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댕의 연인...Camille Claudel
노틀담 성당을 지나 조금 걸어서 세느강을 지나는
다리 하나를 건너
세느강 안에 있는 생 루이섬 (Ile Saint-Louis) 으로 걸어갔습니다.
한 때는 늪지였던 생 루이섬은
17세기에 시테섬에 연결되면서 우아한 주택가로 변모해서
역사적인 인물들이 살았었고 현재도 유명인들의 거주지라고 합니다.
이 섬에 가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베르티옹 아이스크림을 먹으라고 하던데..
너무 추워서 아이스크림은 먹을 생각을 못하고 세느강변을 걸었습니다.
그런데 세느강을 따라 주택들이 있는 길을 가다가
너무나 뜻하지 않게 아래의 현판이 눈에 띄었습니다.
까미유 끌로델이
1899년부터 1913년까지 살았다는 현판이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짧은 생은 여기서 끝나고
길고 어두운 억류된 생활이 시작되었다는 내용입니다.
1913년이면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 해...
그리고 그 정신병원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냈으니...
그리고 1886년에 로댕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
"IL Y A TOUJOURS QUELQUE CHOSE
D' ABSENT QUI ME TOURMENTE"
(항상 나를 괴롭게 하는 비어 있는 무엇이 있다.)
까미유 끌로델이 살던 집을 세느 강변에서 만난 것...
이것은 예정에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던 일이라
가슴이 팡팡 뛸 정도로 감격하였습니다.
프랑스의 천재 여류 조각가, 까미유 끌로델(Camille Claudel: 1864-1943)
포스팅을 위해서 그녀의 비련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까미유 끌로델>을 다시 보았습니다.
부유한 집안에 태어난 까미유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그의 타고난 천재성을 인정한 아버지의 후원을 힘입어 조각을 공부하다가
20세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유명한 로댕(Auguste Rodin)의 제자로 발탁되어
로댕이 의뢰받고 조각하기 시작한 <지옥의 문> 등의 조각을 함께하는 조수로,
또는 그의 모델이 되기도 하면서
이미 동거하는 여인과 아들이 있는 44세의 로댕을 사랑하게 되고
로댕도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지요.
이 때부터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보다는
로댕의 제자로서, 로댕의 제자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한체,
그러나 그를 너무나 사랑하기에,
그 모든 것도 감수하면서 사랑의 단꿈을 꾸게 됩니다.
그러나 로댕과 끌로델...
비록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스승과 제자, 작가와 모델이라는 관계로
예술적인 경쟁심과 시기심이 배제될 수는 없는 관계였나 봅니다.
로댕을 사랑하면서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자신만의 작가적 가치를 갖기를 원하던 까미유...
더구나 여류 조각가로서 인정을 받기가 쉽지 않았던 시대에...
어느날 그녀는 임신한 것을 알게 되고
로댕이 가족을 떠나 자신을 택하기를 원했지만
로댕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명성과 체면때문에 가족을 버리지 못하고
까미유는 남들의 입방아에 오르는 여자가 되어 버립니다.
너무나 실망한 까미유는 실연의 상처를 안고 그를 떠나
물론 아기는 유산이 되고..
자신 만의 작품세계에 몰입하게 되는데...
한 때는 여류조각가로서의 자신의 입지가 굳어지는 것같았는데
로댕에 대한 사랑의 상처를 쉽게 잊을수가 없었기에
정신착란증세를 보이면서 서서히 망가져가지요.
1913년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온 그녀의 아버지가 죽자
남동생과 어머니는 그녀가 혼자서는 도저히 생활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그녀를 정신병원에 보내지요.
그녀는 그곳에서 30년의 세월을 보내고 1943년에 생을 마감합니다.
로댕은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간지 4년 후
1917년에 이미 죽었고...
그녀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카미유 끌로델>은
이렇게 그녀가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으로 영화를 끝내고
그녀의 30년 정신병원에서의 생활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정신병원에서의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녀는 어떻게 보내었을까요?
혹자는 그녀가 참으로 정신착란이었는가 아닌가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병원에서 가족들에게 지극히 정상적인 편지를 보내기도 했고
의사도 그녀를 가끔 데려가도 좋다는 연락을 가족들에게 했지만
그녀의 남동생은 해외에 주로 있었고
어머니는 너무 늙어서 그녀를 돌볼 힘이 없다고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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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댕 박물관을 가기위해 탄 버스를 잘못 내려서
헐레벌떡 종종걸음으로 찾아간 로댕 박물관...
그곳에 까미유 끌로델의 작품들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죽어서야 비로서 사랑하던 로댕과 함께 있는 것일까요?
그녀의 유명한 <성숙의 시대>라는 작품입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이 박물관에서
로댕의 작품들보다 더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왈츠>라는 작품입니다.
그녀의 <파도>라는 작품입니다.
사진으로만 보던 작품을 실제로 보니 참으로 감격적이었습니다.
그녀의 <수다쟁이들>이라는 작품입니다.
수다를 떤다기 보다는
뭔가 은밀한 이야기를 소근거리는 것같습니다.
입구를 지나 정원에 들어서면서 왼쪽으로
로댕의 <깔레의 시민들>이 있었습니다.
<깔레의 시민>...이 작품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100년 전쟁(1339-1453)의 와중에 프랑스의 북부 도시, 깔레는
영국의 집중 공격으로 멸망하기 직전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방어 자체도 힘들었지만 도시민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하여 노무나 힘든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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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깔레 시장의 간청으로 영국의 에드워드 3세가
"깔레가 6명의 책임자(누구든지)를 골라서 나에게 넘긴다면
도시 전체의 학살과 파괴만은 면하게 해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고 합니다.
