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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그물에 숨결을 불어넣는 자의 생명의식 |
<서평>문도진 시인의 '소리가게' |
1 '누리' 라는 말에는 우리말 고유의 예스러움도 있지만, 뉘앙스 상 그 지극히 누려야 할 넓고 한량없는 것들을 그러안는 품 같은 게 느껴진다. 그 누리를 그냥 요즘말로 '세상(世上)' 이라고 별칭하는 것은 어딘지 무람없다. 같은 뜻이라도, 세상이란 말이 평면적이라면 누리라는 말은 입체적이다. 같은 오지랖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비극적 문명의 징후들로 악덕과 기괴함과 무례가 창궐하듯 갖은 용렬한 이미지들과 신드롬으로 확대재생산하는 백화(百花) 만연체(蔓衍體)라면, 누리는 퇴락했으나 심지가 깊은 문화의 그늘 속에서 삭혀낸 마음의 고졸함과 드넓고 웅숭깊은 자연의 품성으로 우려낸 오롯한 다솜에의 간결체(簡潔體)가 있다. 그러나 이즈음에 와서 그 두 말을 대척(對擲)관계로 마주 세우려는 뜻은 하등에 없다. 세상이든 누리든 그 말 자체에는 이미 포함하거나 배제하려는 어떤 선험적인 전제도 깔려있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는 세상이나 누리라는 말로부터 지극히 멀리해온 자신들을 확인하며, 소시민적인 삶의 양태 그 생활방식에 더 방점을 두고 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사람들 대화 속에서는 '세상살이' 라는 말보다 '인생살이' 혹은 '살림살이' 라는 말이 더 회자(膾炙)된지 오래인 듯싶다. 사실 별 차이가 없어 보이는 듯하지만 세기말을 넘어 새로운 세기 초를 사는 사람들의 삶의 시야와 폭, 품성이 세상이 아닌 개별적 자아의 앞가림에 더 치중돼 있음을 발견할 때가 많다. '글로벌(global)'이나 지구촌 같은 말의 허울은 단순히 정치적인 편의를 위해 급조된 말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구촌 사회 전반의 기반시설은 상호교류와 소통이라는 문제를 획기적으로 개선시켰다. 속도의 혁명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그런데도 21세기는 전(前)세기(世紀)의 전쟁과 국가적 국지적 종교적 이념적 민족적 불협화음과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채 새로운 세기의 창조적 화두조차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거창한 공안(公案)을 가지고 접근하던 시대는 어쩌면 갔는지 모른다. 원론적인 말이지만, 이 지구 땅별은, 누리라는 말의 위의(威儀)를 지구촌 모두가 개별적으로 향유하고 실천하는 감각과 사유가 결합된 흥미로운 아이템이 종요롭다. 그러기에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공유(共有)되고 연대(連帶)할 수 있는 인간의 품성과 인식의 결은 아직 시(詩)의 대지(大地)에 원형질처럼 남아있다고 믿는다. 어쩌면 이 말의 공소함을 나는 다시 수정하여, 그 누리의 마음을 믿어야 한다, 혹은 그 누리의 마음을 믿을 수 있게 해야 한다, 라는 현재진행형 혹은 미래형 속에 담아둬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도 깎이고 패이며 깨지고 썩기 마련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와 믿음 속에 우리는 살아간다. 그것은 어디까지이고, 어떻게 조화롭게 연대해 나갈 것인가. 그것이 질박한 문도진 시의 윤리의식과 연결될 수 있을까. 우리는 회의함으로써 발전한다. 