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독서 : 바룩 5,1-9
제2독서 : 필리 1,4-6.8-11
복 음 : 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
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2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
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3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4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
게 내어라.
5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6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루카 3,4)
말씀지기
티베리우스, 빌라도, 헤로데, 필리포스, 리사니아스, 한나스, 그리고 카야파.
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속세와 종교계를 다스렸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이끄는 막강한 로마는 유다 지방을 지배하고 있었고,
빌라도 총독은 이곳에서 로마의 지배력을 행사했습니다.
영주 헤로데와 필리포스와 리사니아스는 황제의 은전을 입고
그 나라의 여러 지방을 통치했습니다.
카야파는 대사제로 다스리고 있었으며,
한나스 역시 은퇴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큰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그때 광야에서 목소리가, 모든 권세와 권력 위에 계시는 분의 출현을 알리는
하나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단 한 사람의 목소리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인 예수님의 출현을 알리기 위해
수많은 천사를 보내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을 보내 그분의 기쁨을 당당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분께는 권력의 핵심부가 아니라 황량한 광야에 있는 하나의 목소리로 충분했습니다.
그리고 그 목소리를 향해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러한 것이 바로 하느님의 위력이 담긴 말씀,
곧 예언자 요한과 위대하신 그 계승자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들의 목소리로써 선포된 어리석음은 인간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그 나약함은 우리의 힘을 뛰어넘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느님의 음성에는 우리 삶 속의 다른 목소리들을 모두 잠재우는 힘이 있습니다.
마귀가 우리를 비난하는 말을 속삭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방종과 자기 연민에 빠져 들라고
나지막히 계속 말을 걸 수도 있습니다.
세상 역시 우리에게 쉴 새 없이 “지혜”와 고뇌
그리고 차선책을 권하는 제안을 쏟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음성은 이 모두를 잠재울 수 있습니다.
그 음성이 오늘 당신에게 무슨 말씀을 들려주고 있습니까?
귀 기울여 들으십시오. 그 말씀에 주목하여 마음에 새기십시오.
당신이 그 음성을 들을 때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그분 곁으로
조금 더 끌어당기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시오.
그분의 약속은 당신에게 더욱 현실적이 되고, 그분의 힘은 더욱 믿음직스럽게 됩니다.
그 음성을 향하십시오.
거기에 담긴 사랑과 격려와 희망의 말씀을 받아들이십시오.
부드럽게 이끄는 그 음성을 좇으십시오.
조용하고 여린 이 음성에는 다른 모든 것을 잠재우는 힘이 담겨 있습니다!
“아버지, 저는 오늘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제 귀를 열어 주시고,
당신을 품어 안을 수 있도록 제 가슴을 열어 주십시오.”
“Father, I want to hear your voice thday.
Open my ears, so that I can hear you;
open my heart, so that I can embrace you."
조명연 마태오 신부
몇 년 전, 네덜란드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의 공항 화장실에서 깜짝 놀랄만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글쎄 남자 소변기 안에 파리 한 마리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웬 파리지?’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곧바로 진짜 파리가 아니라
실제 파리 크기와 같은 그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지요.
저의 정확한 조준(?)에도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형제님들은 아시겠지만 남자 화장실에 가면
‘남자 흘리지 말아야 할 것은 눈물만은 아닙니다.’,
‘소변을 흘리지 마세요.’ 등의 문구를 보신 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닥에 소변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네덜란드 공항에서는 이처럼 변기에 파리 그림을 붙인 결과
주변에 흘린 소변의 양을 80%나 줄일 수 있었답니다.
왜냐하면 변기 안에 그려진 파리를 소변으로 맞추려고
변기 앞으로 바싹 다가섰기 때문입니다.
사소하다고 말할 수 있는 아이디어 하나가 이렇게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는 생각 하나가 사람들의 습관을 바꾸기도 하고,
나아가서는 문화를 그리고 사회 전체를 바꿀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나의 생각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 자신을 그다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느님의 창조물로서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또한 하느님으로부터 소중한 가치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자신의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기에
쉽게 포기하고 좌절 속에 빠집니다.
사실 나의 참된 가치는 지금의 상황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대처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양발이 짝짝이라서 마라토너로는 적합하지 않다는 판정을 받았던 이봉주 선수를 아십니까?
그는 다른 발 크기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발 크기요?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마라톤을 포기하고 싶었을지도 몰라요.”
정말로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할 수 없다는 이유에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은 소중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이 너무나 많음에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늘 대림 제2주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세례자 요한의 활동에 대해 전해줍니다.
그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면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지요.
그가 이렇게 큰일에 대해 적극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 자신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준비하는 사명이 있음을 잘 알고 있었고,
스스로가 할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주님을 맞이하고 세상에 하느님의 구원을 알리는 사명이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비록 그 옛날처럼 광야에 나가 세례를 받으라고, 회개하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지만,
주님의 기쁜 소식을 나의 삶을 통해 증거해야 하는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벌써 2개의 대림초에 불이 켜졌습니다.
