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21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오늘도 새 날이 되어 이 하루가 거룩한 주의 날이 되게 하소서.
나의 육신의 소욕을 위함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함께 하는 영생의 소망이 넘치는 날이길 소망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거룩한 주의 보혈로 날 씻어 정결한 신부로 서게 하시고 내 속에서 하늘의 기쁨이 넘쳐나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사오니 썩어 없어질 세상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마음을 온전히 쏟아 부을 수 있도록 나를 주의 강한 손으로 장악하여 주소서.
거룩한 불구자로 살아 이 하루도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넉넉히 살아내길 원합니다.
기도의 내용이 정형화되어 있을지라도 이 기도가 나의 진솔한 고백이 되게 하소서.
날 구원하신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본문 / 창 49:22-33
제목 : 야곱의 축복이 영적 은혜의 축복이 되어 영원한 주의 일이 되길.
22 요셉은 무성한 가지 곧 샘 곁의 무성한 가지라.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
23 활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적개심을 가지고 그를 쏘았으나
24 요셉의 황은 도리어 굳세며 그의 팔은 힘이 있으니 이는 야곱의 전능자 이스라엘의 반석인 목자의 손을 힘입음이라.
25 네 아버지의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너를 도우실 것이요 전능자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깊은 샘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리로다.
26 네 아버지의 축복이 내 선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 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그 형제 중 뛰어난 자의 정수리로 돌아오리로다.
27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28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29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되 내가 내 조상들에게로 돌아가리니 나를 헷 사람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우리 선조와 함께 장사하라.
30 이 굴은 가나안 땅 마므레 앞 막벨라 밭에 있는 것이라. 아브라함이 헷 사람 에브론에게서 밭과 함께 사서 그의 매장지를 삼았으므로
31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가 거기 장사되었고 이삭과 그의 아내 리브가도 거기 장사되었으며 나도 레아를 그곳에 장사하였노라.
32 이 밭과 거기 있는 굴은 헷 사람에게서 산 것이니라.
33 야곱이 이들에게 명하기를 마치고 그 발을 침상에 모으고 숨을 거두니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갔더라.
* 나의 묵상
임종 전 야곱은 가장 사랑했던 라헬의 두 아들 요셉과 베냐민을 축복한다.
요셉은 담을 넘는 샘 곁의 무성한 가지로서 무수한 학대를 받지만 그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전능자이신 목자의 힘을 통하여 이겨낼 것이다.
그 전능한 하나님은 그를 도우셔서 복을 주시되 하늘의 복과 깊은 샘의 복 등 자손이 번성할 것이다.
그는 아버지를 넘는 선조들의 축복보다 아버지 야곱의 축복을 한없이 받게 될 것이다.
베냐민은 물어뜯는 이리처럼 난폭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야곱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자신을 에브론의 밭에 있는 굴에 장사할 것을 명하였다.
그 굴은 아브라함이 에브론에게 사서 소유 매장지로 삼은 막벨라 밭에 굴이 있음을 밝힌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그리고 자신의 아내 레아가 이미 그곳에 장사되었음도 밝힌다.
그는 이 굴이 헷 사람에게서 산 것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야곱은 그렇게 유언을 마치고 죽어 그의 열조들에게로 돌아갔다.
요셉이라는 이름의 뜻은 자기 어머니 라헬이 지었는데 ‘하나 더’이다.
어렵사리 요셉을 낳은 후에 출산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하나 더’를 외쳤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바램과는 달리 오랜 세월 그 동생을 보지 못하다가 밧단아람에서 돌아오는 노중에서 베냐민을 낳다가 그는 생을 마감하였다.
그의 아버지 야곱이 그를 축복할 때 사용한 단어들에 의미가 있다.
‘무성한 가지’에서 ‘가지’는 히브리어 ‘뻰’으로 이는 ‘아들, 자손’이라는 뜻을 가진다.
‘무성한’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포라트’는 ‘열매를 맺다, 번성하다’라는 뜻으로 ‘무성한 가지’는 열매를 많이 맺는 가지로서 ‘번
성하는 자손’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요셉이 무성한 가지로서 샘 곁에 있다는 말은 큰 가뭄이나 어떠한 재해 속에서도 항상 변함없이 풍요를 누리게 될 것을 의미한다.
이 예언처럼 요셉의 자손들은 다른 아들들이 한 지파만을 형성했던 것과는 달리 에브라임과 므낫세 두 지파를 형성하였고 특히 에브라임은 ‘무성한’에 해당하는 ‘파라’에서 유래된 그의 이름 ‘에프라임’처럼 므낫세보다 더 큰 축복을 받아서 가나안 정복 이후 비옥한 토지를 분배받았다.
또한 다른 지파들에게 둘러싸여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연적인 보호를 받는 특혜까지 누리게 되었으며 왕국 분열 이후에는 북왕국에서 확고한 세력을 확보하고 북왕국을 대표하는 지차가 되기도 하였다.
‘그 가지가 담을 넘었도다’는 말은 동사가 완료형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서 이는 일차적으로 애굽에서 총리가 된 요셉이 7년 대기근을 슬기롭게 잘 극복함으로 그의 가족들과 애굽 사람들 그리고 주변의 다른 나라 사람들까지 큰 유익을 얻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과거적인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요셉의 후손들의 번성이 다른 지파들에게까지도 혜택을 주게 될 것을 예언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버지 야곱의 요셉을 향한 축복은 지극히 현실적인 축복으로 그들의 자손이 번성하는 축복이다.
