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의 사학자 황문웅은 중국의 식인문화는 5천년을 관통하며 지속되고 있고 식인문화를 알지 못하고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논한다는것은 있을수 없는일이며 중국인의 보편적인 사고방식도 이해할수 없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왜 중국인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부모자식간에서 배신을 하는가? 왜 중국인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게 잔인한가? 왜 중국은 중국특유의 대가족주의가 발달했는가 등등.. 이모든것이 식인문화와 관련이깊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식인문화로 인한 폐해와 중국인들의 사고에 미친 악영향을 노신은 광인일기를 써서 정면으로 비판했죠.
중국사람이 아닌 외국인이 중국의 식인문화에 대해 심도 있게 연구를 한 사람들은 바로 일본인들입니다. 그들은 이 식인문화 연구를 통해 중국인의 특성을 잘 간파하고 있었고 이를 대중국 전략을 짜는데 기본지식으로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바로 옆나라에 살면서도 중국의 식인문화가 존재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그것이 중국사람들의 사고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게 한국인과 일본인들의 차이가 아닐까요? 여기 계신 분들이 허락하신다면 제가 알고 있는 중국의 식인문화를 연재형식으로 차례대로 올릴까 하는데 허락해주시면 하루나 이틀에 한개정도 제가 시간이 날때마다 정리해서 올리고자 합니다.
중국의 식인문화는 미개종족의 식인문화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확실히 중국의 식인문화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역사와 정치,문화 중국인의 사고방식에 미친 영향은 엄청납니다. 왜 중국인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며 부모자식간에도 안믿는지.. 식인문화를 살펴보면 이해가 가실것입니다. 또 입으로는 예를 외치면서도 같은 입으로 사람을 잡아먹는 그들의 심리상태토 이해가 가실겁니다. 연재해도 좋다는 리플이 있으면 연재를 시작할까 합니다. 그럼 건강하십시요.
식인종으로 알려진 마사이족 여자들이 뇌가 석회화되어 죽는 경우가 많다는 것으로 세계보건기구에 보고되었다.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역학팀을 보내 연구했더니 그들의 식인풍습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사람고기는 제일 좋은 부분부터 남자, 노인, 어린이 차지가 되고 가장 먹기 어려운 골수나 뇌부분을 여자들이 먹기 때문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1348 . 중국의 식인문화(2) 식인문화가 생겨난 배경
1.격한쟁투에 따른 가혹한 형벌제도의 탄생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율령에 의해서 성문법을 규정했습니다. 중원을 둘러싼 격렬한 쟁투는 잔혹한 보복을 낳았고 잔혹한 형벌제도를 탄생시켰습니다. 이 잔혹한 형벌들은 중국의 식인문화를 정당화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전세계에 유래가없는 황제의 명령에 의한 인간1의 고기를 먹거나 먹이게 하는 "식육의 형벌" 이 그것이며 그 잔혹한 형벌은 놀랍게도 성문법으로 규정되어 버렸습니다.
예를 들어 주나라시대에는 중죄인에게 5가지 형벌을 내리는데 묵형, 비형, 궁형, 월형, 살형이 성문법으로 규정되었습니다. 묵형은 이마에 먹으로 죄인의 문신을 새기는것이고 궁형은 거세를 시키는 형이며 월형은 다리를 자르는형입니다. 사상가인 묵자는 묵형을 받았고 사마천은 궁형을 그리고 병법의 대가인 손자는 월형을 받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그 형벌은 더 잔혹해지고 가짓수도 대폭적으로 늘어나 나중에는 여자의 생식기를 틀어막아 버리는 형벌까지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식육의 형벌이 성문법으로 기록되어 실시되게 되며 이는 전 중국인의 식인풍습을 확산시키는데 기폭제 역활을 하게 됩니다.