4개의 대림초에 불이 다 켜질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또 이렇게 성탄을 맞이하는구나.’라는 후회를 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대림시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외치는 이의 소리
김지훈 신부
"싱싱한 생선이 왔어요. 생선이. 공기 좋고 물 좋은 남해바다에서 방금 올라온… ”
“집안에 있는 고장난 가전제품이나 컴퓨터 가져만 오시면 수리해드립니다~”
“XXX 무도회장~ 인기 가수 아무개 출연에 서비스는 확실하게~~~”
우리 본당이 자리 잡고 있는 상가 주변에 장터가 서는 주말이면
더욱 더 요란하게 트럭에까지 확성기를 실고서는 물건을 사라고,
와서 놀라고(?) 끝도 없이 외쳐대는 온갖 장사꾼들의 소리이다.
첨엔 그 소리가 한없이 시끄럽고 짜증나게 들렸지만
이젠 익숙해져서인지 오히려 그로인해 치열하리만치
생생한 삶의 현장의 맛도 새삼 느낄 수 있는듯하여 정겹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외침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적어도 거기에서는 외치고 있는 사람
자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그 외치는 소리가 무엇(내용)을 말하고 있는지가 아닐까.
정작 외쳐야 할 소리는 물건(생선)이고, 상품(수리)이며,
장소(무도회장)인 것이지, 외치고 있는 그 자신의 소개는 아닐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오시기에 앞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장본인 이었던
세례자 요한에게도 그러하지 않았을까?
사람들은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를 궁금해 할 것이 아니라, 그분이 외친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써 보여라.”의
외침소리에 더 귀를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나는 주일미사 파견강복 직전에 빠짐없이 주보를 통한 공지를 하는 편이다.
이 시간이 꼭 필요한지는 딱히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지만,
다소 시간이 걸리는 관계로 지루해하는 몇 몇 교우분들을 뒤로해 가면서까지
본당신부로서 중요하다고 판단하는 부분만큼은 직접 읽어가면서
거기에 있어 공감대 형성과 관심, 협조 등을 바라곤 한다.
그런데 그것이 언젠가부터 ‘무엇’을 공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부인 ‘나’를 외치는 소리가 되어버리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외치고 있으니 그‘무엇’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식의
억지추념이 자리를 잡는 시간이 되어버린 것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신부인 ‘내’가 아니라 내가 외치는 소리의 내용일 것이며
그 소리에 담긴 내용이 과연 어떤 의미를 전해 주는지 일텐데.
어쩌다가 서점에 들려 책 한권을 고를 때도 그 내용을 보기 전에
‘누가’쓴 책인지를 먼저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
책에 담긴 메시지보다도 글쓴이의 출신지, 출신학교, 현재 활동 등을 더 유심히 보곤 한다.
하지만 그래가지고서는 정말 나에게 필요한 지식과 정보는커녕
그 내용에 담긴 참 의미조차도 발견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결국, 외치고 있는 소리의 장본인이 ‘누구’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소리’를 외치고 있느냐가 더 중요하다.
복음을 받아들여 삶의 참된 양식으로 삼고
또 그것을 매순간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은 이점을 간과하지 말자.
우리 주님께서는 기쁜 소식을 전하시기에 앞서 기쁜 소식 그 자체이셨다는 사실을.
십자가상에서 죽기까지 그분께서 외치시던 복음이 바로 그분 자신이었다는 것을.
‘회개’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
정찬호
오늘은 대림 제2주일입니다.
대림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육화사건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세상 종말 때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시기입니다.
이런 이중적 성격 때문에 교회는 대림 시기를 ‘간절하고 감미로운 희망의 시기’라 부릅니다.
대림 제2주일 성경 말씀은 구세주의 오심에 앞서 우리 자신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메타노이아)는 ‘마음의 변화’, 즉 자신이 범한 과오와 죄를 깊이 성찰하고
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진심 어린 결심을 뜻합니다.
그런 점에서 회개는 ‘하느님을 향한 방향 전환의 기쁨’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회개’는 ‘후회’와 다릅니다.
후회는 그 시선이 과거의 상태에 머물러 있지만,
회개는 미래를 향한 다짐에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후회는 자신을 중심으로 두지만, 회개는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우고자 합니다.
후회는 쓰디쓴 죄의 결과를 맛보게 하지만, 회개는 죄로부터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후회와 회개의 차이를 우리는 유다와 베드로를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 선고를 받으신 것을 보고 자신이 했던 일을 후회하지만,
결국 스스로 목을 매달아 죽습니다.
유다의 시선은 철저히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매어 있었습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회심의 눈물을 흘리고,
종국에는 그리스도를 증거 하다가 순교합니다.
베드로의 시선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렀습니다.
결국 후회와 회개의 차이는 그 중심이 어디 있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후회는 죄의 결과에 머물지만,
회개는 하느님의 자비로움에서 다시 일어날 힘을 얻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