 진류성 공격을 중지했다.
대신 환의와 왕분을 불러 지시했다.- 장수 환의(桓齮)는 장자성을 공격하시오.
- 장수 왕분(王賁)은 호관성을 점령하시오.장자성(長子城)과 호관성(壺關城)은 모두 둔류 땅에 속한 고을로
둔류성과는 품(品)자 형태를 이루고 있었다.장안군(長安君)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자연 그의 지배하에
들게 되었다.두 번 싸움에 두 번 모두 이긴 데다가 며칠 동안 왕전(王翦)이 일체 군사를 내지 않자
둔류성 안의 군사들은 사기가 높아졌다.번어기(樊於期) 또한 왕전이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며칠 후였다.장자성과 호관성을 지키고 있던 부하 장수로부터 급보가 날아들었다.
"큰일났습니다. 왕군(王軍)이 장자성과 호관성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왕전의 계책을 눈치챈 번어기(樊於期)는 그들을 구하러 떠날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장자성(長子城) 함락!- 호관성(壺關城) 함락!
이 소식에 가장 놀란 것은 나이 어린 장안군 성교였다. 성교(成嶠)는 얼굴빛이 하얗게 질린 채 몸을 벌벌 떨었다.
"이제 우리는 이 곳 둔류성에 고립되었소. 어찌하면 좋겠소?"번어기(樊於期)가 장안군을 안심시켰다.
"대군께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조만간 왕전(王翦)과 결전을 벌이겠습니다.
만에 하나, 싸워서 이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연(燕)나라나 조(趙)나라로 도망쳐 여러 나라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기어코 진나라 가짜 왕의 목을 베겠습니다."장자성(長子城)과 호관성(壺關城)을 점령함으로써
둔류성을 고립시키는 데 성공한 왕전(王翦)은 다시 군사를 정비하여 진격 채비를 갖췄다.
그가 막 둔류성을 향해 떠나려는데 수하 장수 하나가 들어와 고했다.
"함양에서 신승(辛勝) 대부께서 오셨습니다."왕전(王翦)은 고개를 갸웃거렸다."어서 모시어라."
신승(辛勝)이 들어왔다.왕전이 물었다."어쩐 일이시오?"
"지금 왕께서는 번어기에 대해 무척 격노하고 계시오. 번어기(樊於期)를 죽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산 채로 잡아오라는 왕명이오. 친히 번어기의 목을 베고 시체를 소금에 절여 두고두고 씹겠다고 하시었소."
왕전(王翦)은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다.'어떻게 하면 번어기를 죽이지 않고 산 채로 잡을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궁리하며 신승을 바라보는 중에 퍼뜩 한 계책이 떠올랐다.
신승을 향해 왕전(王翦)은 말했다."대부께서는 오신 김에 잠시 나를 도와주어야겠소.""분부만 내리십시오."
왕전(王翦)은 즉시 수하 장수들을 불러모아 지시하기 시작했다.
- 환의(桓齮)와 왕분(王賁) 두 장군은 각기 일군을 거느리고 좌우 언덕에 매복해 있으시오.
- 신승(辛勝) 대부는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나가 둔류성을 공격하시오.
- 나는 대군을 이끌고 신승 대부의 뒤를 받쳐주겠소.
871편에 계속
열국지 [列國誌] 871
■ 3부 일통 천하 (194)
제13권 천하는 하나 되고
제 21장 조정(趙政), 진왕에 오르다 (8)
번어기(樊於期)는 결전을 벌일 각오로 군사를 이끌고 둔류성을 나왔다.
성밖 10리 밖에 영채를 내렸을 때였다.초병 하나가 달려와 고했다.
"함양에서 새로 온 신승(辛勝)이라는 장수가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번어기(樊於期)는 껄껄껄 웃었다.
"신승은 군사(軍事)라고는 전혀 알지 못하는 서생이다. 내 신승부터 잡아 목을 벤 후 왕전과 일전을 겨루리라!"
번어기(樊於期)는 망설임없이 병차대를 이끌고 나가 신승을 몰아쳤다.
애초부터 신승(辛勝)은 번어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싸운 지 반 시진도 못 되어 신승이 이끄는 군사들은 지리멸렬(支離滅裂) 하여 달아나기 시작했다.
"한 놈도 놓치지 마라!"번어기(樊於期)의 명령에 반란군은 신승의 뒤를 추격했다.5리쯤 쫓아갔을 때였다.
별안간 좌우 언덕 뒤편에서 한 떼의 군마가 달려나왔다.환의(桓齮)와 왕분(王賁)이 이끄는 군사였다.
그제야 계책에 빠진 것을 안 번어기(樊於期)는 재빨리 군사를 돌려 포위망을 뚫었다.
다행히 큰 피해는 없었다."내 예전에는 왕전(王翦)이 용병에 뛰어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모두가 허명이었구나. 이 정도라면 능히 왕전을 격파하고 함양성에 진입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었다.
번어기(樊於期)가 둔류성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번어기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어느새 둔류성 아래로
왕전의 군사가 새카맣게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번어기(樊於期)는 놀라움과 분노에 휩싸였다.