2.중국의 역사는 살인의 역사
중국의 역사상 대규모적인 내란은 진시황제 이후 1920년까지 160차례이고 소비된 기간은 896년입니다. 즉 3년에 1년은 내란이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봉건영주간의 침탈전쟁은 448차례에 이르고 대규모 전쟁은 222차례입니다. 소비된 기간은 이루 말할수 없을정도지요.
근대에 이르면 이러한 양상은 더욱 격해집니다. 중화민국 정권수립이후 22년 동안 7백회의 내전이 발생했고 그중 사천성에서만 5백회이상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두고 모택동은 중국을 방문한 알바니아 군사대표단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중국인을 가르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 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투쟁과 전쟁을 사랑하는 민족이다."
양계초라는 인물은 중국인을 육민(戮民)이라 칭했는데 이는 전란에 의한 살육사의 비율이 굉장히 높은 국민이란 뜻입니다. 내란과 기근이 덮칠때마다 소,돼지처럼 죽어가는것이 역사의 숙명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1989년 천안문 사태에서 또다시 한번 증명됩니다.
3.역사상 유래를 찾을수 없는 천재지변과 기근
등운특이란 사람이 지은 중국 구황사란 통계에 의하면 중군은 기원전 18년 부터 1937년 까지 수해, 한발, 메뚜기창궐, 우박, 태풍, 지진, 대설등의 전채만 5천 2백여차례가 있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즉 평균 6개월마다 1차례의 재해가 일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가혹한 형벌체계의 발전과 성문법화, 그리고 전란의 역사, 그리고 기근의 역사, 대개 심한 기근이 들었을때 전란이 발생하는점을 두고보면 그때의 식량사정이 어떠했을런지는 어렵지않게 짐작이 가시리라 생각되어 집니다.
중국 정사 중 사기(史記)를 비롯한 이십육사등에 기록한 전란, 기근, 형벌로 인한 식인풍습은 220여차례가 기록되고있고 자치통감, 속자치통감, 명통감, 문헌통고, 속문헌통고, 등등의 자료에 기록된 식인풍습까지 계산하면 거의 셀수가 없을정도의 식인사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식인문화(3) 유교와 중국인의 식인의 관계
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들의 역사를 알아야하고 그것이 그들 사고와 가치 및 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직접 그들과 부딫치며 배워나가야 하겠죠.
식인문화는 중국의 고유문화이며 이를 잘 이해하면 중국인의 사고방식과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되어서 입니다. 이 연재글이 불쾌하시다면 연재를 중단할 계획입니다만.. 중단하라는 리플이 없는한 계속할 작정입니다.
먼저 식인문화에 대한 전반을 살펴보고 그것이 중국인의 가족주의, 대인관계, 중화사상, 기업문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것을 연재하려 합니다.
중국의 식인문화가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중원을 둘러싼 격한 쟁투에 따른 잔혹한 형벌제도의 탄생과 사람을 잡아먹는 형벌이 성문법으로 제정되어 법적으로 허용되었다는점과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수없는 잦은기근과 천재지변, 전쟁, 농업기술낙후로 인한 식량부족등이 한대 맞물리면서 확산되었다는것입니다.
법적으로 식인이 허용되고 식량부족에 기근, 전란이 잦아들면서 차츰 식인문화는 아무 저항감 없이 중국민중에게 뿌리 박히게 되었던것 같습니다. 따라서 정쟁, 전쟁에서 패배한 정적, 적국군병 및 국민등은 "잡아 먹히는 인육"이 되는것은 너무도 당연했고 상황에 따라선 자국국민을 임의로 대량 징발해서 하루에 수천명씩 군대의 식량으로 사용되어진것도 중국역사를 살펴보면 결코 보기 드문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와 인의를 강조하는 유교도 이에 한몫을 단단히 했습니다.
