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05편:천재지변과 천문학
(극심한 가뭄에 시달리는 백성과 군주)
태종은 재위 18년 동안 극심한 천재지변에 시달려야 했다. 을유년과 병술년의 가뭄은 가히 살인적이었다.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들이 민란 일보 직전이었다. 전국의 농토는 불볕으로 타들어 갔고 태종 이방원의 가슴은 재가 됐다. 특히 풍해도와 동북면의 기근이 극심했다. 동북면의 기근을 구휼하기 위하여 전라도의 양곡을 수송하던 조운선이 난파되어 43명의 선원이 목숨을 잃기도 했다.
계림과 합천에 지진이 일어나는가 하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나고 7월, 8월에 우박이 쏟아졌다. 태백성은 저녁 무렵 서쪽 하늘에 보이는 금성
을 이르는 말로서 샛별, 개밥바라기, 장경성(長庚星)이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의 천문기상학으로 해석하면 기상이변이고 천재지변이지만 당시에는 하늘의 노여움으로 받아들였다. 기상대에 해당하는 서운관이 하늘을 관측했지만 뾰쪽한 대책이 없었다. 밤을 새워 하늘을 관측한 서운관승(書雲觀丞) 박염이 보고했다.
박염(朴恬)은 일식을 잘못 관측했다하여 경상도 동래에 귀양갔다 유배가 풀려 되돌아온 서운관원이었다. 당시 일식은 서운관의 주 관측대상이었다. 서운관이 일식의 시일을 예측하면 임금은 각사의 당상관과 낭관을 거느리고 월대에 정좌하여 해와 달이 완전해질 때까지 기도드렸다. 해와 달의 이상변이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시일을 잘못 관측하여 임금을 헛수고하게 하였으니 귀양을 가게 된 것이었다.
"밤에 금성이 목성을 범(犯)하였고 유성이 태미동번(大微東藩) 상장
(上將)에서 나와 고루(庫樓)로 들어갔는데 크기가 됫박(升)만 하고
그 빛이 청황(靑黃)이었습니다." "유성은 어떠한 별인가?"
"병거(兵車)를 맡은 곳입니다."
"그러면 그 응험(應驗)은 어떠한가?"
"유성이 크면 사신(使臣)이 크고 유성이 작으면 사신이 작은 것이오니 명나라 사신이 오리라 생각되옵니다."
이것이 당시의 천문기상학이었다. 태종 이방원은 수라상의 음식 가짓수를 줄이고 약주(藥酒)를 끊었다. 순금사 옥을 비롯한 전국의 형옥에 갇혀 있던 죄인들 중에서 참형 이하의 죄수를 용서하여 석방했다.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아니하는 것은 오직 과인이 우매하기 때문이다. 내가 상벌을 행함에 밝지 못하고 사람을 씀에 적당함을 잃고 궁금(宮禁) 안에서의 복어(服御)가 제도에 지나쳐서 재변(災變)을 부른 것이 아닌가 염려되니 마땅히 각각 직언(直言)하여 숨김이 없도록 하라.
내 그것을 고치겠다." -<태종실록>
스스로 채찍질하며 몸가짐을 단정히 했으나 그래도 비는 오지 않았다.
"지금 한재(旱災)가 심한데도 불구하고 한 사람도 가뭄을 구(救)하자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의정부(議政府)에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너희들이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 말하여 각기 흉년을 구제할 방법을 아뢰라."
사헌부 장령 김여지가 방법을 내놓았다. "신 등은 생각하건대 백악(白岳), 목멱(木覓), 남교(南郊), 북교(北郊)에 벌써 비를 빌었으니 지금은 마땅히 종묘(宗廟) 사직(社稷)과 토룡(土龍)에 비를 빌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예전부터 가뭄과 큰물의 재앙은 다 임금이 덕이 없어 이르는 것인데 지금 중과 무당을 모아서 비를 빌게 하니 부끄럽지 않느냐? 나는 비를 비는 제사는 그만두고 사람의 일을 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나도 경서를 약간 읽어서 중이나 무당의 속이고 허망함을 아는데 이제 도리어 요술을 빙자하여 하늘이 비를 내려주기를 바라서야 되겠느냐."