"이놈들!"그는 괴성과도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앞장서서 돌격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성안으로 들어갈 각오였다.
그의 용력은 대단해 앞을 가로막는 적병들을 마구 후리쳤다.
칼빛이 번쩍일 때마다 토벌군의 목이 낙엽처럼 떨어졌다.
번어기(樊於期)의 이러한 용력에 왕전의 군사들은 주춤했다.
더욱이 진왕 정(政)으로부터 번어기를 죽이지 말라는 명을 받은 그들이었다.활을 쏠 수가 없었다.
결국 왕전(王翦)의 군사는 길을 내주듯 양쪽으로 갈라졌다.
그 틈을 이용해 번어기(樊於期)는 살아남은 부하들을 이끌고 둔류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부터 번어기(樊於期)는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밤낮없이 순시하며 군사들을 지휘했다.
농성 태세로 접어든 것이다.반면 왕전(王翦)은 왕전대로 둔류성을 철통같이 포위하고 맹렬히 공격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이었다.그는 군사들이 다치지 않도록 공격하는 시늉만 하게 했다.
그가 실제로 기다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며칠 전 성안으로 잠입해 들어간 양단화(楊端和)의 활약이
바로 그것이었다.둔류성 안 친척집에 숨어 있던 양단화(楊端和)는 왕전의 공격이 맹렬해지자
자신이 나설 때가 왔음을 알았다.어둠이 짙은 밤이었다.
양단화(楊端和)는 친척집을 나서 장안군 성교가 거처하는 관사로 갔다."긴히 드릴 말씀이 있어 왔습니다."
문지기를 통해 장안군에게 면회를 신청했다.다행히 장안군(長安君)은 양단화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문지기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양단화를 보자 장안군 성교(成嶠)는 반색하며 물었다.
"그대가 여기 웬일이오?"양단화(楊端和)는 절을 마친 후 낮은 목소리로 청했다.
"기밀사항입니다. 좌우 사람을 잠시 밖으로 내보내 주십시오."방 안에는 두 사람만이 남았다.
장안군(長安君)이 궁금함을 이기지 못하고 재촉했다."자. 이제 말해 보오.
내게 알려줄 기밀이라는 게 무엇이오?"양단화(楊端和)는 여전히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오늘날 진나라보다 강한 나라가 없다는 것은 대군께서도 잘 알고 계시는 일입니다. 천하의 6국들이
힘을 합해도 진(秦)나라를 쳐서 이기지 못하는 판에 대군께서는 무엇을 믿고 이런 큰일을 저지르셨습니까?"
장안군 성교(成嶠)는 나이도 어린 데다가 원래부터 겁이 많았다.
반란을 일으킨 지 한 달이 넘었건만 둔류성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게 되자 은근히
후회하고 있던 참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한탄했다."이것이 어찌 나의 뜻이겠소?
번어기(樊於期)가 지금 왕은 선왕의 아들이 아니라면서 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오."
"번어기(樊於期)는 한낱 필부에 불과합니다. 용기는 있을지 모르나 앞날을 고려하지 않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더욱이 그가 각 고을에 격서를 뿌렸지만 아무도 그에 동조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대세는 이미 명확해졌습니다.
대군께서는 어찌하여 살 길을 도모하지 않고 이렇듯 번어기(樊於期)에게 끌려만 다니십니까?"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니오? 나도 어떻게 수습해야 좋을지 모르겠소. 내가 살 수나 있겠소?"
"그 점이라면 염려하지 마십시오. 실은 왕전(王翦) 장군의 부탁을 받고 제가 대군을 찾아왔습니다."
"왕전 장군께서도 대군이 번어기(樊於期)의 꾐에 빠진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여기 왕전(王翦) 장군이 보낸 서신이 있으니 읽어보십시오."양단화(楊端和)는 품속에서 서신을 꺼내 바쳤다.
- 대군께서는 왕의 친동생이십니다.
이렇듯 귀하신 몸이 어찌하여 번어기의 황당무계한 말만 믿고 스스로 몸을 망치려 하십니까.
안타깝고 안타까운 일입니다.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모든 죄가 번어기(樊於期)에게 있음을 저는 잘 압니다.
대군께서는 주저치 마시고 번어기를 사로잡아 왕께 투항하십시오.
제가 대왕께 잘 말씀드리어 반드시 대군을 용서토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군께서 마음을 정하지 못하시고 기회를 놓치신다면 후일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글을 읽은 장안군 성교(成嶠)는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번어기(樊於期)는 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오. 내 어찌 그를 잡아 왕께 바칠 수 있소? 그를 살려준다면 내가 한 번 설득해 보겠소."
양단화(楊端和)는 장안군의 마음이 여려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할 것임을 알고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모든 것은 대군께서 판단하실 일입니다. 제가 다시 대군을 찾아뵐터이니 그때까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아울러 지금 나눈 대화는 누구에게도 비밀로 해야 합니다.""그 점은 염려하지 마오."
양단화(楊端和)는 소리없이 사라졌다.
87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