한여름 잎 그늘 밑의 달팽이 한 마리의 움직임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달팽이가 죽으면 끝내 사람도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전체의 참상(慘狀)을 형상의 참혹함 그 자체에서 원인을 찾는 것은 이미지의 그늘이자 우문(愚問)의 극치다. 그런데 우리는 그 참혹함의 잉걸불만 끄기에도 바쁘다. 대답이 아닌 것 같지만, 그 화염의 아비규환 쪽으로 마음의 먹구름을 몰아가기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모두 그 현장의 마을로 비로 내려야 한다. 모두 마음을 식혀야 한다. 그 아름다운 반대쪽에 우리들은 지구촌 최후의 분단국가의 화약고이자, 동시에 시의 채마밭이 많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한반도의 남쪽에 살고 있다. 2 문도진의 시는 범박하기 그지없다. 수사(修辭)나 분식(粉飾)으로부터 애시 당초 멀다. 그리하여 나는 오히려 그의 시의 범박함이 어쩌면 이제껏 시가 본의 아니게 멀리해 왔던 담백함과 진솔(眞率)함의 한 샛길을 오롯이 열어가는 게 아닌가 기웃거리게 한다. 물론 그의 시 구절에서 보이는 상투적인 언술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그의 시에서 보려는 일반적인 품평의 잣대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의 범박한 시풍(詩風)에서 '누리'를 사는 사람의 시간 속에 드리워져있는 풍물과 풍격(風格)을 새삼 음미할 수 있지 않을까 둘러보게 된다. 그는 단순히 인터넷을 순우리말로 옮긴 '누리그물'에 대해 썼던 것만은 아니다. 내 생각에는, 문도진은 아직도 자신 안에 깃든 생명감각의 누리그물을 자신의 삶 저변으로 좽이그물처럼 던지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의 그런 누리그물을 던지는 완력은 아직 약여(躍如)하고 정직하여 그의 시적 재질을 드러낸다기 보다는 그의 품성에 시가 건져 올려지는 형국에 오히려 더 가깝다. 꺼이 꺼이 새 쫓던 깡통 소리 타다닥 타다닥 콩 타작 하던 소리 배추 허리 동이던 노인네 허리 펴던 소리 찬바람 피해 어디로 갈꼬 두리번거리던 비둘기 모두가 떠난 자리 하이얀 솜이불 한자락만 뒤척이고 있다 -<12월, 어느 밭의 풍경> 전문 시인은 다른 여러 오감(五感) 중에 유독 소리에 민감하다. 어쩌면 풍경은 그 자체로 시각(視覺)의 차원이고 대상이지만, 화자는 그 풍경의 내밀한 속내를 청각의 차원에서 되새김질하고 있다. 소리가 소리에 반응하고 갈마들며 그것을 다시 소멸과 잔존(殘存)의 현실로 되돌려놓는다. 애초 처음의 소리는 모두 그 주인이 있고, 그 주인은 소리의 주체로써 당연시되지만, 그 소리가 주체로부터 발성되어 떠나는 순간, 소리는 그 주체의 성격으로부터 떠난다. 소리의 빛깔과 성격과 형태는 이제 그걸 발생시킨 주체로부터 떠나 소리 자체의 자유로운 파동(波動)을 즐기기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자유로운 소리의 파동이 쓸쓸하다. 이 쓸쓸함의 근원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12월의 밭이라는 소멸의 징후가 농후한 시공간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지만, 그에 앞서 그런 누리의 한 변방에 놓인 빈 밭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삶의 한 진면목으로 인식하는 화자의 눈길에서 기인하는 것일 것이다. '배추 허리 동이던/노인네 허리 펴던 소리' 는 귀에 들리는 소리일 수도 있고, 상상과 관심의 짐직이 일으킨 들리지 않는 소리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소리의 진위여부는 이 시의 맥락이 아니다. 그것은 사실여부와 관계 없는 연민과 연대의 눈길에서 얻어온 풍경의 귓바퀴에 걸린 소리일 것이다. 하여, 현상계(現像界)의 소리와 심층(心層)의 소리가 서로 넘나들이하는 지경을 이 소박하고 쓸쓸한 풍경은 하나로 제시한다. 