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릴 때 나무를 타고 놀았다.
나무에서 떨어지기도 몇 번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나무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볼 수 없다.
갑자기 천국에 들어선 느낌이 들었다.
아이들이 나무를 타고 있었던 것이다.
나뭇가지 위에 새처럼 모여 앉아 조잘대기도 하고, 손으로 가지를 잡고 몸을 흔들어대는 녀석도 있었다.
나무는 대여섯 명이 올라가도 끄떡없을 정도로 튼튼해 보였다. 얼마나 많이 오르내렸는지 나무줄기는 반질반질했고 잎은 무성했다.
그때 이중섭의 그림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소와 새와 물고기와 게를 껴안고 노는 그림들 말이다. 그 그림들을 바라볼 때마다 나는 저절로 무장해제되곤 했지.
그림으로 보던 천진난만의 해방구가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감동할 수밖에. 아이들이 내게 손짓을 보내왔다. 나무 위로 한번 올라와 보라는 거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무에 오를 시기를 놓쳐버린 다 큰 어른일 뿐이었다.
어느 날, 꿈을 꾼 내용이다. 아마 어릴 때 나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무를 잘 타는 아이가 없다. 요즘은 아이들은 아예 나무에 오를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아이들이 나무에 오를 시간을 뺏어버린 어른들 탓이다.
도심 공원에서 어떤 아이가 나무에 기어오른다고 해보자. 어른이라는 이름의 관리인이, 부모가, 지나치던 행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릴 것이다.
과잉보호다. 수피를 만져볼 기회를 얻지 못한 아이들의 상상력은 말라가고 창의력은 어설퍼진다.
한 아이가 자기가 쓴 시를 본 적이 있디.
엉뚱한 발상에 나는 무릎을 쳤다.
“소가 날아간다./
산에 부딪쳤다./
쿵, 하고 떨어졌다./
아,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