왜냐면.. 공자역시 정당한 복수를 칭송하였기 때문입니다. 중국에서 왜 유교가 발달할수 밖에 없었던 이유도 식인문화와 관련깊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떠도는 말중에 하나가 "만일 사람을 잡아먹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사람이 바로 성인(聖人)이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말은 그만큼 식인문화가 널리퍼져 있었고 모든 중국인이 사람을 "즐겨" 먹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회분위기가 그런 상태였기 때문에 "예"와 "도덕"이 강조되어질수 밖에 없었고 그런 사회분위기 하에서 유교가 발달 했습니다.
중국의 식인문화(4)중국 식인문화의 3대특징
1)중국문명의 발전과 그 식인문화의 전파는 그 족적이 일치한다.
식인문화의 시작은 거의 대부분이 황하유역의 산동, 하남, 하북, 산서, 섬서성이 중심이었습니다.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남쪽으로 남하해가는 특징을 찾을수 있습니다. 이어 식인문화는 중국문화의 전파에 따라 남하하여 회화유역에서 장강을 넘어 산동, 복건성으로 파급되어 집니다.
그 파급경로는 중국인들의 강남개발과 이주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즉 중국인이 많이 이주하면 인구가 급증하고 과잉개발에 의해 자연환경이 파괴되며 자연생태학적 균형이 깨어져 기근이 발생하고 식인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한나라 시대 고조 2년 부터 흥평원년에 이르는 400년 도안 식인현상은 대부분 중국문명의 시작인 황하에서만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흥평 2년 이후에는 장강, 황하일대에서도 발생하고 강남, 광동, 복건성에서 식인현상이 나타는것은 중국세력이 남하한 3-4세기 이후 동진시대 이후가 됩니다.
2)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한다.
식인현상은 대부분 인구과밀지역과 일치해서 발생합니다.변경지역이나 미개발지역이 아닌 인구 과밀 개발지역에서 출현합니다. 특히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지인 장안, 낙양, 개봉, 북경, 남경, 양주, 항주등의 도시가 식인문화의 다발지역임은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3)정치환경변화와의 인과관계가 있다.
노신은 고대 중국국가 성립이후의 사회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 라고 못을 박았습니다. 즉 노신이 말하고자 했던것은 국가라고 하는 사적인 권력에 의해 구축된 고대국가 폭력기관이 광대한 대중을 국가라고 하는 우리에 가두고 수탈의 대상으로 삼고 우리 속의 극빈한 군중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작용을 통해서 인구와 식량의 자동제어를 하고 자생자멸해간 결과를 이루어냈다고 하는것입니다.
노신은 수탈의 가혹화와 인구 과밀화가 가져온 식량위기 및 자연-사회환경의 악화가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를 형성하고 중국의 식인문화를 창출했다고 주장합니다.
다음편에는 식인문화를 충성심으로 미화하는 케이스를 살펴보고 식인문화를 정당화 그리고 더 나아가 미화하고 칭찬하며 여러 사람에게 본받게 함으로써 식인문화를 더욱더 부추긴 역사를 소개하고져 합니다.