그것은 사람이 아닌 다른 숨탄것인 비둘기의 '두리번거리던' 동작조차 소리의 뉘앙스로 전환시키는 묘미를 자아낸다. 그런데 그 전환의 묘미는, '두리번거리다' 라는 동사(動辭)가 의태(擬態)의 감각이지 의성(擬聲)의 감각은 아니라는데 있다. 무엇보다 화자는 '두리번거리는 비둘기' 를 통해 음성화된 모든 타자(他者)들에 대한 연민에 마음의 귀를 모으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계절의 순환 같은 자연의 이법(理法) 속에 놓인 숨탄것들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생명의 연대에 기초한다. 그러기에, 파열이나 마찰을 통한 소리의 발성이 아닌 움직임 속에서도 그 고유의 소리를 들여다보는 공감각적 시선이 배어있다. 이건 사유나 감각 이전의 감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따스해지려고 마음먹기 이전에 따스해져 있는 상태를 가졌다는 것, 이건 선천성(先天性)이면서 후천적인 개벽(開闢)의 마음자리일 수밖에 없다. 이럴 때 시는 문장 이전에 마음이 된다. 마음 이전에 마음이 있던 경로를 되묻듯이 하늘에 돌릴 수밖에 없다. 우리의 모든 개별적인 자아가 지닌 오음(吾音/悟陰)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내 것이었다고 마음 먹었지만 그건 이미 내가 마음 먹은 행위를 선점하거나 선택할 수 없었던 마음이었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이렇게 갈마들었는가, 되짚어보면 그때 가벼운 탄식과 웃음과 슬픔이 또한 갈마들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니 다시 되돌아보면 우리는 모두 '두리번거리는 비둘기' 처럼 어디로 갈까, 이 세기의 궁벽한 하늘을 다시 올려다 볼 수밖에 없다. 지상의 길은 너무 번다하여 오히려 뻔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것. 이때 우리는 우리의 좁은 지구촌 문명의 골목길에서 다시 하늘을 본다. 답장은 그럴 때 놀처럼 깔린다. 해답이 아닌 징후나 예감들이 하루치를 장식한 답장으로 말이다. 그건 불가해한 명정(銘旌)처럼 하루라는 시간의 관(棺)을 덮고 어둠속으로 지워져갈 뿐이다. 하지만 문도진은, 그걸 아주 극명하게 드러내는 시편을 보여준다. 자연과 씨름하여-아니 자연과 씨름할 수만 있다면 그건 너무나 즐겁고 고마운 일이다- 일궈낸 소기의 유기물들 앞에 입을 통하지 않는 말을 얻는다. 거름을 뿌렸다 씨를 뿌렸다 땀을 뿌렸다 연인에게 편지를 쓰듯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서성이던 발자국도 동봉했다 편지요, 하는 소리에 창 열고 내다보니 넝쿨과 어우러진 호박덩이가 답장 되어 돌아왔다 -<답장> 전문 연애만큼, 아니 연애시절만큼 상대에 대한 지극한 마음의 순도가 높을 때도 있을까. 그것은 '거름을 뿌리' 고 '씨를 뿌리' 며 '땀을 뿌리' 는 기본적인 성실함 외에 아니나 잘못될까 상대 주변을 '서성이던 발자국'을 길 위에 꽃처럼 피워내는 시절이 아닐까. 결국 다양한 형태와 여러 대상 간의 다솜은 관심과 접촉의 방식으로 생존과 보호 번식, 또 다른 생명의 잉여로 순환되게 되어있다. 이 말은 곧 죽음에 가장 선량하게 맞서는 인간 본연의, 아니 생명 본연의 고갱이인 다솜의 본능으로 대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솜은 어느 한 편만을 죽도록 편드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생명의 보편성에 지극히 편드는 죽음보다 깊은 몰입인 것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그러기에 아직도 죽지 않았다. 그것은 고유명사이면서 보통명사로서의 강신무(降神巫)이다. 