이 때 깔레 최고의 부호였던 위스타슈 드 생 피에르가 자진하여 나섰고
다른 5명의 지원자들과 함께 죽음은 물론이고
에드워드가 항복의 조건으로 내 건 목에 밧줄을 두르고
맨 머리와 맨 발에 홑 옷 한 벌만 걸치고
성을 나서라는 굴욕을 기꺼이 감내 했다고 합니다.
이 숭고한 희생 정신, 혹은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그 후 역사에서 "시민 정신"의 모범이 되었고
그런 시민들을 배출한 깔레에게는 자긍심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그 사건으로부터 500 여년이 지난 19세기 말 깔레시는
그들의 영웅을 청동 조형물로 남기기로 결정하고
그 조형물의 제작을 로댕에게 의뢰해서 나온 작품이 <깔레의 시민>입니다.
전쟁의 역사가 이러한 훌륭한 작품을 탄생시킨 아이로니입니다.
그리고 까미유와 함께 작업한
<지옥의 문>이 있었고
빅토르 위고에 관한 포스팅에 올린 위고의 조각상이 있었습니다.
<지옥의 문>
그리고 건물 뒷쪽으로 넓은 정원에 드문드문
로댕의 조각품들이 있었습니다.
봄이나 여름에는 정원이 아주 아름다울 것같습니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이 작품을 만들었을까요?
자기를 떠난 사랑하던 끌로델일까요?
내부에 들어서니 참으로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
위에 올린 까미유의 작품들을 보다가
막상 로댕의 작품들은 많이 놓쳤습니다.
빅토르 위고상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그는 누구를 이렇게 골똘히 생각하고 있을까...
까미유 끌로델은 로댕과 결별 후 정신 이상자가 되어서
30년이나 정신병원에서 생을 보냈는데
로댕은 <칼레의 시민들>, <빅토르 위고>, <발자크> 같은 중요한 작품의 주문을 받고
조각가로서 대 성공을 거둡니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1905년 그의 비서로 활동했으며,
1908년에는 현재의 로댕 미술관인 비롱 호텔을 빌리도록 촉구하였고
이곳에서 1908년부터 죽을 때까지 살았고
1916년 작품과 전시물을 국가에 기증하고, 1917년에 세상을 떠났고
1919년부터 박물관이 되었다고 합니다.
Phantom of the Opera
"In our tears"
까미유 끌로델...천재 여류 조각가...
그녀의 일생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이 포스팅을 준비하는 동안 내내
마음 깊은 곳에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첫댓글 여기서 얘기하는 Camille의 동생은 Paul Claudel 이라는 중국 대사도 지낸 외교관이었습니다. 유명한 시인이기도 했구요
사람들이 흔히 카미유가 정신병이 생기자 가족들이 냉담했던 것처럼 얘기하는데 사실과 다릅니다
Paul (남동생)은 카미유를 아주 많이 사랑했고 누나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30년동안 정신병원비를 낸 사람도 이 동생이고요
누나에 대한 시도 많이 지었습니다.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첨에는 까미유의 동생인지 모르고 대학 때 그의 시를 좀 읽었었지요.
아, In our tears가 Phantom of the opera 에 나오는 곡이군요. 몰랐었습니다. 제가 아주 좋아하는 곡인데...감사합니다
김영신님, 정말 보물 같은 추가 정보 감사합니다. 그들의 조각품 보는 것만도 큰 소득이라 여기에 소개했었는데 이렇게 부연 설명까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귀국해서 연락하시면 팥죽 대접 크게 쏘겠씁니다.
여러분 턱을 손으로 고여 보십시오. 아마 손바닥이 하늘로 향할 것입니다. 그런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손바닥은 땅으로 향하고 있죠? 백인은 손목을 손바닥 쪽으로 굽히며 일을 하고 유색인은 손목을 손등 쪽으로 젖히며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글을 쓸 때 백인은 손바닥이 로댕조각과 반대로 하늘로 향하지만 손목을 굽히기 때문이며 유색인은 글을 쓸 때 손목이 땅을 항하지만 손목이 젖혀지기 때문입니다.
고릴라는 손바닥을 아래로 향하고 오랑우탄은 손바닥을 윗쪽으로 향하여 손으로 턱을 받친다는 말씀이지요!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슴박사님은 예술품도 그냥 무심코 보시지 않는군요!ㅎㅎㅎㅎ
하하 개 눈에 X만 보이지요. 이회장님은 고릴라 오랑우탄에 대해서는 확실한 수제자십니다.
야비한 로댕과 불쌍한 카미유의 일생과 유명한 작품들 감상 잘 했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박효근 박사님은 유전공학 뿐만이 아니고 이렇게 다양한 취미를 가지고 계신줄은 몰랐습니다.ㅎㅎㅎㅎㅎ
아 이전구 회장님. 저야 이회장님의 다양성에 비하면 새발의 피이지요. 제 본래 전공은 전통적인 식물육종학입니다. 최근에 유전공학이 급속히 발전하여 이를 어떻게 전통육종에 접목시킬 수 있나를 걱정하고 있지요. 현역에서 물러난지 벌써 7년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 전문성은 아주 낮지만 관심은 많지요. 요새 특히 여러분 덕분에 공부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민 초기에 (1975) 워싱톤 Smithsonian 에서 15 년 걸려 준비 햇다는 Rodin 전시회 에서 180 개의 정교한 부조로 된 Gate of Hell 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았읍니다. wife (홍대 조각과, VCU 대학원 회화전공) 말 에 의하면 부조가 입상보다 만들기 어렵다고 하더군요 파리에서 3일 묵은적이 있는데 Rodin 전시관을 못본것 후회되는군요 많은 예술가들이 현실과 이상의 괴리 속에서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한다는것 퍽 가슴아픈 일이라 생각 합니다. 좋은 작품과 음악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