중국의 식인문화(5) 역사에 기록된 중국인의 식인
중국에서는 기원전 206년부터 19C초까지의 식인기록이 정사에 200여개가 넘게 기록되어져 있다.사기(使記)에서는 은 왕조(중국최초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자신의 신하들을 해, 포, 자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해'를 좋아해서 식탁에 '해'가 없으면 식사를 하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위나라의 신하로 공자가 총애하는 제자 자로가 권력다툼에 밀려 처형되었고 그의 시신이 '해'로 만들어져 공자의 식탁에 올려졌다. 그 날 이 후 공자는 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대표적인 인육요리분류 해 : 인육을 잘 게 썰어 소금에 절인 고기 포 : 인육을 저며서 말린 고기 자 : 인육을 구워서 익힌 고기
본초강목(本草綱目) :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기록
철경록(輟耕錄) : 송나라 말기에서 원대에 이르는 시대의 인육 요리법을 기록한 책
진수의 삼국지(三國地)
- 현덕 유비가 '포'를 즐겨먹었으며 여포의 시신을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중국 정사에 나타난 식인의 시초
어제는 은나라시대의 식인사례를 게재했습니다만 그것은 정사에 기록된 사례는 아닙니다. 오늘은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즉.. 정사에 최초로 기록된 식인사례를 올리고자 합니다. 은왕조의 주(紂)왕은 대신인 구후의 딸이 절세미인이란 말을 듣고 아내로 삼았는데 그 아내가 너무도 정숙하고 외설을 좋아하지 않아 자신의 성적취향에 맞지않자 격노하고 그녀를 살해하고 그녀의 아버지 구후를 해(소금에 절인 육젓)으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신하인 곽후가 이를 강력히 말리자 주왕은 곽후를 포(脯:찢어 말린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그밖에도 주왕은 자신에게 간하는 신하 익후를 자(炙:불고기)로 만들어 먹어버립니다. 또 신하 귀후는 포로 매백은 해를 만들어 먹어버렸습니다.또 주왕은 신하인 황비호의 아내 경씨를 희롱하다 거절당하자 그녀를 해로 만들어 남편인 황비호에게 하사하고 먹게 합니다. 이에 황비호는 격노하여 군사를 일으켜 주왕을 제거하게 됩니다.
동물세계에서나 통하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인간에도 적용되는 적나라한 사례입니다.
# 식인의 시작 夏왕조시대 #
최초로 문헌에 기록된 식인풍습은 하나라때부터 시작합니다. 하왕조의 후예란 인물은 병사를 이끌고 약정국을 침공하여 국왕인 백봉의 궁전에 들어가 재산을 약탈하고 백봉을 살해한후 그 육신을 잘게 쪼개어 육장(肉醬)을 만들어 하나라 왕인 중강왕에게 바쳤습니다.
즉 속국의 임금의 고기로 만든 육젓을 진미로 만들어 전리품으로 하왕에게 헌상한것입니다. 그 사건이 있고 얼마지나지 않아 후예는 그 신하인 봉몽과 자신의 애첩간의 공모에 의해 살해를 당합니다. 후예의 애첩은 과거 후예가 정복한 나라에서 전리품으로 데려온 왕녀였습니다.
그녀는 후예를 살해한뒤 그를 역시 육장으로 만들었죠. 다음날 후예의 아들은 아버지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의붓어머니에게 아버지의 행방을 묻자 후예의 육젓을 가져와 보여주며 "너의 아비가 우리나라를 멸망케하고 나의 아들을 죽여 육젓으로 담았으니 나도 너의 아비를 죽여 육젓으로 담았다. 너도 그의 아들이니 용서할수 없느나 니 아비의 육젓을 먹으면 용서해주겠다" 후예의 아들은 놀라 도망쳤으나 곧 잡혀 역시 육젓이 되었습니다.
하왕조에서 처음으로 문서에 기록된 식인의 역사는 복수에 의한 것입니다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복수 및 형벌로서의 식인에서 군량비 대신쓰는 식량으로써.. 단지 사람고기를 너무나 맛있어해서 즐기는쪽으로 발전하고 대상도 죄인, 원수에서 아무런상관이 없는 자국백성 및 부녀자로 확대됩니다
중국인은 왜 식인을 대범하게 받아들이는 걸까요? 왜 살인과 사기같은 범죄를 저지르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뇌물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왜 약자에게 잔인하고 강자에게 비굴한 것을 지혜로운 처세술이라고 여길까요? 왜 돈에 미친듯이 환장을 하는 걸까요?
그들의 민족성이 본래 잔인해서? 아닐 겁니다. 어머니의 자궁에 잉태될 때 그 인간의 유전자 속에 민족성이 전해지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특별한 정보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닐텐데.
그렇다면 그들의 사회, 문화적 환경에 따라서 그런 결과들이 나오는 거겠죠.