그건 고정될 수 없는 흐름이며, 끝없이 상대와 자신 안에 순환되도록 갈무리하는 청춘의 신기(神氣)이자 보편의 혈통, 그 피의 숙명인 것이다. 다솜의 일시적인 속성을 과언(誇言)에 풀었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늙어서 아이를 가질 수는 없는 법. 물론 늙어서, 늦둥이를 해맑게 품고 잉태할 수도 있으나, 그것은 드물어서 오히려 해괴한 노역이 따르는 일일 수도 있다. 그러니 다솜, 그 강신무의 기운이 등등할 때 일어나는 남녀상열지사는 더더욱 자연스러운 이법이 아닐 수 없겠다는 말. 그 답장을 사람만이 아닌 모든 사물에게로 확장하여 받아들일 때, 무더운 땀과 쓰거운 고통의 일면을 새로운 노동에의 기운으로 조리차한다 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어느 날 '창 열고 내다보니' 이법(理法)이라는 님이 '호박덩이'로 ' 답장되어' 화자 앞에 현전(現前)하는 기꺼움인 것이다. 그전에 화자는 자연의 모든 상열지사(相悅之事(詞)) 앞에 땀 흘리며 북을 주고 거름과 기름을 보태는 매개자(媒介者)의 수고스러움을 다하였다. 이러한 자연의 이법과 이심전심(以心傳心)의 이마받이가 소원해지고 적조(積阻)해지는 나날과 터가 늘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난감한 일이다. 자연은 그 시공간에 편재해 있는 삼라만상에게 분별심이 아닌 '답장 되어/돌아왔' 어야 할 보리심(菩提心), 그 가나안의 풍성함의 이미지를 육화(肉化)시킨다. 그런데 이런 것들이 지구촌 도처에서 와해되거나 깨져가는 징후를 접했을 때, 그 요원해진 '답장' 은 몌별(袂別)로 우리의 가슴을 궁핍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이법(理法)의 결여(缺如)이자, 물질의 결핍이며, 생기(生氣)의 부재로 이어진다. 숨탄것들 모두는 비온 뒤 땅 위에 넘쳐나는 벌물이라도 엎드려 받아먹고 생기(生氣)를 얻어야 한다. 분단 민족의 해원(解寃) 또한 서로를 찾는 오래된 목소리를 서로 생짜로 듣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제는 그리운 서로를 발견한 소리가 도처에서 일어나, 한의 씻김굿 맏잡이 통성으로 모두를 적셔야 한다. 그건 모두가 스러진 뒤가 아닌 모두가 스러지지 않아야 할 작금의 통성이어야 한다. 빗소리만 들어도 시들어 쪼그라들었던 고춧잎과 호박잎은 기지개를 활짝 켠다. 이런 생기의 근원을 방해하는 헤어짐의 고착화를 어서 빨리 소진시키고, 숨탄것들이 자연스레 어울려 살게 기존의 바탕을 개부심하듯 다시 열어야 한다. 그러나 역사적 사회적 큰 틀거지 안에 갇힌 우리들은 그것을 한(恨)의 응어리로 스스로를 도축하듯 살아왔다. 원론적인 해법은 있으나, 원론을 벗어난 우리 민족 내부의 서로 부대끼는 이데올로기와 고착화된 권력의 편향, 분단문화의 이질성과 경제적 융합의 난맥상 등으로 시간은 격절의 두 땅을 다른 빛깔로 흐르고 흘러왔다. 애초에 원하지 않던 이들에게 일이 닥친 것이다. 그 한 세월은 무겁고 또 힘겹게 흘러가서, 그 땅의 참상은 우리의 어린 세대들에게 이어져버렸다. 시대와 세대가 바뀌어도 이런 문제는 저류(底流)할뿐 결국 미체험 세대들에게도 또 다른 형태의 고통으로 와전(訛傳)되고 있다. 갈라진 땅의 처절한 비통 속에 이 눈 굴려 저 눈 살펴 진창 속의 국수 꼬랭이 초점 맞춰 집어 든 손 이곳이 낙원이라 노동자의 천국이라 부질없는 허세들 겨울 찬바람에 거동할 기력 없어 잃어가는 동공의 초점을 잡으려 유랑하는 꽃제비여 *꽃제비:북한 주민중에 기근에 시달려 부모로부터 식량을 제공받지 못해 길거리에서 식량을 구걸하는 어린이 -<꽃제비> 부분 내 스스로, '그 땅' 이라는 이격(離隔)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지시대명사를 쓴다는 사실 자체도 단순한 일이 아니다. 거기엔 분단 반세기가 넘는 반목의 요철과 굴헝이 배어있다. 