?<태종실록>
"이는 비록 옛 성왕의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 신에게 모두 제사지내는 것 역시 예전부터 내려온 일입니다. 지금 중들이 이미 모였고 준비도 다 되었으니 풍속에 따라서 행하는 것도 해로울 것이 없을 듯합니다."
불교를 혁파하고 있는데 중을 모아 제사지내는 것은 이율배반이었다. 태조 이방원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제사를 지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갈등이 생겼다.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것은 비록 영전(令典)이 아닐지라도 공구수성(恐懼修省)하는 뜻을 보이고자 함이니 마땅히 중외(中外)
로 하여금 정하게 제사를 마련하도록 힘쓰게 해야 한다."
마음에 내키지 않지만 하늘에 빌어보자:
김여지의 손을 들어주었다. 극심한 가뭄에 백성들이 고통 받고 있으니 군왕으로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우선 종묘사직과 토룡(土龍)에 정결하게 제물을 드리고 동남(童男)을 모아 석척기우
제(蜥蜴祈雨祭)를 행하게 하였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는데 하늘이 움직이지 않았다. 비를 뿌리지 않은 하늘을 원망하던 백성들의 분노의 눈초리가 임금에게 옮겨졌다. 폭발 직전이었다. 기우제를 지내도 비가 오지 않자 천둥을 부르는 태일초례(太一醮禮)를 행하고 백악산 성황당 신에게 녹봉을 내렸다. 그러나 비는 오지 않았다.
"참소(讒訴)가 행하는가? 백성들이 원한이 있는가? 어찌하여 하늘의 꾸지람이 이처럼 심한가?"
간절한 소망이 하늘에 통했을까? 기우제의 영험이 통했을까?
지나가는 비가 뿌리더니만 이제는 전국 곳곳에서 벼락의 희생자가 속출했다. 현풍에서 엄대라는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고 개경에서는 건이라는 여자가 벼락에 희생되었다. 관내에서 제일 많은 희생자를 낸 전라도 도관찰사(全羅道都觀察使) 박은이 보고했다.
"완산 사람 부개가 벼락 맞아 죽었고 남원 사람 부존이 죽었으며 광주사람 득만과 득귀 형제가 죽었습니다. 또한 이들 형제가 끌고 가던 소도 죽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로구나. 벼락(雷震)이 사람에게 치는 것은 무슨 이치인지 내 아직 모르겠다."
"세상에서 벼락을 '천벌(天伐)'이라 합니다. 사람의 죄악이 차고 넘치면 하늘이 이를 내리치는 것입니다."
곁에 있던 서운관원이 대답했다. 책임전가가 아니다. 당시 천문학의 앎이다. 오늘날의 과학문명시대에는 초등학교 수준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의 최고 천문학자라는 선운관원들도 벼락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길거리에 나붙은 대자보:
나라에서 강하게 몰아붙이는 불교 개혁에 밀리던 불교계가 마냥 밀리지만은 않았다. 전열을 가다듬고 반격에 나섰다. 극심한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한 것을 기회로 삼았다. 종루(鍾樓)와 운종가(雲從街)에 익명서가 나붙었다. 오늘날의 대자보다.
"가뭄은 하륜이 집정한 소치다." 어느 시대 어느 때나 반대세력은 있게 마련이다. 하륜이 총대를 메고 불교를 강하게 밀어붙이자 불교 승려
들은 물론 조정에도 반대세력이 있었다. 공격 대상이 된 하륜이 임금에게 정승에서 물러나기를 청했다.
"사직하는 전(箋)문의 언사는 지극히 절실하여 실로 가상하다. 재이(災異)가 옴은 재상의 허물이 아니다. 오늘날 비가 오지 아니함은 죄가 실로 내게 있지 어찌 정승에게 있겠는가? 유언비어로 남을 비방하는 것 따위는 내 진실로 믿지 않는다. 굳이 사임하지 말고 나의 다스림을 보필토록 하라."