이런 축복은 현재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도 공히 받고 싶어 하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축복은 구약적인 축복으로서 하나님께서 실제로 보여주시는 은혜를 통하여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경우이다.
하지만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신약시대, 아니 종말을 살아가는 성령의 시대는 그런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구체적인 현상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이란 우리가 무엇을 행위를 해서 하나님께 보탬이 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일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요 6: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나님의 뜻은 영생이며 그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그것은 내가 무엇을 행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보내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이다.
영생의 다른 말은 구원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다(눅 18:18-26).
영생 곧 구원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나의 어떠한 의나 노력 그리고 열심이 보탬이 되지 않는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일이며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에 관한한 우리의 노력이나 애씀이 전혀 필요 없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출애굽 구원을 받을 때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출 19: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로 인하여만 가능할 뿐이다.
이것이 복음이다.
(창 3:15, 21)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오늘 우리가 누려야 할 축복은 결코 이 땅에서 자손의 번성이나 재물의 축적이 아니다.
오직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것이며 이는 주의 말씀으로 날마다 교제와 사귐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여 나는 날마다 주의 말씀으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생명처럼 여기며 감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연약함은 나를 자주 넘어뜨린다.
이런 묵상을 하는 것으로 나의 의를 드러내기도 하고 묵상을 좀 잘 한 것 같으면 좀 많은 사람들이 봐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내 안에 가득하다.
이런 모습이 나의 참 모습이다.
나를 사람들에게 보란듯하게 보이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이 바로 나의 의라는 말이다.
이처럼 나는 수시로 넘어진다.
이런 의는 사람들 앞에서는 애교정도로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죄가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하나님 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점도 티도 없어야 한다.
그런 내가 나를 하나님 되게 하려하고 나의 의를 드러냈으니 그 죄가 어찌 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 땅에 사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죄가 없을 수 없다.
따라서 그런 모습으로는 단 한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예수가 필요한 이유다.
나를 아무리 포장해서 사람들에게 멋지게 보여도 그것은 이 땅에서 썩어지고 없어질 무화과옷에 다름 아니다.
결국 찢어 발겨야 되는 것이며 발가벗겨야 할 것이다.
아담이 자기 스스로 벗지 못하고 그 옷을 입고 자기가 하나님 자리에 앉아 있을 때 하나님께서 친히 찾아가셔서 그가 입고 있던 무화과옷을 벗겨 주신 것이다.
그것을 벗겨낼 때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크다.
하지만 벗겨내는 것이 은혜다.
나 역시 이런 무화과옷을 얼마나 많이 껴입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껴입은 무화과옷은 나 스스로 벗으려 해도 잘 벗을 수가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필요하다.
나의 무화과옷을 벗기기 위해서 하나님의 시험과 고난이 필요하다.
욥이 입고 있던 그 두터운 자기 의의 옷 곧 무화과옷을 벗기기 위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날려야 했고 나아가 그의 몸까지도 상해야 했다.
그 이후로도 그는 자기 의의 옷을 끝까지 붙잡았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침을 가하신다.
(욥 40:8) 네가 내 공의를 부인하려느냐? 네 의를 세우려고 나를 악하다 하겠느냐?
하나님의 단말마의 외침에 그는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항복하며 회개한다.
(욥 42:5-6)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이렇게 욥은 자신의 의의 옷인 무화과옷을 벗고 철저히 회개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았다.
나 역시 오늘 이 시간 종말을 현재로 살기 원한다.
하나님의 시간은 항상 현재이다.
하지만 나는 과거로 회귀하기를 좋아한다.
왕년에 내가 이랬었는데, 하면서 지난 날 나의 자랑을 드러내고자 하지만 그것 역시 다 사라지고 없어질 것들이다.
나의 지나온 생애에 있었던 추억이지만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곳은 돌아갈 곳이 아니라 단지 추억일 뿐이다.
하지만 내가 가야할 곳은 오직 우리 주님의 품속이다.
그곳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거할 처소이다.
그저 육신을 위하여 구하는 복이 아니라 영원한 복인 영생을 위하여 오늘을 산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야곱이 요셉을 축복한 축복 이야기가 너무 아름다웠던지 야곱의 축복이라는 제목의 노래로까지 만들어져서 불려집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해당되는 복이 아님을 잘 압니다.
그저 모형과 그림자로서 그 시대를 산 이들에게 주신 복이며 그 복은 이미 끝이 난 것도 압니다.
우리의 믿음의 눈이 그리로 돌아가지 않도록 나를 쳐 주옵소서.
이제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육신의 복이나 소유의 복이 아니라 믿음의 가지가 무성하여 져서 담을 넘는 그런 아름다운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게 하옵소서.
그것이 바로 주님이 원하시는 주의 일임을 아오니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게 말한 것처럼, 주 안에서 내가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고전 9;1).
주 안에서 행한 우리의 일이 바로 아름다운 복음의 열매로 잘 맺혀지게 하옵소서.
창원 글로벌비전교회에서 진행되는 복음생명캠프 위에 성령님 함께 하여 주시고 복음을 듣는 이들이 작은 마음을 크게 열어서 주의 나라를 보게 하옵소서.
주의 뜻을 이루어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