그런 분단의 시대가 낳은 참상은, '꽃제비' 라는 그지없이 예쁜 말조차 그 원래의 뜻마저 망각시키고 은어나 비속어로 전락시켰다. 어찌 저런 곱고 아리따운 말에 굶주림과 기아와 유랑의 참상을 숨겼단 말인가. 그것을 바라보는 화자의 시선은, '국수 꼬랭이' 하나 주워 먹으려고 헤매는 꽃제비인 어린 동포들의 '잃어가는 동공의 초점을/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안타까움이 배어있다. 그건 그 어떤 이데올로기로 치유할 수 없는 근원적인 동정심, 본원적인 연민에서 출발한다. 어느 한쪽을 낮춰 보며 마음을 베푸는 것이, 흔히 동정이고 연민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그런 분별을 넘어서는 것이 연민이고 동정이다. 거기에 어떤 계급이나 계층은 없다. 그저 똑같은 사람이 처해지지 말아야 할 고통의 처지에 대한 구휼(救恤)의 알심이 있을 따름이다. 그것은 그대로 지구라는 땅별이 한쪽 병들고 야위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치유와 복원에 대한 생명친화적 접근일 따름이다. 살고 있는 것을, 살아야 하는 것을, 계속 살만큼 살아있게 하려는, 숨탄것들에 대한 넓고 융숭한 마음이 화자의 연민이고 동정이다. 동정이나 연민 같은 사랑의 여줄가리가 없다면, 그래 그런 마음의 발로가 없다면 어떤 물질(物質)도 일어날 수 없고 누리의 가난한 이들에게 옮아갈 수 없다. 이런 마음의 공동체적 발로와 발현, 거기서부터 추렴된 물질의 수습과 이동이야말로 민족의 오랜 해원(解寃)의 단초가 될 것이다. 시는 그런 해원의 실마리를 '잡으려' 하고, 흐려지고 풀려가는 어린 동포의 '동공의 초점을/잡으려' 마음을 쓰고 마음을 넓힌다. 어디로 가느냐 가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어디로 가고 있다고 하겠습니까 당신의 할아버지가 태어났고 아버지가 살고 있는 곳 이곳이 조국이거늘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아들을 어디로 보내려 하는가요 ...(중략)... 힘에 겹게 목숨을 부지하는 부초들도 아버지의 땅에서 몸을 비비고 이름 모를 새들도 때 되면 이 땅을 찾아 돌아오건만 왜 이 땅을 떠나려 하는가요 비바람 불고 천둥 친다고 해도 떠나지 말고 우리 함께 가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부분 문도진은 새삼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그의 물음은 원초적이면서 현실적이다. 이 시의 표면적인 의구심은 한국이라는 모국을 회피하는 이 땅의 극히 소수인들의 이기심과 무정견(無定見)에 대한 질타이지만, 그 표층의 물음 아래에는 보다 근원적인 물음이 스며있다. 그의 시편 전반에서 보여지는 바, 생명에 대한 자애(慈愛)와 연민의 포기, 자연의 이법(理法)을 훼절(毁絶)시키는 모든 삿된 짓거리에 대한 인간적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이 물음에서 우리는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 아마 죽을 때까지 이건 가장 낯익으면서도 낯선 화두로 우리들을 새롭게 일깨우고 일으켜 세우는 문장이 될 것이다. '비바람 불고/천둥 친다고 해도/떠나지' 않고 우리 존재의 울타리를 통쾌히 쓰러뜨리며 한밤중에도 때론 통곡처럼 내 가슴을 칠 것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로 가나요. 이 시적 물음의 죽비는 곧 어디로부터 오는가. 문도진이 마음 한켠에 세워둔 이런 청량하고 늠름한 죽비(竹篦)는 그의 인간적인 소박함이나 정직함에서 우러나온다 여겨진다. 