하륜의 사직을 물리치고 좌정승 하윤(河崙)에게 명하여 소격전(昭格殿)에 비 내리기를 빌게 하였다. 사직을 청하는 하륜에게 무한한 신뢰를 보내며 오히려 힘을 실어준 것이다. 이후에도 전국 명산대천에 기우제를 지냈으나 결국 비는 오지 않았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06편~
#대하역사소설^태종•이방원:⤵
태종•이방원 제106편: 조상을 모셔라
(기상이변에 백성과 임금은 공포에 떨었다)
기상이변은 계속되었다. 길주의 마른하늘에 잿빛 비가 내리는가 하면 기장 앞바다의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임을포(林乙浦)에서 가을포(加乙浦)에 이르는 '바다가 적색(赤色)으로 변하여 바닷물이 죽(粥)과 같고 복어와 잡어가 모두 죽어서 물위로 떠오르고 있다'고 보고하는 경상도 관찰사는 걱정 이상의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오늘날의 과학으로 해석하면 황사현상과 바닷물의 플랑크톤이 이상 증식하면서 발생하는 적조 현상이지만 당시에는 임금과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임금이 잘못하여 하늘에서 벌을 내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백성들은 가뭄으로 고통을 받고 태종 이방원은 가슴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 지신사 황희가 거지 행색의 중을 데리고 들어왔다.
"이 자는 장원심(長願心)이라는 중이온데 남이 굶고 있으면 밥을 빌어다 먹이고, 추위에 떠는 것을 보면 옷을 벗어 주었으며 병들어 있는 자를 보면 반드시 힘을 다하여 구휼하였고, 죽어서도 주인이 없는 자는 반드시 묻어 주어 거리의 아이들도 그 이름을 알지 못하는 자가 없습니다."
"가상하구나." "이자가 흥천사에 들어가 사리전에 기도를 드리면 비를 내릴 수 있다고 합니다."
평소 같으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누구를 속이려 드느냐?'하고 불호령을 내려 내칠 일이지만 현재 상황은 그것이 아니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흥천사라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다. 흥천사는 서모 신덕왕후의 능참사찰이 아닌가? 무슨 말이 어떻게 번질지 불길했다.
"비가 내린다면 천만 다행이지만 비가 내리지 않는다면 신덕왕후 강씨가 저주를 퍼부어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할 것 아닌가?"
그러나 그런 것을 따질 경황이 없었다. 태종 이방원은 장원심으로 하여금 흥천사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허락했다. 그런데 신통방통하고 귀신 곡할 일이 벌어졌다. 장원심이 기도한 이튿날 비가 내린 것이다. 신하들의 시선이 중 장원심에게 쏠렸고 백성들의 관심이 불교에 집중되었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진퇴양난이었다. 중 장원심에게 관심을 보이면 지금까지 추진해왔던 불교개혁이 탄력을 잃을 것이고 관심 밖으로 밀어내면 백성들의 원망이 두려웠다. 고민하던 태종 이방원이 지신사 황희를 불렀다.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다. 중 장원심의 자비행이 가상하니 후히 상을 주어 돌려보내도록 하라."
비는 하늘이 내리는 것이지 중 장원심의 신통력으로 내린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또한 상을 주는 것도 비를 내리게 한 기도력을 높이 산 것이 아니라 장원심의 평소 자비를 치하한다는 것이다. 황희는 중 장원심에게 저포(苧布) 1필, 정포(正布) 25필, 미두(米豆) 20석을 내려 주어 돌려보냈다. 기층민들의 구휼에 힘쓰라는 것이다.
가뭄이 극성을 부리고 장원심이 신통력을 발휘했다고 불교개혁을 멈출 수 없었다. 지신사 황희, 서운관 제조 유양우, 대사헌 김첨 그리고 이조 판서 이직을 불렀다.
"부처의 도(道)는 허와 실을(虛實) 알기가 어렵다. 지금 이러한 가뭄은 하늘이 나를 견책(譴責)하는 것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것은 비록 전(典)이 아닐지라도 하늘에 내 뜻을 보이고자 함이다. 궁궐과 가까운 곳에 인소전을 지어 내가 아침저녁으로 봉사(奉祀)하기를 평시(平時)와 같이 하고자 하니 진전을 정성들여 짓고 정하게 제사를 마련하도록 하라."-<태종실록>
부처에게 비는 것보다 조상에게 빌겠다: 인소전(仁昭殿)은 태조 이성계의 비(妃)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를 모신 혼전(魂殿)으로 태종 8년(1408)에 태조가 승하하자 이름을 문소전(文昭殿)이라 고치고 태조와 신의왕후를 같이 모신 사당이다. 비가 오지 않으면 명산대천의 잡신에게 빌 것이 아니라 조상에게 빌겠다는 뜻이다.