중국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말한다면 1백명이 정원인 기차간 안에 1만명이 들어가 서로 밑에 깔리지 않으려고 서 있으려 안간힘을 쓰는 꼴입니다.
즉 한마디로 극심한 생존경쟁 사회란 거죠.
역사를 들어 설명한다면 앞에서 제가 말한 것 처럼 중국은 수천번의 내전과 침략, 기근, 질병에 시달려 왔습니다. 춘추전국시대, 진시황의 사후 벌어진 유방과 항우의 항쟁, 흉노족의 침략, 전한의 멸망과 내분, 후한의 붕괴와 더불어 위오촉의 삼국시대, 그 이후 북방 유목민족들의 대대적인 남침과 그로 인한 강북 상실... 수나라의 멸망과 역시 잦은 내분, 당왕조의 팽창에 이은 무수한 전쟁, 오대 십국, 거란족과 여진, 몽골의 침략, 명나라의 쇠퇴와 내란, 청의 침입, 서양 열강과 일제의 침략, 국공내전...
이렇게 삶과 죽음이 오가는 극한 상황들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사람의 가치관에 중대한 변화가 발생합니다. 형이상학적인 관념들- 명예, 도덕, 윤리, 규범, 염치, 동정, 사랑 등 -은 무시되고 오로지 형이하하적이고 원초적인 본능들을 위주로 매사를 판단하게 되지요.
우선은 돈이 있어야지요. 그 다음은 음식, 집, 색욕, 권력의 순으로 발전해 갑니다. 이 과정은 현대 중국인들이 동경하는 성공의 과정이기도 하고요.
등소평이 개방을 하기 이전에 이미 중국인들의 심리 속에는 물욕에 대한 강렬한 열망이 있었던 겁니다.
이렇게 중국인들은 철저히 실용적(?)입니다. 죄의식이라든지 선과 악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라든지 하는 쓰잘데 없는 몽상따위는 애초에 그들의 머릿속에 자리잡을 곳이 없죠.
그런 실용적인 사고의 극단이 바로 식인이라는 방식으로 나타난 거죠. 땅은 한정되어 있는데 인구는 쎄고 쎄고 넘쳐나겠다, 한 두놈쯤 죽여봐야 표도 안나니 이왕 죽어서 썩을 거 내가 좀 먹고 영양 보충좀 하면 어떠냐... 하는 생각으로 식인을 한 겁니다.
제가 중국의 역사서와 소설들을 몇 가지 들춰 보았는데 -여건상 수천권의 관련 서적들을 모두 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서요. 용서 바랍니다.- 놀라운 사실은 중국인은 식인을 그다지 끔찍한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좀 대놓고 떠들기엔 그렇지만 일상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보면 이런 일들이 나옵니다. 송나라의 환공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신하인 남궁장만과 맹획이 각각 진나라와 위나라로 도망치자 두 나라로 사자를 보내 그들을 은밀히 데려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남궁장만과 맹획이 송나라로 끌려오자 송환공은 그들을 시장 한 가운데에 세워놓고 병사들을 시켜 쇠몽둥이로 수백번을 때려 죽인 다음 둘의 살점을 칼로 떼어 소금에 절여 그 인육을 모든 신하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합니다. 그럼 그 인육을 받은 신하들을 어떻게 했을까요? 고이 모셔놓기만 했을까요? 각자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시길 바랍니다.
또 이런 일도 있습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오패이자 가장 뛰어난 군주인 제환공은 간신인 역아를 총애했는데 어느날 그에게 "나는 일찌기 새고기와 집짐승, 가축, 사냥감, 물고기로 만든 온갖 요리를 먹어보았지만 사람의 고기를 먹지 못해 그 맛을 모르겠다"라고 농담조(?)로 말을 걸었습니다. 그러자 역아는 아무 말 없이 물러가더니 점심상에 왠 찐 고기 한 쟁반을 들고와 제환공에게 바쳤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고기는 젖을 먹은 염소 새끼 고기보다더 연하고 맛이 좋았다고 합니다. 맛있게 고기를 먹고 난 제환공은 역아에게 "이 고기가 무언데 이토록 맛이 좋으냐?"라고 묻자 역아는 태연스럽게 말했습니다. "제 큰 아들을 죽여서 상감께 바쳤습니다."