그는 어떤 형태로든 배운 자이지만, 그의 시적 메시지는 그의 제도권적인 배움의 발로가 아니라 그가 인간적인 품성으로 숙성시켜낸 생명체적 앎이자 삶의 연륜에서 길어올린 생활의 득의(得意)와 감각이라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지식적인 도량에 상관없이, 생명에 대한 안타까운 연민을 다양한 감정의 뉘앙스로 분화(分化)시키는 시적 멘트를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이런 생명의 아우라를 다양한 시적 층위(層位)에서 여러 소재를 통해 드러내고 있는데, 그것이 결코 수사적인 차원에서 교묘하고 겉치레의 화장술로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왜냐면, 문도진은 적어도 말을 가지고 분식(粉飾)하여 자신을 비롯한 상대적인 관계의 사물이나 풍경을 왜곡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에 대한 절대긍정과 연민의 세월이 그가 이제껏 세상사를 헤쳐오며 견지해온 마음의 처세경(處世經)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긍정적 눈길은 첨단만을 구가하는 작금에도 사라졌거나 사라져가는 유무형(有無形)의 것들에게 선량한 추파를 던진다. 그의 수집벽은 인간적인 낭만과 향수, 삶의 습도로서의 눈물과 그 연대를 가능케 하는 그리움을 추수하는 순정한 것들에의 열정인 것이다. 사라져 가는 뱃고동 소리 기관차가 내뿜는 치이익 소리 이런 소리 파시는가요 개구리 풀벌레 맹꽁이 재잘거리는 소리 한여름 무더위 날려 버리려 시끌벅적하게 울어 대는 매미 소리 이런 소리 파시는가요 봄을 부르는 뻐꾸기 소리 졸졸졸 흐르는 개여울 소리 이런 소리 파시는가요 아스라이 멀어진 기억을 더듬어도 들릴 듯 말 듯한 그런 소리를 파시는가요 이런 소리 저런 소리 저런 소리 이런 소리 이 가게에서는 파시는가요 아니 사랑하는 이의 마음 깊은 곳 사랑한다 했던 그 소리 당신을 사랑하였다고 고백했던 그 소리 파시는가요 아니 어디에서 그런 소리 살 수 있는 가요 -<소리 가게> 전문 문도진에게 있어 낭만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 아닐까 싶은데, 그 현재진행형이 한때의 유행적인 낭만이나 재래적인 추억의 소모품이 아닐 가능성은 높다. 그의 낭만성은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자연친화력이 농후한데 그 낭만의 현실적인 기초를 '사랑하는 이의 마음 깊은 곳/사랑한다 했던 그 소리'에 귀를 아니 마음을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세상을 향해서는 은근짜로 '당신을 사랑하였다고 고백했던/그 소리를 파시는가요' 라고 자신에겐 듯 세상에겐 듯 겹소리로 묻고 있는 듯하다. 그러기에 그의 낭만은 결코 현실과 유리된 한때의 유희이거나 청춘의 소모적 연애풍조만은 아닌 까닭이다. 그는 앞서 말했듯이, 세상에 번다하게 얽히고설킨 소음들로부터 진정한 '소리'를 얻어내고자 한다. 그 소리에 대한 진정한 그리움은 어쩌면 앎과 행동이 하나인 '말(씀)' 에 대한 동경도 거느리고 있는 듯 보인다. 하여 진정을 얻어내야만 그것이 우리를 생명으로 살아있게 하고 그 진정의 파동을 통해 생명감을 충전하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다, 문도진은 소박하게 진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그런 가식 없는 시적 발언, 아니 그의 생명체로서의 투박하나 가식 없는 시어, 아니 그의 말대로라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그의 '소리'에 아무런 문학적 우열이나 품평 없이 동감할 수가 있다. 3 살아있는 생명만이 살아있는 소리의 생명을 낳는다. 이 투박하고 번연한 명제 앞에서 문도진은 아무런 조건을 달지 않는다. 원래 그러하였던 자연 앞에서 우리가 매다는 온갖 조건들이란 너무 용렬하기 그지없고 이악스럽다. 소리는 말하지 않고, 스미듯 일깨운다. 