태종 이방원은 어머니 신의왕후 한씨에 대하여 생모 이상의 애틋한 정을 갖고 있었다. 하늘처럼 받들던 지아비를 제2의 여인에게 빼앗기고 숨 한 번 크게 쉬어보지 못했던 여자. 줄줄이 태어난 자식들에게 버릇없는 군인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노심초사했던 어머니. 지아비가 임금이 되고 두 아들이 왕이 되었지
만 부귀영화를 누려 보지 못한 여인.
그러한 생을 살다간 어머니가 항상 가슴에 맺혀있었다. 그 어머니에게 아들이 왕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봉사(奉祀)드리면 어여삐 봐줄 것만 같았다. 기근에 허덕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힘들어 하는 자신의 짐을 조금은 덜어줄 것만 같았다. 실체가 없는 허무맹랑한 잡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보다 큰 감동으로 되돌려 줄 것만 같았다.
인소전을 세운 태종 이방원은 진전(眞殿) 봉사만큼은 직접 챙겼고 전국의 각 고을에 사직단을 세워 고을 수령들로 하여금 봉사(奉祀) 하도록 했다. 이로부터 군주를 후손으로 둔 조상신은 궁궐로 들어 왔고 개인은 신주(神主)라는 이름 하에 가정으로 들어왔다. 가뭄이라는 시련이 조상을 숭배하는 유교국가의 시금석이 된 것이다.
진정한 의미의 유교국가 탄생이다. 이 때부터 조상의 위패를 모신 가로 6cm 세로 25cm 밤나무로 만든 사판(祠板)은 각 가정의 귀중한 물건이 되었다. 그 어떤 가보(家寶)보다도 소중히 모시는 대상이 된 것이다. 훗날 조일전쟁(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쟁시기 피난 갈 때 다른 가재도구는 다 버렸지만 신주는 꼭 챙겼다.
의녀의 탄생:
인소전을 지어 큰 물줄기를 제시한 태종 이방원은 가뭄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고 흉흉한 민심을 다잡기 위하여 대책을 내놓았다. 가뭄으로 가정이 해체되고 뿔뿔이 흩어져 의지할 곳 없는 불쌍한 백성들을 제생원(濟生院)에 모아 보살피도록 의정부(議政府)에 지시했다.
"환과고독(鰥寡孤獨)과 독질(篤疾), 폐질자(廢疾者), 실업(失業)한 백성들이 어찌 추위에 얼고 배고픔에 주려 비명에 죽는 자가 없겠느냐? 내가 매우 불쌍히 여긴다. 한양부와 유휴사는 물론 오부(五部)에 빠짐없이 알려 불쌍한 백성들을 거두어 보살피도록 하라."-<태종실록>
환가고독(鰥寡孤獨)은 홀아비, 과부, 고아와 자식이 없는 늙은이를 말한다. 600여년이 흐른 오늘날에도 노숙자가 넘쳐나고 독거노인의 시신이 사후 몇 개월 만에 발견되는 현실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명을 받은 지제생원사(知濟生院事) 허도는 즉각 실행에 들어갔고 덧붙여 의견을 내놓았다.
"부인이 병이 있는데도 남자 의원으로 하여금 진맥하려 하면 그 병을 보이기 부끄러워 끝내는 보이지 않고 사망에 이르게 됩니다. 제생원과 궁사(宮司)의 동녀(童女) 중에서 10여명을 골라 맥경(脈經)과 침구(針灸)의 법(法)을 가르쳐 이들로 하여금 부인들을 치료하게 하면 보탬이 될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은 제생원(濟生院)에 명하여 나이어린 여자 어린이로 하여금 의약(醫藥)을 가르치게 하였다. 교육 대상자는 천출이었기 때문에 학문적인 기초가 부족하여 필수적인 의약과 산부인과에 관한 의술을 주로 가르쳤다. 의녀(醫女)의 출현이다.
태종•이방원^다음 제107편~
첫댓글 105,106편 감사하게 연달아 올려주셨네요.
틈날때 또 읽어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장님 항상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