이런 일이 있는 후 제환공은 역아를 어떻게 대우했을까요? 놀랍게도 그는 역아를 "군주를 위해 자신의 자식까지 죽여 바친 충성심있는 인물"이라고 여기며 깊이 총애해 말년에는 그에게 국가의 전권을 맡겼다고 합니다.
여기서 몇가지 들여다 볼 것이 있습니다. 이미 춘추전국시대에 식인은 흔하게 일어났으며 중국인들은 그것을 일상화된 현상으로 여겼고 죽임을 당해 요리가 된 인간을 전혀 동정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관들도 식인이라는 행위 자체를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정말이지 이런 중국의 추한 일면을 알면 알수록 공자가 "구이九夷의 땅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말한 내역이 이해가 됩니다. 아울러 고조선이 망하기 전까지 우리땅에는 범죄가 없어 사람들이 밤에도 집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 평화롭게 살았는데 한나라의 침공으로 조선이 망하고 한족漢族들이 대거 유입되 들어오자 온갖 범죄가 들끓어 밤에 집문을 걸어 잠그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었다는 기록도 이해가 되고요.
- 천하가 모두 전란의 도가니가 되어 있는 지금, 회하 상류 지방의 군인들은 인육을 즐겨 먹는다. 어린이의 고기를 상품으로 치고, 여성의 고기는 그 다음으로 치며, 남성의 고기는 그 아래이다. 요리할 때는 먼저 사람을 두 개의 항아리 사이에 앉혀 놓고, 밖에서 불을 때던가 아니면 철시렁에 거치고 산 채로 굽는다. 혹은 손발으 묶고 팔팔 끓는 물을 부은 뒤 대빗자루로 껍질을 벗겨내거나, 혹은 자루에 담아 큰 냄비에 넣어 산 채로 찌는 수도 있으며, 잘게 사시미를 만들어 소금에 찍어 먹는 경우도 있다. 남성일 경우는 두 다리를 자르고 여성인 경우는 두 유방을 도려내 먹는 것이 최고인데, 그 잔악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이를 개괄적으로 일컬어 상육(想肉)이라 한다. (중국의 식인문화, 77페이지)
*아마 이 책이 일본에서 처음 출판된 관계로 "사시미"란 단어가 들어간 모양입니다.