그것이 사람의 말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어떤 꾸미지 않는 '소리' 앞에 마음과 귀를 모으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닌가 싶다. 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문도진의 시는 요즘 시들의 경향이나 먹물이 든 소위 엘리트 시인 군상들의 시풍과는 상당히 거리에 있다. 어쩌면 지극히 재래적이며 수사적 혹은 문법적 참신성에서 일정한 한계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에게 시의 미학적 체계를 발견하거나 새로움 문학적 전위를 읽어내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문도진의 시가 가지는 진정한 힘은 그의 범박한 진솔함과 생명에 대한 진정성에 두어야 한다고 본다. 시는 결국,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 느낌의 공유는 진솔함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겨진다. 부연하자면, 삿됨이 없는[思無邪] 마음의 눈길로 늠연히 세상사와 주변을 바라보는 그의 눈길은 지극한 사랑의 평범함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따스하고 때로 아프게 그가 통섭하고 통섭해야 할 누리에 벌려있는 모든 생명들, 그 숨탄것들에 가닿는 정직한 눈길, 그것은 그가 마음의 씨줄과 날줄로 엮은 생기(生氣)의 누리그물일 터, 거기에 그는 그의 반평생 넘게 숨결을 불어넣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시집은 늦되나 오히려 더 알곡의 알심으로 투박하나 진정성의 맛으로 먹음직스럽다. 나에겐 또 다른 일용할 양식이 있다 그것은 누구나 일용하는 양식이 아니다 그 양식으로 인해 나는 호흡을 연장하여 간다 매일 아침마다 식후에 그를 만난 지 벌써 햇수로 4년째다 친숙해지고 지겹기도 하여 이제는 그만 만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지만 그는 나와 이별을 하려 하지 않는다 헤어질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있기에 나는 감사한다 그가 아니었다면 낮은 마음을 가질 수 없었기에 내 몸속 깊숙이 자리한 그를 사랑할 순 없다 어쩌면 그와 이별하는 날 서운함에 마음 아파하며 웃음 지을지 모를 일이다 그가 있기에 내가 있고 그는 나로 하여금 낮아지라고 더욱 낮아지라고 -<약(藥)> 전문 그는 때로 아프고, 그 아픔의 소리조차 겸허히 받아들이는 인내심으로 다시 생명의 활기를 일깨우는 소리를 불러낼 것이다. 그 소리가 바로, 그의 시의 든든하고 따스한 전도(前途)가 되어줄 것이다. 그의 아픔은 그와 주변을 일깨우는 생명의 약(藥)으로, 문도진이라는 시적 존재를 닦아세우는 처방으로, 그는 모든 숨탄것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살리는 청음(淸音)의 기맥(氣脈)을 짚어나갈 것이다. 잡초라는 아주 작은 누리그물에 이슬 맺히는 소리에도 그는 이제 소박한 득음(得音)의 미소를 가질 수 있으리라. 그는 아프므로 아픈 자들은 가장 낮아지는 곳에서 더불어 아플 수 있는 우주의 모음(母音)에 귀를 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끝> |
기사입력: 2010/09/24 [20:56] 최종편집: ⓒ 컬쳐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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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시, 유종인 아니면 쓸 수 없는 명시에 명문장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