- 천방국(天方國, 아라비아)의 어떤 70~80세의 노인이 자신의 몸을 버려 민중을 구하기 위해 식량을 먹지 않고 벌꿀만 먹고 살았다. 그런 지 한 달이 지나자 소변이 모두 벌꿀이 되어 나왔다. 노인이 죽은 뒤에 사람들이 시체를 벌꿀에 담그고 석관에 날짜를 새겨 매장했다. 백년 후에 열어 보았더니 시체는 밀제(蜜劑)가 되어 있었는데 상처가 났을 때에 조금만 복용하면 나았다고 한다. (78페이지)
- 명대의 학자 사조제(謝肇제)는 그의 저서 <오잡저(五雜저)>에서 철경록에 <인육애호명사록>이 있다고 적고 있다.(80페이지)
- 당나라 장족(張족)의 <조야첨제>에는 설진이라는 인육애호가가 등장한다. 측천무후때 항주의 임안위(무관직)에 설진이라는 인물이 있었는데 인육을 좋아했다. 한번은 그에게 돈을 빌려준 부부가 임안에 와 그의 집에 묵게 되었다. 설진은 그들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하고 먼저 남편을 살해한 뒤 수은을 넣고 시체를 달여 뼈까지 녹였다. 그 뒤 부인가지 상미(賞味)하려고 했으나 이를 눈치챈 부인이 담을 넘어 탈출, 현 지사에게 고소했다. 지사는 자세한 내용을 조사한 후에 설진을 송청(送廳)하여 백타의 형에 처했는데, 태사했다. 설진의 이야기는 철경록에도 인용되어 있다.(86페이지)
- 당대의 덕종-헌종 시대에 조정 중신 중에 장무소라는 사람이 있었다. <빈퇴록>에서는 이 장무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장무소는 절도사를 지내고 있을 당시 자주 사람고기를 먹었다. 군직을 마치고 경성으로 영전했을 때, 조정의 동료가 그에게 지방군정장관 재직중에 사람고기를 좋아했느냐고 물었다. 장무소는 빙긋이 웃으며 "비린내나는 사람고기를 누가 먹습니까>"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장이 스스로 인육애호가임을 부정한 셈인데, 사람고기가 비린내난다고 말한 점이 이상하다.』 <철경록>도 <노씨잡설>을 인용하여 장무소를 소개하고 있다. <철경록>에 따르면 원의 흠주 지사 임천지도 인육애호가의 한 사람인데 사람고기만을 먹었다는 이유로 관직이 파면되어 남해로 추방되었다고 한다.(87,8페이지)
이 "중국의 식인문화"에서는 수백 장에 걸쳐 중국의 갖가지 식인사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철경록에 있어서는 식인사례의 기록이지 처음 올라옸던 글대로 인육요리책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싶군요.
p.s."중국의 식인문화"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구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디코에서 옮김...
참. 최근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혁명기에도 식인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유추해보면 식인에 대한 거부감이 그만큼 없어서가 아닐까 싶군요. 동국병감에도 홍건적이 철령이북에 들어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을 잡아먹은 기록이 있기도 합니다....
저거 특정요리방법로 인육을 요리한 기록 가지고 XX는 인육요리였고 이를 먹은 기록이 보이니 중국은 식인국가이다- 이러는 식이죠- 한국으로 하자면 콩쥐팥쥐전중에 팥쥐모자 시체로 젖갈 만들었다 하3(극히 일부 판본으로 알지만-_-)~ 젖갈은 한국에 아주 흔한 요리종류3(그게 인육으로 만들었는가는 별문제)~ 고로 한국인은 인육을 엄청 먹어 치웠3~ 이런식의 논리전개라죠 ㅡ.ㅡ
하긴 인간이 등장한 이래로 인육을 먹지 않았던 때가 최근이라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먹었구요... 게다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인육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었는데, 선사시대엔 적을 잡아먹었다는 증거와 인육을 먹으면 일어나는 부작용에 대한 저항성 유전자가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을 든 적도 있었구요... Daum Bark// 계속 올려주셨으면 좋을 거같아요..... 글구 디코에서 그 글에 대한 반박한 글을 같이 올리면 더더욱 좋을거같은데요
첫댓글 디코에서 상당히 까인글 아닌가요.대만사람들 중국 싫어하잖아요.
저거 철경록도 근거 부족하다고 까이고.. 디코 3대 본좌분들부터 시작해서 줄줄이 깠던 글.그러니까.. 김완섭이 한국깐글 하고 비슷하다는.
저거 특정요리방법로 인육을 요리한 기록 가지고 XX는 인육요리였고 이를 먹은 기록이 보이니 중국은 식인국가이다- 이러는 식이죠- 한국으로 하자면 콩쥐팥쥐전중에 팥쥐모자 시체로 젖갈 만들었다 하3(극히 일부 판본으로 알지만-_-)~ 젖갈은 한국에 아주 흔한 요리종류3(그게 인육으로 만들었는가는 별문제)~ 고로 한국인은 인육을 엄청 먹어 치웠3~ 이런식의 논리전개라죠 ㅡ.ㅡ
동국병감에 보면 홍건적이 쳐들어와서 인육을 먹은 내용이 나옵니다. 찾아서 올려보죠..
전쟁중 인육을 먹은것은 중국이 아니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매우 흔합니다 ㅡ.ㅡ
어느 시대, 어떤 나라든 100명쯤 몰아넣고 적당히 굶기면 인육먹는 사람 나온다에 전재산 겁니다. 한국에서도 지존파같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중국이라고 이런 특수한 경우를 일반화시키면 곤란할 듯..
엇.... 그렇게 흔한가요....? 몇몇 사례좀... -_ㅠ..
하긴 인간이 등장한 이래로 인육을 먹지 않았던 때가 최근이라고 할 정도로 오랫동안 먹었구요... 게다가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인육에 대한 다큐를 방영했었는데, 선사시대엔 적을 잡아먹었다는 증거와 인육을 먹으면 일어나는 부작용에 대한 저항성 유전자가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다는 점을 든 적도 있었구요... Daum Bark// 계속 올려주셨으면 좋을 거같아요..... 글구 디코에서 그 글에 대한 반박한 글을 같이 올리면 더더욱 좋을거같은데요
그 다큐에서의 내용을 더 추가하자면은 인육에서 가장 맛있고 영양이 가장 풍부한게 바로 '뇌'이라더군요.....상상만 하니까 토할 거같다는....................................
뇌라는 장기 자체가 원캉 기름덩어리에 뼈 한 조각 근육 한 줄 없는 기관이다보니....(우웩)
고소한 맛은 지방,담백한 맛은 단백질, 뇌 자체가 다량의 단백질 아닌가요...고소한 맛과 담백한 맛..수..순두..부..연두부? 두부 맛을 능가하는걸까요...
특수한 경우 같아 보이진 않는데요. 저 정도의 규모와 빈번함이라면..--;
중국은 땅 넓고 사람 많습니다. 특수한 경우겠지요.
솔직히... 인육 먹는건 맞는 것 같습니다.중국 같이 기아가 지역별로 빈번한 곳은 드므니까요.하지만 기아가 없는 상태에서 인육을 먹는거는.. 드믄일 같애요.
우리나라만 봐도 임진왜란 때는 인육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ㄷㄷㄷ
진위 여부를 떠나서 솔직히 구역질 나는군요. 이런 주제로 글 올리는 것은 모두 자제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뭐 사람이 극한까지 가면 뭔 들 못 먹겟습니까? 윗분도 말 씀하셨듯이 임란때 기근이 닥쳤을때도 인육을 먹었다는 보고가 올라온적도 있고 세계적으로도 극한 상황에서 인육을 먹었다는 예는 많지요. 러시아 혁명때도 그런 예가 있더군요.
중국의 무협 이야기 같은데 보아도 인육만두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지요. 한국 같았으면 심의에서 바로 컷 당할 것 같다는 1인~!!
60-70년대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조난당한 사람들은.. 자기 친구,가족들이 죽으니까 서로 바꿔먹고. 연명했다고 하는데;; -_-;;
그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가 얼라이브죠. 보면서 안습이였음.. ㄷㄷㄷ
이전 관련글 못보신 분들은 2509번, "중국인들의 식인성향: 만들어진 신화"라는 글을 우선 보시고요, 윗 글에 대한 평은 따로 글로 올리죠.
드라마 이순신에서도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여서 죽은 사람 인육 먹는 장면이 나오던데... 근데 이건 중국의 경우와 다르죠.. 중국은 영아탕이란 것도 있고, 사람으로 포도 만들고 젓갈도 해먹으니.....
어디에 나오나요?
쥐포... 인육포.... -_-... 아 섊...
직접 본 적이 있는겁니까? 아니면, 어디선가의 "카더라"인가요.